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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강물처럼 Jun 05. 2023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하나도 안 받아 들인다.

■■ 저수지 일본에서 느끼는 韓流 ■■

일본의 문화는 저수지 문화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하나도 안 받아 들인다. 

                                                                         - 가라타니 고진


1871년 12월 23일, 이토오 히로부미는 메이지유신의 주역으로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들을 돌아보며 선진문화를 배우는 사절단의 부사 자격으로 일본 요코하마를 떠나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사절단의 단장은 부총리급인 이와쿠라 도모미치였고 부사는 3명으로 부단장격이었다. 총 108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행정가와 학자 48명 그리고 유학생 6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1873년 9월13일 요코하마로 돌아올 때까지 1년 9개월 28일 동안 미국과 유럽 각국을 둘러봤다. 2년 예정의 사절단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을 동양의 맹주국가로 만들겠다는 야심에 차있었다. 미래의 일본이 나아갈 길이 그들의 눈과 귀와 그들의 기록에 달려 있었다. 의식주 문화는 물론이고 정치 행정 경제 예술 모든 분야에 대해 그들이 본 중에 가장 좋은 것을 그대로 국가 경영에 적용했다. 일본인들의 습합사상(習合思想)에서 비롯된 국가개혁 방식이었다. 


일본 말 이이토코토리 (良いとこ取り)는 '좋은 것은 기꺼이 취한다'는 뜻이다.  6세기경 고대일본의 지도자였던 쇼토쿠태자의 가르침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습합사상은 '자신에게 유익하고 필요한 것은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배우고 베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정신'이다. 우리의 '김치'를 베껴서 그들의 '기무치'를 만들어낸 것도 그들의 습합사상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부끄러워하지 않고'의 정신으로 글로벌 메뉴판의 '김치'를 '기무치'로 바꾸려들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신사에 가서 축복을 하고, 자신의 종교와 상관없이 결혼식은 교회에서 하기를 원하고, 죽으면 장례식은 절에서 한다. 사고가 유연하다고 좋게 봐야할지 모르겠으나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낸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전을 이뤄내어 극동아시아의 강자로 부상했다. 남방전쟁으로 동남아의 영국,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더니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워 아시아의 맹주가 되고자 했다. 호주까지 정복해 동태평양을 일본의 앞바다로 삼고자 했다. 때는 야만의 제국주의 시대였던 것이다. 태평양을 통해 아시아로 진출하려던 미국과 맞붙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그만 섬나라가 거대한 자원과 잠재적 1위의 경제능력을 가진 미국과 감히 전쟁을 하겠다고 나선 데는 비약적인 공업발전으로 군수공업이 발전하여 우수한 무기 생산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할 당시에도 일본의 제로센 전투기는 조종사 보호 기능이 취약한 면도 있었지만 속도와 선회능력 등의 우수함으로 치고빠지는 민첩성과 순발력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고, 전투기를 싣고 다니는 항공모함 전력에서도 미국의 태평양함대에 밀리지 않았다. 미국 태평양함대의 모항이었던 진주만 기습공격, 산호해전, 미드웨이해전으로 이어지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최종적으로는 패전이었지만 초반의 승승장구는 모두 우수한 전쟁무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수한 전쟁무기는 적극적인 습합사상, 이이토코토리 정신으로 무장한 일본인의 특성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태평양전쟁에서 패하여 세력이 위축되기는 했으나 전후에도 습합사상, 메이지유신期의 이와쿠라사절단의 서양 체험, 이이토코토리 정신을 바탕으로 서양의 과학문명을 숭배하며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전쟁기에 축적한 군수공업기술 위에서 한때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되기도 했었다. 




시대는 변했다. '모방의 시대'에서 '창의의 시대'로의 전환이다. 다시 말하자면 습합사상이 21세기 일본의 발전에 이제는 최대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위대한 예술가도 초창기에는 모방을 통한 습작 시기를 겪는다. 습작 시기를 거치면서 자신만의 독창적 창작의 시기로 나아가게 된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습작시기를 거치면서 독창적 창작의 시대를 개척하지 못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한 예로 일본 전자제품 회사들의 몰락을 들 수 있다. 1970년대부터 소니, 파나소닉, 산요. 히다치, 내쇼날, 도시바, 샤프, 아이와 등 굴지의 전자회사들이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었다. 브랜드 자동차를 갖는 게 불가능하던 시절, 우리는 일제 전자제품으로 '가짐'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살던 때가 있었다. 현재 우리가 롤스로이스, 벤츠, 베엠베, 아우디, 크라이슬러, 볼보를 말하는 그 자리에서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일본 전자제품을 말하며 살았었다. 이제 산요와 아이와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고 소니, 파나소닉, 히다치, 도시바 등 2000년대 초까지 우리의 입에서 회자되며 세계를 주도하던 일본전자제품 회사들은 디지털혁신에 실패함으로써 한국과 중국 대만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2020년 기준 세계 10대 전자기업

자료제공 - (전자산업 - 나무위키(namu.wiki) 


1871년 이와쿠라사절단이 가장 눈여겨 본 국가는 프로이센이었다. 이 해는 프로이센이 도이칠란트 통일을 완성한 후 도이치제국의 성립을 선포한 해였다. 프로이센의 비약적 발전과 통일에 크게 감명을 받은 사절단은 본국으로 돌아와 도이칠란트의 성공에 대한 연구를 하여 그 비결이 우수한 관리가 이끄는 제도라고 생각했다. 일본도 엘리트 관리 주도형 경제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한때 미국을 능가하는 경제대국이 될 날이 가까웠다고 전 세계가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관료주의는 우수한 엘리트 집단으로 구성된 관리가 국가경영의 중심이 되는 걸 말하는데 군국주의적 분위기가 팽배한 시절에는 상명하복의 위계질서가 미덕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위계사회의 병폐는 '계급사회에서의 한 단계 위로 상승'이 인생의 성공신화처럼 받아들여진다는데 있었다. 승진의 야망을 이루는데 최대의 걸림돌은 승진에 누가 되는 실수와 그에 따른 책임이다. 당연히 '복지부동의 보신주의'가 팽배할 수 밖에 없다. 책임을 질 일을 하지 않으려면 규제를 강화하는 게 상책이다. 1984년 당시 8,900가지의 각종 규제가 1996년에 19,000가지로 늘어났다. 미드웨이 해전에 참전했던 항공모함 아가키, 쇼가쿠, 히류, 소류의 둔중한 선회기동이 아니라 제로센 전투기들의 날렵한 몸놀림이 필요했는데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여 '잃어버린 20년'을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현대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이다. 근래 우리나라 국문학 논문에서 최다 인용한 외국인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나라에 날이 시퍼런 메스를 들이댔다. 


일본의 문화는 저수지 문화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하나도 안 받아 들인다.


일본은 받아들이기만 했지 일본이란 저수지에는 일본적인 그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말이다. 열심히 받아들였으나 결국은 받아들인 게 없다는 뼈아픈 소리이다. 한류(韓流)의 바닷물이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을 흐르고 있다. 전자제품, 의복, 음식, 음악, 영화 등이 전 세계 곳곳에서 한국풍을 일으키고 있다. 세계가 강남스타일로 말춤을 추었고 우리의 BTS가 유엔총회에서 연설을 하기에 이르렀다. 영화 <기생충>과 <미나리>가 세계 영화제에서 붉은 카펫 위로 행진을 했다. 


일본도 한때는 일본류로 세계를 열광하게 하던 호시절이 있었다. 지금 우리가 맞는 한류의 호시절이 영원할 수는 없겠지만 쉽게 사그러들지 않도록 해야한다. 일본 저수지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만 할 게 아니라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을 늘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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