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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강물처럼 May 29. 2023

양날의 검 : 보은과 복수

남에게서 빌린 것은 주인에게로 되돌려주어야 한다. 선물을 받게 되면 상응하는 것을 되돌려주는 것이 상식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교양있는 사회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간관계를 맺으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살아갈 줄 알아야한다. 관계는 지혜롭게 주고받는 방법으로 더욱 돈독해진다. 계약에 의해 법적으로 채무관계가 맺어지는 경우에는 주고받는데 문제가 생기면 법으로 해결하면 되지만 마음으로 주고받는 경우에는 훨씬 더 복잡하고 미묘한 채무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도움이나 선물을 받았을 때 상응하는 것으로 갚아줌으로 관계가 더욱 돈독해질 수 있다. 하나의 끈은 약하지만 또 하나의 끈으로 한 번 더 이어놓으면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원한을 사게 되면 끈이 아니라 쇠사슬처럼 강한 에너지로 서로가 묶이게 된다.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는 사이가 되면 어느 한쪽이 가던 길을 돌아서서 피하려 하지 않는다. 서로의 삶을 파괴하는 강한 에너지를 뿜으면서 자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보은과 복수의 마음은 한 마음 뿌리에서 나온 성격 다른 두형제이다. 보은이냐 복수이냐 대한 기준은 '고마움이냐 당함이냐' 이다. 보은 에너지는 잉걸불과 같아서 처음에는 이글이글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그라들기 쉽다. 하지만 복수 에너지는 그 힘이 무한에 가까워서 수십년간 거대한 선체를 움직이게 하는 핵항공모함의 원자로같다. 춘추전국시대에 오왕 부차의 와신(臥薪)이나 월왕 구천의 상담(嘗膽)의 고사는 복수의 힘이 얼마나 강하고 집요한지를 말해준다. 




유교에서는 효와 충을 최고의 가르침으로 삼는다. 부모가 사망하면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묘소를 돌보며 삼년을 죄인처럼 살아가는 것을 효의 귀감으로 여겼다.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태어나서 걷지를 못하니 자신의 대소변 처리도 하지 못하고 먹여주어야 먹고 살 수 있다. 몸을 뒤집는데 일년, 걷는데 일년, 뛰는데 일년. 삼년이 지나야 비로소 제대로 걸을 수 있고 자기 손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미숙아로 태어나서 부모의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뉘시는 삼년의 은공으로 살았으니 부모님 살아 생전에 효를 다하고 부모가 돌아가시면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뉘는 마음'으로 묘소를 살피라는 뜻이다. 


가르침은 그러하지만 부모의 은공 뿐 아니라 남으로 부터 받은 은혜를 갚고자 하는 마음은 상품의 유통기한처럼 처음의 신선함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선도를 잃어가게 되는가 하면 심한 경우에는 은공 자체를 마음 속에서 스스로 밀어내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게 된다. 이런 사람을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라 하여 떳떳이 돌멩이를 들 수 있는 자가 있을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이런 심리를 꼬집은 <페리숑씨의 여행>이라는 희극 작품이 있다. 페리숑씨의 콤플렉스라는 심리용어까지 사용될 정도이니 흥미를 가져도 될성 싶다. 

19세기 프랑스의 극작가 외젠 라비슈는 <페리숑씨의 여행>이라는 희극 작품에서 인간의 묘한 심리를 드러내는 한 가지 행동을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다. 파리의 부르주아 페리숑씨는 자신의 부인과 아름다운 딸과, 그 딸에게 혼인을 청한 두명의 청년, 다니엘과 아르망과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페리숑씨의 여행은 뜻밖의 사고를 맞이하게 된다. 말을 타는 도중 발을 헛디딘 말이 페리송씨를 떨어뜨린 것이다. 떨어진 페리송씨는 굴러 가파른 절벽 아래까지 이르게 되고, 그 순간 아르망이 달려가 페리송씨를 구하게되고 가족들은 아르망에게 크게 고마워한다. 

페리송씨는 처음에는 생명에 은인이라고 매우 고마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놔둬도 혼자 위기를 넘겼을건데 왜 도와줬는지 이해가 안된다...이런식으로 처음의 고마운 마음을 깎아내며 결국은 고마움보다는 의심과 찝찝함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데 페리숑씨의 여행에서 다시 유사한 사고가 일어난다. 이튿날 페리숑씨와 일행들은 산을 타던 와중 다니엘이 절벽아래로 떨어질뻔했다. 이때 페리숑씨가 구하게 된다. 페리숑씨는 스스로 아주 대견하고 뿌듯해서 가족들에게 돌아가 자랑을 한다. 다니엘은 페리숑씨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자기는 죽었을 거라면서 아낌없는 찬사로 그를 거든다. 당연한 얘기지만 페리숑씨는 아르망보다 다니엘에게 관심을 갖도록 딸을 부추긴다. 그리고 다니엘과 자신의 딸을 혼인시키고자한다.

이런 와중에 페리송씨에게 자기를 도와준 아르망의 존재가 더더욱 불편하게 다가왔다. 아르망이 자기를 도와준 일은 갈수록 불필요했던 일로만 여겨졌다. 급기야는 아르망이 자기를 도와주었다는 사실조차 의심하기에 이른다. 결국 이 마음이 커져 아르망의 호의를 면전에 대놓고 따지게 된다. 

페리숑씨의 여행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주변에는 도움을 받고 언제 받았지 하고 잊은 사람들과 되려 밀쳐내는 사람들까지 다양하다. 고마움을 모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를 도와준 사람들을 미워하는 자들도 있다. 그것은 아마도 도와준 사람들에게 빚진 기분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싫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와준 사람들을 좋아한다 우리의 선행을 자랑스러워하고 그들이 두고두고 감사하리라 확신하면서 말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상상력사전)


페리숑은 죽음의 위기에서 자신을 도와준 아르망의 은혜는 애써 잊으려 한다. 심지어는 도와준 사람을 미워하기까지 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베푼 것은 외면하려하면서도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베푼 것은 끝까지 기억되기를 원한다. 참 아이러니컬한 이기심이다. 이 아이러니가 어릴적부터 '은혜갚은 두꺼비' 식의 동화를 읽게하는 이유이다. 한낱 미물도 은혜를 갚을 줄 아는데 하물며 사람이 배은망덕의 무도함을 저질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머리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해보지 않고서 남의 배은망덕함을 함부로 입에 올릴 일도 아니다. 일단,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을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그대로 이렇게 할 수 있는지를 늘 생각하며 사는데서 나를 돌아봐야 한다. 혹시나 나는 TPO에 맞춰 옷장 안에 옷을 골라 입듯이 때와 장소에 따라 페르소나를 골라 쓰는 사람이 아닌지도 함께 생각해볼 일이다.




반면 복수하려는 마음은 어떠한가?

보은하고자 하는 마음이 구심력적이라면 복수하려는 마음은 원심력적이다. 보은의 마음은 주변의 눈이 없으면 거둬들이기 쉽고 복수의 마음은 주변에서 말려도 시위를 떠난 화살같아서 그 마음 거둬들이기 정말 어렵다. 박찬욱 영화감독이 연출한 영화중 복수를 주제로 하는 영화 셋이 있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 항간에서는 이를 묶어서 '복수 3부작' 이라고들 한다. 보은을 주제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관객들에게 외면당하기 쉽상이라 아예 만들 엄두를 내기 어렵고 복수 영화는 보은 영화보다는 흥행에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누구나 보은으로 얻는 마음 값이 복수로 얻는 마음 값보다 더 비싸서 구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구약성서 창세기에는 인류의 첫 살인자 카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야훼가 동생 아벨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면서 자신의 제사는 흡족해하지 않음을 시기하여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 돌로 쳐죽인다. 동생이 자신을 직접 위해하지 않았으나 분노하여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카인은 우리의 조상이고 우리는 카인의 후예들이다. 신화적 메타포로서의 의미가 심장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잘 알려진 함무라비왕의 법은 그 기저에 복수의 심리를 깔고 있다. 법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고대 사회에서는 지나치다가 툭 건드렸다고 돌을 쳐드는 일이 다반사였을텐데 눈을 상하게 한 자는 죽음이 아니라 그의 눈을 상하게하는 정도로 그쳐야한다는 보호의 의미일수도 있지만 함무라비 법은 눈에는 눈을 바치게 함으로써 상한 자의 마음을 달래주고자 하는 복수심 충족법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사형수의 사형 장소에 피해자 가족을 불러 참관하게 한다. 살아있는 현대판 함무라비 법 집행이라할 수 있다. 




보은 행위는 해야할 일이며 권장할 일이며 보은은 개인의 몫이지 국가의 몫이 아니다. 보은은 할수록 튼튼한 사회가 되므로 가르쳐야할 덕목이지만 법치국가에서는 복수를 위해 저지른 행위는 범죄행위가 된다. 복수의 대상이 된 자의 행위를 재판하여 죄를 묻는 것은 국가가 할 일이지 개인이 할 일이 아닌 것이다. 


문제는 국가의 '대신 복수' 가 공정하여 공분을 사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며, 개인은 '보복'행위가 자신의 몫이 아니라 국가에 일임하고 있음을 깊이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보복운전, 층간소음 보복, 주차공간 시비 이외에도 온라인상에서의 댓글과 소위 악플로 인한 갈등이 원인이 되는 끔찍한 보복행위는 함무라비왕 시대의 사회질서 유지 방법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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