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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강물처럼 Jun 07. 2023

잡초의 헤게모니

퇴직 후 농부가 되었습니다. 고대 중국 요순임금의 태평시대에 백성들이 격양가를 불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떠올림도 있지만 원래 몸 움직이는 걸 좋아하고 원래 힘을 들여 용쓰는 걸 마다하지 않는 터라 흙을 만지고 수박통만 한 돌들을 캐내고 들어 옮기느라 끙끙대면서도 싫지 않습니다. 내 생애 중에 내 입으로 들어갈 먹거리는 내가 해결한다는 한때의 자급자족의 삶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급자족을 넘어 이웃들과 나눌 수 있다면 격양을 통해 함포와 고복의 기쁨을 주는 선을 행하는 일이라 여깁니다.


팔백 평쯤 되는 땅에 나무를 심고 땅을 일구어 채전을 한다는 게 녹록지 않은 나이이지만 일단 합니다. 주변에서 말렸습니다. 특히 아들과 딸이 크게 반대했지만 나는 극구 더 반대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더 큰 반대는 사람의 반대가 아니라 풀의 반대입니다. 평화롭던 풀의 나라에 탱크처럼 삽과 호미를 들이대고 낫으로 목을 댕강댕강 쳐대니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아우성으로 대들고 있습니다. 시퍼렇게 날 선 낫과 시퍼런 녹색의 풀과의 전쟁.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남는 쪽이 강한 쪽이다'라는 인내의 싸움터가 될 것입니다.


식민지 아메리카의 독립을 위해 무장을 하여 영국에 맞서자며 피를 토하며 웅변한 패트릭 헨리의 명연설이 생각납니다.

쇠사슬을 차고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데도 목숨이 그리도 소중하고 평화가 그렇게도 달콤하단 말입니까? 전능하신 신이시여, 길을 인도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길을 선택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외칩니다. 내게 자유를 달라, 아니면 죽음을 달라.


내돈내산 내 땅인데 풀들의 외침에 내가 악덕 땅주인이 된 것 같습니다. 나의 낫질에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풀들이 인해전술 아니 초해전술로 맞서고 있습니다.




농사일을 시작하고 보니 사실 밭 농작물보다는 잡초에 미운 정이 더 박히다니 참 아이러니입니다.  미운 정의 이유는 낫으로 댕강 목을 날리다가 뭔 마음인지 뽑아내기로 마음을 바꾼 때문입니다. '풀들아, 너희들에게 내가 졌다' 하고 무릎 꿇었습니다. 의협 김두한처럼 연장을 쓰지 않고 인도주의적으로 손으로 맞짱 뜨자고 나선 겁니다. 실은 허리 굽혀 뽑다 보니 안면으로 피가 몰리고 허리가 아파서 도저히 참아내기 어려워서 무릎에 매트를 깔고 엎드려 뽑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눈높이가 낮아지니 낫질할 때 안 보이던 것들이 다 보입니다. 풀의 잎모양 줄기 색깔 그리고 뽑혀 나온 뿌리의 모양과 질감 강도 그리고 풀마다의 특성까지 다 보입니다. 식물 중에서 온실에서 자란 것은 화초라 부르는데 사람의 손이 많이 가고 반려식물이라까지 일컬음을 받습니다. 영양 상태가 좋아 피부가 좋고 필라테스 운동을 한 것처럼 체형도 좋습니다. 보기 좋다고 이리저리 팔려나가 사람이 자주 찾는 장소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고만 자라서인지 사랑을 못 받으면 우울증에 걸리고 맙니다. 미인박명이라서인가요.


사람이 잡초처럼 자랐다면 마구잡이로 컸다기보다는 생존능력이 강한 사람으로 자랐다는 뜻입니다. 잡초의 사전적 의미는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입니다. 가꾸어주는 이 없이 혼자 힘으로 목숨을 지켜냈으니 독야청정하며 유아독존입니다. 땅이 거칠어 돌이 많아도 돌 사이를 비집고 뿌리를 박는 개척력, 물을 주지 않아도 비가 내리기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 알아서 연애하고 알아서 번식하는 사교성, 벌레들의 습격에도 철옹성으로 지켜내는 방어력, 팔다리 다 잘라도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능력,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랬는데 수십 미터 거목을 휘감고 기어오르는 용맹함, 하나로는 약하지만 집단을 이루면 강하다는 걸 아는 지혜. 온실의 화초로는 언감생심 넘보지 못할 경지에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잡초는 매우 정치적인 존재입니다. 민초(民草)는 백성을 질긴 생명력을 지닌 잡초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 지방자치제를 시행하면서 가장 많이 쓰인 말이 풀뿌리민주주의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풀뿌리민주주의는 지방자치제와 동의어입니다. 군사정권 앞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친 민초들의 풀뿌리민주성이 오늘의 대한민국의 정치 현재를 이뤄낸 것, 아닙니까.


우리는 그저 땅 위에 드러난 걸 풀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낫으로 예초기로 눈에 보이는 걸 제거합니다만 실은 풀은 뿌리가 9할 9푼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잡초의 개척력, 인내심, 사교성, 방어력, 부활력, 용맹, 집단성의 칠덕은 모두 뿌리의 힘입니다. 뿌리를 뽑아내지 않으면 잡초의 1푼밖에 제거하지 못한 것입니다. 게다가 속에서 뿌리를 뻗어가며 주변 땅에 번식을 하고 있습니다. 풀을 가까이하다 보니 풀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지하세계를 건설하고 있다는 알았습니다.


튀르키에의 데린쿠유지하도시(Derinkuyu Underground City)는 로마의 박해를 피해 기독교인들이 건설하기 시작한 지하도시입니다. 이후에도 오스만투르크의 박해와 티무르제국의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기독교도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데린쿠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잡초는 지상에서의 꽃으로 수정되는 것보다는 지하에서 뿌리로 번식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데린쿠유를 건설한 이들도 풀뿌리와 개미들의 거주지를 관찰하면서 얻은 영감으로 놀라운 지하세계를 건설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2014년 1월 제가 방문했을 때 본 데린쿠유의 개미굴 같은 모습이 풀을 뽑으면서 뿌리가 서로 끊어지는 묘한 단말마의 비명이 영감이 되어 되살아납니다.


베트남이 하나가 되기 전에 북베트남의 게릴라인 베트콩들은 미군의 공격을 피해 지하세계로 숨어들었습니다. 구찌 터널이라고 합니다. 내부에는 부엌, 식당, 침실, 치료실, 학교도 있었고 심지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조산소까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 점을 고려하여 환기 시설도 마련해 두었고 실탄 사격장이 있어 소총 사격도 할 수 있었습니다. 총연장 250km에 달한다니 어마어마합니다. 지하세계가 안식처가 되고 학교가 있어서 필요한 사상교육까지 시켜서 땅 위로 올려보내 적들과 싸우게 했으니 지하의 풀뿌리가 살아있으면 지상의 줄기와 잎이 아무리 상해도 잘 버텨낼 수 있음과 같습니다.


 



이탈리아의  천재 철학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옛 것은 죽는데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는 게 위기다"라고 했습니다. 가을에 낙엽이 된 풀잎이 다음 해 봄에 새로운 잎을 피우지 못하면 뿌리가 상한 것입니다. 뿌리가 상한 것이 위기입니다. 그람시는 이어서 말합니다.


혁명의 핵심 동력은 빈부 차이나 운동조직, 무력이 아니다.
다중이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문화적 도덕적 이데올로기가 하나로 모여 헤게모니가 될 때 권력교체가 가능하다.


잡초는 빈자 중 빈자이며 약자 중 약자입니다. 도끼나 톱이 아니라 손으로 당겨도 뜯기고 뽑혀나갑니다. 개별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금세 어마어마한 집단을 이루어내는 번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이 땅의 권력을 바꾸자. 우리도 잘 살아아보자'라는 이데올로기로 헤게모니를 이루어 지배자가 됩니다.




나의 땅과 이웃하고 있는 땅의 주인은 나와 비슷한 넓이의 땅에 난 풀을 제초제로 일거에 제압했습니다. 마치 미군 헬기들이 베트남 정글에 고엽제를 살포하듯이 하룻만에 풀들을 진압했습니다. 내가 기어가며 뽑으며 전진한 50미터 뒤에서는 완전히 뽑히지 않은 풀뿌리가 새싹을 피워 올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미련스럽게 오늘도 나는 전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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