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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강물처럼 Jul 14. 2023

1543년,  그해에 우리는...

서울역을 떠난 KTX가 대전에 이르러서 오른쪽으로 가면 광주를 거쳐 목포에 닿게되고 왼쪽으로 가면 대구를 거쳐 부산에 도착하게 됩니다. 대전에 이르기까지는 같은 길을 달려오다가 대전을 분기점으로 하여 호남선과 경부선으로 갈라집니다. 이와 같이 사물의 속성 따위가 바뀌어 갈라지는 지점을 분기점이라고 합니다. 공간 뿐만 아니라 시간이 분기점이 되는 때도 있습니다. 


역사상 한 분기점은 세계의 판도를 바꾸는 획기적 시점이 됩니다. 

1453년은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투르크 메흐메트2세에 의해 함락되던 해입니다. 유럽인들에 의한 신항로 개척은 콜럼버스가 인도를 향해 대서양을 건너던 1492년이 그 원년으로 여겨집니다만 사실은 그보다 40년 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던 1453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방무역의 중개지였던 동로마제국을 이슬람국가인 오스만제국이 점령하여 유럽과 동방의 교역의 중간 거점이 사라지자 육로가 아닌 신항로 개척을 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콜럼버스의 항해의 원래 목적지는 신대륙 아메리카가 아니라 인도였습니다. 이전에는 동쪽으로 나아가면 나오던 인도를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돌아서 인도에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자꾸 걸어나가면 온세상 어린이들 다 만나고 오겠네~~ 라고 부르는 동요처럼 말입니다. 인도로 가겠다고 나섰다가 예상치 못하게 아메리카를 발견한 것이지요.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이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분기점이 되었고 1453년은 바닷길로 동양과 서양이 연결되는 분기점이 되는 해였습니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기원이 되고 분기점이 되어 '나비효과'처럼 거대한 쓰나미가 되어 밀어닥치는 게 세상 이치인가 봅니다. 




1543년은 중세시대 극동의 두나라  조선과 일본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분기점이 된 해였습니다. 1543년을 기점으로 수천년 동안 바다를 사이에 두고 교역과 문화교류 그리고 전쟁의 역사를 이어온 두 나라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길을 들어서더니 50년 후인 1592년 조선은 7년 전쟁의 기나긴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됩니다. 


1543년 조선은 

오늘날의 지방사립대학교에 해당하는 서원을 건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대 사화와 그에서 비롯된 정치적 혼란을 겪으면서 조선 중기의 학자들은 지방에 은거하면서 선현 유학자들을 기리는 사당의 기능과 후학 양성의 기능을 가진 서원을 창설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국립교육기관인 성균관과 지방 향교와는 다르게, 늘날 사립학교들이 설립이념을 제각기 달리하듯이 서원들은 지방색이 나타나고, 추앙하는 성현의 학문적 이론과 뜻을 받드는 교육기관으로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같은 서원에서 동문수학한 선비들은 자연히 같은 이념과 학문적 이론을 먹이 삼아 정신적 성장을 한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후일 과거에 급제하여서도 비슷한 노선을 걸으며 정치적 동지가 되어 국가경영에 한 축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붕당(朋黨)이란 말은 말 그대로 같은 서원에서 동문수학한 '벗(朋)들과 같은 '무리(黨)'가 되어 정치적 동지로서 운명을 같이 했다는 뜻이겠지요. 정치적 갈등이 생길 때마다 동인, 서인, 노론, 소론, 남인, 북인, 벽파, 시파라는 무리로 갈라지기를 거듭하였습니다. 문제는 지금이나 예나 국가 발전과 정치 체제 발전을 위한다기 보다는 대립 당의 노선에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으며 오로지 권력을 탐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일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1590년 3월 조선 조정은 서인 황윤길을 정사로, 동인 김성일을 부사로 하여 통신사를 일본으로 파견했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명나라를 치러 가는 길을 조선이 내어달라(정명가도,征明假道)는 요구를 일본이 분명히 하였으나 황윤길은 '반드시 침략한다'로, 김성일은 '침략의 움직임이 전혀 없다'로 조정에 보고를 했습니다.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은 빛을 잃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1592년 왜군은 부산포에 상륙을 하였습니다.


1659년 조선 현종 때, 임진왜란이 끝난지 60여년만에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복상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크게 논란이 된 두 차례의 예법에 관한 논쟁, 소위 예송논쟁이 격화되었습니다. 민주국가인 지금의 대한민국과 달리 왕조시대의 권위는 정통성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만 너무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너무나 중요한 시기에 정파적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때는 병자호란이 있었던 해로부터 22년 뒤였습니다. 다시는 외침으로 나라가 유린당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다짐이 더 중요한 시기인데 말입니다. 곳곳에서 각양각색으로 사림들이 무리를 이루고 붕당간 갈등으로 국력은 점점 쇠퇴하더니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정당은 정당 이념을 구현하는 의식을 가질 때 대립 정당의 대표가 참석하느냐 않느냐의 문제로 서로 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보는 국민들 입장에서는 참으로 씁쓸합니다. 마치 우리집 초상났을 때 너가 문상하지 않았으니 너희집 초상나면 나도 문상하지 않겠다고 벼르는 걸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못해 외면하고 싶을 지경입니다.  


정치계를 벗어나도 파벌 갈등은 줄기차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줄기세포 연구로 일약 세계적 스타 과학자가 된 서울대학교 황우석교수는 존재하지 않는 연구결과물이 존재한다고 했다가 하루아침에 '사기꾼'이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거짓으로 연구실적을 부풀린 것은 백번 잘못입니다. 세월이 지나고 나니 거짓과 추락 모두가 격화된 연구 경쟁 속에서 벌어진 일들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황우석교수는 지금 아랍에미리트 정부의 막강한 지원으로 낙타를 이용한 줄기세포 연구를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 정부의 지원과 우리 국민들의 염원이 담긴 연구실적이 모두 허사가 되고 먼 중동의 국가는 어부지리의 이익을 얻은 셈입니다.  


예술계와 스포츠계의 '블랙리스트'라는 것이 정말 존재한다면 정말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파벌싸움으로 국가대표 선수가 외국으로 다른 나라로 귀화하여 남의 나라에 금메달을 안겨주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1543년 일본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처음으로 조총을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우뢰와 같은 폭발음과 함께 멀리서 목표물을 쓰러뜨리는 신무기의 위력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칼과 활로 싸우던 사무라이들에게 총은 신세계였습니다. 오와리의 영주 오다 노부나가는 일찌감치 조총의 위력을 간파하고 조총을 적극 도입했습니다. 조총은 재장전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불을 붙여야하기 때문에 습기에는 취약했습니다. 노부나가는 느린 재장전을 극복하기 위해 1열의 병사들이 발사하는 동안 뒤에 있는 2열과 3열의 병사들이 재장전하는 방식을 고안해내는 등으로 조총을 활용한 전술을 개발하여 전국시대 패권을 장악하는데 큰 도움을 얻었습니다. 노부나가의 권좌를 이어받은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렇게 쌓인 센코쿠시대의 전술 능력을 바탕으로하여 명나라를 치겠다고 나섰고 조선에는 명으로 가는 길을 열어달라고 요구하며 조선정벌에 나섰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무대뽀'라는 말은 '鐵砲(조총)'도 없으면서 무모하게 덤벼드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정확한 유래인지는 알 수 없으나 '無鐵砲'라는 말에서 당시에 조총이 가진 위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은 총을 도입하여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는 되었으나 막상 총을 쏘는데 필요한 화약 생산을 할 수 없었습니다. 화약을 만드는데는 초석이 필요한데 중국이 일본과 무역을 금지하여 화약을 수입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포르투갈 상인들이 일본에 화약을 대량 공급하는 덕분에 조총부대를 운용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으로서는 명나라를 정복하면 화약을 대량 생산해낼 수 있고 동시에 거대한 중국 땅을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시작한 하와이 진주만 기습과 아주 닮았습니다. 전쟁무기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석유가 필요한데 미국이 일본에 석유를 수출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석유를 확보하고 세계 진출을 위해서 미국과 태평양을 두고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은 여기서도 입증이 된 셈입니다. 


조총의 도입에서 보듯이, 일본은 서양문물을 거꺼이 받아들여서 군사력이 증강되고 경제가 성장하는 나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았을 것입니다. 받아들이지 못하면 빼앗아서라도 기어코 자기네 것으로 만들어버리려 했습니다. 19세기 메이지유신은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자기네 것으로 만들어 부국강병의 길로 나서게 된 결정적 분기점이 된 것입니다. 




 1543년은 조선에게는 서원건립의 원년이었습니다. 문치의 길로 들어서는 분기점이 되었고 붕당정치의 싹이 여기에서 튼 것으로 보여집니다.  일본에게는 1543년이 조총의 도입을 본격적으로 '글로벌 싸움꾼'의 길로 나아가는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중세시대의 정보통신 능력으로는 1543년이 극동의 두 나라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는 당시로서는 알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정확히 480년이 지났습니다. 지금은 정보통신의 시대이고 세계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을 어떤 분기점을 지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정확히 짚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연일 사색당파로 갈라져 이념논쟁과 피바람으로 살던 과거 그때가 연상되는 지금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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