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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강물처럼 Jun 21. 2023

'제눈에 안경' 끼고 세상 살아가기

경국지색(傾國之色)은 여색에 빠져 일국의 왕이 나랏일을 돌보지 않아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로 대단한 미색을 지닌 여인을 말합니다. 중국에서는 경국지색을 지닌 4대미녀로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를 꼽습니다.


서시의 별명이 침어(沈魚)입니다. 어느날 서시가 빨래를 하러 강으로 나갔는데 물속의 물고기들의 서시의 아름다움에 취해 헤엄치기를 중단하여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와신상담 고사에 나오는 서시(西施)는 춘추전국시대에 월나라 사람이었습다. 서시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원수의 나라 오나라로 보내졌습니다. 서시의 미색에 빠진 오나라 왕 부차는 서시가 시키는대로 궁궐신축과 대규목 토목공사를 벌이는가 하면 이웃나라와의 전쟁으로 국고를 탕진하게 됩니다. 결국 나라의 침공으로 나라는 망하게 됩니다.




淸나라 황증(黃增)의 집항주속어시(集杭州俗語詩)에는 서시에 대한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색불미인인자미(色不迷人人自迷)
정인안리출서시(情人眼裏出西施)

색(모양)이 사람을 미혹시키지 않는데도 제 스스로 미혹되며
연인의 눈 속에서 서시가 나온다.


'정인안리출서시'는 사랑에 빠지면 연인이 서시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눈에 콩깍지가 덮였다는 말이지요.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별로 예쁘지도 않은 사람을 '제눈에 안경'으로 보면 천하절색으로 보이니 그 안경은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희한한 물건인가 봅니다.




눈에만 착시현상이 있는 게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자세와 즐기는 취미에도 '제눈에 안경'이 있습니다. 황금만능사상에 빠진 사람에게는 공수래공수거를 말하는 사람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영국의 산악인 조지 말로리는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하려 나섰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가 생전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Why did you want to climb Mount Everest?"라는 질문을 받고 "Because it's there."로 답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히말라야 높은 설봉을 오르려는 산악인들의 '무모함'이 일반인들에게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한때 우표수집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보통사람들 눈에는 그냥 엄지손톱만한 종이쪼가리인데 이를 위해 엄청난 시간과 고액의 돈을 들이는 사람들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다 '제눈'마다 다른 안경을 끼고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짚신을 벤츠 자동차로 알고 험산준령을 고속도로로 알고 일평생 온땅을 헤집고 다니며 대동여지도를 그려낸 고산자 김정호. 창고에서 달걀을 품고 병아리가 부화하기를 기다렸다는 발명가 에디슨. 현대그룹을 일군 정주영회장의 "임자, 해봤어?"라는 말. 이런 정신과 생각을 가진 분들 때문에 인류 문명은 발전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제눈에 안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교양인입니다.


공자의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라는 말씀은 '제눈에 안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락지자'는 '미친 사람'입니다. 김정호이며 에디슨이며 정주영이며 말로리입니다. 무언가를 즐기지 않고는 미치는 경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진로문제로 고민이 많습니다. 부모가 자신의 안경을 자녀의 눈에 씌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관심분야가 무엇인지 찾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야 자녀가 '미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락지자'가 되어야 무언가를 이룰 수 있기때문입니다. 락지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흥미진진하니까 재미있으니까 스스로 방법과 길을 찾아간다는 말입니다.




저는 재주가 없습니다. 관심은 다방면에 걸쳐 있으나 어느 하나 제대로 해낸 게 없습니다. 어느 하나 전문가 수준에 도달한 게 없습니다. 가까이에도 닿지 못했습니다. 저를 찾는 사람은 많습니다만 일의 수준이 높아지면 저를 찾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저를 보는 사람들의 생각일 뿐 저는 즐겁습니다. 갑갑하다, 심심하다, 따분하다 지겹다라는 말을 거의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의 눈에 낀 '제눈에 안경'은 도수가 저에게 아주 잘 맞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퇴직하기 전에는 일에 '미친 자'였다가 퇴직후에는 하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던 일들이 번호표 받아 대기중입니다. 목공을 하고, 굴착기 면허를 따고, 용접을 배우고, 브런치스토리에 글도 써봅니다. 농사일도 그 중 하나입니다. 골프, 여행을 주로 권합니다만 저에게는 우선순위 20위, 30위권에 있는 것들입니다. 농사 짓는 일은 무척 고단한 일입니다. 끙끙 앓으며 잠을 자고 온몸에 알이 배고 관절이 욱신욱신합니다. 손은 거칠어서 가려운 곳 긁기에 참 좋습니다. '신체발부수지부모'의 뜻을 잘 받들지 못해 불효스런 마음이 크지만 제눈에 안경이 너무나 잘 맞아 시력 하나 만큼은 나이를 넘어서 짱짱합니다. '눈 효도'를 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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