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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강물처럼 Sep 13. 2023

로마제국-일본제국

관용의 가치

창대했던 천년제국 로마도 그 시작은 미약했습니다. 로마는 넓은 곡창지대도 아니고 방어벽으로 삼을 높은 산도 없는 입지조건이 열악한 곳, 테레베 강변의 50m 정도 높이에 불과한 일곱 언덕 위에서 옹기종기 모여 가냘픈 호흡을 시작했습니다. 그런 '마을국가'로 시작한 로마가 찬란한 문명 발상지 그리스를 극복하고 통상경제력이 뛰어나고 군사력이 막강했던 해상국가 카르타고를 억누르고 지중해 연안을 호령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유장함과 도도함으로 천년 역사를 이어가갈 터와 제도 그리고 그것을 경영해나갈 인물을 길러내는 데 하루아침으로 될 리는 없었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로마는 시간 속에서 서서히 자라나갔습니다. 로마는 대기만성형 거인이었습니다.


중력을 거스르는 건축물일수록 기초가 튼튼해야 하는 법입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해지는 제국은 운이 좋아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진대 분명 로마의 성장에는 남다른 비밀이 있었을 것입니다. 콜로세움이 수천 년의 풍상을 견뎌내고 지금도 굳건한 것은 그 기초가 튼튼해서였을 것입니다. 콜로세움을 지은 로마인의 건축술 못지않은 그들만의 대제국 건설 비결이 무엇이었길래 천년을 깊은 강물처럼 도도하게 흐를 수 있었을까요.  왜 지중해의 역사가 곧 로마의 역사가 되었을까요. 사색의 계절 가을은 또 이렇게 질문을 던져놓습니다.




하나의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살 수는 없습니다. 하나의 바다 지중해에서 두 개의 태양이 뜰 수는 없었습니다. 로마와 카르타고.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두 나라의 전쟁은 필연이었습니다.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제1차 포에니전쟁에서 로마에게 당한 패배를 설욕하고자 23년 만에 군사를 다시 움직여 복수전을 시작했습니다. 한니발은 로마의 속주 에스파냐 남부의 사군툼이라는 도시를 함락시킵니다. 전쟁사에서 상대의 허를 찌른 대표적 기습작전으로 알려져 있는 피레네산맥과 알프스산맥을 넘기 위한 전술을 펼칠 교두보를 확보한 것입니다. 현대전의 탱크처럼 이용할 코끼리를 몰고 말이지요. 그것도 한겨울에 말입니다. 민족의 영웅 이순신장군이 남해島 지족해협의 죽방렴 그물에서 얻은 영감으로 학익진을 펼쳐 한산대첩을 이루었다는 가설에서 보듯 범인과 천재의 차이는 보이는 것을 보이는 것 이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한니발은 갈리아 지방의 목동들이 양 떼를 몰고 알프스와 피레네 산맥을 넘어 다닌다는 사실을 예사롭게 보아 넘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니발의 '미친 짓'은 먼 훗날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라는 단어는 없다'라는 말로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한 선례가 되었습니다.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격하던 한니발 군대와 외침을 막으려던 로마 군대는 칸나에 평원에서 국운을 걸고 건곤일척의 대결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전사자를 내며 한니발 군대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한 나라에는 반드시 분열과 혁명이 뒤따른다는 것이 공식입니다. 그러나 칸나에 전투에서의 처참한 패배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로마는 분열하지 않았습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카르타고의 승전과 승승장구에도 로마의 속주동맹국들은 동요나 이탈 없이 '로마연합'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의 무형(無形)의 역량은 바로 이 순간 최고로 빛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한니발은 보급을 목적으로 보급 통로에 있는 로마의 속주와 동맹국을 대상으로 회유책을 썼습니다.

한두 번의 만남과 선물과 식사 대접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기 어렵듯이 국가간 신뢰와 의리도 단기간에 생겨나지 않습니다. 어느 나라도 로마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냉혹하고 허망한 것도 국가 간 관계라지만 로마의 속주와 동맹국은 한니발 보다는 로마를 선택했습니다. 한니발의 당근과 채찍이 로마와의 의리를 넘을 수는 없었습니다.




로마의 이러한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칸나에 전투에서 패한 로마군을 재편성하여 다시 한니발과 맞서 싸운 것은 24세의 풋내기 장군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였습니다. 술에 비유한다면 그는 와인이나 코냑이 아니라 막걸리 탁주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으뜸 조건은 '마음의 접근성'이 아닐까요. 때로는 이것이 지도자로서의 비범한 능력을 앞서는 우선 조건이기도 합니다.  귀족이면서도 막걸리 한 사발에 홍도야 우지 마라 오빠가 있다~를  외치는 사람이 스키피오였습니다. 맑고 깨끗한 영혼 그리고 소탈한 성품을 가진 스키피오에게 로마는 나라의 운명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그의 리더십을 믿기로 했습니다. 




스키피오 장군의 인품과 리더십으로 대표되는 게 바로 로마의 국격이자 국품이면서 이민족도 안아주는 넓은 품 '국품'이었습니다. 로마의 품은 개방과 관용과 포용의 온기로 따뜻했습니다.

아테네에서 오랜 세월을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조차도 죽을 때까지 아테네 시민권을 얻지 못했습니다. 부모가 아테네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마는 달랐습니다.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었습니다. 일정기간만 로마에서 거주해도 시민권을 가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두었습니다.


로마의 국품은 식민지와 동맹국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식민지인일지라도 로마시민이 가질 수 있는 문은 열려 있었고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 될 자격까지 주어졌습니다.

 그리스 역사가 디오니시오스는 그의 저서 <고대 로마사>에서 '종교에 대한 로마의 태도와 생각이 로마를 강대국으로 만들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는 다신교 국가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신과 다른 신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도 인정하고 존중했습니다. 그런 사고방식으로 동맹국과 식민지를 대했습니다. 로마의 힘은 광신적 배타적 폐쇄적이지 않은 수많은 '스키피오'들로 구성된 나라에서 나오는 관용의 힘이었습니다.

적어도 로마제국의 기초를 쌓아가던 시절에는 로마의 품은 이렇게 크고 넓고 깊었습니다. 천년제국 로마의 튼튼한 기초는 이렇게 다져졌습니다.




그 시대는 그 시대만의 가치와 사고방식이 따로 있습니다. 지동설이 나오기 전의 사람들이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었음을 두고 무지몽매하다고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고대의 로마제국과 근대의 일본제국을 같은 테이블에 올려놓고 비교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적 가치를 넘어서 둘을 비교해 봄으로써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더 뚜렷이 잡아내고 또 조정해 나갈 수 있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반복되는 게 역사이니까요.


로마가 대기만성형 부자를 꿈꾸었다면 일본은 졸부를 꿈꾸었습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제국을 이룰 생각을 하지 않고 차근차근 내실을 다져나갔습니다. 반면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급격한 개혁의 드라이브를 걸었습니다. 모방과 답습을 개혁의 본질로 삼았습니다. 1872년 이와쿠라 사절단 130여 명이 일본 요코하마 항을 떠났습니다. 서양 열강들을 견학하며 보고 들은 것을 일본 개혁에 적용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이 바로 스펙트럼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으로 본 것이 그들을 통해 일본의 전 영역에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저명한 일본의 대표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본의 문화는 저수지 문화다. 일본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하나도 안 받아들인다." 졸부를 꿈꾸는 일본은 급했습니다.


조급한 사람에게서는 관용성과 포용성을 찾을 수 없습니다. 시간적 여유가 없으면 남을 돌아보고 헤아려줄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마음이 그랬습니다. 2년여의 세월 동안 서양 열강을 둘러본 사절단은 심한 열등감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조급함이 더해졌습니다. 서양 나라들처럼 해외 식민지를 만들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강한 군대가 필요했습니다. 군국주의는 더욱 강성 군국주의가 되어야 했습니다. 로마제국의 기초가 포용과 관용이었다면 일본제국의 기초는 조급함이었습니다. 애초에 식민지로 조선을 병탄 할 때에 그 목적이 수탈이었지만 해도해도 너무 했던 조급증 환자 일본이었습니다.




몇 해 전 대만의 어느 고등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 건물 중 가장 눈이 많이 가는 3층 건물 벽 전체에 일본의 욱일기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그림이 벽화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대만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긴 뒤 난징조약에 의해 50년을 일본의 식민지로 지냈습니다. 그런 대만이 일본의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를 연상시키는 대형 벽화를 그것도 애국 교육을 해야 할 학교 현장에 그려놓은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교장선생님에게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통역사의 말을 듣고 난 후 씩~ 웃음으로만 무언의 대답을 해왔습니다. 내가 대만을 알듯 그 분도 대한민국의 역사를 알터이니 마땅한 대답이 없어 웃음으로 답한 것입니다.


식민지 조선에 임명된 조선총독은 주로 일본군 육군대장 계급이었고 대만에 임명된 대만총독은 문관출신이거나 일본군 해군출신들이었습니다. 무기를 앞세워 싸우는 해군과 공군과는 달리 육군은 모든 전쟁의 최일선에서 적군의 얼굴과 눈동자를 보며 근접사격전과 백병전을 치르는 부대입니다. 육군과 해군은 전투 방법에 따른 분위기가 크게 다릅니다.  다시 말하면 조선은 무단철권통치를 받았고 대만은 다소 온건한 통치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조선 1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육군 출신으로서 조선을 무단통치하다가 1919년 3.1 만세운동을 초래했습니다. 놀란 일본 정부는 3대 총독으로 해군출신 사이토 마코토를 임명했고 사이토는 문화통치를 표명하는 제스처를 취했습니다. 같은 정부에서 임명한 총독이지만 그의 통치에 대한 조선과 대만 식민지인들의 반응은 크게 달랐습니다. 얼마나 관용적인가에 따라서 식민지인들의 반발과 순응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바닥에 놓인 농구공을 막대기로 세게 칠수록 탄력으로 튀어 오른 막대기는 공을 친 사람의 머리를 더 강하게 때릴 것입니다. 일본제국은 스스로 조급하게 자멸의 길로 들어섰던 것입니다.




로마도 영토가 넓어지고 부유해져 대제국의 틀을 갖추기 시작하자 초기의 개방과 관용의 정신을 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애석한 일입니다.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이 원로원에 의해 무산되고 형제는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도 있었습니다. 관용의 정신으로 기초를 다져가던 로마는 대제국으로 성장해 갔지만 관용을 정신을 상실한 로마는 점점 쇠퇴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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