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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강물처럼 Sep 07. 2023

자식의 - 자식을 위한 - 자식에 의한

난생처음으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지어보고 있는 중'이라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 농사를 짓고 보니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의미가 전과 다르게 느껴집니다. 농사는 건강과 직결되는 먹거리를 생산해 내는 일이라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이므로 힘들고 고되지만 나 그리고 다른 사람이 먹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일이니 거룩 거룩한 일입니다. 그러나 완전 초보라서 본의 아니게 야생동물과 벌레들과 농작물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살충제 농약을 치지 않고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으니 동물들도 건강에 좋은 유기농 작물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신기한 것은 동물들이 유기농 농작물을 신기하게도 잘도 찾아낸다는 것입니다. 어찌 알고 우리 밭에만 오는 걸까요. 화가 나기도 하지만 애초 계획대로 울타리 치지 않고 그냥 지켜볼 참입니다.


고추 농사를 지어보니 참 많이도 달리대요. 꽃이 피면 어김없이 그 자리에 가지가 휠 정도로 열매가 많이 열립니다. 자주자주 따 주어서 클 놈이 크도록 해야 하는데 여럿이서 양분을 나누어 먹으니 크게 자라지는 못했습니다. 단순한 진리를 몰라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智不是道지불시도( 앎이 곧 도는 아니다)'를 생각했습니다. 개수에 대한 욕심으로 '道'에서 멀어진 탓입니다.


건강하게 잘 자라던 것들이 붉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중장년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성인병이 찾아오듯이 고추도 그런가 생각했습니다. 괜스레 감상적이 되어 잠시 흐느적대기도 했습니다. 노사연 가수의 노랫말처럼 삼라만상이 '늙어가는 게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것'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후대에게 물려주고 떠나는 게 삶의 순리이지만 누구나 병들지 않고 떠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늘로 돌아가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잘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세운 작전은 바로 이 겁니다. 붉어진 후 병이 들기 전에 고추 딴다. 작전계획에 따라 약 이십일 동안 매일마다 따서 건조기로 말려 열다섯 근 고춧가루를 만들었습니다. 전문가 농부라면 사십 근은 넘게 수확했을 농사입니다. 반타작도 못했지만 건강한 먹거리를 내 손으로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내심 크게 감동했습니다. 방앗간 고추 빻는 기계에서 가루가 되어 나오는 붉은 가루가 슬롯머신에서 잭팟이 터져 나오는 동전처럼 보이는 환상에 빠진 듯했습니다. 건강해서 달랑 삽자루 하나 들고 농사지을 수 있어서 좋고 밭일한 만큼 더 건강해졌으니 좋고, 반타작도 못했지만 생산량보다는 감동량이 더 커서 크게 실망도 하지 않습니다.  남는 장사한 셈입니다.




소중한 이 고춧가루를 아들네와 딸네에게 보낼 참입니다. 봄에 농사 시작할 때는 아이들이 야채는 안 사 먹어도 되도록 유기농 먹거리를 공급할 생각이었지만 서툰 농사로 고춧가루 말고는 보낼 게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반씩 나누어 보내고 우리는 다른 데서 고춧가루를 구입해서 먹을 겁니다. 고추를 다듬고 말리면서 부모에게 자식이란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뜬금없이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이  1863년 11월 게티즈버그에서 한 명연설이 생각났습니다.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   일국의 대통령은 '수신제가치국'의 지도자이지만 저는 평범한 백성이니 '수신제가'까지가 저의 의무이자 권한입니다. 링컨이 말하는 정부는 저에게 가족이며 가정입니다. 그래서 'people(국민)'을 'son과 daughter(자식)'로 바꾸어 제 마음대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자식의 농사

사람의 일생은 농사로 시작해서 농사로 끝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가정과 가문의 토양에서 자라남과, 또 부모가 되어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을 농사에 비유하여 '자식농사'라고 합니다. 자식농사를 잘 지으면 집안이 흥하게 되고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보편적 사회문화입니다. 시골길을 지나다 보면 '(축) 아무개 아들 000. 00 국가고시 합격' 류의 현수막을 볼 수 있습니다. 훌륭한 아들을 두었으니 동네 수호신 느티나무에 현수막을 걸어 성공한 자식농사를 세상에 알립니다. 저에게는 현수막을 붙일 일은 없었던 아들 딸이 있습니다. 반듯하게 자라서 제 앞가림하고 잘 어울리는 배필을 만나서 단란한 가정 꾸리고 총명한 아들을 하나씩 낳아서 잘 살고 있는 아들 딸이 있으니 저도 자식농사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자식을 위한 농사

제가 짓는 농사는 국가경제발전 기여와는 애당초 거리가 멀고, 가계에 보탬이 될 생산도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농사의 목표가 건전한 소일과 건강 다지기와 가족먹고 친지들과 나눌 먹거리 생산에 있으니 농약과 제초제를 사용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독성이 없으니 땅을 파면 지렁이가 보이고 풀밭에는 개구리가 뛰어다니고 제초제 뿌린 밭에는 뱀이 오지 않는다던데 때로는 뱀도 보입니다.


자식 농사를 지었으니 이제는 밭에서 청정하게 농사지은 것을 자식에게 나눠주는 농사로 <자식농사 시즌2>를 시작한 것입니다. 자식농사 시즌2는 투사의 개념이 적용된 것 같습니다. 직장 다니랴 아이들 건사하랴 발을 동동 구르며 뛰어다니던 30여 년 전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을 또 어떤 이는 부를 이루기 위해 바닥 고생을 하던  자신의 과거의 고난을 자신의 자식들에게서 보게 됩니다. 이때 부모라면 특히 우리나라 부모들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열정이 발동합니다. '부모의 신화'를 이루려는 열정입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부모가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신은 도처에 있을 수 없어서 대신 어머니를 보냈다'는 유태 격언을 보면 인간세상 어디서나 부모는 신화의 주인공인가 봅니다.


자식에 의한 농사

자식 농사로 평생을 일관한 부모의 신화도 부모의 노쇠와 더불어 빛을 잃기 시작합니다. 잔고는 빈약해집니다. 건강이 여의치 못하면 이제는 자식이 부모 농사에 나서야 할 때가 됩니다. 자신의 노후 대비를 철저히 해두어도 결국 실행자는 자녀 이어야 하므로 자식에 의한 부모 농사가 불가피합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람은 누군가의 돌봄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를 돌보아야 하게 됩니다. 부모 자식 간의 돌봄이 주고받는 거래관계의 의무성을 띤 것은 아니지만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변하고 있으므로 농사처럼 여겨지던 부모자식 간의 돌봄 관계에 대한 새로운 질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자식농사라는 말은 서서히 사라지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자신을 희생해 가며 평생 자녀에게 아낌없이 내어주며 신의 역할을 하던 부모의 신화는 빛을 잃어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빛을 잃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옳을지도 모릅니다. 부모의 신화는 성인이 된 자녀에게도 언제나 경제적 지원을 해주고 정서적 지지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른 집 부모는 자식이 원하는 것 다해주는데 나는 내 자식에게 그렇게 못해주었으니 죄스럽다는 마음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물어보지 않고 낳았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인생백세시대를 말한 지가 불과 10년인데 이제는 인간 수명 120년도 가능하다는 얘기들이 심심찮게 들립니다. 어떤 이는 130년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농사 방식도 이제 새로운 정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수명이 길어지면 거기에 비례해서 서로에 대한 농사짓기 기간도 길어지게 됩니다. 매정하지만 각자도생의 길로 들어서야 하는 시대가 시작돼야 할 것 같습니다. '각자도생 + 더 깊은 사랑'으로 말입니다.


고추를 다듬고 건조하면서 이런 부모의 모습이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정한 말이지만 이제 부모와 자식 간에도 '각자도생'의 전략이 필요한 미래가 가까이에 와 있는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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