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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강물처럼 Nov 21. 2023

자유란 무엇인가? - 4

벼룩처럼...  코이처럼...


 



신장이 170 센티미터인 사람이 땅 위에서 기구의 도움 없이 15층 빌딩 옥상으로 뛰어오르기란 불가능합니다, 영화 속의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이라면 모르겠습니다만. 15층 빌딩 옥상으로 뛰어오른다는 것은 건물 1개 층높이를 3미터라 칠 때 자신의 키 170센티미터의 27배에 달하는 45미터 높이를 맨몸으로 도약하는 일입니다.


곤충으로서 자신의 키의 27배를 도약할 수 있는 곤충이 있습니다. 바로 벼룩입니다. 뛰어봤자 벼룩. 벼룩이 간 내먹기. 벼룩이 낯짝. 속담의 내용을 보면 벼룩은 인간과 함께 지내며 살아왔고, 크기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고, 뛰어오르는 천부적 재능이 탁월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높이뛰기 천재 벼룩의 천부적 재능을 없애는 방법이 있습니다. 벼룩이 뛰어오를 수 있는 높이보다 낮은 높이의 상자에 상자 안에 벼룩을 넣습니다. 벼룩은 뛰어오르다가 상자의 뚜껑에 부딪혀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합니다. 수없이 뛰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상자의 뚜껑을 제거하면 벼룩은 이제 뚜껑이 있었던 높이까지만 뛰어오르지 처음에 뛸 수 있었던 높이까지 뛰어오르지를 않습니다. 뛰어봤자 장애물에 막혀 마음껏 뛸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더 낮은 높이의 상자 안에 벼룩을 넣어두면 벼룩의 도약 능력은 또 더 떨어지게 됩니다.


'코이'라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비단잉어의 종주국인 일본의 니가타현에서 관상용으로 길러낸 품종이라고 합니다. 코이는 작은 어항에서는 5~8㎝, 큰 수족관이나 연못에서는 15~25cm에 불과하지만, 강이나 호수에서는 90~120㎝ 크기까지 자랍니다. 사는 곳에 따라서 피라미가 될 수도 있고 대어로 자랄 수도 있습니다. 코이는 환경에 맞추어 성장억제 호르몬 분비를 조절할 수 있어서 사는 곳에 맞추어 자신의 몸 크기를 조절합니다. 누울 자리 보고 발을 뻗을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과 같은 물고기입니다.




상자 안의 벼룩. 좁은 어항 속의 코이.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입니다. 능력껏 도약할 수 있는 공간과 타고난 크기대로 자랄 수 있는 강물이 그들에게는 자유입니다. 사람도 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므로 타고난 시간과 공간이 '운명'이 됩니다. 때로는 운명이 자유와 반대말이 됩니다. 自由의 '由'자는 말미암을 '유'입니다. 내 생각과 내 생각에서 비롯되는 행동이 나에게서 말미암은 것, 비롯되는 것이니 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운명이 된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나의 자유로운 생각이 나의 운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의 운명은 나의 자유의지에 의해 만들어지는 운명입니다. 내 생각대로 즉 내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자유는 생물체에게는 공기와 물과 같습니다. 미국의 독립운동가였던 패트릭 헨리의 명언 '나에게 자유를 달라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은 인간에게 자유는 공기와 물과 같다고 말함과 같습니다.


그러나 보통 우리가 말하는 '운명'은 타고난  '八字'입니다. 타고난 운명 때문에 자신의 마음에 품은 것을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것은 환경에 맞추어서 그냥 살아가는 것이며  '정해진 운명대로 살아주는 것'입니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조르바는  "인간이라뇨? 그게 무슨 말입니까"라는 두목의 말에 "자유. 자유라는 거지요."라고 대답합니다. 조르바에게 인간과 자유는 동의어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나름의 100% 능력을 타고났지만 팔자소관이라는 '환경'의 영향으로 10% 능력도 발휘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서자로 태어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고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없었던 소설 속의 홍길동. 여자이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없도록 한 게르만족 프랑크 왕국의 살리카 법. 능력이 없어도 가문의 권세로 과거를 치르지도 않고 벼슬을 살 수 있게 한 조선시대의 음서제. 할 수 있어도 할 수 없고 할 수 없어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게 환경입니다. 생각의 크기를 변화시키면 자신이 발휘할 능력과 꿈의 크기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항 속의 코이가 강물에 사는 코이가 되듯이 말이지요. 지금까지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주변 환경을 바꿔야 합니다. 가장 먼저  한다. 환경에 따라 미래가 바뀌기 때문이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비슷한 말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분노와 고집은 자존심의 외피입니다. 반면 자존감은 자신감과 자기애의 표현입니다. 타인에 대한 사랑은 자존감에서 비롯됩니다. 자존심은 나를 숨기고자 하는 마음이지만 자존감은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자존심은 나를 부정하지만 자존감은 '나는 나다'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자존감은 자신의 환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거나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결국 자존심은 자신을 적으로 삼고 자신을 공격하지만 자존감은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고  그 기운은 세상을 향하게 됩니다. 자존감의 기저에는 자유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신 앞에서 인간은 '뛰어봤자 벼룩'입니다. 그래도 도약하려 기를 쓰면 코이처럼 큰 물에서 큰 물고기가 될 수 있습니다.




손발이 묶인 사람이 묶은 밧줄을 풀고 자유를 얻고자 할 때 묶은 밧줄이 일순간 동시에 훌훌 벗겨지지는 않습니다. 손을 묶은 밧줄이 조금이라도 느슨하면 그 틈새를 이용해 오랜 시간 바닥에 밧줄을 문질러 닳게 하고 손목을 비틀고 비틀어 틈을 점점 넓혀 갑니다. 손목에 피가 나고 손톱이 빠지더라도 밧줄에서 손목만 빼내면 발을 묶은 밧줄도 손으로 풀 수 있습니다. 일단 손발이 자유로워야 감옥의 쇠창살을 자를 수 있고 간수에게서 열쇠를 빼앗을 수도 있습니다. 감옥을 벗어나야 담장을 넘든지 땅 밑으로 굴을 파든지 할 수 있습니다.


르네상스는 정신문화의 암흑기로 치부되던 서양 중세기의 감옥에서 인간성이 해방된 때입니다. 476년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로마제국 영토가 쪼개지면서 지역 간 나라 간의 분열과 분쟁으로 구심적 역할을 하는 어른이 필요했습니다. 정신적 지주랄까요. 교황과 기독교의 절대적 영향력으로 유럽사회는 성서와 기독교 율법과 종교의식이 모든 것에 우선하였고 왕들도 가장 두려운 것이 교황으로부터 기독교 울타리 안에서 쫓겨나 파문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교황그레고리 7세와 대립하다가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했습니다. 그는 교황이 있는 카놋사 성 밖 눈 밭에서 사흘을 무릎 꿇고 빌고 나서야 용서를 받았습니다. '교황은 반짝이는 태양이며, 황제는 그 빛을 받아 겨우 빛을 내는 달과 같다.'라고 말하는 시대가 바로 중세시대였습니다.


그리스 로마시대의 자유로운 정신세계와 아름다움을 표현하던 예술정신은 유폐되었습니다. 팔등신의 <밀로의 비너스>는  검은 옷을 입고 은둔해야 했습니다. 거인 골리앗을 상대하러 나가는 물맷돌을 어깨에 맨 소년 다윗이 옷을 벗고 세상에 나타나기까지 천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된 <밀로의 비너스>와 피렌체 미켈란젤로 박물관의 <다비드상>


하늘을 찌르던 교황의 권세가 지는 태양처럼 빛을 잃게 된 역사적인 분기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200년간 지속된 십자군 원정이었습니다. 실패로 끝난 전쟁의 중심에 있었던 교황도 그 권위를 잃어가게 되었습니다. 중세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는 데도 정신을 속박하던 모든 굴레가 하루아침에 훌훌 벗겨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얼음 밑을 흐르던 계곡의 작은 물줄기가 훈풍을 만나 큰 물줄기를 이루고 물줄기들이 만나 도도한 강줄기를 이루어내니 말 그대로 '사상의 흐름(思潮)'이 되어 한 시대사조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도시마다 나라마다 교회와 봉건제가 크고 작은 도미노 칩이 되어 속절없이 쓰러지고 쓰러뜨리고 쓰러진 자리에는 화려하게 르네상스의 꽃이 피었습니다. 유럽에서의 자연과학을 중심으로 한 12세기 르네상스, 인문과학을 중심으로 한 14~16세기 르네상스는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유럽이 갑자기 낳은 ‘만능 천재’는 아니었습니다. 이 불세출의 인물은 그냥 천재가 아니라 시대의 자유물결 속에서 거대한 물고기로 자라날 수 있었던 '코이'였습니다. 만일 다빈치가 중세기 중에서 칠흑의 밤 시기를 살았던 인물이라면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과 같은 걸작은 태어날 수 없었고. 메디치 家의 후원과 말년에 만난 프랑스 국왕 프랑수와 1세의 후원이 없었더라면 다빈치는 평범한 화가로 살고 말았을 것입니다. 메디치와 프랑수와 1세는 다빈치가 거대어 '코이'로 자랄 수 있는 물결이 되어주었습니다.




인간사는 우연으로 가득합니다.

프랑수와 1세 이전의 선왕 루이 12세는 영국의 헨리 8세의 여동생 메리와 결혼하였으나 메리보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결혼 후 몇 달 만에 죽고 말아 왕위를 이을 후사가 없었습니다.  여성이 왕위를 이을 수 없다는 <살리카 법>의 전통 탓에 사위인 프랑수와가 왕이 되었습니다. 악법이 르네상스라는 꽃에 거름이 된 것이기도 합니다. 아이러니컬한 일입니다. 프랑수와는 왕이 되어 클로뤼세 성을 내어주며 다빈치를 프랑스로 초빙하여 다빈치가 숨을 거둘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이탈리아人 다빈치의 걸작 <모나리자> <세례자요한> <성 안나와 성 모자> 등의 걸작품이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된 연유입니다. 학문을 사랑하고 자유정신을 가진 휴머니스트였던 메디치와 프랑수와 같은 인물이 없었다면 서양의 중세는 더 오랜 세월을 어둠 속에서 방황하였을 것입니다.


역사는 아이러니의 전시장입니다.

중세 암흑기는 르네상스라는 꽃이 필 수 있는 휴식의 밤이었고, 요구르트 같은 발효식품이 탄생할 수 있는 밀폐된 용기()였습니다. 날이 밝기 직전이 가장 추운 법입니다. 암흑의 중세는 '神바람'이 난무하는 가운데 증명 불가한 신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논리를 펼쳐가는 가운데 신학과 철학과 과학이 정교하게 다듬어진 시대이기도 합니다. 여명의 시대라는 근대의 합리적 이성의 씨앗이 뿌려진 시대였습니다.


대나무가 큰 키에도 부러지지 않고 수십 미터 길이로 자라는 것은 중간중간에 생긴 마디 때문입니다. 역사는 암흑의 시기를 지나면서 고대와 근대를 이어주는 마디를 얻었습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옵니다.

'나에게 자유를 달라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패트릭 헨리의 절규가 메아리치는 아침입니다.



       아침 이미지 

                                              

                                              박남수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어둠은 온갖 물상(物象)을 돌려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屈服)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들은 몸을 움직이어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지상(地上)의 잔치에

금(金)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開闢)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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