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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강물처럼 Dec 03. 2023

아부지요 오겡끼 데스까

ㅡ춘래불사춘

1912년-1959년=47년

1959년-2006년=47년

1912년생인 아버지가 47세가 되는 1959년에 아들을 낳았으면 그 아들이 올해 65세가 됩니다. 1959년생인 아버지가 47세가 되는 2006년에 아들을 낳았으면 그 아들이 올해 고등학교 1학년 학생입니다.



앞의 나이 계산은 저의 아버지가 저를 낳으신 실제 나이 계산이고, 뒤의 계산은 제가 저의 아버지처럼 47세에 아들을 낳았을 때를 가정한 계산입니다. 제가 47세에 아들을 낳았으면 65세 된 지금 저는 고등학교 1학년 학부모가 됩니다. '젊은 오빠'식의 표현으로 할아버지가 형용사로 붙는 '할아버지 아버지'가 되겠지요. 저의 맏형님께서는 1935년생이시니 24살에 아들 같은 막냇동생인 저를 만나셨습니다. 형수님께서는 시집오셨을 때 막내 시동생인 제가 기저귀 차고 뽈뽈 기어 다니고 있었노라고 지금도 가끔씩 놀리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늘 책을 가까이하시며 (요즘으로 말하면) '인문학' 공부하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내셨습니다. 유머러스한 성격에 어머니에게 장난도 많이 치시고 로맨티스트 기질도 다분하신 분이셨습니다.



2002년 돌아가시던 해 12월 초에 고향으로 찾아뵈었더니 눈을 감고 벽에 기대어 앉아 계시다가 잠시 저의 인사를 받고는 다시 눈을 감고서 혼잣말로 뭔가를 암송하시는 듯했습니다.



-아부지요. 뭐하시니껴?

-'춘래불사춘'이란 구절이 갑자기 생각이 났어. 고맙지(생각이 나줘서). 그거 잊어 뿌까 봐 계속 말하는 게래.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힘이 들어 눈을 감고 있는 게 편하다는 '노인'에게서 기억의 한 자락이라도 붙들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느껴져 콧날이 시큰했습니다. '춘래불사춘'이 삶의 끈이라도 되는 양 그걸 놓지 않으려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12월이 되면 봄이 아닌데도 '춘래불사춘'이 떠오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 여섯 넷, 자식 막내인 저에게만 '춘래불사춘'을 따로 유산으로 남기고 가셨습니다. '춘래불사춘'은 왕소군을 읊은 시구이니 아버지는 저에게 절세미녀 왕소군도 남겨주고 가셨습니다.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자연의대완(自然衣帶緩)
비시위요신(非是爲腰身)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저절로 옷 띠가 느슨해지니
가는 허리를 위함이 아니로구나

               - 동방규의 詩 소군원(昭君怨) 中 일부


말을 타고 흉노(훈족)의 땅으로 원하지 않는 시집을 가는 여인의 아름다움에 하늘을 날던 기러기도 넋을 잃었습니다.  날갯짓을 잊어버려 땅에 떨어졌습니다. 기쁨에 찬 얼굴보다는 슬픔에 찬 얼굴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법이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는 말인가 싶습니다.



유방이 세운 한나라의 9대 황제인 선제 때입니다. 흉노족 왕 호한야 선우(呼韓耶 單于)가 한(漢) 나라를 방문했다가 돌아가기 며칠 전에 한나라 황실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고 선제에게 요청을 했습니다. 흉노를 오랑캐라고 무시하는 한나라이지만 막강한 세력을 가진 흉노족 왕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보내기는 해야겠는데 오랑캐와 사돈이 되기는 꺼려지는 일이어서 자신의 후궁들 중에 하나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평소에 수많은 후궁들을 하나하나 기억하지 못하는 황제는 화공 모연수(毛延壽)에게 후궁들의 얼굴을 그려서 가져오게 한 후에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드는 후궁을 골라 그날 밤을 함께 보내곤 했습니다. 대면 면접이 아니라 서류전형으로 하는 선발이었습니다.



황제는 이번에도 모연수가 그려서 바친 그림을 보고 흉노족 왕에게 보낼 후궁을 선택하고자 했습니다. 먼 곳으로 보내도 아깝지 않을, 다시 보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을 하나를 골랐습니다. 그래서 선택된 후궁이 왕소군이었습니다. 황제는 흉노 왕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날, 왕소군을 불렀습니다. 거친 땅으로 보내는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위로의 말과 한나라를 위해 당부하고 싶은 말을 일러두고 싶었습니다.



왕소군을 본 황제는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왜, 어쩌다가, 무슨 이유로~ 이 여인을 이제야 만나게 되는가~ 흉노 땅으로 가는 왕소군을 본 기러기가 날갯짓을 잊어버리기에 앞서 황제가 먼저 날갯짓을 잊어버린 기러기가 되었습니다. 땅을 치고 후회한들 이미 늦었습니다. 마음이야 왕소군 대신 다른 후궁을 보내고 싶었겠지만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그렇게 되면 황제의 체면이 말이 아닌 게 되니 어쩔 수 없이 보내야 했습니다.



황제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은총을 받아 왕자를 생산하면 권세가 하늘을 찌르게 되니 후궁들은 화공 모연수에게 뇌물을 써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주기를 부탁하는 게 다반사였습니다. 황제를 모시는 후궁 팔자도 뒤웅박 팔자였던가 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왕소군은 뇌물을 쓸만한 재력이 없어서 모연수의 미움을 샀습니다. 모연수는 왕소군을 평범한 모습으로 그린 데다가 얼굴에는 미운 점까지 찍어 놓았습니다. 열다섯 살에 입궐해서 삼 년이 지나도록 황제의 총애는커녕 용안 한 번 뵙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모연수를 불러들여 조사를 한 황제는 자초지종을 알고는 모연수를 참형에 처해서 울분을 풀었습니다.


 

시인 동방규가 전지적 시점에서 왕소군의 원망의 마음을 시에서 절절이 표현하고 있으니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으니 봄은 왔건만 봄 같지 않구나 저절로 옷 띠가 느슨해지니 가는 허리를 위함이 아니었구나'라고 읊은 이가 동방규가 아니라 왕소군이라고 받아들여 보는 것이 시인에 대한 최고의 예우이자 왕소군의 운명을 슬퍼하는 정서를 더욱 고조시켜 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장안의 황궁에서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며 기화요초와 아름다운 새소리와 더불어 살다가 마른 하늘을 나는 기러기의 구슬픈 소리가 들리는 곳, 말발굽에 뽀얀 먼지 이는 북방으로 가는 길목에 선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웠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황량한 벌판을 가야 하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원망과 한이 차오른 여인의 몸이 여위고 약해져 허리띠가 느슨해질 정도이니 얼마나 비감했겠습니까. 자신의 비통한 마음을 달래려 비파를 꺼내 들고 '흉노의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못하겠구나'하고 노래하니 처연한 노랫소리와 노래하는 여인의 아름다움에 함께 가던 사람들은 넋을 잃었습니다. 하늘을 날던 기러기도 날갯짓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기러기가 떨어졌다는 뜻을 가진 '낙안(落雁)'이 왕소군의 별명이 되었습니다. 중국인들의 과장이 지나칠 정도인 것은 알지만 왕소군의 기러기 고사(故事)는 과장이 아니라 실제임을 믿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듭니다.




자신을 그린 모연수의 그림 한 장 때문에 운명이 바뀐 왕소군은 돌아올 기약 없는 곳으로 떠났지만 역사기록을 두고 생각해 보면 '흉노의 땅'으로 간 왕소군은 오히려 더 행복했을 삶을 살았으리라 생각됩니다. 문화민족임을 자처하여 중국 이외의 사방의 민족을 오랑캐로 불렀던 중국인들의 오만과 우월감이 현대적 기준으로 본다면 더 오랑캐스러웠습니다. 유교의 영향을 적게 받았으며 여자가 귀한 유목민족의 땅에서 왕소군은 중국 황궁에서의 삶보다 더 인간다운 삶과 지도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왕소군이 중국의 황후가 되어서 누렸을 권세보다도 흉노족 선우의 부인으로서 더 큰 권세를 누렸다고 합니다. 오만한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오랑캐' 땅으로 간 왕소군은 불쌍한 여인이었지만 정작 왕소군 본인은 흉노의 땅에 살면서 '시집 잘 간 여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왕소군을 데려간 호한야 선우는 50대 중반의 독신이었으며 왕소군은 선우의 공식적인 부인이 되어서 유교적 사회인 중국에서의 황후보다도 더 큰 권한을 가졌습니다. 혼인 후 3년 만에 호한야 선우가 사망하였고 호한야 선우 전처소생인 아들 복주루가 왕의 지위에 해당하는 선우의 자리를 물려받았습니다. 유목민 전통에 따라 왕소군은 복주루 선우의 청혼을 받아들여 흉노의 땅에서 일생동안 두 남자의 여인이 되어 살았습니다. 이상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나 당시 유목민들의 전통으로는 혼자가 된 여인을 보살피는 것이 큰 미덕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왕소군은 죽은 후 흉노의 땅에 묻혔고 무덤에는 '청총'이라는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푸를:청 / 무덤:총 '청총(靑塚)'입니다.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겠구나~ 한탄했던 왕소군을 위로하듯 푸른 풀이 돋는 무덤이라는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저의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호한야 선우에게로 시집간 이후의 왕소군의 삶에 대해서도 알고 계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모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즘처럼 이런 이야기를 쉽게 찾아내기 어려운 시절을 사셨던 분이셨으니까요. 살아 계실 때 47살 차이가 나는 막내아들과 왕소군의 <시즌2:흉노의 왕비 왕소군>의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좀 더 자주 찾아 뵙고 좀 더 많은 추억을 만들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제가 막내라서 불쌍하다시던 우리 어머니는 "니는 우리를 많이 못보잖아. 그래서 안됐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부모님 살아실 제 섬기기란 다 하여라' 선인들의 가르침이 가슴에 사무치는 12월입니다. 아버지~ 그립습니다.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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