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쯤 손가락을 칼에 베어 본 적 있으시겠지요. 신경이 통증을 느끼기 전에 손가락을 스치고 지나갔던 금속의 느낌. 뒤이어 찾아오는 예리한 통증. 붉은 피를 보았을 때의 공포심. 이런 기억 때문에 다음부터는 칼을 조심하게 됩니다. 말 때문에 힘들었던 적도 있으시겠지요. 내가 남에게 했건, 남이 나에게 했건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들도 칼입니다. 촌철살인의 말은 몇 마디의 말일 뿐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할 때가 있습니다. 한마디 말에 천하를 다 얻은 듯 기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죽음도 불사할 만큼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 말하지 말 것을. 그 사람이 나한테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이런 생각으로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운 적도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고통이란 필요악입니다. 몸으로 느낀 고통이나 마음으로 느낀 고통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고 기억조차도 하고 싶지 않지만, 그 고통과 기억 때문에 흉한 물건을 보면 조심하고 또 말이 칼이 될 수 있음을 알고 말을 아끼게 되니 한편으로는 없어서도 안될 것이 고통이 아닌가 싶습니다. 진통제는 아픈 상처의 고통을 없애줍니다만 이미 시작된 아픔을 달래줄 뿐입니다. 그러나 한번 겪어본 아픔은 진통제가 아니라 백신입니다. 그 아픔이 백신이 되어 똑같은 아픔을 두 번 다시는 겪지 않게 해주는 방어기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기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기심은 양날을 가진 칼과 같습니다. 한쪽 날로는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고 또 한쪽 날로는 사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니까요. 신약성서 야고보서에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욕심을 잉태하는 것은 '선한' 이기심이 아니라 지나친 이기심입니다. 지나친 이기심에서 나온 과욕 때문에 남의 것을 취하고 남을 다치게 하여 죄가 됩니다. '나 혼자 잘살자고 이러는 줄 알아. 다 같이 살아야 할 것 아닌가.' 까지는 그래도 봐줄 만합니다. 왜냐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선한 이기심은 이기의 행위가 나를 위한 것으로 끝나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준다면 자기의 이익을 도모해서 남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게 바로 악성 이기심입니다. 몇 년 전부터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내가 부동산을 하면 자본주의 경제의 꽃인 투자이고 남이 하면 경제교란사범인 투기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면 법규운전이요, 남이 하면 얌체운전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면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고 남이 하면 인신공격 범죄행위를 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동식물의 약육강식의 세계는 인간세계와 사뭇 다릅니다. 동식물은 살아남기 위한 생존기술을 유전적으로 타고납니다. 칡은 어마어마한 힘으로 넝쿨을 뻗어 나무든 전봇대든 높은 곳으로 칭칭 감고 기어오릅니다. 그리고는 제일 양지바른 곳을 점령하고는 넓적한 잎을 펼치고서 나무를 몇 년 내에 죽게 만들고 맙니다. 카멜레온은 몸 색깔을 주변환경에 맞게 수시로 바꾸면서 먹이를 잡아먹고 살아갑니다. 만일 사람이 칡과 카멜레온처럼 살아간다면 그는 이기적인 인간이 아니라 범죄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부부가 주유소에 들어왔습니다.
주유하는 직원이 서비스 차원에서 차의 앞 유리를 닦아주었습니다. 차에 타고 있던 남편은 차 유리가 제대로 안 닦였으니 한 번 더 닦아달라고 했습니다. 직원은 아무 말 없이 다시 한번 더 닦았지만 운전자는 닦으려면 제대로 닦지 오히려 유리에 얼룩이 졌다며 짜증을 냈습니다. 그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아내가 남편의 안경을 벗기더니 안경을 휴지로 깨끗이 닦아서 남편에게 다시 주었습니다. 남편은 깨끗한 유리창을 보고서는 자신의 안경이 더러웠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내로남불'은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시작되는 이기심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누구나 세상을 바라보는 각기 다른 마음의 안경을 쓰고 삽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고 듣고 싶은 것을 들으면 좋아합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하고 세상도 그렇게 돌아가주기를 바랍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기심은 도덕과 윤리와 공감의 고삐를 벗어나게 됩니다.
이기심은 나를 지키려는 방어기제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이 경우의 이기심은 말 그대로 나를 이롭게 하되 남을 위해하는 행위가 없는 때에만 국한됩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자기의 목숨을 보존하고 죽기 전에 자기의 후손을 생산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능은 유전자에 기록된 특정 생물종의 고유한 행동양식입니다. 살아남기 위한 생존기술과 삶에 대한 집착도 유전자 속에 들어있는 정보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에게 집중해야 하는 것이지 나를 버리고 남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정보는 유전자 속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도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이기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정도가 심하면 지탄받을 일이 되겠지만 자신을 위하는 행위를 두고 손가락질을 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좋게 말하는 사람은 신뢰하지 말라'는 영국의 교육자 콜린즈의 말은 이타적인 면만 보이는 사람은 사실은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말과 상통합니다. 악인조차도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평판을 걱정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며 남을 위하는 모습만 보이려는 사람은 우리와 같은 범주의 사람이 아니라 성인의 반열에 든 사람일 것입니다.
착취당하는 민중들의 응축된 울분이 폭탄이 되어 공산주의는 짧은 기간에 폭발적으로 지구상 수많은 나라의 통치이념으로 수용되었고 착취당하던 백성들 뿐 아니라 수많은 지식인들의 정신세계를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나 1917년 세계최초로 러시아가 공산혁명에 성공하여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을 수립한 이후 한 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지구상에서 퇴장해 버렸습니다. 자본주의 정신을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고 이념 간 대립을 하였으나 자본주의는 아직도 건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세를 점점 더하여 '브레이크 없는 벤츠'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의 실패와 자본주의의 흥성은 인간의 본성인 '이기심을 제대로 이해하였는가'의 문제입니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군주론>에서 '아버지의 죽음은 쉽게 잊어도 재산의 상실은 쉽게 잊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지주와 탐관오리들이 행한 '내가 노동한 것'에 대한 착취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반드시 반란이나 혁명을 불러왔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나 러시아혁명과 중국의 신해혁명 등 모든 혁명은 굶주린 민중들의 내 것을 내놓으라는 '순수한 이기심'에서 시작한 정정당당한 당위행위였습니다.
사진출처 - 중국의 명차(名茶)7~안휘성:⑩육안과편, (황..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1978년 공산주의 치하이던 중국 안휘성(安徽省) 샤오강(小崗)의 인민농장 20 가구의 주민들은 해마다 소출이 적어 배가 고팠습니다. 11월 어느 날 밤 주민들은 몰래 집회를 가졌습니다. 농장을 세대별로 나누어서 경작을 하여서 생산량 중 국가가 할당한 양을 헌납하고 나머지는 개인별로 나누어갖는다는 결의를 했습니다. 국가에 대한 반역행위에 해당하므로 발각이 되면 큰 처벌을 감수해야 할 모험행위였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발각이 되면 나머지 세대들이 그 집의 아이들이 18세가 될 때까지 책임을 진다는 내용도 합의사항에 들어있었습니다. 그다음 해부터 소출은 그 전해 소출량보다 훨씬 많은 양의 쌀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영어 속담 Everybody's business is nobody's business(공동의 책임은 무책임)이라는 말의 현장이 바로 과거의 인민농장이었습니다. '기약 없는 내 것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은 농민들의 생산욕구를 일깨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생산한 것은 헌납량을 제외하면 모두 내 것이라는 생각이 공산혁명 이전의 농사열정을 다시 불러일으켰습니다.
샤오강 농장 사람들의 몸에 살이 붙고 얼굴이 펴지는 걸 주변에서 알아서인지 비밀은 새나가고 말았습니다. 당국에 고발하기보다는 주변 인민농장에서도 하나둘 샤오강의 반역사례를 '성공사례'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국가에서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최고 권력자는 작은 거인으로 알려진 덩샤오핑이었습니다. 그의 흑묘백묘론(黑猫白描論)은 안휘성의 사례로 시작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고양이가 흰둥이든 검둥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되듯이,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중국 인민의 배를 불리는 게 제일이라는 그의 정치철학은 신장이 152센티미터 남짓한 그를 작은 거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개인보다는 국가 우선, 국가보다는 당(黨)이 우선인 공산국가가 당보다는 인간의 이기심이 흑묘백묘론의 주인공이라는 걸 인정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분양 후 10년이 지난 같은 아파트 단지 내의 두 집을 비교해 보면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집주인이 10년 동안 살고 난 뒤의 집과 셋집으로 10년이 지난 뒤의 집은 많이 다릅니다. 내 소유물을 내 것으로 아끼는 마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문제는 내것은 아끼면서 남의 것은 함부로 다루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내 것을 아끼고 남의 것도 귀한 줄 아는 사람은 사회인으로 직장인으로 성실할 것이고 애국심 또한 강할 것입니다.
공기업(公企業)은 중앙정부 또는 지방정부가 출자의 주체가 되어 설립되었거나 지분이 대부분 정부에게 속해 있는 기업을 말합니다. 출자금이 세금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경영과정과 실적이 국정감사의 대상이 됩니다. 만일 공기업의 영업손익이 적자일 경우에는 채권 발행을 통해서 부채를 돌려 막다가 결국에는 국민의 세금인 공적자금이 투입됩니다. 공기업의 특성상 국민들을 대상으로 낮은 요금을 책정해야 하고 사기업이라면 외면할 분야에도 투자를 하여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므로 사기업만큼의 이익을 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직원들의 연봉과 복지에 무리한 지출을 한다든지 불필요한 인력을 채용하는 등의 방만한 경영은 지탄받아야 할 일입니다. 여기에서도 자신의 재산은 소중다고 하여 높은 연봉을 바라겠지만 적자운영으로 국민의 세금을 축내는 것은 이기적인 행위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因緣(인연)의 '緣'자는 '가장자리:연'입니다. 옷의 가장자리 즉 옷깃을 스치는 정도의 작은 것도 인연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은 참으로 정이 많은 민족입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 간에도 나이와 출신을 물어서 금세 형님 동생으로 호칭이 바뀌고, 식당에 가면 식당 직원을 이모 삼촌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정겹게 느껴지고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그러나 이런 민족성에는 '제 식구 감싸기'나 집단이기주의와 같은 위험성도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한 때 세간에 유행했던 '우리가 다리가(우리가 다른 편이 아니지 않은가)'라는 말속에는 '나와 너' 보다는 '우리'일 때 더 안정감과 안전함을 느끼는 정서가 숨어 있습니다. 집단이기주의는 집단에 속한 각각의 '우리'들의 이기심을 합한 것이라기보다는 각각의 목적들의 합이므로 그 방출 에너지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개인의 이기적 행위에서는 보기 어려운 '극단의 선택적 행위'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집단이기주의는 이익집단이라는 괴물을 낳습니다. 2023년 8월에 개봉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으로 모든 건물이 무너진 가운데 혼자만 우뚝~ 살아남은 '황궁아파트'의 주민들이 집단이기주의가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평소에 황궁아파트를 후지다~라고 무시하던 드림팰리스 아파트 주민들에 대한 잠재된 복수심이 탈출구를 얻음과 동시에 평소에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살던 주민들이 재난상황에서 한 덩어리로 뭉칩니다.
무한경쟁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는 이기심을 승리의 제1의 전략으로 삼기 십상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갈등의 원인은 모두 이기심의 문제입니다. 부의 불균형, 세대 간 갈등, 성별 간의 갈등, 국가 간의 무한경쟁 등입니다.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연인도 이성으로서의 갈등을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남자는 금성인, 여자는 화성인이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이기심으로 지지고 볶는 지구인들이 정녕 하나가 되는 방법은 외계인을 만나 우주전쟁을 할 때뿐인 것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