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살림살이 대부분을 정리했다. 참 오랜 세월 싸안고 다녔던 책들도 함께 정리했다. 그때 살아남은 책들 중에 최명희 작가님의 “혼불”이 있다. 10권 중에 1판 1쇄도 있는 걸 보면 나와 참 오랜 세월 함께 익어가고 있는 책이다.
“매달 『혼불』 연재 기다리는 재미에 감옥 한 달이 어찌 가는지도 모른답니다. 피로 찍어 쓴 듯한 문장 문장에서 뿜어 나오는 기(氣)가 제 몸속 옛 기억을 짚어내는 순간 불덩이처럼 솟는 시의 영감에 한동안 눈을 감고 얼어붙곤 합니다.”
박노해 시인이 최명희 작가님의 『혼불』 연재를 기다리며 쓰신 말씀이다. 그러면서 밥 꼭꼭 드시고 잠 편히 드시고 정말 건강하셔야 한다고 부탁을 한다. 어떤 책이기에 세상 풍파 다 겪은 시인 박노해를 얼어붙게 하는 것일까? 어떤 책이기에 ‘대하소설’도 아닌 ‘대하예술소설’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일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아름답고 슬펐다. 아름다워서 슬펐다. 아니 슬퍼서 아름다웠나? 책을 읽다보면 눈이 아니라 가슴에서 뚝뚝 눈물이 떨어지곤 했다.
일제 강점기인 1930~1940년대 남원 지방을 배경으로 하는 이 책은 우리네들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매안 이씨’ 문중에서 무너져 가는 종가를 지키는 종부 3대 그리고, 이씨 문중의 땅을 부치면서 살아가는 거멍굴 사람들. 신분제가 혼란한 그 시기였지만 여전히 신분제가 남아서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는 않으나 너무나 선명한 구분이 있었다. 누구도 쉽게 넘어설 수 없는.
“혼불”을 읽으며 대부분의 독자들은 양반 사회를 지켜나가려는 청암 부인이나 효원의 삶을 조명한다. 혹은 치밀하게 묘사된 평민과 천민의 고난과 애환을 애닯게 지켜보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한 여인 ‘강실이’에 참 많이 눈이 갔다. 양반집 아씨인 그네는 거멍굴 상민인 춘복이에게 겁탈당해 첩 아닌 첩으로 살아가고 있다. 돌아갈 수도 없고, 이곳에서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나약하고 여린 ‘강실이’가 너무 아팠다.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그네의 삶이 너무 아팠다.
어쩜 이렇게 섬세할 수 있을까? 우리 말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끼게 해 준 이야기책이다. 우리 민족의 관혼상제 등 당시의 풍속사를 잘 그려내고 있고, 인물 개개인의 심리 묘사도 참으로 절묘하다. 그러니 대하예술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이겠지.
오늘밤은 핸드폰을 잠시 내려놓고 원고지 한 칸 한 칸 작가의 혼을 불어넣은 아니 새겨넣은 혼불을 내 마음에도 지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