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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편선 Oct 24. 2023

우리 가족, 정치해주세요

현명하셨던 할머니를 추억하며...

‘관계’라는 말은 그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말이다. 딱 붙어 있다면 굳이 관계라고 이름 붙일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 거리를 인정하지 못해 괴로운 경우가 참 많다. 부모가 자식에게 요구하는 거리와 자식이 부모에게 원하는 거리가 같지 않다.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원하는 거리도 서로 같지 않다. 때론 너무 가까워서 때론 너무 멀어서 아플 때가 많다.





지난 일요일에 가족들이 모여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아버지 생신을 며칠 당겨서 주말 모임을 하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침부터 편찮으시다며 아침밥도 안 드신다. 분명히 어제저녁에 누구누구가 오고 밖에 나가서 식사할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당신 듣고 싶은 대로만 들으시고는 아침부터 역정을 내신다. 엄마가 가정 안에서 중심을 잡고 계실 때는 아버지와 우리 사이에 약간의 삐걱거림이 있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엄마의 부재(엄마의 치매)가 참 크게 느껴졌다.  





할머니 생각이 났다. 우리 할머니는 참 고우셨다. 이름(김 반월, 반달)도 얼굴도 마음도 참 고우셨다. 물론 우리 엄마에게는 여느 시어머니처럼 쉽지 않았겠지만, 손녀로서 보는 우리 할머니는 정말 최고였다. 어린 시절에는 그냥 모든 걸 다 받아주시는 할머니가 좋았는데, 자라서 보니 우리 할머니께서 정치를, 집안 정치를 참 잘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딸 셋, 아들 둘을 두셨다. 당신 자식 다섯에 일찍 부모를 잃은 조카들을 함께 키우셨다고 한다. 그래서 할머니 생전에는 오촌 고모들이 친정을 찾아오듯 자주 우리 집을 찾아오기도 했었다. 우리 엄마에게는 시어머니인 할머니가 마냥 좋지 않았을 테고 그 관계에 대해서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손녀의 입장에서 보는 우리 할머니는 참 멋진 분이었다. 할머니로서도, 시어머니로서도.



 내가 국민학교, 중학교 시절에 방학이면 서울과 천안에 사는 사촌들이 놀러 오곤 했다. 할머니 입장에서는 가끔 보는 손주들이 얼마나 귀하고 사랑스러우셨을까? 그렇지만 할머니는 항상 함께 사는 우리를 먼저 챙기셨다. 사촌들에게도 잘해주셨지만, 결코 함께 사는 우리를 섭섭하게 하지 않으셨다. 그렇기에 우리 엄마도 조카들을 진심으로 챙기셨다. 도시 애들 왔다고 반찬 하나라도 더 챙겨서 올리셨고, 그 밥상에는 진심과 사랑이 담겨 있었다.



 


할머니는 가끔 오는 고모들이나 작은아버지 앞에서도 결코 큰며느리 흉을 보지 않으셨다. 항상 우리 큰며느리 같은 사람 없다 하셨다. 그래서인지 우리 작은엄마는 평생 손윗동서인 우리 엄마에게 “형님, 이게 아니고, 저렇게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라는 식의 말씀을 안 했다. 고모들도 “우리 언니, 우리 언니” 하면서 친정에 오면 부엌부터 들어가서 함께 일을 했다.





그 시절. 아버지는 조합장 일을 하시며 집안일을 잘 돌보지 못하셨다. 엄마와의 갈등도 꽤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는데, 그 말도 할머니의 정치에는 통하지 않았다. 아들 편을 들지 않고 아버지를 나무라셨다. 그렇게 할머니에게 한바탕 꾸지람을 듣고 안방으로 들어오는 아버지를 보는 엄마는 어쩌면 잔소리할 분량의 일정 부분을 그렇게 덜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힘든 시절을 잘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그 시절 나의 일기장을 보면 곳곳에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보인다. 그런데도 내가 참으로 행복하고 편안하게 그때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할머니의 정치 때문인 듯싶다. 오롯이 사랑만 주셨던 할머니가, 가족 간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 주신 할머니의 정치가 그리운 주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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