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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편선 Sep 03. 2023

듣지는 못해도 말할 수 있어 다행이다. "사랑한다"라고

오랜 병원 생활 중인 남편에게 쓰는 편지

여보야!

요즘 글 모임에서 글쓰기를 하고 있는데, 오늘의 글감이 가족에게 편지 쓰기야.

그러고 보니 우리 여보에게 편지를 안 쓴 지가 꽤 된 것 같아 미안해지려고 하네.

오늘 모처럼 당신에게 편지를 쓰면서 우리의 추억도 한번 꺼내보아야겠어. 



당신에게는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당신을 처음 봤을 때, 첫사랑을  본 것 같았어. 

지나고 생각해 보니 전혀 닮지 않았는데, 난 그때 가슴이 철렁했잖아. 

그때 우리는 함께 할 시간이  많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그래도 인연이었던지 처음 만나고 일 년 정도 지났을 때는 부부가 되어 나름 알콩달콩 달달한 신혼을 보내고 있었지. 

 


당신은 참 자상한 사람이었어. 

난 경상도에서 20여 년을 살아서인지 경상도 사람들의 그 무뚝뚝함이 정말 싫었는데...

충청도 사람인 당신은 결혼 전에도 헤어질 때면 집까지 바래다주고, 또 잘 들어갔냐고 꼭 전화해 주고(그땐, 핸드폰도 없었던 때였는데)

우리 여보 목소리가 엄청 멋있잖아. 

어쩜,,,난 당신의 목소리에 반했잖아.



당신은 내가 좋아하던 노래를 다운받아서 밤새 반복해서 틀어주기도 했었지. 아마 그 노래를 수백 번쯤은 들었을 거야. 요즘이야 검색만 하면 바로 들을 수 있었지만, 그 시절엔 어디 그랬나.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뭐 그런 시대라 노래 한 곡 다운 받으려면 몇 분이 걸리고, 영화 한 편 다운 받으려면 밤새 걸리던 때었잖아. 전화가 걸려 오면 통신이 끊기고 말이야. 



그래도 당신은 내가 말만 하면 밤잠 안 자고도 찾아주었었지. 난 말만 해놓고는 꿀잠을 잤어. 자다가 잠깐씩 깨어보면 당신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내가 해달라는 걸 하고 있곤 했어.



여보야,

4년 전 당신이 쓰러지던 날은 정말 두려운 날이었어. 그때 우리 관계는 썩 좋지 않았었지. 그맘때쯤 난 항상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 당신에게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래서 더 두렵고 미안했어. 

내가 당신에게 너무 스트레스를 준 건 아닐까? 그래서 당신이 쓰러진 건 아닐까? 하고.



하지만, 그날 이후로는 한 번도 당신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어. 나 때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너무 미안했고, 또 때론 하루하루가 버겁기도 했지만, 당신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라. 

뭘까? 이런 마음은. 

가끔 주변 사람들은 그런 말도 해. 

차라리 이혼하면 이런저런 혜택이 많아서 여러 가지로 도움이 많이 될 거라고.

그래. 그럴지도 몰라. 그게 현명한 방법일 수도 있어. 그런데, 난 내가 감당하고 싶더라고. 당신의 외로움을 내가 가장 잘 아니까. 



여보야, 

요즘 당신을 생각하면 너무 속상해. 

밥을 못 먹고 콧줄을 끼고 생활한 지가 어느덧 10개월 정도가 되었잖아. 핼쑥해지니 젊은 시절 얼굴이 나오면서 오히려 잘 생기긴 했지만, 먹는 즐거움을 못 느끼며 살아가는 당신을 생각하면 맘이 너무 아파.



그리고, 당신과 전화할 때 들려오는 주변의 소음도 날 속상하게 해. 

당신이 병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해서 나를 힘들게 할 때는 그저 잘 적응해 주기만을 바랐는데,

요즘은 소음 때문에 편히 잠들지 못할세라, 소음 때문에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할세라 걱정이 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그렇네.



그래도 하루에 두세 번씩 전화해 줘서 고마워.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도 꼬박꼬박 전화해 줘서 고마워.

병원 생활 초반에 통화를 할 때는 당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엄청 답답했었는데, 

참 신기하게도 이제는 당신 목소리만 들어도 어떤 기분일지 알 것 같아. 



당신은 나에게  "사랑한다" 말로 하지 못하지만 

내가 하루에 두세 번씩 당신에게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

당신은 나에게  "사랑한다" 말로 하지 못하지만 

당신도 매일 나에게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거  맞지? 



여보야, 

우리의 동행. 힘들지만 함께 가보자. 

그 끝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걸어가 보자. 


"사랑해."








코로나 이전 병실에 자유롭게 드나들 때, 매일 스케치북에 써서 줬던 편지.

사실 이때는 남편이 글씨를 읽을 수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몰라서 사진을 붙였다. 

이 편지를 쓰려고 '핸드폰 사진인화기'도 샀다. 

이때만 해도 당연히 남편이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코로나 이후 병원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주일 치의 편지를 써서 일주일 치의 간식과 함께 입구에 맡겨놓고 오곤 했다. 





남편의 병원 생활은 현재 진행형이다. 

4년 6개월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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