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는 아주 안 좋은 습관 하나가 있다. 회사 일처럼 무조건 꼭 해야 하거나 과제처럼 마감이 정해져 있는 일이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일을 미루고 미루다 안 해버리는 것이다. 사실 뭔가 해야지 마음을 먹으면 실제로 하기 전에 이렇게 저렇게 해야지 나름의 계획을 세워두긴 한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한 번 돌려놓고 이렇게 해야지 마음만 먹고 정작 차일피일 미루다 안 하는 게 문제지.
이쯤 되면 안 꺼내면 섭섭한 웹소설 쓸 때도 그랬다. 뒤 내용을 어떻게 써야지, 어떤 사건을 넣어야지 이런 걸 다 짜놓고 쓰기만 하면 되는 상태로 만든다. 그리고 안 쓴다. 개발자 시절에 토이 프로젝트를 계획할 때도 그랬다.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가미해서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야지. 계획 열심히 짜고 시뮬레이션해서 손가락만 움직이면 되는데 안 했다.
하면 금방 할 수 있는데 대체 왜 이렇게 미루다 안 하게 되는 건지 나조차 내가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았다. 1차원적으로 생각했을 땐 그냥 게으른 한량이라 그런가 싶다가도, 정말 그렇게 게을렀으면 애초에 할 생각도 안 하고 어떻게 할지 계획도 안 짜지 않았을까 싶다. 매번 나의 슈퍼 파워 방패가 되어주는 에너지 레벨이 낮아서 그런 걸까? 근데 또 쉬다 에너지 돌아왔을 때도 별로 하고 싶은 마음은 안 들던데.
이것도 저것도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어디선가 풍문으로 들었던 게으른 완벽주의자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했다. 완벽하게 만들고 싶은데 그럴 능력이 없거나 투입해야 할 노력이 너무 많으니까, 완벽하게 만들 수 없는 상태에서는 시도를 안 하거나 미루는 성향이라는데. 얼추 나와 비슷한 면이 있긴 했다.
뭔가를 실제로 착수해서 완성한 후에 마음에 들기보다는 안 들었던 적이 더 많긴 했으니까. 근데 기준도 빡세고 기대도 컸던 웹소설 쪽을 제외하면 그냥 했다는 것에 의의를 둔 적도 많긴 했다. 토이 프로젝트 같은 경우에는 그냥 개발하고 만드는 것 자체가 재밌을 때도 많았다. 돌아가기만 하면 만족하고 끝! 외치고 해방되기도 했다. 뭔가 반만 맞고 반만 틀린 느낌.
혼자 생각해서는 답이 안 나오니 AI에게 문제를 던져서 의견을 구해보기로 했다. 사실은 물어봐도 완벽주의 성향으로 인한 문제라는 답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 보여서 대화할 가치가 있을까 했는데. 답변으로 생각 못했던 게 튀어나왔다.
계획은 다 짰는데 실행을 안 하고 계속 미루다 포기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AI는 여러 가능성을 말해줬다. 1번 이미 다 준비된 일은 긴장이 안 생긴다고 한다. 준비가 안 된 일은 불안하고 걱정되니까 오히려 더 생각하고 시도하는데, 이미 준비가 다 돼서 하기만 하면 되는 일은 말 그대로 하기만 하면 되니까 긴장할 일이 없고 위험도가 낮다. 이 말은 자극이 없고 급하게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는 뜻도 됐다. 이 말을 보고 뭔가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미친 도파민 중독 인간이라서 미리 준비된 건 도파민이 안 터지니까 안 한다는 거잖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일리가 있었다. 맨날 도파민 콘텐츠 쫓아다니는 것만 봐도 도파민 중독자라는 타이틀을 떼기 어렵긴 하고. 그러고 보면 간혹 뭔가를 할 때 그냥 한 방에 끝내버리거나 별 텀 없이 했던 일들의 경우를 보면, 딱히 계획 없이 그냥 냅다 질러서 했던 경우가 많았다.
브런치에 에세이 쓰는 것도 막 떠오른 거 글로 막 휘갈겨서 옮길 때는 금방 해치우고 끝내는데, 제목 정도로 글감만 적어두고 나중에 틈나면 써야 했던 건 한참을 미루다 겨우 쓰거나 여전히 안 쓴 채 서랍에 있다는 걸 보면 정말 명확한 진단이 아닐 수 없다. 뭘 할 때 계획하고 시뮬레이션하는 버릇을 좀 버려야 하나. 그럼 그냥 좀 해. 가 될 것 같기도 하고?
처음으로 이야기해 준 이유가 너무 강력하게 나를 때려서인지 다음으로 나열된 것들에는 큰 감흥이 없었다. 언제든 할 수 있고 꼭 지금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미루는 것일 수 있다거나 완성 후 결과가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으니 피하는 거라거나 통제감을 잃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일 수 있다거나.
진부한 이야기 끝에 진부한 해결법도 소개됐다. 동기 부여를 하는 건 나한테 안 통하는 전략이니 처음부터 끝장 보려고 하지 말고 그냥 가볍게 살짝 손만 대라는 것. 언제든 할 수 있다는 조건을 버리고 제약을 걸어야 하니, 공개적으로 선언해서 할 수밖에 없게 만들 거나 알람 같을 걸 활용하라는 얘기도 있었다. 또 계획은 해뒀고 하기만 하면 금방 해치울 수 있다는 걸 장점이 아니라 제약으로 쓰라는 소리도 있었다. 어차피 빨리 끝낼 수 있으니까 지금 당장 해치워버리자 이런 식으로?
사실 별로 와닿거나 활용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들었다. 전에도 AI가 소개해 준 해결법이란 것들을 몰라서 안 썼던 게 아니니까. 딱히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 다만 다른 힌트는 얻었다. 아직 시뮬레이션을 돌리기 전, 무계획 상태로 무작정 덤벼서 일을 시작할 것. 뭔가를 하고 싶어졌을 때 미루지 말고 그냥 바로 시작하고 시도해서 할 것.
어쩐지 몰랐던 나에 대한 사용법을 발견한 것 같다. 뭔가 안 미루고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잘해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꼭 해야만 하는 일이 나한테 있나? 생기려나? 하면 없을 것 같긴 하다. 그런 스트레스 요소 다 치워버리고 차단한 상태니까. 그래도 뭐 언젠간 생길 수도 있겠지. 당장 쓰지 않더라도 대처법은 많이 알아두는 게 좋은 거니까, 이번 AI와의 대화는 꽤 유익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