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와 함께 우울감과 충동을 느끼고 나는 내가 우울증인가 보다. 그런 정도의 감상을 가지고 살았다. 다만 딱히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여기진 않았는데, 아주 어릴 땐 그냥 생각이 없었고. 정신과에 대한 그저 그냥 있는 거부감과 좋지 않은 인식도 한몫했다. 후에 거부감이나 인식이 옅어진 후에도 갈 생각을 딱히 하지 않은 건 이미 만성화돼서 익숙해진 탓도 있지만 효과가 있겠나?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울감도 사람이 가진 감정 중 하나고 나한테는 익숙하고 친숙하기까지 한 감정인데, 그게 약을 먹는다고 해서 완벽히 제거되거나 사라지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다. 물론 그저 내 생각일 뿐 이게 옳다는 건 아니다. 약을 먹으면 우울감이 좀 적어지거나 일시적으로 완화되긴 하겠지만 결국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무엇보다 하도 자주 드는 감정이고 익숙한 감정이다 보니 이제 그리 불편하게 느껴지지도 않았고, 필요하다면 좀 치워내거나 환기하는 방법도 꽤 알게 된 것 같다. 내 경우엔 그냥 그런 우울감이나 생각을 다른 생각이 덮어버리거나 아예 노래나 콘텐츠 소비 등으로 등 돌려버리는 방법을 쓴다. 어쩔 땐 그냥 혼자 아 신난다 기분 좋다 그렇게 세뇌하는 게 통하기도 한다.
사실 딱히 치료하게 될 거란 생각은 안 들지만, 효과가 있으려나 실험하는 마음으로 정신과에 가본 적이 있긴 한데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건 아니고. 최근에 꽤 흥미로운 글을 읽고 내가 정말 우울증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돼서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봤던 글은 요즘 우울증 양상의 이야기였는데, 흔히 우울증이라고 하면 좌절하고 절망하고 침잠해 늘어지는 모습을 떠올리는데. 요즘 흔한 우울증의 형태는 비교적 조용하고 침착하고 겉보기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경우가 많단다. 다만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게 어떤 것에도 별 의욕이 없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즐거운 것도 없고. 삶이 엄청난 고통은 아니고 그럭저럭 잘 굴러가지만, 그렇다고 행복이나 즐거움도 없는 형태.
딱히 주변과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무난하지만, 힘든 일이 있을 때 털어놓을 사람은 없다. 정확히는 털어놓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거다. 힘든 얘기 해봐야 듣는 사람도 같이 힘들어질 뿐이고, 해결이 되는 것도 없는데 민폐라는 생각. 결국 혼자 버티는 것에 익숙해진다.
하루하루 그냥 버텨내듯 시간을 흘려내고 살고. 당장 죽어도 아무런 미련이 없고 그냥 그러려니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스스로 죽을 생각은 딱히 없는 상태. 이게 요즘 흔한 우울증의 형태라고 했다. 지금 내 마음 상태와도 같아서 꽤 흥미롭게 읽었고 나와 비슷한 사람이 많은가 보다 그런 생각을 했다.
양상 이야기 말고도 왜 이런 사람이 많은지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 있었다. 감정을 표출하지 않고 억제하고 통제하다 보니 감정에 대해 무뎌져서 그렇단다. 의욕이 생기려면 즐거움을 느껴야 하는데, 그 즐거움마저 억눌려 표현되지 않다 보니 즐거움이 뭔지 모르는 상태가 되고 그렇게 의욕 상실로 이어진 거라고. 의욕이 없고 즐거움이 없으니 살 이유가 딱히 없고, 그러니 당장 죽어도 그러려니 하는 상태가 됐단다.
맞는 말 같았다. 내가 거쳐왔던 길 같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겸손해야 한다는 말을 지겹도록 들었다. 정확히 겸손이 뭔지 모르던 어린 시절의 나는 겸손을 좋은 일이 있어도 티 내지 않는 방식으로 행했다. 좋은 성적을 얻어도 그렇지 않은 친구들을 위해 자랑하지 않고. 갖고 싶던 물건을 가지게 됐을 때도 자랑하는 걸 수치스럽거나 불쾌한 짓으로 여겼다.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으로 기분이 나쁘고 상처받아도 티 내지 않고 웃어넘기는 일이 잦았다. 지적하고 불쾌감을 표하면 분위기가 깨지거나 싸움이 날 테니까. 학교를 떠나 사회에 나와서는 더 심했다. 문제아로 보이지 않기 위해 내 불쾌감을 누르고 숨기고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으니까. 부당하고 불쾌하며 이해가 안 되는 상사의 지시에도 찍소리하지 않아야 했다.
언제부턴가 좋든 나쁘든 감정을 표현하는 게 죄악시됐다. 그렇게 잘못된 해석과 사회의 요구로 감정을 누르고 숨기고 감추고 없는 것처럼 살다 보니 어느새 정말 그렇게 된 것 같다. 좋은 일이 있어도 딱히 즐겁거나 신나지 않고, 나쁜 일이 있어도 그냥 이미 벌어진 거 어쩌겠나 그렇게 흘려내게 됐다.
왜 이렇게 됐나 어느 정도 힌트를 얻긴 했지만,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됐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었다. 난 이미 감정을 느끼는 게 좀 망가진 상태니까. 억지로 끌어올려 별거 아닌 일에도 즐거워하고 기뻐하기에는 지치고 힘든 건 둘째 치고 오글거리는 느낌을 견디기가 힘들다. 그래도 참고 하다 보면 좀 나아지려나.
아무튼 현대 우울증의 양상 이야기를 보고 내가 든 생각은, 감정이 마모되고 억눌려서 무감정해지고 무기력해진 건데 그걸 우울증이라고 볼 수 있나? 였다. 무감정 무기력이 우울증의 대표적인 증상이라고는 하는데, 자의 타의에 의해서 무감정해지고 그래서 무기력해졌을 뿐이지 심각한 우울감이 꼭 따라붙는 건 아니라 우울증이라고 하기에는 좀 안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경우 때때로 우울감이 심하게 들 때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에는 그저 평온했다. 딱히 즐거운 것도 불행한 것도 없는 정도. 뭔가의 트리거나 사건으로 감정이 잠시 쏠릴 때도 있긴 하지만 일상적일 땐 그냥 평온했다. 물론 때때로 죽는 게 편할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해서 즐거운 것도 드문데. 살려면 돈 벌고 먹고 씻고 자고 귀찮고 번거로운 일들이 너무 많다. 살아서 좋은 것보다 귀찮은 게 많으니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편해지고 싶다는 게 솔직한 생각이다.
그냥 죽고 싶어 하면 무조건 우울증이고 삶의 의욕과 재미가 없으면 우울증이고 그렇게 치부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는 게 즐겁고 재밌는 일일 수도 있지만, 귀찮고 번거로운 일일 수도 있는 거니까.
우울감보단 무기력 무감정이 더 크니, 지금 내 상태는 우울증보단 무기력증 혹은 무감정증 쪽에 가깝지 않나. 그런 생각이다. 그리고 감정을 막 표현하고 표출하는 게 낯설고 거북한 나한테는 지금의 상태가 어쨌든 내가 원한 모습의 일종 같기도 하단 생각이다. 이러면서도 재밌게 살 수 있으면 좋으려나 그런 생각도 드는 걸 보면 사람 마음이란 건 참 복잡 미묘하다 싶다.
어딘가에는 사회가 원하는 평온함을 가졌으면서도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사람도 있겠지? 어쩌면 이렇게 시간을 흘려내다 보면 언젠가 나를 흥분시키고 즐겁고 신나게 만들 일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낙관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그런 일을 찾기 이해 적극적으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경험하고 싶은 마음은 딱히 없다. 귀찮고 번거로우니까. 그래서 이런 상태가 된 걸까?
더 나아가지 않고 안주한다. 지금 이 길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고, 뭐가 있는지 다 살펴봤고 아니까. 더 가면 좋은 게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쁜 게 있을지도 모르니, 나쁜 것도 좋은 것도 피하자. 지금 여기가 안전하고 편해. 어쩌면 결국 에너지와 체력 문제인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보면 지금은 잠시 쉬며 재충전하는 시간 같기도 하다. 충전이 되고 있는지 모호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어쨌든 큰 소모는 없다는 점에서 언젠가 길을 다시 나설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