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작가가 예전에 그런 말을 했더랬다.
문학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지껄이는 놈이 있으면 그건 개소리니까 당장 때려죽이라고. 문학은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서열의 문제라고.
'힘들게 살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
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대충 저런 요지의 말을 했었다. 문학은 개인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애초에 그런 기능이 있지도 않다고.
그런 말을 한 소설가를 나는 존경한다. 이 짝사랑에 가까운 감정은 작년 겨울 내무반에서 <하얼빈>을 읽고 시작되었다.
허나 문청文淸 -문인文人이라 자칭하기에는 심히 부끄러운 것이다- 이 되어 그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니 마음이 무겁다.
왜 어째서 나는 문학을 우상으로 여기고 있는가. 나에게 문학이란. 나이게 글이란 결국 황금송아지에 지나지 않았단 말인가?
젠장. 담배를 끊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어쩌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인가.
과학자를 꿈꾸던 소년이 소설가가 되기로 한 까닭은 무엇이었나.
돌이켜보니 나는 원체 느린 사람이었다. 배움에 있어서는 특히 그러했다. 한글을 뗀 것은 초등학교에 가서였고 나눗셈을 이해하지 못해 얼추 비슷한 숫자가 나올 때까지 몫을 곱했다. (119÷3을, 3×38 = 114, 3×39 = 117, 3×40 = 120... 이런 식으로 답을 찾았다.)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에야 나는 간신히 나눗셈을 알았다.
사춘기思春期, 봄을 생각하는 시기에 들어서 나는 꿈을 키웠다.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그냥 단순 노동자로 월급 받아먹으며 살기는 싫었다. 그건 아마 그 나이 때 소년 특유의 '나는 남들과는 달라'라는 망상에서 기인한 고집이었을 게다.
그 고집이 마냥 가볍지는 않았던가. 고집도 두꺼우면 신념에 가까운 절실함이 발하는 것인가.
기적이 있었다.
조롱과 비아냥이 일상이던 교실에서 나는 교과서 몇 권에 의지하여 전교권에 들었다. '의대입시반'을 기웃거리던 친구들과 성적으로 겨루기 시작했다.
조용할 날 없는 집구석.
간밤에 얼어붙은 수돗물과 얼음 깨려 내리치니 되려 제가 깨진 플라스틱 바가지.
벌벌 떨고 있는 나의 손은 새 빨겠다.
학교는 가야지.
나는 그 손으로 물티슈 몇 장을 꺼내 몸을 닦았다.
그리고 텅 빈 교실에서 책을 펼쳤다.
그런 열정이,
나에겐 있었다.
그럼에도 미소 짓던 내가 있었다.
변명이 기니 듣기 거북하다. 역겨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니 이제는 솔직해지자.
사실 맞다. 나에게 꿈은 곧 구원이었다. 우상이었고 숭배의 대상이었다. 아니면 강아지 꼬-추같던 삶의 도피처였거나. 하지만 역시 그건 구원이라 봄이 가장 정확하겠다.
이렇게 자랐어도 손에 쥔 펜에 의지한 채 하루하루를 불태우다 보면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나의 꿈은 그 믿음을 주었다. 무언가-, 여태껏 보이지 않았던. 남에게는 보이지 않는 빛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만 같았다, 아니지. 나는 분명 그 빛을 봤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갔던 날에.
동아일보 본사에서 어느 국립 과학연구소의 소장님과 연구원분들, 신문사 사장님과 장관 대리인을 만났을 때. 명문고라 불러 부족함이 없는 곳의 수재들과 한 자리에 서서 그들과 함께 꽃을 받았을 때.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희열이 꿈을, 제 자아의 실현을 이루었을 때라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가장 큰 절망은 비로소 꿈이 실패했을 때 느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고작 상패 하나 받았다고 달라진 것은 없었던 게다. 해서 여느 때와 같이 살았다. 살아버렸다. 독서실 옥상에 올랐다가 다시 계단에 쭈그려 앉아 질질 짜고만 겁쟁이는 탄약고 초소에서 차디 찬 K-1의 총구멍을 아갈창에 집어넣고 공포탄은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궁금해하다가도 끝끝내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아직 살아있다. 왜 나는 나를 죽이지 못했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왜 계속 쓰려고 하는가.
설마
행복이 이토록 절실한 것이었던가
나는 이제야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인정한다. 실패한 꿈. 꿈의 부재, 그 공백을 문학으로 메꾸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하필이면 문학인 이유마저도 지극히 이기적이다. 이런 거시기 같은 감정을 맘껏 지껄여도 터부시 되지 않는, 되려 더러우면 더러울수록 찬사 받는 정신 나간 영역이기에. 그래서 나는 수음행위와도 같은, 열등감, 고독, 상처, 결핍, 고통, 상실 따위를 주제로 천박한 글을 싸질러 온 것이다. 그렇게라도 계속 꿈을 품기 위해서. 문학을 사랑해서도 문예의 미를 추종해서도 아닌.
단지 꿈을 포기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가 인간이기를 실격한 채 살던, 그 비참한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부끄럼으로 얼룩진 인생으로 그 끝에 마침점을 찍기는 끔찍하리만치 싫어서.
그래서 꼴에 문인文人이라는 비원을 품었다.
그래서 산다.
그래서 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존경하는 작가의 말을 감히 긍정하고 싶지가 않다. 고작 글이지만. 고작 활자 뭉치에 지나지 않지만.
내게 글은 매춘에 가깝다는 것을 안다. 제 마음속 깊은 곳에 붕대로 꽁꽁 싸매두었던 속마음을. 그 속살을. 질 낮은 야설에서나 볼만치 거칠게 풀어헤쳐선 그대로 토정하니까. 그리고 저 혼자 몸 어딘가 시원해져선 녹록해진 그 몸을 침대에 눕힌다. 고작 이따위 저급한 일련의 행위가 나에겐 글쓰기의 전부다.
그러나 문학이 나를 구원했음을 어찌 부정할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살기 좆같다면서 왜 안 뒤지냐 라는 질문에 글을 쓰니까 혹은 글을 써야하니까라 답한다면.
이게 문학이 구원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구원이냔 말이다.
이만 글을 줄인다.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혀를 놀리자. 꼴에 글 쓴다며 비대해진 나의 에고에 전하는 일종의 부탁. 안그래도 두서 없는 글에 또 사족을 붙이자며는.
다음에는 조금 더 행복한 글을 쓰자.
다자이 오사무의 그림자에 갇혀서는 나 자신만의 글을 쓰지 못할 것 같다. 옛말에 고승이 되려거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 그랬다지 않은가. 적절한 예시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 망할 놈의 <인간실격>을 집어던져야 행복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부끄러운 삶을 살았지만,
그게 꼭 죽어야 할 이유는 아니지 않은가.
나는 요조가 행복할 수 있었다고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