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시적 기획과 미시적 조율이 만나는 지점에서 배운 것들
2012년에서 2014년 무렵, 저는 반도체 회사의 분당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곳은 계열사 사장단과 주요 임원진이 상주하던 공간이었죠. 저는 그곳에서 회장님의 비서 업무와 더불어, 당시 법인 물적 분할을 담당하던 전략기획팀소속으로 사무실 전반의 어드민(ADMIN)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전략기획팀이 치열한 숫자로 회사의 미래를 '예측'하는 곳이라면, 비서 업무는 그런 팀의 업무와는 조금 동떨어진 보조적인 일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공통분모라곤 없을 것 같은 이 두 세계를 오가며, 저는 비즈니스를 움직이는 거대한 축을 목격하게 됩니다.
당시 글로벌 경제 뉴스는 연일 '셰일 혁명'이라는 단어로 도배되다시피 했습니다. 미국에서 촉발된 이 에너지 혁명으로 국제 유가가 요동치기 시작했고, 전 세계 경제의 지각변동이 본격화되던 시기였죠. 그러던 어느 날, 회장님께서 제게 셰일가스 세미나를 신청해달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지시를 받자마자 제 머릿속엔 물음표가 가득했습니다. '우리 회사는 반도체 회사인데, 왜 땅을 파서 캐내는 가스 기술에 관심을 두시는 걸까?'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의문이 생겼습니다.
저는 곧바로 당시의 경제 상황과 셰일가스 관련 리포트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곧 제가 가졌던 의문이 얼마나 좁은 시야였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며 마주한 진실은 놀라웠습니다. 셰일가스 혁명은 단순히 '기름값이 싸진다'는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에너지 비용의 하락은 곧 글로벌 제조 원가의 하락을 의미했고, 이는 물류 비용의 변화와 미국 중심의 거대한 공급망 재편을 예고하는 강력한 신호탄이었습니다.
회장님의 시선은 반도체 공정이라는 미세한 단위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에너지 패권의 이동이 우리 회사의 제조 원가와 수출 경쟁력, 나아가 글로벌 팩토리의 입지에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지 미리 계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경제적 맥락을 스스로 찾아본 뒤에야, 저는 회장님이 가고자 하시는 세미나가 단순한 외부 일정이 아니라 미래 비즈니스의 지형도를 그리는 설계의 현장임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갓 입사한 신입사원으로 회장님의 단순 사무 보조와 팀 서포트 업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대내외적으로는 '비서'라 불렸지만, 본질적으로는 '팀 어드민'에 가까운 역할이었습니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본 전략기획팀장님은 달랐습니다.
당시 팀장님께서 대외적으로 회장님께서 본인을 Secretary 라고 소개하신다 하셨으니까요. 그때는 그 의미를 다 알지 못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팀장님은 단순한 행정가를 넘어 회장님의 의사결정 맥락을 완벽히 설계하는 분이셨습니다. 보스가 왜 이 주제에 관심을 두는지 파헤치고, 그 통찰이 전략기획팀의 보고서와 매끄럽게 연결되도록 정보의 흐름을 미리 세팅하는 것. 그것이 진짜 비서이자 설계자의 역할이었습니다.
전략기획이 숲의 전체적인 지형도를 그리는 일이라면, 비서는 그 숲을 걷는 리더가 길을 잃지 않도록 가장 효율적인 동선과 날씨의 변화를 미리 읽어내는 일입니다. 숫자로 증명하는 '기획'과 직관을 보좌하는 '의전'은 결국 최적의 결과물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든다는 점에서 완벽히 맞닿아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비서와 전략기획팀을 모두 떠난 지금도, 그때 배운 '설계자의 시선'은 제 커리어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눈앞에 주어진 단편적인 업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의문이 생길 때 그 이면의 큰 흐름을 스스로 찾아보는 문해력. 그리고 그 흐름을 나의 일상적인 프로세스 안으로 가져와 유연하게 조율하는 능력. 이것이 제가 정의하는 전문가의 역량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삶의 설계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처리하는 작은 서류 한 장, 무심코 넘긴 뉴스 한 줄이 어떤 거대한 서사와 연결되어 있을지 모를 일이니까요. 의문이 생긴다면 멈추지 말고 그 이면의 흐름을 찾아보세요. 생각보다 더 큰 세상이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도 오늘 하루, '왜?'라는 질문을 통해 자신만의 설계도를 그려나가시길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