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과 사유의 사이에서

삶의 균형

by 온길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2부에서
싯다르타는 매혹적인 여인 카말라를 만난 뒤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사실 하나를 인정하게 된다.


그렇다. 사고의 세계 역시 이편의 세계에 있었다. 때문에 감각이라는 허구적인 자기를 죽이고 사유와 학식이라는 또 하나의 허구적인 자기를 살찌운다 해도, 결국 아무 소용이 없었다.

두 가지 모두를, 다시 말해 감각과 사유를 모두 인정해야 했다.

이 두 가지 모두에 궁극적인 뜻이 숨어 있었다. 두 가지가 다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고, 직접 체험해야 했다. 어느 것도 과소평가되거나 과대평가될 수 없었고, 그 두 가지 모두로부터 가장 심오한 곳의 비밀스러운 소리들을 들어야 했다.
-『싯다르타』중에서


이전의 그는 감각을 저급한 것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몸이 느끼는 즐거움이나 기쁨은
내면을 흐리는 것이라고 믿었고,
사유와 고요만이 진리라고 여겼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깨닫는다.

감각 없이 사유만으로는 삶이 반쪽이 되고,

사유 없이 감각만으로는 방향을 잃는다는 것을.


감각은 지금을 느끼게 하고,

사유는 지금을 이해하게 한다.

둘은 서로의 반대가 아니라

서로를 완성시키는 축이었다.




그리고 이 장면이 유난히 마음에 오래 남은 이유는
싯다르타가 한때의 나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30대의 나는 사유의 세계에 더 기울어 있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눈 앞의 즐거움이나 감각적인 기쁨들을
조금은 조심스럽게,
때로는 죄스럽게 바라보던 시절.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내 마음의 순도를 검열하던 때였다.


그러나 자녀들을 키우는 동안

나의 세계는 조용히 다른 방향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감각으로 세상을 배우는 존재였고,

감각을 부정하는 순간

그들이 몸으로 부딪히며 성장해 갈 세상 또한

부정하는 일이 되어버린다는 걸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삶에는 어느 것 하나

터부시할 것도, 판단할 것도 없다는 것을.


감각도, 사유도

모두 ‘살아 있음’의 증거이며

서로가 서로를 밝혀주는 방식이라는 것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문장이 조용히 마음에서 빛을 냈다.


“나는 내 존재의 어두운 시간을 사랑한다.”



이 문장은
내 안의 흔들림과 그림자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태도이자,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는 고독한 사유의 시간을

스스로 사랑하겠다는 고백이다.


잠시 멈춰 서서
나의 안쪽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시간.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내가 어떤 방향을 향하는지,
오늘의 마음은 어디쯤 머물러 있는지를
조용히 확인한다.


그런 시간이 있기에
감각은 더 선명해지고,
삶은 다시 중심을 찾아간다는 것을
릴케 역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감각과 사유 사이에서
조용히 균형을 배우는 중이다.


감각의 즐거움을 기쁘게 받아들이되

그 속에만 머물지 않고,

사유의 고요를 소중히 여기되

스스로를 무겁게 만들지 않는 일.


어떤 날은 감각이 하루를 이끌고,

어떤 날은 사유가 생각을 정리한다.

둘은 서로를 침범하는 것이 아니라

내 하루를 완성하는 두 개의 리듬이다.


이 균형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내가 살고 싶은 삶이다.
나는 이 시간을 성장이라 부르고,

마침내 단단해져가는

성숙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소망한다.

오늘의 한 걸음이
내일의 나를
조금 더 균형 있는 자리로 데려가길.


감각과 사유가 서로를 흐리지 않고
내 삶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하길.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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