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에 머무르는 힘

by 온길

지난해 가을,
언젠가는 혼자 무등산을 걸어보고 싶다고
마음속에 조용히 새겨두었던 약속이 있었다.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무등산으로 단번에 가는 노선을 발견했던 그날이 시작이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마음으로
미루고 미루던 그 약속이
지난 주말에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버스에 몸을 싣는 순간,
내가 나에게 건네는 작은 도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렇게 안전지대를 조금 벗어나는 시도들이
결국 나를 믿게 하는 힘이 되어왔다는 것을
나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날의 산행은 시작부터 벅차고 조용히 행복했다.


매서운 바람이 오기 전의 가을이었다.
달큰한 공기가 스치고,
또렷한 단풍이 산을 채우며,
발밑의 낙엽은 얇게 바스락거렸다.


그 공간에 있음으로
마음속의 소리들이 조금씩 잦아들고
나는 자연스레 ‘지금, 여기’에 닿았다.


그때 문득 떠올랐다.
류시화의 『좋은지 나쁜지 어떻게 아는가』 속 문장.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사과를
마지막 사과인 것처럼 최대한 맛있게 음미하는 일이다.”


이 문장은

지금을 붙잡아 보라는 단순한 권유 같았지만,

눈앞의 순간을 어떻게 바라볼지의 태도를

생각하게 했다.


다음 순간은 약속되지 않았고,
어쩌면 우리는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경험하고 있는지도모른다.

그래서 사라질 것을 알면
아무 것도 평범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아슬아슬한 현존이
지금 이 순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그렇게 산에 머무르는 동안,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나의 오래된 질문에도
작은 답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지금, 여기'에 머무르는 일.

어쩌면 그 단순한 태도가
내 삶을 천천히 단단하게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결코 해가 떠오르는 것을 돕지 못했다.
하지만 해가 뜨는 현장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 아닌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중에서


그렇다.

그 순간,

나는 나로서 가을을 맞았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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