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일

업의 본질에 대하여

by 온길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를 연구한 일본 학자 기시미 이치로는
한 강연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간호대학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왜 간호사가 되려고 하나요?”


한 학생이 말했다.

“퇴원하는 환자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요.”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땐,
그저 한 간호대 학생의 맑고 순수한 마음이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고마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
자신의 손길이 누군가의 회복에 닿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은 충분히 따뜻했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바람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 말 속에 아주 작은 방향의 차이가 숨어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다는 마음은
분명 따뜻하지만,
그 중심이 아주 조금은
상대가 아니라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환자가 건강을 되찾는 순간 그 자체보다
그 순간에 내가 어떤 존재로 기억될지를
더 기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차이는 아주 작아 보이지만,
일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분명한 방향을 만든다.




새 학기를 앞두고 이 질문을 꺼내본다.


나는 이 일을 통해

나를 채우고 싶은 걸까,

아니면

이 일의 본래 자리를 지키고 싶은 걸까.


직업은 때로

자기만족의 통로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자신을 비워야만 온전히 설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간호사의 일은
감사를 수집하는 일이 아니라
회복을 돕는 일일 것이다.


‘고맙다’는 말이 없어도
환자가 걸어 나가는 모습만으로
충분히 의미가 되는 일.


아마 그 지점이
업의 본질에 더 가까운 자리일 것이다.





교사도 다르지 않다.

아이에게
“선생님 덕분이에요.”
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환해진다.


졸업한 아이가 찾아와
그때의 한 마디가 힘이 되었다고 말해주면
가슴이 오래 따뜻하다.


그 기쁨은 분명 귀하다.
그 순간을 애써 밀어낼 필요는 없다.


다만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물어야겠다.


나는 아이를 위해 가르치고 있는가,
아니면
아이를 통해 나의 가치를 확인받고 싶은가.


교사의 역할은
아이를 나에게 기대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으로 자라도록
곁에서 돕는 일이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상담에 있어서
“환자가 의존하게 하거나 무책임하게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상담의 목적은
내담자가 스스로 삶을 감당할 힘을 회복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 사람이
상담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언젠가는 잊어버릴 수 있을 만큼.


교사의 언어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아이가
“선생님 덕분이에요.”라고 말하지 않아도,


자기 힘으로 해냈다고 믿으며
자기 삶을 단단히 걸어간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교사가 느끼는 보람은
박수에서 오지 않는다.


마침내 물러나
아이의 뒷 모습을 바라볼 때,
그리고 아이가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순간을 만날 때,

그때 비로소
내 업의 본질이 또렷해진다.


붙잡는 일이 아니라
보내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새로 만날 아이들 앞에서,


내내 이 마음의 결을 따라
나의 말을 골라내고 싶다.


이 말이
아이를 나에게 묶어두는 말인지,
아니면
아이를 자기 삶으로 보내는 말인지.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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