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었던 거잖아.

by 온길


저녁을 준비하던 어느 날이었다.

둘째가 태권도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는데 평소와 달랐다.

인사도 없이 조용히 들어오더니 대답도 잘 하지 않았다.

씩씩거린다기보다는, 그냥 무겁고 꾸웅한 공기가 따라 들어왔다.

밥도 먹기 싫다 하고, 씻는 것도 귀찮다 했다.


사실 그날 나도 지쳐 있었다. 하루 종일 일에 치이고 몸과 마음이 모두 무겁던 날이었다.

그래도 아이의 기분을 풀어주려 몇 마디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응… 어…” 뿐.

답답한 마음에 결국 날카로운 말을 내뱉었다.


“왜 그래? 학원에서 평소보다 30분 더 늦게 끝나서 지금 엄마한테 짜증 내는 거야?”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전날 아이가 학원을 빠졌고, 그래서 오늘은 더 오래 공부하고 온 것을.

그래서 조금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네 몫이야. 어제 안 갔잖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었잖아. 어제 네가 한 선택에 대한 책임을 오늘 더 오래 공부한 것으로 진 거야. 인생이 원래 그래.”


아이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단호하게 말하는 동안 내 머릿 속에서는 아이가 학원에 있는 시간, 그리고 배도 고팠을텐데 끝나고 바로 태권도장에 갔을 상황들이 그려졌다. 그 순간,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그런데 넌 지금 화난 게 아니라
힘들었던 거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이의 눈빛이 바뀌었다. 아이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나는 천천히 아이에게 말했다.
“그래, 오늘은 화가 난 게 아니라 힘들었던 거야. 힘들 때는 가족에게 ‘이래서 힘들었어, 저래서 속상했어’ 하고 털어놓으면 돼. 엄마도 어제 너무 피곤했었는데 네가 어깨 마사지해 줄 때 스르륵 잠이 오더라. 그렇게 회복했어. 너도 가족에게 말하고 기대면 돼. 그게 가족이 있는 이유야.”


그제야 아이는 입을 열었다.

학원에서 늦게 끝난 것보다 태권도장에서 다른 아이가 떼 쓰는 바람에 경기를 못 하고 기다려야 했던 일이 속상했다고. 사실은 그게 제일 힘들었다고.

엄마한테 힘들었던 순간을 다 털어놓고, 울기도 하고, 함께 흉도 보면서 그렇게 아이의 마음은 제자리를 찾아갔다.



내 아이만 이럴까... 나 역시 내 감정을 제대로 모를 때가 많다.


화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피곤함이었고, 짜증 같았지만 서운함일 때도 있다.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내 마음의 평안을 되찾는 첫 걸음은 바로 감정 알아차리기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일은 나에게 한 가지 더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


감정을 다루는 방식은
아이의 기질에 따라 다르다.


어떤 아이들은 스스로도 정확히 감정이 뭔지 모른 채, 종알종알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오늘 이런 저런 일들이 있었는데, 이래서 짜증났고, 저래서 속상했고, 그래서 나는 이렇게 해 버렸어.”


이렇게 두서없이 쭉 말하다 보면 부모가 건네는 작은 피드백 속에서 자기 마음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차리고, 자연스럽게 위로를 받는다. 굳이 “이건 슬픔이야” 하고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말하는 과정 자체가 치유가 되기도 한다.


반면 우리 아이처럼 조용히 곱씹는 것이 편안한 아이들도 있다.

이들은 자기 감정이 명확해질 때까지 밖으로 내뱉지 않고 안에서 먼저 정리하고 싶어 한다.

이런 아이들에게는 믿을 만한 어른이 곁에서 “혹시 이런 마음이었을까?”, “화가 아니라 힘듦이었을지도 몰라” 하고 살며시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큰 힘이 된다. 그런 경험이 쌓일수록, 아이는 자기 감정에 확신을 가지게 되고, 스스로 감정을 익숙하게 다스릴 힘을 얻게 된다.


그래서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아이의 기질을 알아차리고 그에 맞게 곁을 지켜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아이에게는 차분한 경청자가 되어 주고, 옳고 그름을 평가하기보다는 “그랬구나” 하고 기다려주기.
조용히 곱씹는 아이에게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혹시 이런 마음이었을까?” 하고 감정을 짚어주는 적극적 경청자가 되어 주기.


그날 밤, 아이는 편안해진 얼굴로 잠들었다.
나도 마음이 고요해졌다.

이렇게 아이를 키우며, 나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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