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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틀리제 Sep 22. 2024

사연녀와 그녀의 수호천사들

10화 : 민정의 병원 탈출 미션(2)

악령을 퇴치한 후에도 민정은 한동안 텐션이 올라 씩씩거렸다가 이내 제정신을 되찾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녀는 방망이를 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에 이 손으로 방망이를 휘둘러 했던 짓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그렇게도 무시무시하게 생긴 악령을 직접 묵사발을 만들었다.


“크흠. 진정하자.”


그러나 분명히 방망이를 휘두를 때 민정이 느꼈던 것은 아주 환상적인 감각이었다. 그녀의 손과 머리를 짜릿하게 만들었다.


“이거 좀...재밌을지도?”


살짝 맛이 간 것 같긴 했지만, 겁먹고 아무것도 못 하는 것보단 나았다. 아까 전의 폭력도 결과를 놓고 보면 잘한 일이었고, 어차피 이 병원을 탈출하려면 그런 과감함이 필요했다.


“가자 빨리 다음으로.”


민정은 조금 씩씩해진 느낌으로 병실을 나섰다. 다음 목표는 202호였다. 일단 2층의 모든 병실을 돌아다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2호 안에는 테이블에 또 빛나는 쪽지가 있었다. 민정은 이제 좀 익숙하게 주변을 잘 살피며 쪽지에 접근했다.

잠깐 둘러보니 이번 병실은 구조가 좀 달랐는데, 침대가 두 개밖에 없고 공간에 여유가 많았다. 그에 의아함을 느끼며 민정은 쪽지를 살폈다.


- 일이 잘 되어갈 때도 어려움은 온다. 그때 오는 어려움이 일이 잘 안 될 때 오는 어려움보다 더 클 수도 있다.


“...”


민정은 쪽지의 내용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아주 직설적으로 난이도를 올리겠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래도 미션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격려이긴 했다.


또다시 삐용거리는 경망스러운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병실 문이 열렸고, 거기에는 아까 전에 쇠사슬에 묶여 있던 악령은 귀여워 보일 정도로 처참한 몰골의 악령이 있었다.

팔과 다리, 몸통과 얼굴이 있다는 것만 겨우 알 듯할 정도로 뒤틀린 몸으로 ‘바닥을 기어다니는’ 끔찍한 악령이었다. 점점 더 끔찍한 모습을 한 악령들이 등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악령은 쇠사슬에 묶여 있지가 않았다. 악령은 몸을 뒤틀며 느지막하게 민정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민정은 머리가 쭈뼛 서면서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방망이를 꽉 쥐고 뒤로 물러서서 침대를 앞에 두고 길을 막아서 악령을 상대하기 유리한 위치를 잡고 악령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악령은 매우 끔찍하게 생겼지만 자세히 보면 아까 전에 묶여 있던 것보다 약한 것 같았다. 외모가 괴상할 뿐 풍기는 위압감이 저번 악령보다 못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민정은 악령의 접근을 기다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마침내 악령이 공격 거리에 들어오자, 민정은 위에서 아래로 방망이를 크게 휘둘렀다. 


까앙-


그러나 방망이는 악령이 아닌 바닥을 때렸다. 악령이 몸을 틀어 민정의 공격을 피했기 때문이다. 민정은 극히 당황했다. 오히려 놈이 팔을 휘둘러 민정을 공격하려 하자 민정은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민정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병실의 다른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거기에 병실 입구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얼른 손전등으로 비추니 아까 전의 병실에서와 같은 악령이 병실 문에 똑같이 묶여 있었다.

민정이 기어다니는 악령을 피해 병실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길을 막은 것이었다. 기어다니는 악령을 먼저 처리한 후 입구를 막은 악령을 처리해야 병실을 빠져 나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기어다니는 악령이 민정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움직이는 건 상당히 느리지만 놈이 준비했던 공격을 피해버렸기에 민정은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사실 빗나간 첫 번째 공격은 놈이 피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약간 방심해서 살살 휘두르긴 했었다. 이제 제대로 최선을 다해서 휘두르면 분명히 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민정은 그렇게 마음을 먹고 또 한번의 기회를 기다렸다. 놈이 공격 거리에 다가온 순간 민정은 최대한 빠르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퍼억-


과연 민정의 생각대로 민정의 방망이는 놈의 머리에 직격했다. 똑같은 타격감에 민정이 희열에 찬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방심하지 말았어야 했다. 미소 짓는 민정에게 놈의 뒤틀린 팔이 날아들었다. 뭉툭한 팔이 민정의 왼쪽 다리를 때렸다.


“아악!!”


민정은 다리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엉덩이가 바닥에 세게 부딪혔지만 다리의 통증 때문에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녀는 빨리 도망가야겠다는 본능에 발버둥쳤지만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민정은 엉덩이를 끌어서 주저앉은 채로 겨우 악령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미션을 시작한 이후로 악령에게 처음으로 공격을 허용했다. 다리를 보니 피가 바지에 번졌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흐으윽...”


그녀는 눈물을 훔치면서도 다음 공격 기회를 기다렸다. 주저앉아 있으니 기어다니는 놈을 때리기는 더 좋은 자세였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온 악령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놈이 팔을 뻗으면 뒤로 살짝 물러났고, 다가오는 놈의 머리를 내려치기를 반복하면서 병실 바닥을 엉덩이로 쓸고 돌아다녔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극적인 긴장감이 연속되는 작업이었다. 몇 번 위험한 순간들이 있었다. 머리를 내리치고 재빨리 도망가지 못하면 놈의 팔이 민정에게 거의 닿을 뻔한 일들이 생겼다. 그러나 민정은 도망치지 못할 것 같으면 공격을 시도하지도 않고 최대한 안전하게 싸웠기에 그녀가 더이상 공격을 허용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십수 번 머리를 내리치자 악령의 움직임이 점점 둔해졌다. 놈이 팔을 뻗어서 공격하는 것도 민정이 방망이로 쳐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거기서 몇 번 더 때리자 악령은 이내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민정은 그렇게 주저앉은 채로 무력화된 기어다니는 악령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퍼억, 퍼억, 퍼억.


눈물 자국을 선명하게 남기고 입술을 꽉 깨문 민정이 만든 둔탁한 타격음이 계속 병실을 울렸다. 입구를 지키는 악령의 쇠사슬이 절그럭거리는 소리도, 그가 그르렁거리는 소리도 이 규칙적인 타격음을 가리지 못했다.

마침내 악령이 사라졌다. 


“하아, 하아.”


한숨 돌린 민정은 주저앉은 채로 문을 막고 있는 악령을 쳐다보았다. 악령은 민정을 노려보며 그르릉거렸지만,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하아, 좀 쉴까.”


민정은 벽에 기대고 몸에 힘을 뺐다. 다리에 통증이 많이 줄어들었다. 이제 일어설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좀 더 앉아서 쉬기로 했다. 그러나...


삐용삐용삐용삐용-


또 경박한 사이렌이 들렸다. 깜짝 놀라 보니 입구를 막은 악령이 쇠사슬이 풀려 비틀거리며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 속도는 기어다니는 악령보다 훨씬 빨랐다.


“이런 씨발.”


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욕을 했다. 평소에는 욕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참을 수가 없었다.


민정은 억지로 일어나서 약간 절뚝거리는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며 악령과 거리를 조절했다. 걸어다니는 악령은 기어다니는 악령보다는 훨씬 위협적이었지만, 다행히 민정보다는 훨씬 느렸고 팔이 무척 짧았기에 부지런히 움직이면 놈에게 닿지 않고 방망이로 때릴 수 있었다.


퍽, 퍽, 퍽-


한결 능숙해진 방망이질이었다. 타격 시점에 힘을 주어 위력을 늘리는 법을 조금씩 체득하는 민정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악령을 때렸다. 민정은 악령에게 공격당하지 않고 퇴치하는 데 성공하는 듯했다. 몇십 분만에 쉴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아악!”


그러나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타격이 심해지자 악령이 승부수를 던졌다. 갑자기 몸을 던져 날려, 손전등을 들고 있는 민정의 왼쪽 어깨를 붙잡은 것이었다.

어깨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민정은 놈을 발로 차고 방망이를 계속 휘둘렀다. 악령은 결국 민정을 놓쳤다. 민정은 소리를 지르며 방망이를 매섭게 휘둘렀다.


“이 개 같은 새끼!”


눈물 섞인 울부짖음이었다. 어깨가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으로 비롯한 공포와 분노가 민정의 뇌를 마비시켰다. 마비된 뇌는 이내 고통조차 잊었다.


퍽, 퍽, 퍽


민정의 입장에서 처절한 싸움이 이어졌다. 많이 얻어맞은 악령은 바닥에 쓰러졌지만, 쓰러지고도 민정의 다리를 공격했다. 다리를 맞은 민정은 비명을 지르고 주저앉은 채로 악령을 계속 두들겨 팼다.

한참이 지나자 마침내 악령이 축 늘어졌고, 이내 사라졌다.


“하아, 하아. 씨발.”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민정은 악령이 사라져서 아무런 위험이 없어졌음에도 허공에다 방망이를 마구 휘둘렀다. 전쟁 후 외상후 스트레스를 겪는 군인과 같았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현실을 직시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하아...훌쩍.”


마침내 마음이 안정되자 민정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영혼은 육신보다 감각을 훨씬 깊이 느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좋은 것은 더 좋고, 나쁜 것은 더 나쁘죠.’


영혼의 세계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해일이 한 말이었다. 영혼으로 입는 상처는 육신으로는 상상도 못 해 본 고통이었다. 민정은 홀로 남은 병실에서 처음으로 학교 건물 옥상에서 떨어진 선택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민정이 악령과 피 튀기는 싸움을 하던 무렵, 그녀에게 그 힘든 일을 시켰던 해일도 그의 숙적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애송아. 나 보고 싶었어?”


누더기를 입고 하체가 없는 사탄, 악화가 긴 손톱을 딱딱거리게 부딪히며 물었다.

악화의 옆에는 그녀의 충실한 부하인 악행, 악의와 함께 피보라 팀 3사탄인 피보라와 피철철, 피칠갑이 있었다. 또한 그들의 주변에는 중하급 악령들이 수백 마리가 에워싸고 있었다. 천사들이 악화의 가용 최대 전력으로 추정한 그대로였다.

여섯 개의 단지로 이루어진 제1본부를 악한 영들이 가득 채운 것이었다. 그러나 해일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쓸데없이 친한 듯 말을 거는 악화를 무시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제가 혼자 상대하겠습니다. 천사님들은 ‘보석’을 지켜 주세요.”


“하지만 제1본부의 이점은 해일 천사님께는 적용되지 않을 텐데요...”


“괜찮습니다. 제가 지더라도 죽진 않을 겁니다. 그러면 천사님들이 제1본부를 잘 지켜 주세요.”


해일은 대담하게도 혼자 싸우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제1본부는 천사들의 요새와 같아서 천사들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이는 민정의 원래 경호 담당인 루미, 나래, 로운에게만 적용되는 이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일은 자신감을 보였다. 그런 이점 없이도 놈들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설령 패배하더라도 남은 천사들이 방어만 한다면 강력한 악화라고 해도 단독으로는 루미, 나래, 로운 셋을 뚫고 ‘보석’을 강탈할 수 없다는 계산이 있었다.

세 천사는 제1본부의 성문 앞에 모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나래가 방패를 땅에 꽂고 결계를 형성했고 로운, 루미의 나무와 바람의 결계가 덧대어졌다.


타앙-


방어 태세가 갖춰짐을 확인하자마자 해일은 공격을 개시했다. 노란 군복을 입은 해일이 양손에 든 권총이 연달아 불을 뿜었다.


콰앙-


겉모양만 총일 뿐 총알이 목표에 닿을 때의 파괴력은 폭탄이 터지는 것 같았다. 마구잡이로 전 범위에 총을 난사한 해일은 순식간에 수백 마리의 악령을 흔적도 안 남게 소멸시켰다.


“우와...”


로운이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수호천사가 된지 얼마 되지 않은 로운은 해일이 민정의 <여정>을 총괄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해일의 실력을 꼭 확인해 보고 싶었다. 임관한 지 칠 년 만에 엄청난 실력으로 삼위일체의 인정을 받아, 세계 수준에서 손꼽히는 유망주로 성장한 현재진행형 전설, 해일의 진짜 전투력을 처음으로 두 눈으로 본 것이었다. 


“잘 봐 둬. 도움이 많이 될 거야.”


나래가 로운에게 속삭였다. 물론 그들의 임무는 ‘보석’을 지키는 것이고 지금 구경하는 때가 아니었지만, 로운의 마음을 아는 두 천사는 그 정도의 여유는 허락해 주었다.


끼야아아아-


그러나 사탄들이라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소름끼치는 울음소리와 함께 기다란 열 손톱을 채찍처럼 쭉 늘려 온갖 각도로 해일을 공격하는 악화를 시작으로 비쩍 마른 몸에 비해 바위처럼 거대한 머리에서 나오는 염력(念力)으로 해일이 존재하는 공간 자체에 압박을 가하는 악의, 상관인 악화에게 머리를 반쯤 뜯어먹힌 것 외에는 사탄치고 외모가 멀쩡하며 몸이 강철같이 단단한 악행이 해일을 차례대로 노렸다. 이들에 비하면 많이 약한 피보라조차도 멀리서 핏물을 날려 해일을 견제했다.


피융-


해일의 총소리가 빠르고 경쾌해졌다. 폭탄처럼 광범위한 화력을 가졌던 해일의 총알은 이제 저격총과 같이 한 점 집중의 섬세한 무기로 바뀌었다. 두 개의 총에서 쏟아지는 총알은 다양한 각도로 파고드는 악화의 열 개의 손톱을 모두 막아냈지만, 악의와 악행이 가세하자 해일은 움직여서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몸을 날려 공중에 떴다.


휘익-


쏘아내는 총알만큼이나 빠르게 움직이는 해일의 발걸음은 경쾌했지만 사탄들도 만만치 않았다. 아파트 단지 곳곳을 누비며 총을 쏴대는 해일이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해일이 아파트 건물 뒤로 엄폐하자 악의가 건물을 찢어버렸고 곧바로 악행과 악화가 접근했다.


“까꿍~ 여기 숨었니?”


“아우, 미친놈.”


음산한 목소리로 발랄한 발음을 하는 악화의 말을 들은 로운은 혐오감에 험한 말이 저절로 나왔다. 정작 해일은 못 들은 것처럼 표정 하나 변화 없이 싸움에만 집중했다. 둘이 동시에 덤벼도 허무하게 공격을 허용할 해일이 아니었다.


쾅-


커다란 폭발이 달려들던 사탄들을 덮쳤다. 피보라 정도 되는 사탄이라면 중상을 입었겠지만 악행과 악화는 끄떡도 없었다. 악행이 뻗어드는 주먹을 재빨리 물러서며 피하는 해일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순식간에 반대편 아파트 건물 위까지 이동한 해일은 다시 사탄들을 저격했다.


피융, 피융, 피융-


해일의 공격이 기관총처럼 쏟아졌지만, 해일 못지않게 빠르게 접근하는 악행이었다. 악행은 해일을 직접 노리지 않고 그가 밟고 서 있던 아파트에 주먹을 꽂았다. 아파트 전체가 금이 가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부서지는 잔해를 피해 얼른 몸을 날리는 해일에게 사탄들의 공격이 빗발쳤다.

공중에서 악화의 손톱을 피하던 해일에게 악의의 염력이 가해진 수십 개의 커다란 아파트 잔해물이 덮쳤다.


“위험해-”


로운이 깜짝 놀라서 외쳤다. 그러나 옆에서 나래가 괜찮다고 말을 하기도 전에 새하얀 빛이 뿜어지며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꽈앙-


해일에게 쏟아지던 수십 개의 잔해가 가루로 되었다. 동시에 날카롭게 찌르는 창같이 예리한 총알이 날아들어, 다급히 방어를 하던 염력자 악의의 머리를 꿰뚫었다. 해일의 힘을 이기지 못해 치명상을 입은 악의는 그 모습이 사라졌다.


“오, 과연 대단하신-”


거의 반쯤 관전 모드로 변한 로운의 탄성이 끝나기도 전에 상황은 급격히 반전되었다. 악의를 해치우는 빈틈을 노린 악화의 손톱 하나가 해일의 어깨에 닿았다. 수 미터나 되는 다른 손톱들이 순식간에 펴지더니 붕대처럼 해일의 어깨를 휘감았다.


“안돼!!”


애타는 로운의 외침을 뒤로 하고 악화의 텅 빈 하체에서 날카로운 꼬리가 튀어나와 해일의 배를 꿰뚫었다. 여태 작은 상처조차 입지 않았던 해일에게 닿은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다섯 사탄과 혼자 싸우려고 하다니. 네놈의 자만이 지금의 결과를 만든 것이다.”


악화가 웃으며 말했다. 루미가 다급하게 ‘기술’을 사용했다.


“선인의 하루.”


루미의 태양이 떴다. 태양은 아파트 단지 곳곳을 비추어 천사들의 힘을 강화하고 사탄들을 약화시켰다. 하지만 태양은 붙잡힌 해일 가까이에 떠 있었고, 천사들의 방어 범위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 기다렸다는 듯 피보라 팀 3사탄과 악행까지 합쳐서 루미의 태양을 제거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이런...!”


경험이 적은 로운은 당황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네 사탄이 달려들어 공격하면 루미의 ‘기술’은 소멸할 것이다. 하지만 천사들이 그걸 막기 위해 움직이면 가장 중요한 성문의 방어력이 약해진다. 그렇다고 가만히 두고만 봐야 하는 것인가? 다양한 상황에 대해서 미리 대비를 했던 천사 팀이었지만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어떡하죠?”


로운은 나래에게 급히 물었다.


“이럴 때일수록 맡은 역할에 집중해야 해.”


나래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는 오히려 루미의 태양에는 관심도 없는 듯 방패에 영력을 더해 방어력만 높일 뿐이었다. 태양을 만든 루미조차 태양을 지키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았다. 결국 피보라의 핏물이 태양을 삼키고, 악행의 커다란 주먹이 강타하자 태양은 유리 깨지는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쨍그랑-


천사들에게 이로운 효과를 주던 기술이 소멸했다. 로운은 큰 위기에 닥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일은 악화에게 큰 상처를 입었고, 루미의 ‘기술’마저 소멸했다. 이제 사탄들이 공격을 개시하면 누가 막아야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끼이이이이아아악!”


소름이 돋는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멀리 보이는 악화의 너덜너덜한 옷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뚫린 배에서 나온 피로 온몸이 빨갛게 물든 해일이 다시 한번 악화의 몸에 구멍을 냈다. 창백해진 얼굴처럼 그의 눈빛은 한층 차가워져 있었다.


“위기에 처할수록 강해지는 게 해일이 성격이지.”


“휴-”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하게 말하는 나래였다.


“죽어라!!”


악화를 비롯한 모든 사탄들이 해일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똑같이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속도나 위력이 전혀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정교해진 해일과 달리 열 개의 손톱으로 사각을 노리며 해일을 견제했던 악화의 움직임은 약간 느려졌다. 여태껏 악화의 변화무쌍한 손톱 공격을 해일이 막아내는 형국이었다면 지금은 해일이 무자비하게 쏘아대는 총알을 악화가 막기에 급급했다. 악행, 피보라, 피철철, 피칠갑 모두가 악화를 도와 해일에게 달려들었지만 해일은 움직임만으로 그 사탄들의 공격을 따돌렸다.


“우와.”


다시 관전모드가 되어 버린 로운이 감탄사를 냈다.


“해일 천사님 많이 다치신 거 아니었어요? 배에 난 구멍으로 뒤에 배경이 보이는데.”


로운이 나래에게 물었다. 나래는 긴장을 거두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보이는 것보다는 실제 입은 피해가 적을 거야. 적을 속이는 거지. 원래 해일이가 밥 먹듯이 하는 전략이기도 하고, 실제로 해일이는 상처를 입을수록 강해지는 편이야. 본인은 죽기 전에 발악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그 때문에 사탄들이 해일이를 까다로워하지. 얼마나 더 때려야 죽는지 모르는 거야. 우리도 잘 모르잖아.”


“전략이라는 건 알겠는데... 고통은요? 진짜로 크게 다치는 거잖아요? 해일 천사님이라고 배에 구멍이 나도 멀쩡할 리는 없잖아요?”


“웬만큼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짓이지. 해일이는 미친놈이야. 머릿속에 임무를 성공시키는 것밖에 없어.”


해일 천사의 총알이 악행의 단단한 몸을 터뜨렸다. 이 싸움에 끼어들 수준이 되지 않는 피보라와 피칠갑, 피철철은 진작에 중상을 입고 도망쳤다. 홀로 남은 악화는 괴성을 지르며 해일에게 달려들었지만 해일은 두 다리를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사방에서 날아드는 악화의 열 손톱을 두 개의 총만으로 전부 막아냈다.


“악화야. 또 속냐?”


지금껏 어떤 상황에도 말 한 마디 없이 총만 쏘던 해일이 악화를 도발했다. 입에는 얄미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런 찢어 죽일... 끄아아악!!”


이를 가는 악화에게 해일이 수 발의 총을 발사했다. 악화는 그 입고 있는 옷처럼 몸이 너덜너덜해졌다. 그러나 죽지는 않았다.


“내가 원래 사탄들을 불쌍해하지 않는데, 네 부하들이 좀 불쌍한 것 같다. 이기지도 못하는 싸움을 매번 억지로 하고 있으니까.”


모든 사탄들을 물리친 후 악화를 고문하며 태연히 말을 거는 해일을 보며 로운이 나래에게 질문했다.


“해일 천사님, 사탄과는 대화를 안 하시는 분인 줄 알았는데요.”


“원래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임무에 도움이 된다면 무슨 대화든 할 수 있지. 아마 저놈이 민정이보다 해일 본인을 더 노리도록 일부러 저렇게 하는 것 같아.”


나래가 소곤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나 악화는 그의 생각처럼 어리석기만 한 사탄이 아니었다.


“키키킥킥킥킥.”


너덜너덜해진 악화가 돌연 웃기 시작했다. 기괴한 웃음소리에 천사들은 섬뜩했고 해일도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라도 그년이 네 얄팍한 품을 떠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여정이 끝나기 전까지 한 번은 우리가 그년을 취할 것이야. 우린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년의 모든 것을 무너뜨릴 것이다!!”


패배를 목전에 둔 악화가 악을 썼다. 해일뿐만 아니라 천사들에게 전하는 섬뜩한 선전 포고였다. 루미와 나래, 로운 모두 긴장하며 침을 삼켰지만 악화를 마주한 해일은 태연했다.


“빼앗기면 되찾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네게 확실히 말한다. 설령 민정이가 네놈들 손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 아이는 결코 너희가 무너뜨릴 만큼 약한 아이가 아니란다. 그러니 너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담담한 해일의 태도는 한 점의 거짓 없이 당당했다.


“헛소리! 네놈의 희망 사항을 지껄이는구나. ‘보석’을 뺏으면 그년이 안 무너지고 배겨!! 네놈은 항상 인간의 좋은 면을 보고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모으지. 하지만 어디 인간이 네놈 생각대로 되더냐? 분명히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도 안 되던 것들이 몇 번이더냐? 네놈은 스스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척 하지만, 넌 그저 네가 보고 싶은 것들만 보고 믿을 뿐이다.”


“이제 와서 논쟁을 하자는 건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는다고? 맞다. 난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그리고 믿은 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타앙-


말을 하면서 해일은 계속 총을 쏘았다. 크나큰 고통에도 불구하고 악화에게는 해일의 목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그 노력을 위해 때로는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억지로 이야기한 적도 있지. 인정한다. 하지만 악화야. 이번에는 불가능한 걸 알면서도 외치는 얄팍한 희망 사항이 아니란다. 이번 <인생여정>은 우리가 이긴다. 민정이 성공을 막기 위해 발버둥치고 애를 써 봐. 절대로 네 뜻대로는 안될 거다.”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린 천사들은 해일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악화는 끝까지 지려고 하지 않았다.


“킥킥... 거짓말이 자연스럽구나. 인간에게 ‘절대’가 어디 있다는 말이냐.”


“...”


“인간의 시련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니. 죽어서도 그녀를 무너뜨릴 안배를 남기겠다.”


그것이 악화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해일이 무언가 하기도 전에 악화가 자기 자신의 머리를 손톱으로 찔렀다. 고통에 찬 표정의 악화는 사라졌다.


“쓰읍...”


해일은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다른 천사들은 일단 박수를 보냈다


“짝짝짝. 해일아, 수고했다.”


“해일 천사님 고생하셨습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악화 놈이 자기 목숨을 걸고 ‘저주’를 남겼는데, 이것이 민정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군요.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큰 영향은 없을 겁니다.

악화를 죽였으니 부활하는 40시간은 안전하겠죠. 저는 본부에 돌아가서 정비를 하고 오겠습니다. 민정이 이번 여정은 곧 끝날 것 같으니 돌아오면...”


해일은 천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한 해일은 총명하고 분명하게 말했다.


“나래 천사님이 잘 챙겨주십시오. 민정이 마음을 잘 풀어 주시고, 조건과 대가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그리고 혹시 방금 저주가 민정이에게 무슨 영향을 줬는지 확인 가능하다면 그것도 부탁드립니다.”


“민정이 화가 많이 났을 것 같은데?”


나래가 걱정스레 말했다.


“저한테 화가 났지 천사님들한테는 안 그럴 거예요. 잘 어르고 달래 놓아 주세요. 루미 천사님과 로운 천사님은 다음 여정 대비를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어. 뭐, 먹을 거라도 좀 준비해 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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