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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틀리제 Sep 25. 2024

사연녀와 그녀의 수호천사들

11화 : 민정의 병원 탈출 미션(3)

202호에서 극한의 고통을 겪으면서 두 마리의 악령을 해치운 민정은 한참을 깜깜한 어둠 속에 누워서 쉬었다.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병원 탈출 미션을 시작한 지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손전등을 비추지 않으면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이 어둠이 민정은 도대체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무지막지하던 다리의 통증은 조금씩 약해졌고 오랜 시간이 지나자 사라졌다.


“집에 가고 싶다.”


민정이 집에 가고 싶다면서 떠올린 곳은 생전의 좁고 어두운 집이 아니라, 천사들이 영혼의 세계에 마련한 여정 본부였다. 다를 것도 없는 빌라 그대로였지만 민정은 그 두 공간이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난다고 느꼈다. 좁고 어두운 게 아니라 고요하고 편안한 공간이었다.


“편안하게?”


이번 여정은 좀 편하게, 재미있게, 가볍게 가자고 해 놓고 생전에도 겪어보지 못한 고생을 시켜 버리는 해일을 떠올리며 민정은 이를 갈았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해일이 자기에게 이런 고생을 시키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고 있었다. 한참 집중해서 몸을 움직이며 싸우다가 누워서 쉬니 가라앉지 않은 텐션에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다리의 통증이 잦아든 민정은 몸을 일으켜 병실을 나갔다. 이제 1층으로 내려갈 시간이었다. 복도에 손전등을 비추며 걸어가려는데 또 경박한 사이렌이 울렸다.


삐용삐용삐용삐용-


“하아.”


민정은 한숨을 쉬었다. 앞에서 너덧 마리의 걸어다니는 악령이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나마 복도는 일직선이며 뒤에서는 아무것도 다가오지 않아서 포위당할 일은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민정은 악령들에게 달려들었다. 열심히 싸웠고 꽤나 잘 싸웠지만, 맨 앞에서 두들겨맞던 악령이 몸을 던지자 완전히 막아내지 못하고 넘어졌다. 그대로 공격을 허용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을 참으며 사투 끝에 두 마리를 제거했으나 아직 세 마리나 남아 있을 때에 민정의 몸이 한계에 다다랐다. 끔찍한 고통마저도 사라지는 느낌이 들며 민정의 정신이 흐려졌다.


그리고 어느 병실의 침대에 누운 채로 눈을 떴다. 그녀는 그곳이 이 미션을 시작한 병실이라는 것이 깨달아졌다.


“...죽고 부활한 건가 보다.”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던 통증도 없었고 몸 상태가 전체적으로 아주 멀쩡했다. 게다가 옆에는 지금껏 획득한 도구인 지도, 손전등, 방망이가 있었다. 민정은 즉시 그것들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2층으로 향했다.


2층으로 가는 계단에는 개 악령이 있었다. 아까 전에는 뼈다귀를 던져서 임시방편으로 이곳을 통과했다. 그러나 이제는 근본적인 해결 수단이 있었다.


“야, 똥개.”


멍멍, 크르렁, 각종으로 짖어대는 개를 보며 민정이 방망이를 빙빙 돌렸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지만... 여긴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야!”


민정이 대충 휘두른 방망이를 개 악령이 피하며 민정의 발밑으로 파고들었다.


“어딜!”


그러나 민정이 달려드는 개 악령을 타이밍 좋게 힘껏 발로 차 버렸다. 물러났던 개 악령이 다시 타이밍을 노리다가 끼깅거리며 달려들었다. 민정은 몸을 숙여 기다렸고, 개 악령이 피하지 못할 타이밍을 잡아냈다.

휘익, 퍽.


“깨갱!” 


단말마를 내지르며 사라지는 개 악령이었다. 개 악령을 물리친 민정은 한 손엔 손전등, 한 손엔 방망이를 들고 터덜터덜 2층으로 걸어갔다. 두 개의 병실을 지나 내려가려고 하자 또 익숙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후우.”


이번에는 한숨이 아닌 심호흡을 하는 민정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놀랍게도 먼저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순간 그녀는 천사들만큼이나 강한 의지로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녀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지만, 영혼의 세계는 마음과 의지가 수행 능력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곳이었다. 한번 죽고 부활한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민정은 채 5분도 안 되어서 다섯 마리의 악령을 격파하고 1층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1층으로 가는 계단에서 민정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악령이 가까이에 있을 때 느껴지는 위화감이 없었다. 그 위화감은 악령을 상대하는 데 두려움을 줬지만 악령이 가까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척도이기도 했다.


과연 그 느낌대로 계단에는 악령이 없었다. 민정은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1층에 내려섰다. 지도에 따르면 1층 계단으로 내려가면 밖으로 나가는 현관문이 바로 있었다. 민정은 현관문을 확인했다.


문을 지키고 있는 악령은 없었고 악령의 존재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혹시 몰라 두려운 마음에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


“그럼 그렇지. 열쇠를 찾아야 하는구나.”


민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1층에는 101호와 102호, 두 개의 병실이 있었다. 101호 아니면 102호에 현관문 열쇠가 있을 것이었다. 민정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붙잡으며 101호를 밖에서 들여다보았다. 일단 가운데 테이블에 빛나는 쪽지가 있는 게 보였다.


민정은 조심스럽게 쪽지에 다가서서 내용을 확인했다.


- 모든 준비와 연습은 마지막 한 번을 위한 것일 수 있다. 때로는 중간에 제대로 못 했어도 마지막만 잘 하면 되는가 하면, 중간에 잘 했어도 마지막에 못 하면 안 되기도 한다.


민정은 쪽지의 내용의 뜻을 곱씹었다.


“이제 마지막인가. 그러니까 보스가 나올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 민정은 긴장한 채로 보스의 등장을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보스는 등장하지 않았다.


“102호에 보스가 있는 건가.”


민정은 102호의 문 앞에서 안을 들여다보려고 움직이려다가, 101호를 수색하는 게 먼저임을 깨닫고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췄다.


“어? 이건 뭐지?”


그리고 거기서 아이템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나무로 된 방망이었다.


“아니, 이걸 왜 또 줘?”


민정은 의문을 표하며 방망이를 집어들었다. 그런데 방망이에 손이 닿자 갑자기 방망이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악! 이게 뭐야!”


빛이 너무 밝아서 민정은 눈살을 찌푸렸다. 왜 방망이에서 빛이 나는 거냐고. 그렇게 그녀는 잠깐 빛에 적응하는 시간을 가졌다.

빛에 눈이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그녀는 방망이를 집어 들고 휘둘러 보았다. 지금껏 들었던 방망이보다 좀 더 묵직한 것 같았다.


“보스를 잡을 때가 되니까 무기를 강화시켜 준 건가.”


민정이 천사들의 의도를 추측했다.


“진짜 밝네. 이제 손전등은 필요가 없겠어.”


방망이가 어찌나 밝았던지 방 안이 환하게 비췄다. 민정의 말처럼 손전등이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사실 지금까지 민정은 한 손에는 손전등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방망이를 휘둘러야 했다.

이것은 무척 불편했고 악령과의 싸움에서 승패를 가르는 핸디캡이었다. 이제는 두 손으로 방망이를 단단하게 잡을 수 있었고 손전등으로 비출 필요도 없었다. 처음부터 이런 야광 방망이가 있었다면 미션이 훨씬 쉬웠겠지만, 그보다도 민정은 살짝 걱정스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미션은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첫 번째는 어둠이 주는 공포, 두 번째는 악령이 주는 공포였다. 그런데 이 방망이가 어둠이 주는 공포를 없애 주었다. 그러면 악령을 상대하는 어려움만 남게 되는데, 그만큼 강한 악령이 나올 것 같았다. 심지어 보스전이라면.


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는 동안 눈이 방망이에 완전히 적응했다. 이제는 빛나는 방망이를 똑바로 쳐다봐도 괜찮았다.


“보스를 잡으러 가 볼까.”


민정은 긴장한 채로 102호를 향해 걸었다. 그리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악령이 하나 서 있었다. 놈은 민정을 기다렸다는 듯 처음부터 밖을 노려보고 있었다. 악령과 눈이 마주쳤다. 외형부터 느낌까지 놈은 지금까지 상대한 다른 악령들과 많이 달랐다.

다른 악령들이 형체가 모호하거나 기괴했던 것과 달리 아주 멀쩡하게 생겼다. 정확히 인체비율에 맞는 팔다리와 몸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악령은 옷을 입고 있었다. 분명히 까만 셔츠와 바지였다. 다만 신발은 신지 않아 맨발이었다.


그렇다고 아주 멀쩡하게 생긴 건 아니었다. 오히려 얼굴만 보면 다른 그 어떤 악령들보다 인간답지 않았는데, 놈은 몸은 인간이었지만 사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털투성이의 험악한 얼굴에 찢어진 눈, 비틀어 올려진 입을 가진 야비한 포식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초원의 제왕 같은 멋있는 사자가 아니라, 약자를 유린하는 것을 즐기는 비열한 짐승이었다.


민정은 놈의 목에 열쇠가 걸린 것이 보였다. 놈은 열쇠를 한껏 드러내면서 민정을 유혹하고 있었다. 열쇠를 찾으러 여기에 들어온다면 너를 가지고 비뚤어진 욕심을 채우겠다는 음습한 자신감을 뽐내고 있었다.


민정은 놈을 이기기 쉽지 않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지금 민정의 내면을 채우는 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느낌이 아니었다.


민정은 그 야비한 눈을 짜부러트리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꼈다. 몇 번을 죽고 부활하더라도 결국 놈을 쓰러뜨리고 짓밟아 버리고 싶었다. 죽기 전부터 지금까지 쌓였던 스트레스를 놈에게 풀고, 자기를 우습게 여기고 있는 얼굴을 고통으로 찡그리게 만들고 싶었다.


민정은 방망이를 들어 놈을 가리켰다. 민정의 도발에 놈은 가소롭다는 듯 픽 웃었다. 놈의 역도발에 민정은 걸려들기로 했다. 민정은 병실 문을 거칠게 열고, 방망이를 두 손으로 잡았다.


“하앗!”


기세 좋게 방망이를 휘두르며 달려들었지만 사자머리 악령은 팔을 들어 민정의 공격을 가볍게 막았다. 민정은 일단 뒤로 물러섰다.


“쳇.”


공격이 쉽게 통하지 않았다. 한 번만에 놈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나름 최대한 세게 방망이를 휘둘렀음에도 전혀 타격이 없자 내심 당황했다. 때렸던 손바닥이 오히려 얼얼했다. 


처음 병원 탈출 미션을 시작했을 때와 다르게, 민정이 방망이를 휘둘러 내려찍으면 바닥에 흠집이 날 정도로 그 위력이 강해졌다. 아마 방망이를 바꾸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 위력 그대로 팔로 막아도 놈은 조금 아프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게다가 놈이 반격을 들어오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놈은 주먹을 민정의 가슴께로 뻗었다. 민정은 방망이를 세로로 들어 주먹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깡-


방어에 성공했는데도 방망이 너머로 전해지는 충격에 민정은 비틀거렸다. 그런데 의외로 사자머리 악령 또한 직접 맞을 때보다 더 아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방망이는 멀쩡했다. 자신감이 생긴 민정은 방망이의 성능에 감탄하며 다시 한 번 휘둘렀다.

그러나 놈은 옆으로 살짝 뛰어 민정의 공격을 피했다. 체중이 실린 공격이 빗나가자 몸을 가누지 못한 민정이 아차 싶은 순간 놈의 주먹이 어깨를 강타했다.


“끄악-”


민정은 요상한 괴성을 지르며 튕겨나가서 벽에 처박혔다. 그녀는 처참한 고통을 애써 무시하며 재빨리 일어났다. 직격당한 팔은 오히려 아무 감각이 없었고 고통은 다른 온몸에서 느껴졌다. 팔이 아예 뜯겨 나간 것 같았다. 세상 처음 겪어 보는 고통이었다.


사자머리 악령이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민정은 고통을 참으면서 현실을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이번 싸움은 진 모양이다, 라고 생각한 민정은 죽음을 각오하고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된 타격을 먹여 보기를 노렸다. 

성한 왼팔로 방망이를 똑바로 잡았다. 악령이 뚜벅뚜벅 걸어와서는 민정의 복부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민정은 방어하지 않고 오히려 왼팔이나마 방망이를 휘둘러 놈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끄악!”


“크윽!”


둘의 비명이 엇갈렸다. 민정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잔뜩 찡그린 채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놈이 보였다. 민정은 고통에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

.

.



민정은 눈앞에 한 아이가 보였다. 분명 미션의 마지막 목표인 사자머리 악령과 싸우다가 죽었는데, 이번엔 곧바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뭔지 모를 누군가를 마주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존재였다. 그런 존재를 이전에 봤을 리가 없었다. 연약한 아이지만 추한 모습이었다. 여섯 살 쯤 되었을 텐데 머리가 보통 아이보다 다섯 배는 커 보이는 기괴한 비율이었으며 피부에도 흉측한 자국이 가득 나 있었다.

하체는 흐릿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간 보았던 악령들처럼 무섭거나 악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기괴하고 흉측해서 불쌍해 보였다. 갑자기 이 영혼의 모습을 보게 된 연유를 알지 못하는 민정은 의문스레 영혼을 관찰했다. 그 시간은 십여 초 정도, 그리 길지 않았으나 어째서인지 오랜 시간 동안 그 영혼을 관찰한 느낌이 들었다.

또 어째서인지 그 추한 영혼에게서, 민정은 왠지 모르게 그녀의 부모님과 연관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혹시 저 꼬마가 부모님 영혼의 모습인가, 아버지인가, 어머니인가? 민정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또 한가지 느껴지는 것은, 저것을 보는 것이 민정에게 허락되지 않았을 거라는 점.

민정은 일탈에서 오는 스릴을 느꼈다.


그러나 그 시간이 길지 않았기에, 그녀는 금방 다시 병원에서 부활했다.


꿈을 꾼 것처럼 묘했으나, 이제 다시 미션을 수행할 때였다. 민정은 그 추한 꼬마 영혼은 금세 머리에서 지웠다.


“때릴 때는 좋았는데...”

희망을 보았음에도 3층에서 다시 눈을 뜬 민정의 마음은 무거웠다. 죽음을 무릅쓰고 머리 한 대를 때렸다. 목숨을 주고 살을 깎은 경우였다. 다시 놈을 마주해서 싸운다면 똑같은 결과가 나올 것 같았다.

만약 머리에 제대로 공격이 성공한다면 분명히 이길 수 있는 상대였다. 그러나 그 공격을 성공시킬 방법이 요원해 보였다. 놈은 분명히 민정보다 좀 더 빨랐다. 방망이를 휘두르는 공격이 놈이 주먹을 뻗는 것보다 느리다면 때리기는커녕 맞기만 할 것이 분명했다.


“혹시 다른 아이템이 아직 남아 있나?”


민정은 병실들을 다시 뒤져 볼까 고민했으나, 부활한 자리에 지도가 재생되지 않는 걸 알고 포기했다. 지도뿐 아니라 손전등과 예전에 쓰던 방망이도 없었다. 오직 빛나는 방망이 뿐이었다. 지도가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지도가 없어졌다는 건 더 찾아낼 아이템이 없다는 뜻 같았다.


“이제 이 방망이만 있으면 된다는 뜻이구나.”


그것은 다른 말로는 이 방망이 하나로 사자머리를 두들겨 패야 한다는 말이었다. 다른 도구의 도움 없이.


“이거 좀 너무한 거 아닌가.”


민정은 얼굴을 찌푸렸다. 생전 처음으로 맞아서 날아가서 벽에 처박혀 봤다. 참 대단한 경험이었다. 예민한 영의 감각으로 겪는 고통은 육신으로는 겪어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고통을 다시 겪느니 차라리 이 어두운 병실에 혼자 있는 게 나은 것 같았다. 지금은 방망이 때문에 그렇게 어둡지도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배가 고프지도 잠이 오지도 않았다.


“...”


한참을 두려움에 망설이던 민정은 깨달았다. 그렇다고 여기 계속 앉아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결국에는 일어서서 움직여 사자머리 악령 앞에 서서, 방망이를 휘둘러서, 무찌르고 이 병원을 나가야 한다는 것을.


“후우...씨발.”


심호흡하고 마음을 정리한 민정은 몸을 움직일 동력으로 감정을 끌어올리는 것을 택했다. 재수 없는 개새끼, 아니 사자 새끼를 죽도록 패 버리겠다는 마음으로 분노를 끌어올렸다.


분노에 이끌린 민정은 욕설을 뱉은 후 뛰어가서 단숨에 102호 앞에 섰다. 길을 막는 조무래기 악령들은 방망이로 가뿐하게 때려 주고 내려왔다. 102호에서 안을 들여다본 민정은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자기를 노려보며 야비한 웃음을 짓는 사자머리를 발견했다.


“나와 이 개새끼야!”


상스러운 욕을 뱉으며 민정은 안에 들어선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이기기 위해서는 지형을 활용해야 할 듯싶었다.


특이하게 이 병실은 다른 병실보다 좀 좁았다. 침대는 하나뿐이었고 침대를 제외하면 몇 걸음 걸을 공간이 없었다.


‘여기가 좁은 건 내게 행운일까 혹은 불행일까.’


민정은 생각했다. 놈은 재빠르고 잘 피한다. 그러나 좁으면 피할 곳이 마땅치 않겠지.


“내게 행운이다 이 새끼야!”


민정은 방망이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그러나 놈은 예상한 공격이라는 듯 피식 웃으며 옆으로 피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놈의 주먹을,


“하압!”


민정 또한 예상했고 방망이로 쳐 냈다. 그래서 처음 방망이를 내리그을 때 힘을 빼서 다음 동작을 원활하게 준비했다. 민정 나름의 연결 동작이었다.


빠악-


방망이가 주먹을 제대로 때렸다. 놈이 비명을 질렀다. 방망이에 맞은 주먹은 뼈가 부러진 듯 늘어졌다. 역시 믿을 건 방망이 뿐이었다. 방망이는 강하고 재빠른 놈을 잡을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도구였다.


“좋아.”


기회다 싶은 민정은 방망이를 계속 휘두르며 놈에게 접근했다. 놈은 당황하여 이리저리 피하기 시작했다.


휘익-휘익-


“하압! 하앗!”


민정이 각양각색의 기합을 내지르면서 열심히 방망이를 휘둘렀지만 놈은 좁은 공간을 잘도 피해다녔다. 맞을 듯 맞지 않는 놈에게 민정은 애가 탔다.

다급해진 민정은 결국 깊숙이 파고들어서 공격을 시도했다. 그런데-


퍼억-


“끄악!”


오히려 놈의 공격에 카운터를 맞고 말았다. 놈은 한쪽 주먹은 못 쓰게 되었기에 다른 쪽으로 공격했고 그것이 명중했다. 복부를 제대로 가격당한 민정은 고통에 숨이 막혔다. 몸이 아예 망가졌다는 게 느껴졌다.


“아... 너무 흥분했나. 다음엔... 조금만 침착하게... ”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시야가 흐려지는 걸 아쉬워하며 민정은 또 원래 위치에서 부활했다.


“나는 죽고 부활하면 그만큼 요령이 쌓이지만 저 놈은 아니야. 결국에는 내가 이긴다.”


그렇게 생각한 민정이었다. 그 이후로도 민정은 세 번 더 죽어서, 총 다섯 번을 죽고 여섯 번째에 사자머리 악령을 격파했다.

사자머리는 수세에 몰리자 방어를 포기하고 달려들기도 했고, 쓰러진 척을 하기도 했다. 민정은 나름 신중하게 접근했지만 한 번이라도 공격을 허용한다면 사실상 패배로 이어졌다. 민정은 그때마다 더 분노를 불태우며 돌아왔다.


“허억, 허억.”


여섯 번 째 시도에서 결국 민정은 한 번도 맞지 않고 놈을 제압했지만, 때리기만 했는데도 녹초가 되었다. 쓰러진 사자머리 악령이 아예 사라질 때까지 때려야지만 확실하게 끝을 내는 것이었다. 그냥 쓰러진 척을 한 녀석에게 방심했다가 당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숨이 턱에 차오를 정도로 지친 민정은 기합도 못 질렀으나 살벌한 눈빛만은 유지했다. 끝까지 집중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퍽, 퍽-


마침내 거의 끝났다는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사자머리 악령에 대한 복수심과 드디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마지막 힘을 냈다.


“하앗!”


퍽- 하는 타격음을 끝으로 사자머리가 악령은 사라졌다. 그러자 열쇠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와, 허억. 허억.”


민정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해냈다. 이제 나갈 수 있다.

민정은 열쇠를 챙겨서 일어섰다. 너무 지쳤기 때문에 분명히 조금만 쉬었다 갈 생각이었지만 열쇠를 줍자 갑자기 없던 힘이 생겨났다. 사자머리가 남긴 열쇠를 들고 황급히 뛰어나가 현관문에 꽂으니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민정이 방망이를 들고 밖으로 나가자 신기한 공간이 나왔다.


복도였다. 분명히 건물 밖을 나가는 현관문이었는데 실내 복도가 나왔다. 수 미터 앞에 복도의 끝에 또 다른 문이 있었다. 민정은 풍경을 눈에 담을 생각도 않고 반사적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자,


아주 특별한 풍경이 펼쳐졌다.

흰옷을 입은 어린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놀고 있었다. 민정이 어릴 때 놀던 아파트 단지 내의 놀이터였다. 그런데 민정이 아는 풍경만은 아니었다. 미끄럼틀과 시소가 있고 잔디가 깔려 있었던 것은 민정이 아는 풍경이었으나 잔디 위에 황금빛 물이 찰랑거리며 미끄럼틀이 꽃과 보석으로 장식된 것은 민정에게 낭만과 환희로 다가오는 모습이었다. 그 안에서 어린아이들이 세상 즐거운 듯 뛰어노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순간 이런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이유도 이해하지 못한 채 민정은 빠져들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두려움과 분노가 모조리 사라지는 것이 금방이었다. 

그 풍경이 끝난 순간 민정을 맞이하는 것은,


“하핫, 음, 고생하셨어요.”


제2본부에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홀로 민정을 맞이하는 나래였다. 다른 천사들은 자리에 없었다.


“...”


민정은 대답하지 않고 나래를 째려보았다. 눈빛에 독기와 살기가 가득한 모습에 섬뜩해진 나래가 말했다.


“일, 일단 좀 앉으시죠. 그 방망이도 내려놓으시고요.”


민정은 그제야 아직도 방망이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민정은 목숨처럼 의지했던 방망이를 내려놓기가 뭔가가 꺼림칙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강박관념을 이제는 잊어야 할 때였다.

그러나 안전이 확보되었고 앞서 본 평화로운 풍경에 의해 감정이 많이 전환되었다고는 해도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기억은 잊지 않았다. 이제는 천사들에게 따질 시간이었다.


자리에 앉아서 방망이를 바닥에 내려놓는 민정이었다. 나래는 그런 민정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를 포기했던 그의 보석.

그런 민정이 한껏 예민해진 상황이다. 해일은 앞선 전투가 끝난 후 치료를 받으러 떠나기 전에 나래에게 부탁했었다.


‘선배님, 제가 벌여 놓은 일들 수습 좀 부탁드립니다. 민정이한테 잘 좀 얘기해 주세요.’


‘갑자기 무슨 선배님이야. 그리고 나 말 잘 못 하는데. 루미 팀장님한테 부탁드리지 그래?’


‘아니요. 지금은 선배님밖에 없습니다.’


과거의 민정이 절망에 빠지고 괴로워하고 결국 뛰어내릴 때까지 지켜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래였다. 

그리고 스스로를 생각보다는 낯을 가리고, 언변도 좋지 못하다고 평가하는 천사 나래는 그의 수호 대상을 마주했다. 처음 인생여정을 시작할 때보다 표정에 자신감이 생기고 눈빛도 강해진 민정의 모습이었다. 이번 여정 역시 나래 본인은 걱정했지만 결국 해일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일 천사님은 어디 가셨어요?”


민정은 천사들 앞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자마자 해일의 행방을 물었다.


“재밌게 편안하게 가자고 하시던 해일 천사님은 어디에 도망을 가신 건가요?”


민정이 큰 상처를 입고 치료 중인 해일을 비난하였어도 나래는 미소를 지었다.


“해일 천사님은 중요한 일이 있으셔서요. 잠깐만 기다리시죠. 여기 치킨이라도 드시면서 말이죠.”


나래가 가리킨 테이블 중앙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후라이드 치킨이 여러 소스와 함께 놓여 있었다. 민정은 못 당하겠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하아, 천사님들...화를 낼 수 없게 만드시네요. 알면서도 당하게 되네.”


민정은 말을 하면서 치킨을 들고는 소스에 적당히 찍었다. 한 입 베어물고는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천상의 맛이다...”


마음이 조금 풀린 듯한 민정을 보며 나래는 속으로 안도했다. 그는 민정의 심리를 알아차렸다. 해일을 비롯한 천사들에게 서운한 마음은 있지만 용서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닫아버린 건 아니라고 봤다. 민정이 한숨 돌리자 나래는 대화를 시작했다.


“다른 천사님들은 지금 조금 바쁘셔서 저 혼자입니다. 이번 여정은 어떠셨나요?”


“어땠기는요. 세상에 살면서 이렇게 힘든 적이 없었어요. 내가 자살한 걸 후회했다니까요.”


민정이 퉁명스럽게 말하더니 이내 속에 담긴 화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해일 천사님이 저한테 이번에는 편하고 재밌는 여정을 하자고 말한 거 알아요? 이게 편하고 재밌는 놀이인가요? 천사님들이 자기들만 믿으라고 해 놓고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시다니요. 천사가 그래도 됩니까?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이번 여정이 민정씨를 많이 힘들게 한 것은 해일이도 잘 압니다. 그걸 의도한 게 맞아요. 저를 비롯한 다른 천사들도 걱정을 많이 했죠. 하지만 민정씨가 결국엔 스스로 멋지게 해내셨습니다. 솔직히 이렇게 잘 하실 줄 몰랐습니다.”


“결과만 좋으면 다 좋은 건가요? 내가 왜 그런 고생을 해야 했죠?”


“약 0.5퍼센트 정도 됩니다.”


“뭐가요?”


“이 정도 미션을 아무에게나 줬을 때 성공할 가능성이요. 100명 중에 5명 정도 겨우 성공할까요? 아마 태반은 제대로 출발도 못 해서 악령은 만나지도 못하고 포기하겠죠. 저도 사실은 민정씨가 성공할 거라는 확신은 없었어요. 하지만 해일이는 민정씨가 해낼 거라고 믿고 있었죠.”


“...”


민정은 나래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고 보면 정말로 어떻게 그 으스스한 어둠을 헤치고 악령을 죽이면서 미션을 다 해냈는지가 스스로 신기했다.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자 짜릿하게 뿌듯함이 차올랐다. 이런 성취감을 언제 또 느껴봤을까.


‘맞아. 깜깜하고 아프고. 정말 미친 짓이였어. 아무나 못 하는 일이었지. 그렇지만...’


“음, 그래도 사실은 믿는 구석이 있었어요. 죽어도 부활한다는 말을 듣기도 했고, 또 천사님들이 준비한 미션이니까 그렇게 위험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생각보다는 훨씬 힘들었지만...”


“맞아요,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이면 도중에 포기했을걸요? 이번 미션, 엄청 무섭고 아팠잖아요. 누가 그걸 감수하면서 끝까지 하려고 해요. 가만히 앉아서 도저히 못 하겠다고 제발 꺼내달라고 애원하거나, 아니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버티면 저희가 뭘 어찌할 도리가 있었겠어요?”


나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민정은 그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민정씨의 <현재> 여정, 두 번째 감정 <겁이 많은>을 했습니다. 민정씨는 굉장히 겁이 없고 용감한 편이에요. 의지도 강한 편이고요.”


나래가 말을 이었다.


“불평은 했을지언정 못 하겠다는 말은 한 번도 안 했어요. 오히려 반드시 해내겠다는 생각만 했죠. 이제 누구도 민정씨가 의지가 약하다든지 겁이 많다든지 그런 말은 못 할걸요. 민정씨 스스로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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