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틀리제 Sep 27. 2024

사연녀와 그녀의 수호천사들

12화 : 여정의 막간 - 천사들의 모의 전투

나래가 칭찬을 이어가자 민정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존재인 천사에게 진심으로 칭찬을 들었다. 민정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꽤 열심히 잘 했다. 기분이 좋아진 민정은 괜스레 툴툴거렸다.


“그래도 그렇지... 참 나한테 너무하셨어요...”


“음. 치킨은 맛있나요? 느끼하진 않겠지만 콜라도 같이 드시죠.”


말을 돌리면서 민정의 컵에 시원한 콜라를 따라 주는 나래였다. 


“그런 경험을 시키는 것이 이번 여정의 목표였나요?”


민정은 치킨과 콜라의 맛을 느끼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고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데 성공했다. 나래는 해일이 민정으로 하여금 질문하는 습관을 들이는 데 성공한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민정의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할지 생각했다.

해일이 요구했던 ‘조건과 대가에 대한 설명’을 민정의 수준에 맞는 눈높이로 제공하면서, 나래 본인이 민정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도 하려고.


“고생 없이는 얻는 것이 없는 법이죠.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이곳에서는 더욱 뼈저린 의미를 가지는 격언입니다. 나중에 뭔가 원하는 게 있으면 이번 미션을 대가로 해일이에게 요구를 해 보세요. 합리적인 요구라면 해일이는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오, 정말요?”


민정에겐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나래가 말을 이었다.


“저도 해일이가 무슨 생각으로 이번 여정을 기획했는지, 그 생각을 100퍼센트 알진 못합니다만, 다 생각과 계획이 있는 녀석이죠. 눈빛 하나도 의도할 줄 아는 친구에요, 해일이는.”


“그러고 보니 나래 천사님은 해일 천사님을 편하게 부르시네요? 다른 분들은 안 그러시던데.”


“맞아요. 해일이가 처음 임관해서 임무를 맡았을 때 잠깐 같이 활동했어요. 어떻게 보면 귀한 인연이죠.”


“오, 정말요? 같은 팀이셨던 거예요? 지금처럼?”


“아뇨. 그때는 각자 다른 사람을 수호하고 있었고 잠깐 같이 임무를 할 일이 있었습니다.”


“해일 천사님은 그때도 그랬어요?”


“그때도 그랬냐는 게 무슨 말이죠?”


“아니, 막 뒤통수 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런 천사였냐고요. 해야 할 말만 하고 그 외에는 말도 안 하고.”


“크흠, 이번에 해일이가 좀 너무하긴 했지만, 해일이를 오해하고 계신 것 같아요. 음, 아무튼 해일이는 예전에는 지금이랑 좀 달랐죠. 자신만만하고 계획적인 점은 똑같지만 지금은 더 노련하고 지혜롭고 여유로워요. 예전에는 패기만만하지만 여유가 없고 미숙한 느낌이 있었거든요.”


“그래요...?”


“천사들이라고 처음부터 완벽하게 잘 하지 못해요. 해일이도 수많은 실패를 겪은 후에 지금처럼 뛰어난 천사가 되었죠. 괜히 특수임무를 맡는 게 아니에요. 해일이 실력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대한민국 인구를 대략 5천만으로 잡고, 1인당 수호천사가 우리 팀의 경우와 같이 3명씩만 있다고 가정하죠. 그러면 대한민국의 수호천사 숫자는 해일이처럼 따로 임무를 받아서 활동하는 천사들은 제외해도 개인 수호 담당 천사만 대략 1억5천이죠.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습니다만,

아무튼 약 1억5천만 명의 천사들 중에서 해일이의 전투능력이나 임무수행능력 평가는, 적어도 100위 안에는 들어갈 겁니다.”


“오... 실력 하나는 엄청난 분이시네요.”


민정은 숫자 감각이 뛰어난 편이라 해일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 편인지 감이 왔다. 대충 대학 입시로 치면 전국 1등 이상인 수준이다. 150만분의 1의 사나이 해일.


“확실히 앞뒤 안 가리고 목적 달성에만 집중하는 모습도 있어요. 그래서 민정씨한테도 무리한 미션을 시켰고요. 하지만 말씀드렸듯이 다 의도하고 생각한 바가 있는 친구예요. 지금 민정씨가 해일이한테 배신감을 느끼시는 것조차도 알고 있을 겁니다, 분명히.”


“그래요...?”


알면서 그랬다는 사실에 떨떠름하고 기분이 나쁜 민정이었다.


“그런데 해일이는 겉으로 티는 안 내도 정말 좋은 녀석이에요. 민정씨한테 무리한 미션을 시킨 것도 민정씨를 고평가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민정씨한테 좋은 일이라면 자기는 욕 먹어도 상관 없다는 거죠.”


“으음.”


“그리고 항상 본인한테는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합니다. 다른 천사들한테는 잘 이야기하지 않지만요.”


“그럴 것 같긴 해요. 본인부터 완벽주의겠죠.”


“저도 해일이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잘 몰라요. 하지만 앞으로도 해일이가 이해가 안 되거나 마음에 안 들게 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냥 믿어 주세요. 절대로 민정씨한테 해가 되는 일은 안 하는 녀석이니까요.”


나래가 진심을 가득 담아 말했다. 민정은 툴툴거렸다.


“뭐, 두고 봐야죠.”


그 말이 나래의 귀에는 열심히 그렇게 해 보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리고 민정의 눈은 웃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해일이의 진가는 역시 제일 어려울 때 드러나지요...”


“해일 천사님은 알겠고 이제 다른 천사님들 얘기도 했으면 좋겠어요.”


“다른 천사들요?”


나래가 머리를 긁적였다. 해일이 주문한 것도,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도 다 했다. 그 외엔 딱히 무슨 이야기를 할지 미리 생각하진 않았었다. 나래는 대화에 있어서 순발력이 있는 천사는 아니었다. 하물며 인간인 민정에게는, 아무리 평소에 깊고 진한 충성심으로 수호해 왔고 내적 친밀감이 크더라도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뭐, 궁금하신 거라도?”


결국 그는 대화의 주도권을 민정에게 넘겼다.


“다들 콘셉트 하나씩 가지시는 것 같던데요. 해일 천사님은 군인이셨고, 로운 천사님은 나무 정령이었는데. 다른 두 분은 뭐예요?”


“흠, 루미 천사님 특성이 뭔지는 제가 함부로 알려드릴 수는 없고요. 저는 ‘경찰’입니다.”


“경찰이요?”


민정은 하하 웃고는 농담을 건넸다.


“해일 천사님과 나래 천사님은 왜 이렇게 창의력이 없어요? 로운 천사님은 나무 정령이라는데. 판타지스럽고 좋잖아요. 로운 천사님한테도 찰떡이고.”


“예? 아니, 나무 정령이라고 딱히 창의력이 돋보이는 개성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군인 경찰보다야 훨씬 낫지.”


“하하, 그런가요.”


딱히 할 말이 없는 나래는 그냥 웃었다.


“천사님들이 싸우는 것도 한번 보고 싶어요. 나는 이 방망이나 들고 무식하게 휘두르기만 했는데. 도대체 나무의 정령은 어떻게 싸울까.”


“저희가 싸우는 거... 보는 재미는 있겠지만 사실은 위험한 상황일 텐데요.”


나래가 상상하기도 싫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부분은 민정도 동의했다. 민정도 악령과 사투를 벌이고 나니 악령과 싸우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되었다.


“그래도 여정을 하다가 보면은 한 번쯤은 전투를 치를 수도 있을 거... 어라. 잠시만요.”


말하는 도중에 끊은 나래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민정은 무슨 일이냐고 눈짓으로 물었다.


“천사들은 서로 전화 통화를 하듯이 텔레파시를 쓸 수 있어요. 방금 해일이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우리들이 싸우는 것을 이제 보게 되겠는데요?”


“네? 왜요?”


“다음 여정은 ‘모의 전투’라고 하네요. 저희끼리 편을 나눠 대련을 하는 걸 보시겠네요.”


“와, 정말요?”


“네. 대신에, 준비를 해야 된다고 조금 기다리라고 합니다. 근데...”


“네, 왜요?”


나래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혹시 병원 탈출 미션을 하다가 뭐 이상한 일은 없으셨어요?”


“이상한 일이요?”


“네, 뭔가 희한한 것을 봤다던가, 특이한 감정을 느꼈다던가 하는 거요.”


질문을 하는 나래의 표정은 평화로웠다. 민정은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사자머리 악령에게 당하고 부활할 때, 꿈처럼 잠깐 보았던 그 추한 꼬마 영혼.

왠지 모르게 부모님과 연관된 것 같았던 느낌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어, 아뇨? 그런 게 있었나... 잘 모르겠어요.”


“그런가요?”


그러나 민정은 그것을 천사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지금껏 그녀가 획득하는 모든 정보를 천사들이 통제했다. 그러나 이제 천사들은 모르고 자기만 아는 무언가가 생겼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것이 혹시 문제가 되지 않을지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이 사실을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천사들이 그 꼬마 영혼의 정체를 알려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범함으로 쾌감을 느끼는 것을 선택했다.






“갑작스럽게 민정이 앞에서 전투 모습을 보이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나래가 민정과 대화하는 동안 다음 여정에 대해서 결정을 내린 후 루미와 로운을 만난 해일이 그들에게 사과했다. 


“모의 전투는 어차피 한 번은 해야 할 일로 생각하긴 했어도 여정이 2부로 넘어간 후에 할 생각이었는데, 빠르게 하는 이유는 첫 번째는 사탄들이 제법 공격적으로 나오다 보니 민정이와 함께 있을 때에도 쳐들어올 것 같아요. 미리 우리의 싸움에 적응시킬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여정이 확정되었어요. 다음 여정까지 시간도 적당히 남았지만, 다음 여정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그전까지는 민정이가 자기 인생에 대해서 복잡한 생각 없이 머리를 비우게 해야 할 듯합니다. 그러니 본인 인생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모의 전투를 하게 되었습니다.” 


“네, 그럼 모의 전투는 어떤 식으로 하실 생각이세요?”


“평범하게 저와 천사님들이 공격과 방어를 번갈아가면서 하는 것으로 하면 될 것 같아요. 특별히 뭔가 더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해일이 앞으로 있을 ‘모의 전투’의 방향에 대해 결정을 내렸다. 천사들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네. 그러면 모의 전투 다음에는...?”


“제가 치료를 받는 동안 신주연 경호 팀에서 연락을 줬습니다. 신주연과 관련된 여정을 할 겁니다.”


“결국 그렇게 되었군요. 다음 여정은 목숨을 걸어야겠네요.”


“준비되면 나래 천사님이 민정이를 데리고 훈련장으로 오실 겁니다.”


‘모의 전투’준비가 끝나자 해일은 나래와 민정을 ‘수호천사본부 서울지부’ 안의 훈련장으로 불렀다.

이 순간만을 기다리던 나래가 민정을 데리고 순간이동했다.


“우와-”


운동장같이 평평하고 단단한 땅이 끝없이 펼쳐진 공터였다. 그 외에 나무라든지 구조물이 아무것도 없이 광활했는데 그게 꽤나 웅장해 보였다.


“민정씨, 미션은 잘 하셨나요.”


“예, 예.”


병원 탈출 이후 해일을 처음으로 만난 민정은 그에게 화를 내고 싶었지만 빨리 천사들의 전투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저 조금 툴툴거리며 넘어갔다.


“여기 모의 전투실은 자유롭게 환경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거라서 그냥 기본 장소로 할 겁니다.”


해일이 설명하자 주변 풍경이 확확 바뀌었다. 가파른 산지, 건물이 빽빽한 도심지, 심지어는 바다 위나 하늘 위의 풍경으로도 바뀌었다가 다시 넓은 공터로 돌아왔다.


“모의 전투는 저와 세 천사님이 공격하는 입장과 방어하는 입장으로 나눠서, 실제 싸움을 하는 것처럼 한 차례씩 공격을 주고 받는 과정으로 진행합니다. 승패의 기준은 민정씨입니다. 공격자들은 민정씨를 방어자에게서 탈취하는 것이 목적이고, 방어자들은 공격자에게서 민정씨를 보호합니다.”


전투의 승패 기준이 자신이라는 점에 민정은 놀랐다. 해일의 설명이 이어졌다.


“모의 전투는 민정씨가 앞으로 있을 수 있는 사탄과의 싸움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의도로 시행합니다. 민정씨는 싸움에 개입하지 않으시고, 이런 식으로 전투가 이루어지는구나 하고 느끼시면 됩니다.”


“네.”


민정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천사들은 매우 진지한 모습이었고 어느새 전투제복을 갖춰 입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각자 공격은 10분동안 진행하고 10분간 민정씨를 지키면 방어 팀의 승리입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죠. 먼저 제가 방어합니다.”


해일이 선언하고는 민정의 앞에 섰다. 세 천사들은 그를 마주 보고 십여 미터의 거리에서 일렬로 섰다. 민정은 한복 느낌이 나는 고풍스러운 흰옷을 입은 루미에게 특히 시선이 갔다.


윤기가 나고 아름다운 무늬로 꾸민 단색의 비단옷이었다. 저고리와 치마로 구분되지 않고 원피스처럼 하나로 연결되었으며 품이 넉넉했다. 루미의 흰 피부보다 조금 짙고 약간의 옥빛이 감도는, 수수하지만 아름답고 매력적인 옷이었다. 전투제복의 루미에게서는 느껴지는 고결함과 기품에 민정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마음을 빼앗겼다.

멋진 루미의 모습에 입이 벌어지려던 민정은 그녀의 사뭇 단호한 표정에 도로 입을 다물었다. 지금 루미는 민정의 적이었다. 루미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어떻게든 원하는 것을 얻겠다는 강한 의지가 마치 민정을 향한 적의에 불타는 듯 보였다.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키는 순간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 주인공은 루미였다.


“하앗-”


가장 먼저 강력한 돌풍이 몰아쳤다. 어느새 루미는 작은 부채를 손에 들고 강하게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묵직하게 쏟아지는 바람은 그에 비하면 가벼운 총소리를 내는 해일의 반격에 막혀 해일에게 닿지 못했다. 그는 양 손에 권총을 감싸 쥐고 동시에 방아쇠를 마구 당겼다. 옆에서 로운의 나무가 뾰족한 창 모양으로 날아든 것도 해일의 다른 총에 막혔다. 그는 양손으로 쉼 없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총을 쏘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 푸른색 곤봉을 들고 제법 위협적으로 크게 도약해서 내리꽂던 나래도 해일의 총을 맞고는 멀리 튕겨나갔다.


“와...”


민정이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든 속도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앞에서 거대한 힘들이 부딪히는 것이 느껴졌다. 저 사이에 민정이 서 있었다면 삽시간에 사지가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민정도 악령한테 얻어맞고 나가떨어진 적이 있었지만, 지금 나래는 해일한테 얻어맞고 수십 미터를 총알처럼 날아가서 처박히고는 다시 일어나서 전투적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 와중에 도대체 어떻게 바람을 총으로 막을 수 있는지가 궁금하던 찰나 쉼 없이 쏟아지던 공격이 잠시 주춤했다. 보니 나래와 로운이 계속 해일을 공격하는 동안 루미는 작은 부채를 양손으로 쥐고 가득 바람을 모아 쏘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큰 거 오겠다.”


생각하고 내뱉은 순간 민정의 생각대로 다섯 갈래로 쏟아지는, 건물도 무너뜨릴 것 같은 큰 바람이 해일에게 매섭게 쏟아졌다. 그러나 루미가 잠시 주춤하며 힘을 모으던 사이 해일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그 역시 양손의 권총 중 하나로만 다른 천사들을 막아내고, 나머지는 큰 힘을 모으는 중이었다. 그리고-


꽈앙-


엄청난 굉음에 민정은 귀를 막았다. 미사일이 터지면 이런 소리가 날까. 반경 수십 미터가 해일의 폭발 범위에 들어갔다. 루미의 바람이야 당연히 막혔고 천사들이 있던 곳도 거대한 힘이 휩쓸었다. 그러나 폭발의 여파가 사라진 그 순간,

가까이 다가온 나래가 곤봉을 크게 휘둘렀다. 해일의 발 아래로는 작은 나무뿌리들이 돋아나 그의 발과 다리를 옭아맸고 허리 부근으로 굵직하고 뾰족한 나무뿌리가 덮쳤다.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여러 공격을 마주한 해일이 위기를 맞이한 것 같았다. 민정은 순간 자신을 보호하던 해일이 위기에 빠진 것 같아 덜컥 겁이 났다. 


“조심해요-”


민정의 걱정 서린 외침이 해일에게 닿기도 전에 해일은 번개같이 움직였다. 총알이 쏟아져 곤봉을 막아내고 오히려 나래를 공격했고 허리를 공격하던 나무뿌리들도 튕겨냈다. 그러나 다리의 나무뿌리는 여전했고 나래도 튕겨나가지 않고 계속 곤봉을 휘둘렀다. 잘 보니 나래도 커다란 방패를 새로 들어 해일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총에 맞아도 튕겨나가지 않는 나래와 나무뿌리에 발이 묶여 움직임이 제한된 해일의 근접전이 시작되었다. 총알이 곤봉과 방패에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민정이 병원 미션에서 휘두르던 속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곤봉을 휘둘러대는 나래였지만 한 번도 양손에 권총을 든 해일에게 닿지 못했다. 거기에 로운이 가세하여 사방에서 나무줄기가 해일의 팔다리나 머리를 뚫으려고 몰아쳤다.


“와...”


민정의 입이 벌어졌다. 살벌하고 빠르고 강력하고 멋있었다. 착하디착하고 사이가 그렇게 좋아 보였던 천사들이 서로 머리나 몸통을 부숴버리려고 온 힘을 다해 공격하고 있었다. 그 속도가 인간을 한참이나 초월해서 민정의 눈으로는 따라가기도 힘들었으며 공격에 담긴 힘이 뒤에 동떨어져 있는 민정에게도 오싹하게 느껴지도록 강력했다. 그중에서도 세 천사의 공격을 두 다리를 움직이지 않고 서서 오직 두 개의 권총으로만 막아내는 해일의 모습은 그 수준을 달리함이 느껴졌다.


“정말 대단하네.”


민정이 중얼거렸다.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든 전투였지만 그녀는 지금 해일이 세 천사와는 달리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도 죽을힘을 다하는 세 천사들의 공격을 한 번도 허용하지 않고 여유롭게 막아냈고, 그 중에서도 총을 들고 근접전을 펼치는 모습이 압권이었다.


쾅-


다시 굉음이 나며 근접전의 균형이 깨졌다. 나래가 폭발에 튕겨나가 다시 수십 미터를 날아갔다. 


“쿨럭.”


날아가면서 기침을 하는 나래였다. 걱정스런 마음에 멀리서 보니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


나래는 훌쩍 뛰어오더니 해일에게 덤비지 않고 다른 천사들 옆에 섰다. 다른 천사들도 공세를 멈추고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해일은 그들을 공격하지 않고 정비했다.

소강상태였다. 민정은 긴장이 조금 풀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10분이라는 시간 제한이 있었기에 금방 전투가 이어졌다. 다시 천사들이 공격을 시작했고, 이번에도 루미였다.


“백학(白鶴), 홍학(紅鶴).”


루미가 말하자 하늘에 새 두 마리가 나타났다. 우아한 흰색의 새가 나래의 어깨에 앉자 나래의 입가에 피가 사라지고 표정도 편안해졌다. 또 다른 붉게 빛나는 새는 하늘 위에서 해일에게 붉은 화염을 쏘아냈다. 루미는 부채를 휘둘러 붉은 새의 화염에 바람을 더했다. 그러자 집채만 한 엄청난 화력의 불길이 해일을 덮쳤다.

민정은 감탄했다. 실로 장관이었다. 실력은 해일이 세 천사에게 앞섰지만 루미가 보여 주는 모습도 굉장했다. 가녀린 체구와 수수한 복장과는 달리 살벌한 기운을 쏟아내면서 화려하고 다채로운 기술들을 보여 주었다. 민정은 내심 해일이 이 화려한 기술을 어떻게 막아낼지가 기대되었다.


해일은 거대한 화염 돌풍을 향해 총을 들었다. 설마 지금껏 똑같이 총으로 뚫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루미가 성의를 보인 게 있는데...


타앙-


그저 약간 힘을 더 끌어모은 총알을 쏴서 화염 돌풍의 중심을 갈라지게 만드는 해일이었다. 민정은 해일 입장에선 나름 수준을 높인 공격임을 알 수 있었지만 화려함 없이 건조한 공격 기술에 살짝 실망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전투에 어느 정도 적응하여 관람 모드가 되어 버린 민정과 달리 천사들은 여전히 목숨 걸고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략을 바꾸어 좀 더 난전을 유도하는 천사들이었다. 주로 멀찍이서 로운과 루미, 그리고 홍학이 해일을 공격했다. 해일은 그런 그들의 공격을 총으로 방어하면서 반격을 가했는데 그 반격은 나래가 방패와 곤봉으로 막아냈다.

큰 공격보다 서로 소모전처럼 견제를 주고 받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주한 천사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고, 민정을 등진 해일의 뒷모습은 부인할 수 없이 든든했다. 눈으로 보고 인식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주고 받는 공방이 무서울 것도 같았지만, 민정은 점점 마음을 놓을 수 있었으나.


깡-


정신 없이 전투를 구경하던 민정의 바로 옆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났다. 어느 새인가 못처럼 작은 나뭇가지들 수십 개가 민정을 덮치고 있었다. 나뭇가지는 보이지 않는 방어막을 뚫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민정은 소름이 돋았다.

이 전투의 목적은 공격 측이 민정을 탈취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민정 본인에게도 직접 공격이 들어올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을 허용할 해일이 아니었다. 곧바로 로운에게 수많은 총알이 날아들었고 황급히 나래가 로운을 보호했다.


쾅-


굉음과 불, 나무, 폭발이 이어졌다. 민정은 두려우면서도 짜릿한 흥분을 느꼈고 그 이중적 감정에 도파민이 폭발하듯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천사들의 서로를 향한 날선 견제는 점점 한쪽의 우세로 흘러갔다.

루미, 나래, 로운은 점점 지친 기색을 보였지만 해일은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마치 뒤가 없는 것처럼 사력을 다하던 로운은 몹시 지쳐 보였다. 루미는 사투를 벌이면서도 노련하게 체력을 아낀 모습이었고 나래는 방어 위주로 활동하다보니 체력 소모가 덜했다.

이대로라면 균형이 무너진다고 생각한 로운은 힘든 와중에도 승부수를 띄웠다.


“생명력 넘치는 만물의 터전을 만들려니.”


로운 쪽에서 뭔가 강하게 태동하는 힘이 느껴졌다. 민정조차 그녀에게서 무언가 느껴졌고 진짜 큰 거 온다는 걸 알아차려 다급하게 외쳤다.


“해일-”


콰앙!


순식간에 강력한 영력을 준비한 해일 주변에 커다란 폭발이 터졌다. 민정도 폭발 범위 안에 있었지만, 피아를 구분하는 폭발이었고 해일과 민정은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피해는 오롯이 방금 그들 주변에 피어나기 시작한 반경 십여 미터의 숲이 뒤집어썼다. 열대 우림처럼 십여 미터가 넘는 거대한 나무들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와...”


나무의 정령이 혼신의 힘을 다해 피워낸 ‘숲’도 장관이었지만 그 숲이 생기자마자 모두 태워버리는 해일의 모습에 민정이 감탄했다. 준비한 일격이 수포로 돌아간 로운은 어지러운 듯 비틀거렸다. 빈틈이었다.


“아악!”


“로운!”


해일의 총알이 로운의 다리에 명중했다. 지금껏 나래가 열심히 막아냈지만 전부 막아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민정은 멀리서 로운이 다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깜짝 놀란 민정은 로운을 주목했다. 잔뜩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에서 극심한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민정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녀도 로운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천사들의 훈련은 장난이 아니었다. 서로 웃고 화기애애하던 천사들이 결국에는 피를 보고 끔찍한 고통을 주었다.


루미의 백학이 로운의 다리를 치료하여 상처가 아물어갔다. 그러나 해일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날카로운 총알이 흰 새를 찢을 듯이 매섭게 날아갔다. 무척이나 빠른 속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정은 이번에는 마치 슬로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총알이 날아가는 모습을 똑똑히 인식할 수 있었다. 본인이 부리는 마법 같은 일에 놀랄 틈도 없이 나래가 총알 앞에 서는 것을 봤다. 총알이 방패를 때렸다. 그리고 뒤이어 더 강한 힘을 품은 총알이 날아와, 길을 막고 선 방패를 설명하기 어려운 궤적으로 피해 넘어갔다. 나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앗!”


놀라운 광경에 민정이 내지른 탄성이 백학의 비명소리를 묻었다. 급소가 뚫린 백학은 땅에 떨어지지도 못한 채 공중에서 그대로 소멸했다. 루미가 비틀거렸다. 그러나 백학이 소멸하는 동안 루미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성령의 불이여, 모든 악을 태우소서.”


백학에게 총알이 명중하기 전에 이미 홍학이 온 힘을 다해 화염을 뿜어냈다. 영력이 다한 홍학은 백학과 함께 소멸했고, 역시 온 힘을 다해 태풍을 일으킨 루미는 이게 마지막이다, 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집채만 한 화염 회오리가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돌진하는 것을 민정은 입을 벌리고 쳐다보았다.


해일의 총에서 번쩍거리는 빛이 났다. 나래가 다급히 앞으로 뛰었다.


정말로 세상을 집어삼키는 강한 섬광이 일었다. 민정은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지만 억지로 눈을 부릅뜨고 앞을 쳐다보았다.


쾅-


거대한 폭발 앞에서 나래가 로운과 루미를 지키고 섰다. 루미는 힘이 다했고, 로운은 나래의 방패를 두꺼운 나무로 덮어씌웠다. 그리고 폭발이 천사들을 뒤덮었다.


“...”


승패가 결정되었다. 약간 지쳐 보이는 해일은 멀쩡하게 서 있는 반면 천사들은 어디 한 곳 성한 곳이 없어 보였다. 여기저기 긁히고 다쳤다. 나래는 방패를 짚고 간신히 앉아 있었고 로운은 아예 누워서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그녀의 다리에서는 여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만 루미는 비교적 우아한 모습을 유지했다.


“쿨럭, 고생하셨습니다.”


걸레짝이 된 방패를 손에서 놓고 주저앉은 나래가 기침을 하면서 피를 조금 토했다. 하지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고 해일이 대답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조금 쉬었다가 공수 교대해서 진행하겠습니다.”


바닥에 쓰러져 누워 있던 로운이 몸을 일으켰다.


“으어어...”


앓는 소리를 내는 로운의 표정은 그래도 개운해 보였다. 루미는 나래와 로운을 일으켜세우고는 민정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희는 회복하고 올게요. 잠깐 쉬었다가 반대로 시작하겠습니다.”


세 천사가 동시에 사라졌다.

이전 11화 사연녀와 그녀의 수호천사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