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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틀리제 Oct 02. 2024

사연녀와 그녀의 수호천사들

14화 : 민정의 세 번째 여정(2)

주연은 별로 민정과 친한 사람은 아니었다. 주연은 민정에게 더 친밀감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민정은 그렇지 않았다.

나이는 그녀보다 두 살 많은 스물셋이었고, 원래는 4학년이었지만 일 년 휴학해서 3학년이었다. 그래서 나이는 두 살 차이, 학년은 한 학년 차이가 났다. 민정은 친한 선배가 하나도 없었는데, 신주연만큼은 수업을 같이 들었기 때문에 그래도 안면은 있었다.


“신주연 씨 생각이야 제가 알지는 못합니다. 이번 여정에서 그것도 확인해 보시죠.”


“으음.”


“민정씨 어머니 때처럼 자세하게 알지는 못할 겁니다.”


“휴우...”


민정이 학교 옥상에서 떨어진 것도 5일이 넘게 지났다. 엄마가 머리나 감겨 줬는지 모르겠다. 꼴이 말이 아닐 텐데.


어차피 상관 없을까. 죽으려고 뛰어내린 사람 꼴이 보기 좋은 것도 우스운 일일 것이다.

주연 언니는 왜 나를 찾아올까. 그들의 인연은 기껏해야 지난 학기에 일주일에 세 번씩 같은 수업을 들었을 뿐이었다. 조별 과제가 끝났을 때는 같이 밥을 먹은 적도 있긴 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밥만 먹었었다.

나라면 나 같은 후배가 뛰어내렸다고 해서 딱히 병문안을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부담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주연 언니는 나 같은 사람이 아니다.

주연 언니는 천사 로운과 루미를 섞은 것 같은 사람이다. 로운처럼 밝고 명랑한 점도 있는가 하면 루미처럼 우아한 점도 있다. 

1학년짜리 신입생이 봤을 때 저런 선배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다. 어른스럽고 아는 것도 많고...

무엇보다 배려심이 많다. 베풀고 도와주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이다. 수업 때 강의실에서 만나면 먹을 것도 주고, 필기도 도와주고, 시험 범위에서 중요한 부분도 집어 줬다. 그밖에 조별 과제 역할 분담 같은 부분이나 심지어 강의실 의자가 불편한지 아닌지 같은 것도 물어봐 주고 챙겨 주는 사람이었다.


민정은 신주연이 본인 병문안을 오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자기를 도와 준 것들이 끊임없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런 점이 민정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지점이었다. 민정이 신주연의 입장이었다면 병문안을 가는 것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당히 도덕적인 사람은 뛰어나게 도덕적인 사람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법이었다.


천사들은 그런 민정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다. 루미는 해일에게 우려를 표했었다.


“민정이는 주연이를... 불편해하죠. 물론 우리가 하자고 한다면 거절하지는 않겠지만, 민정이가 잘 해낼 수 있을지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민정이 태어났을 때부터 민정을 경호해 온, 인간과 천사를 통틀어 민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존재의 말이었다.


“루미 천사님이 그 정도로 말씀하시니... 저도 조금 자신이 없어지네요.”


웃고 있던 해일의 미소도 사라졌다. 그렇지만 해일은 여유를 잃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도 좀 더 민정이가 준비되면 신주연 여정을 하고 싶었는데, 이건 신주연이 병문안을 올 때 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신주연 경호 팀도 이렇게 일찍 병문안을 오는 건 생각지도 않고 있었는데, 갑자기 신주연이 결심을 했어요. 모든 변수를 통제하고 싶지만 불가능하죠.

하지만 지금 당장 민정이가 별 생각 없이 신주연을 만난다고 해도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나중에 때가 되고 준비가 되면 신주연과의 만남을 생각하면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렇다 보니 최대한 미래지향적이고 민정이 기억에 남을 만한 방향으로 이번 여정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시간이 많진 않을 텐데요.”


로운이 걱정스레 말했다.


“나래한테 시간 좀 끌어달라고 부탁해야겠네요.”


루미가 말했다.


“나래 천사님이 고생하시겠네요.”


“히히, 어쩔 수 없죠. 다들 고생하는데.”


나래가 고통받는 것을 즐거워하는 로운이었다. 그녀는 나래가 시간을 끄는 동안 미래지향적이고 기억에 남을 만한 신주연 여정이 될 수 있도록 준비를 했다.


“...그렇게 하면 되겠군요!”


짧은 시간이나마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천사들은 현 시점에서 나름대로 민정에게 미래지향적인 깨달음을 줄 만한 방법을 찾아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현재, 기대에 차서 민정을 바라보는 천사들에게 민정은 한참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좋아요. 할게요. 내가 뭘 하면 되죠?”


“시간에 맞춰서 민정씨가 입원한 병실에 가면 신주연씨가 올 겁니다. 그 때 신주연씨의 영혼을 보면 됩니다. 그 전까지는 여기서 잠깐 기다리시죠.”


“알았어요.”


“10분 정도 있다가 이동하면 될 것 같습니다.”


남은 10분간 그들은 모의 전투에 대한 감상을 나누었다. 10분 후에 천사들은 다같이 민정이 입원한 병실로 순간이동했다.


민정의 첫 번째 여정을 진행했던 장소에 이번에는 모든 천사들이 함께 모였다. 김현숙은 비교적 깔끔한 옷을 입고 있었다. 민정은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자기 머리가 감겨져 있음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평일 낮의 병실은 고요했다. 신주연의 도착을 기다리는 잠깐 동안 민정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적막하고 무기력한 병실의 분위기를 살폈다. 아마도 반평생을 바쁘게 움직이며 살아왔을 김현숙이 조용히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어쩌면 이 순간이 그녀에게는 휴식과도 같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녀가 원하지 않는 휴식이겠지만.


병실 문이 열리고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 수수하지만 밝은 원피스를 입고 구두를 신고 있었다. 민정은 그 옷의 밝음에 감탄했다. 


“안녕하세요. 민정이 학교 선배 신주연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와 줘서 고마워요.”


김현숙이 신주연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어머니, 많이 힘드시죠?”


신주연은 김현숙에게 위로하는 말을 건네고 민정에게 다가갔다. 창백하게 누워 있는 민정을 위해 준비해 온 선물이 있었다. 예쁜 종이봉투에 담긴 것은 기초화장품 세트로 민정이 쓰는 종류의 것이었다. 같이 수업을 듣던 때에 나눴던 사소한 대화 중에는 사용하는 기초화장품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던 것이다.


“민정이 얼굴 좀 씻어주고 이거 발라줘도 괜찮을까요?”


스스로 삶을 포기한 이에게 기초화장품을 선물해 주고 더 나아가 직접 발라주려고 하는 신주연의 심리에 대해서도 민정은 생각할 거리가 많았겠지만, 지금 그녀는 신주연의 육신의 행동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신주연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 함께 들어오는 존재가 있었다. 희고 깨끗한 옷을 입고 얼굴에서는 빛이 뿜어져 나와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존재였다. 다만 민정은 그 존재가 신주연의 영혼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신주연 영혼의 강렬한 존재감에 휩쓸려 넋을 놓고 쳐다보는 그때 뒤에서는 신주연을 경호하는 천사들도 들어왔다. 그러나 해일을 비롯한 천사들이 미리 준비하여 민정은 그들을 볼 수가 없었다. 대신에 민정은 신주연 영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어떠한 환상을 보게 되었다.


눈앞에 있는 영혼의 주인인 신주연이 기뻐하며 웃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퇴원하고 복학해서 학교를 다니는 민정이 있었다.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신주연이 슬퍼하며 울고 있었다. 신주연이 장례식장에서 민정의 영정사진을 쳐다보는 장면이었다.


“민정씨?”


짧은 환상이 끝나자 해일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타이밍 좋게 민정에게 말을 걸었다. 병실에서 신주연의 육신은 민정의 얼굴에 화장품을 펴 발라 주고 있었다. 신주연 영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주연 언니 어디 갔어요?”


민정이 홀린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해일이 대답했다.


“신주연씨의 영혼을 보셨습니까? 보셨는데 지금은 안 보이시나요? 신주연씨 영혼은 지금도 이곳에 존재하고 계십니다. 다만 존재의 차원이 달라서 보기가 어려울 겁니다. 이해하기 어려우시겠습니다만.”


해일은 살짝 놀랐다는 듯이 설명했다.


“환상을 봤어요.”


“환상이요?”


“제가 본 것이 미래인가요?”


민정이 멍하게 물었다. 자기가 본 장면에 대해서 설명하지도 않았지만 해일은 당연히 대략적으로 어떤 환상이었는지 알고 있었다.


“어... 민정씨가 무얼 보셨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 장면이 미래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미래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앞날을 예지하는 환상이었을 수도 있지만 단순하게 민정씨의 상상력이나 의지가 구성한 장면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육신이 꿈을 꾸는 것처럼 말이죠.”


해일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도 신주연씨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어라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민정씨가 깊이 생각해 보고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신주연은 세 가지 화장품을 민정의 얼굴에 꼼꼼히 펴 발랐다. 창백한 피부에 조금은 생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서 김현숙이 잘라 준 케이크와 포도를 먹으면서 이십여 분간 대화를 나누었다. 민정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신주연이 면회를 끝내고 돌아가자 천사들도 민정을 데리고 그들의 본부로 돌아갔다. 신주연 여정이 끝났다.






해일은 민정이 환상을 보는 짧은 시간 동안 천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번 여정이 끝나면 민정이가 일기를 쓰게 해야겠습니다.”


해일이 민정에게 일기를 쓰게 시키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지금까지의 여정을 통해서 느낀점을 정리하게 하는 것이고, 하나는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서 의논할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민정씨도 일기를 한번 써 보시는 건 어때요? 이번 여정이 끝날 때까지.”


민정을 설득하는 역할은 루미가 맡았다. 루미는 현재 민정이 가장 경외하는 천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새하얀 공책과 화려한 볼펜을 아직 여정의 여운을 벗어나지 못한 민정에게 보여주었다.


“일기요?”


일기 쓰기를 참 싫어하는 민정이었으나 루미가 말하자 관심을 보였다. 


“네. 여정 사이에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남으니까요. 일기 쓰기는 여정과 직접적 연관은 없기 때문에 꼭 해야 되는 건 아니고, 그냥 제안만 드리는 거예요. 아무래도 민정씨는 하루하루 겪은 것들을 잘 기록할 필요는 있을 테니까요.”


“음, 그렇죠.”


민정은 초등학교 이후로는 취미로라도 일기를 써본 일이 없었고 일기를 쓴다는 것은 매우 귀찮은 일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루미의 말이라면 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고 싶은 민정이었기에 그녀는 일기를 쓰는 것을 매우 진지하게 고려했다.

생각해 보니 루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처럼 어차피 하루하루를 정리하고 기록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고, 심지어는 지금도 머릿속으로 그런 것들을 정리하느라 애쓰는데 차라리 처음부터 일기를 쓸걸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저, 그러면 부탁드릴 게 있는데.”


“그게 뭐죠?”


“제가 쓰는 내용들을 따로 확인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실 수 있나요?”


“아, 그럼요. 이건 그냥 민정씨가 마음대로 쓰면 되는 거에요. 절대로 민정씨의 일기 내용을 확인하지 않겠다고 약속드릴게요.”


루미가 걱정 말라는 듯이 분명히 말했다. 다른 천사들도 고개를 끄덕이니 민정은 안심했다.


“여기 노트가 있으니 쓰시면 돼요. 만약 노트북 같은 전자기기로 일기를 쓰고 싶으시다면 준비해 드릴 테니 말씀해 주세요.”


루미는 들고 있던 공책과 볼펜을 민정에게 건네주었다. 민정은 고맙다고 인사한 후 공책을 펼치고 앉아서 잠깐 생각에 잠겼다.

천사들은 그 옆에 멀찍이 앉아서 차를 마시면서 쉬는 시간을 가졌다.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민정이 보기에는 예쁜 찻잔에다가 차를 따라놓고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그들이 평화롭고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들을 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들은 아주 치열하게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신주연은 역시 잘 해줬습니다. 그리고 민정이도 잘했어요. 우리가 준비한 대로 민정이는 신주연과 관련해서 무언가 환상을 봤어요. 구체적인 장면은 알 수 없지만 본인과 신주연의 ‘인연’에 대한 내용인 건 확실하겠죠.”


해일이 기뻐했다.


“그럼 신주연의 존재가 민정이가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할 이유 중 하나가 될까요?”


루미가 희망을 담고 물었다. 그것이 천사들이 신주연 여정을 준비한 궁극적인 목표였다.


“거기까지는 아닐 수도 있죠. 민정이는 자기가 본 환상이 미래냐고 물었죠. 저는 그렇다고 말하지 못했구요. 민정이도 본인이 삶을 선택해서 육신으로 돌아갔을 때 남은 생에 신주연이라는 인물과 인연이 되어 희망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수도 있겠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기를 기대하고 그런 환상을 보여줬지만.”


해일이 입맛을 다셨다.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민정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최소한 신주연이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 겁니다. 우리가 의도한 대로 일은 이루어졌지만 그 효과가 제대로 나타날지는 알 수 없군요. 이 인생여정에서 민정이가 아무리 김현숙씨에 대해서 깊이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김현숙씨를 심리적으로 친밀하게 의지하기는 어려울 테고, 결국 마음을 열고 의지할 사람은 신주연밖에 없는데. 민정이가 그 사실을 강하게 깨달을 수도 있고 어렴풋이 깨달을 수도 있으나, 중요한 건 그 사실을 받아들이느냐 외면하느냐고, 그건 민정이의 몫이죠.”


천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일은 다음 주제로 회의를 이어나갔다.


“벌써 여정을 시작한 지 5일이 지났습니다. 총 21일간의 여정 중에 1부 적정 기간을 14일로 잡았으니 1부도 3분의 1정도 지났군요. ”


“걱정을 많이 했는데 지금까지는 잘 되고 있는 것 같아요.”


루미가 지금까지의 여정을 평가했다. 다른 천사들도 이에 동의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해일은 전반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의견을 말했다.


“여정 진행 자체는 성공적인데 사실 민정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확인이 필요하죠. 민정이는 눈치가 빠르고 사람의 의도를 분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 의도를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민정이가 어느 쪽으로 선택을 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는지를 물어보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죠.”


나래가 말했다.


“저도 고민 중입니다. 민정이가 우리 의도를 거의 알아차렸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을 떠보려고 하는 것 자체가 민정이에겐 부담일 거예요.

거기에 민정이 성격상 우리와 민정이가 서로 무슨 마음인지를 다 안다고 할지라도, 즉 우리가 본인이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한다는 걸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그걸 직접 요구하는 티를 내는 것은 민정이에겐 다른 문제가 됩니다.”


해일이 말했다. 민정은 청개구리 같은 성향이 있었다. 누군가 자기가 정한 선을 넘어서 자기에게 간섭을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차라리 반대로 해 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민정이의 마음을 확인하지 않고 이대로 진행만 할 수는 없긴 합니다. 다음 여정을 하고 그다음 여정을 하기 전에 쉬는 시간에 뭔가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천사님들의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사탄들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아직은 아무런 낌새가 없습니다. 본부에서 따로 첩보가 오지도 않았고요. 놈들이 죽지 않고 무사히 도망쳤는데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으니 불안하군요.”


해일이 말했다.


“그래도 바뀌는 건 없으니 그대로 진행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탄들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가 없으면 안 됩니다. 본부에서 정보를 전달해 주지 못한다면, 지하영계에 대한 정찰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해일이 말을 흐렸다. 나래가 그에게 대답했다.


“내가 갈게. 민정이가 다음 여정을 시작하면 출발할게. 팀장님이랑 로운이는 제1본부를 지키고.”


“후우, 위험하겠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내가 제일 적당하잖아. 경호 일에 더 위험하고 덜 위험한 일이 어딨어. 여차하면 바로 도망치면 되고. 지옥이나 무저갱도 아니고 지하영계쯤은 괜찮지.”


“정보가 필요하긴 하지만 어차피 사탄들이 꽁꽁 싸매놓았을 거고, 놈들의 현재 움직임만 파악할 정도로 가볍게 정찰만 갔다 와 주세요.”


해일이 걱정하며 말했다.


“걱정 마. 다녀올게.”


"나래 천사님께서 수고해 주시는 동안 저는 다음 여정을 진행하겠습니다. 나래 천사님은 준비가 되시면 바로 출발해 주세요. 다른 두 분은 본부를 잘 지켜 주시고요. 민정이가 일기를 다 쓰면 다음 여정을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네. 민정이가 일기를 열심히 쓰고 있네요.”


민정은 천사들이 타준 차를 홀짝거리며 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편안해 보이는 자세와 여유로운 미소는 천사들의 걱정을 덜어 주었지만, 정작 민정의 머릿속에서는 큰 폭풍이 몰아쳤다.


-천사들이 나에게 숨기는 것이 너무 많다. 그리고 다 알려주지도 않으면서 나에게 원하는 것이 많다. 약간은 어린애 취급을 당하는 것 같다. 천사들이 보여주고 알려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나래는 쓰레기 더미로 뒤덮인 오염된 길을 조용히 걸었다. 도처에 깔린 악령들을 마주치거나 사탄의 감시망에 발각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방검복에 전투경찰 방패까지 든 전투제복 차림이었다.

지하영계는 본래 정말 땅속의 영계를 말함이 아니었고, 오히려 지상영계의 일종이었다. 지상영계 중에는 악령들이 주관하는 구역이 있었다. 천국에 거주하는 천사들이 지상영계에 거점을 만들어 놓듯 지옥에 거주하는 사탄들도 지상영계에 거점을 만들어 그들의 필요로 사용하였다. 땅속 깊숙이 존재하는 지옥과 같은 성질을 가진 이러한 영계를 천사들은 지하영계라고 불렀다.

이곳 넓디넓은 지하영계에는 피보라 팀이 사용하는 거점도 있었다. 지하영계가 대부분 그렇듯이 그곳으로 가는 길은 꽤 지저분했다. 죄의 썩은내가 진동하는 곳이었다. 토사물, 무언가의 시체, 피, 벌레가 무분별하게 널려 있었음에도 나래는 그러한 것들을 적극적으로 피하지 못했다. 천사의 능력을 사용한다면 피하는 것을 넘어 모두 없애 버리면서 전진할 수도 있었으나 그러면 사탄들에게 발각될 것이 분명했다. 그는 오물이든 벌레든 튼튼한 신발로 밟고 가야 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신경이 곤두선 나래는 역겨움을 심하게 느끼지 못했다. 해일 앞에서는 큰소리쳤지만 그는 무척 위험한 상황임을 알고 있었다. 언제든지 본부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 축복을 미리 준비해 온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피보라와 그 수하인 피철철, 피칠갑 정도라면 즉시 도망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지만, 악화나 악의가 직접 움직인다면 축복을 사용하지도 못하고 당해버릴지도 몰랐다.


‘설령 죽더라도 놈들이 무슨 꿍꿍이인지는 알아내야 한다.’


그것이 나래의 각오였다. 정보만 전달해 주면 나머지는 해일이가 알아서 잘 할 것이다. 자신이 40시간의 부활 기간을 보낸다 해도 여정에는 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해일이 시킨 대로 가볍게 정찰만 하고 와야겠지만,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도 그러했다.


“거의 다 와 가네요.”


“네.”


나래에게 소곤거리는 천사는 수호천사본부 서울지부 정보부 소속으로 이름은 신하(神下)였다. 정보부 공식의 푸른 군복을 입은 그는 해일의 요청으로 본부에서 이번 정찰 작전을 위해 파견을 온 천사였다.

신하 천사의 말대로 나래는 저 멀리에서 검붉고 끈적한 액체가 허공에서 유영하는 유리벽을 볼 수 있었다. 수족관 같은 그 해괴한 공간이 피보라 팀이 지하영계에 세운 거점이었다. 


“이제 작전을 시작할까요.”


“적당한 악령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들은 사탄에게 들킬세라 극히 조심히 소곤거렸다. 정보부 소속 천사들이 온갖 영물도 보내고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한번 해일에게 패배한 후 악화를 비롯한 사탄들은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도 철저하게 정보를 통제했다. 해일조차도 그렇게 하지는 못했었다.

어려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 영계의 법칙이었다. 결국 나래가 정보부 천사를 대동해서 지하영계까지 왔고, 둘은 함께 사탄의 눈을 속이고 정보를 수집할 작전을 세웠다.


나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한 악령이 힘없이 누워 있었다. 비쩍 마른 채로 쓰레기 더미 속에 파묻혀 있는 악령을 나래는 끄집어 내었다.


“이봐.”


“아이고, 천사님.”


거렁뱅이 악령은 비굴하게 나래에게 인사했다. 나래는 차갑게 말했다.


“저기 앞까지 가서 저 유리벽에 이걸 던지면 먹을 것을 주지.”


나래는 품에서 작은 수류탄과 한 덩이의 빵을 꺼냈다. 빵을 쳐다보는 악령의 눈에 탐욕이 어렸으나 악령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저 사탄님들을 건드리는 건 자살행위인데요. 특히 요즘에는 못 보던 사탄님들도 오셔가지고 주변을 싹 정리하셨는데. 잘못 걸리면 곱게 못 죽습니다.”


“싫으면 말고.”


나래가 냉정하게 돌아서자 악령이 나래에게 매달렸다.


“천사님!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쇼.”


“조건 없는 대가는 없다.”


“알겠습니다. 빵을 먼저 주십쇼.”


나래는 비굴하게 웃는 악령에게 작은 빵을 던졌다. 악령은 빵을 거의 한 입에 삼키더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빨리 움직여. 저기 저 지점에서 정확하게 던져라.”


나래가 명령하자 악령은 발을 질질 끌면서 가는 듯 마는 듯하였다. 나래가 곤봉을 꺼내들자 그제야 악령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갑니다.”


악령은 툴툴거리면서 느릿느릿 나래가 지시한 장소로 걸어갔다. 나래는 신하와 함께 기척을 죽이고 유리벽에 가까이 접근했다.


수조같이 투명한 유리벽에 둘러싸인 사각형의 방은 사탄의 거점답게 어두웠다. 하수도의 오염수 같은 새카만 색에서 약간의 붉은빛을 더했으면서 끈적한 점성을 가진 액체가 투명한 유리 안에서 나름의 물결을 그리고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옆으로, 다시 위로, 자아를 가진 생물 같기도 했지만, 일정한 알고리즘으로 움직였다.

중간에는 의자가 있었고 익숙한 사탄들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눈은 검붉은 빛이 났고 어두운 기운이 가득했다. 검붉은 방과 대비되는 새빨간 모습의 사탄들이었다.


‘피보라와 그 수하들이군. 악화 쪽 사탄들은 다른 곳에 있는 건가.’


나래가 신하를 돌아보며 눈빛으로 말했다. 강력한 악화가 부재한다는 것은 정찰을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피보라 팀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기 위해서는 더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그러면 언제 발각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나래는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극도의 긴장과 집중으로 감각이 예민해졌다. 사탄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그리고 목소리가 조금씩 들렸다.


“다음으로 우리가 할 일은- ...이다.”


소름끼치는 피보라의 목소리가 얼핏 들린 순간 나래는 생각을 바꾸었다.

이건 함정이다.

하지만 걸려들 가치가 있는 함정이다.

한 번의 목숨보다 한 번의 정보 수집이 더 중요한 순간이 되었다. 마치 그들의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 순간에 몰입했던 나래는 펑 하는 폭발음을 듣자마자 유리벽으로 돌진했다. 곤봉으로 유리벽을 세게 때리자 유리벽이 깨졌다. 금방 다시 복구되었지만 이미 나래와 신하는 유리벽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신하는 곧바로 정보 수집을 시작했다. 그는 손에 작은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정보부 소속 천사들이 정보를 수집하는 도구였다. 정보 수집기는 곧바로 유리벽 안에서 최근에 있었던 모든 시간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유리벽 안에 잠입하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정보 수집에 필요한 시간만큼 나래가 버텨주느냐이다. 몇십 시간의 정보를 수집하는 데는 불과 몇 초 걸리지 않기는 하지만,


“크악!”


사탄들은 천사의 방문을 예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현장에 없는 척 모습을 숨기고 있던 악행이 나래의 방패를 때렸다. 나래보다 월등히 강한 그의 힘에 튕겨나가려는 나래를 붙잡은 것은 악행과 늘 함께 다니는 악의였다. 나래는 순간 영력을 집중시켜 방패를 강하게 만들었지만, 우그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패는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악의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분노한 악화가 나래의 방패를 뚫어버렸다.


이미 악화 팀과 나래의 영력 차이에, 수적으로도 압도적으로 불리하고, 장소가 지하영계의 사탄들 거점인 점, 그리고 사탄들이 이미 천사가 올 것을 알고 준비중이었다는 점 등 모든 점에서 나래의 상황은 암울했다. 몇 초도 버티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 그러나 나래가 아무 이유 없이 죽음으로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작전을 위해 지원을 받은 모든 영력을 모았다.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지킵니다.”


구겨진 방패가 펴지더니 은은한 빛이 흘러 두 천사를 감쌌다. ‘기술’을 거의 연마하지 않고 기본기로 승부하는 나래의 몇 안 되는 기술이었다. 천사 나래가 본인의 생존을 포기하고 모든 영력을 쏟아붓는다면 본인 영력 대비 수십 배에 달하는 공격도 막을 수 있는 희생의 방패였다.


“쯧.”


나래의 절대 방패를 확인한 악화가 혀를 찼다. 악화는 나래가 적당히 근처에만 왔다가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한 번의 정보 수집을 위해 죽음을 택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예상했다 한들 '기술'의 사용을 막기는 어려웠겠으나 예상대로 되지 않은 것 자체가 불쾌한 것이었다.


“처리해.”


기분이 나빠진 악화는 차갑게 명령했다. 악행을 비롯한 모든 사탄들이 나래를 에워쌌다. 유리벽 안을 유영하던 끈적한 핏물들도 성난 뱀처럼 나래의 앞에서 솟구쳤다.


신하 천사는 이미 정보 수집을 완료하고 축복을 사용해 본부로 귀환했다. 기술을 써버린 나래에게 사탄들이 할 일은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서 다시는 이런 짓을 할 엄두를 못 내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자기 목표를 달성한 나래는 눈을 감고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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