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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틀리제 Oct 04. 2024

사연녀와 그녀의 수호천사들

15화 : 민정의 선택

제2본부에서 민정을 데리고 다음 여정을 진행하던 해일은 나래의 부고를 전해들었다. 해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까지 하시기를 바라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해 주셨으니 요긴하게 쓰겠습니다.’


나래가 목숨을 버려가면서 정보를 얻은 이유가 있을 터였다. 정보부에서 획득한 정보를 분석해서 알려줄 것이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누구 하나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이신데. 배 아파요?”


“아닙니다. 그래서, 언제일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생각을 오래 해 봤는데 그 때밖에 없어요. 내가 어렸을 때.”


민정이 우울한 듯이 말했다.


“아빠 돌아가시기 전에 아파트에 살았을 때. 그때가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일 거예요.”


“확인해보시죠.”


풍경이 바뀌었다. 햇빛이 넉넉하게 내리쬐는 오후의 아파트 단지였다. 제1본부를 닮은 모양의 아파트 단지 안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노는 웃음소리와 새소리가 들렸다. 놀이터 한가운데 한 여자아이가 홀로 어딘가를 보면서 미소짓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발 아래에 둔 대부호나 권력자라도 가지지 못할 밝고 순수한 미소였다.


그리고 그 미소가 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오는 두 남녀는 이 풍경 속의 히로인이었다. 소녀의 미소에 뒤지지 않는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는 남녀를 민정은 속절없이 불렀다.


“엄마, 아빠.”


부른다고 대답이 돌아올 수는 없었다. 민정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다시는 올 수 없는 과거에 박제되어 있었다. 


“당연히 예상했던 바예요. 아빠가 살아계실 때가 제일 행복했을 거예요. ”


민정은 이제 해일이 묻지도 않았는데 이야기를 술술 꺼냈다. 


“그 이후는 집도 가난해지고, 엄마는 웃는 법을 모르게 되었어요. 행복은 나에게서 멀어졌죠. 하지만 분명히 그 전에, 그러니까 아빠가 살아계실 때는 행복한 순간들이 많았어요.”


민정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해일에게 질문했다.


“이 장면은 정확히 언제죠?”


“민정씨의 아홉 번째 생일날을 기준으로 재구성한 장면입니다. 실제 그 날과 비슷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고요.”


“신기하네요. 내 과거의 일이라서 그런가, 아주 생생해요. 다른 사람의 삶을 볼 때와는 달라요.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요. 나도... 이렇게 순수하게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군요.”


행복했던 순간의 감정을 다시금 느끼는 행복함과, 이 행복감을 다시는 느낄 수 없다는 절망감이 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민정은 그 속내를 조금씩 표현했다. 해일은 그녀의 속내를 정확히 알아내기 위해 신경을 집중했다. 이번 <가장 행복했던 순간> 여정에 대해서 다른 천사들의 반대는 물론 해일 본인도 고민이 있었다.


‘죽은 아버지는 다시 만날 수 없어. 어쩌면 민정이가 그 사실에 절망하여 삶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양날의 검이다.’


자칫 최악의 경우에는 지금까지 민정이를 삶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한 모든 수고가 허사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해일은 그렇게 일이 틀어질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는 판단이 있었다.


‘민정이는 순간의 감정에 휘둘려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순간의 감정을 넘어서서 자기 행동의 근원이 되는 신념과 사상이지.’


지금까지 여정도 크게 보면 그런 기준으로 해 왔었다. 어머니 김현숙을 이해하는 것,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그것을 대하는 태도를 되짚었던 ‘걱정이 많은’, 그리고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을 심어 준 ‘겁이 많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의지할 수 있다는 신주연까지, 모든 여정은 조민정으로 하여금 다시 삶을 선택하고 그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생각을 바꾸는 과정이었다. 


실제로 민정의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아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해일은 지금껏 민정은 자신의 의도를 충실히 따라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여 이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하였다. 이번 ‘행복한 순간’ 여정에서는 지금까지의 여정들보다 훨씬 간접적이지만 근원적으로 민정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해일의 의도였다. ‘행복한 순간’은 미끼였고 그 안에는 해일의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


“그런데 엄마랑 아빠가 저렇게 행복해하시는 것도 처음 보는 것 같아요. 마치... 엄마 아빠의 가장 행복한 순간도 나와 마찬가지로 지금인 것처럼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민정의 행복한 미소에 못지않게 환하게 웃고 있는 민정의 부모였다. 민정은 그 미소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리고 마침내 해일이 기대하던 말을 했다.


“아빠랑 엄마가 나를 많이 사랑하긴 했나 봐요.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미소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네요.”


"아마도 그러시겠죠."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해일은 속으로는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민정 자신이 큰 사랑을 받는 존재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이번 여정의 목적이었다. 이제는 스스로 목숨을 버릴 때보다 본인의 가치를 더 높이 생각할 수 있을 터였다. 비록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때로는 민정의 마음을 꺾을 일도 있을 수 있으나, 적어도 민정이 삶을 선택하는 데는 도움을 줄 것이었다.

더 열심히 살아야지. 나는 사랑을 받는 사람이니까. 민정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리라.

해일은 환하게 웃고 있는 남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들을 보니 정찰을 갔다가 희생한 나래가 생각났다.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이지만, 늘 다른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존재하는 민정이었다. 





“정보부에서 정보 분석이 끝났습니다.”


루미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장 행복한 순간> 여정을 간단하게 성공시키기는 했지만 나래의 죽음 때문에 천사들의 분위기는 가라앉은 상태였다. 여정이 끝난 민정은 쉬면서 일기를 쓰게 하고 천사들은 제2본부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나래가 끔찍한 고통을 감내하며 얻은 정보를 토대로 전략을 세울 시간이었다.


“분석에 따르면 현재 사탄들은 ‘땅 넓히기 전략’을 사용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대략 1만 이상의 악령을 동원하여 병원, 학교, 제1본부 주변과 2본부 등등 민정이와 관련이 있는 지상영계를 점령하고 악의 기운으로 물들일 예정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완전한 선의 장소인 천국과 완전한 악의 장소인 지옥과 달리 지상영계는 선 또는 악으로 그 성질이 물들 수 있는 특징이 있었다. 존재하는 장소가 선하냐 악하냐는 그곳에서 활동하는 영들의 능력이나 축복의 효과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여 천사들과 사탄들은 각자 자기들이 활동할 영역인 지상영계를 선 또는 악의 성질을 갖도록 만드는 땅따먹기를 하면서 서로 대결하였다. 악의 성질로 많이 물든 곳은 지하영계가 되는 것이었다.


“거기에 놈들이 준비한 ‘저주’가 영력 강화 외에 집단 순간이동, 순간이동 방해, 사념 방해, 현혹, 등 다양하다고 합니다. 자세한 것은 자료로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천사들이 ‘축복’을 사용해서 여정을 진행하고 다양한 능력을 부리는 만큼 사탄들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천사들은 사탄이 사용하는 축복인 만큼 이를 '저주'라고 불렀다.


“지금 땅 넓히기를 한다고요? 그것도 1만 명이나 동원해서 말입니까? 흐음...”


루미가 언급한 정보에 해일조차 놀란 반응을 보였다. 땅 넓히기 전략 자체는 사탄들이 자주 쓰는 전략이었으나 지금의 상황에서 땅 넓히기는 의외였다. 땅 넓히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지상영계에 영향을 미치는 전략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얽히는 천사나 사탄들도 그 숫자가 많았다. 그런 여건 때문에 단체 대 단체의 싸움에서 많이 쓰이는 전략이었지, 한 개인을 경호하고 공격하는 천사와 사탄 사이에서는 잘 하지 않는 싸움이었다.


“변수가 많아졌네요. 만약 정말로 놈들이 땅 넓히기를 한다면 어떻게 대응할지가 문제입니다. 엄청난 ‘의’를 지불해야 하겠지만, 본부에 지원을 요청해서 천군의 도움을 받는다면 1만의 악령이라도 싹 쓸어버릴 수도 있겠죠. 만약 '의'를 아끼기 위해 우리 자체적으로 해결한다면 1만의 악령을 모두 처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여정 일정이 조금 늦어질 수도 있고, 여정이 진행될 때에 방해를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의’는 해일이 민정에게 설명했던 ‘조건’과 비슷한 개념으로, 조건을 충족할 만한 선한 행위를 통해 얻게 되는 재화 같은 것이었다. 선한 행위를 통해 조건을 충족시키면 의를 얻고 이를 통해 축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한정된 ‘의’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와 같은 전략이 중요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루미가 해일의 의중을 물었다. 해일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했다.


"결국은 '의'를 아끼느냐 혹은 시간을 아끼느냐의 문제입니다. 많은 '의'를 사용하면 바로 악령들을 물리치고 다시 여정을 시작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의'를 아끼는 대신 제가 시간을 들여서 악령들을 정리해야 합니다. 며칠씩 시간이 필요하겠죠.

그런데 민정이는 지금까지 잘 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시간을 많이 아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조금 시간을 써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의’는 아껴 두었다가 좀 더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하도록 하죠. 나래 천사님이 복귀하실 때까지 주변 정리를 완료할 테니 두 분께서는 민정이를 데리고 적절한 활동을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동안은 뭘 할까요?”


“민정이에게는 여정 중의 하나라고 하고, 두 분이서 수호천사본부 안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을 생각해봐야겠습니다. 땅 넓히기 전략이 시행된다면 우리 제1본부는 몰라도 제2본부를 포함한 웬만한 지상영계는 모두 위험한 곳이 될 거니까요. 그렇다고 제1본부에 민정이를 데리고 갈 순 없으니 아예 수호천사본부로 가야할 듯 합니다.

다만...이미 정보가 유출되었기 때문에 놈들이 전략 자체를 수정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이 땅 넓히기라는 전략이 유출된 것 자체가 놈들의 함정일 수도 있고요.”


“정보부에서도 놈들이 정보를 매우 잘 관리한 흔적이 보인다면서, 유리벽 거점에서의 모든 대화와 준비가 전부 조작이며 정보를 일부러 유출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어요.”


루미가 걱정을 숨기지 못한 채 말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상황이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나래의 희생도 소용없게 되어버린다.


“어쩌면 놈들이 극도로 준비를 철저히 했을 수도 있겠군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준비를 철저히 한다고 무조건 이기는 게 아니니까요.”


해일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곧바로 움직이시죠. 저는 바로 병원 쪽부터 가서 살펴보겠습니다. 두 분은 민정이를 데리고 본부로 이동해 주세요.”


“네. 사실 민정이가 여정 시작한 후로 옷을 한 번도 안 갈아입었는데, 수호천사본부의 백화점에 가서 옷을 사 입으면 될까요?”


“좋네요. 그러고 보니 밥은 몇 번 먹였는데 옷은 그대로였군요. 그냥 쉰다고 하기보다는 체험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해일은 곧바로 순간이동해서 제2본부인 민정의 빌라를 빠져나갔다. 루미는 일기장을 펼쳐 놓고 멍하게 앉아 있는 민정을 불렀다.


“민정씨.”


“아, 네.”


민정은 놀라서 대답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어요?”


“아, 아니에요.”


무슨 생각을 하였기에 깜짝 놀라는지 궁금한 루미였지만 그걸 물어볼 수는 없었다. 루미는 본론을 꺼냈다.


“다음 여정을 하기 전까지, 이번에는 수호천사 본부에서 체험을 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아, 그 모의 전투를 했던 장소 말씀이시죠?”


“네. 수호천사 본부는 아주 넓어요. 지금 갈 곳은 본부 안의 백화점입니다. 민정씨가 지금 일주일째 같은 옷을 입고 계시네요. 이번에 옷이라도 좀 살까 하는데 어떠세요?”


“흐흐, 옷이요? 와, 너무 좋죠.”


민정이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히죽히죽 웃었다.


“그런데 다른 천사님들은 같이 안 가세요? 해일 천사님은 워낙 바빠 보였긴 했는데 나래 천사님은 어디 가셨대.”


“두 분 모두 바쁘셔서요. 이번에는 저랑 로운이만 함께할 것 같아요.”


“흐응, 뭐 어차피 옷 보러 가는 건데 필요 없어요.”


말과는 달리 속으로는 해일과 나래가 함께 가지 않는 것이 살짝 서운한 민정이었고, 그런 감정을 나름대로 에둘러 표현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민정의 말을 들은 루미는 순간 표정이 어두워졌다.

둘에게 서운해하는 민정을 위해 두 천사는 훨씬 고생을 하고 있었고, 루미 본인은 민정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주지도 못하고 그녀와 함께 편안하게 옷이나 구경하러 가는 상황이었다. 루미의 표정을 보고 무거운 마음을 눈치챈 로운은 일부러 신난 듯 외쳤다.


“패션쇼 하러 출발!”


루미는 로운의 텐션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민정을 데리고 순간이동했다. 건물의 로비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복도가 길게 뻗어 있었고 여러 방들이 있었는데, 많은 방들 중에 오직 하나만 열려 있었다. 천사들은 열려 있는 방으로 민정을 안내했다. 가면서 다른 방들을 쳐다보았으나 세련되게 생긴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열려 있는 방으로 들어가자 밖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넓은 공간이 나왔다.


“수호천사본부의 의상실입니다. 실제로 천사들이 옷을 고르는 장소예요.” 


“와-”


민정은 입이 떡 벌어졌다. 운동장처럼 넓게 펼쳐진 방 안에서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온갖 종류의 옷이 걸려 있었다. 구석구석을 돌아봐도 너무 많았다. 옷이 최소한 천 벌은 넘는 것 같았다. 백화점처럼 따뜻한 조명이 벽과 바닥에 반사되어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백화점이랑 되게 비슷하죠? 옷이 브랜드별로, 종류별로 나뉘어 있고 원하는 옷은 당연히 입어볼 수도 있어요. 저쪽에는 액세서리도 있고요. 가방, 목걸이, 반지 등등 다 있어요. 명품들이구요.”


민정의 반응에 신난 로운이 간단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여기에 계속 있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저쪽으로 가야 합니다.”


루미가 한쪽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벽에는 아치형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마치 문을 그려 놓은 것 같았다.


“으...좀 더 보고 싶은데...”


“얼른 와요!”


로운이 민정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아치형 무늬 앞에 선 루미가 무늬 중심에 있는 동그란 모양을 손으로 누르자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어.”


놀란 민정의 손을 잡고 있는 로운이 똑같은 부분을 누르자 둘은 함께 순간이동했다. 나타난 장소는 넓은 방이었다. 그러나 원래 있던 공간이 워낙 넓었기에 이 방은 상당히 좁아 보였다.


“여기는 어디에요?”


“탈의실이죠.”


루미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곧바로 방 중앙에 반짝거리는 빛이 나더니 홀로그램이 생겼다. 그 안에는 방금 있었던 수많은 옷들이 걸려 있는 홀의 모습이었다.


“저 옷을 가져와 볼까요.”


루미가 허공에 손을 내젓더니 홀로그램이 확대되었다. 안에서 눈에 띄는 티셔츠 하나를 가리켰다. 그러자-티셔츠가 움직이더니 홀로그램 밖으로 튀어나왔다.


“오...”


최첨단 영계의 신기술에 민정이 감탄했다. 루미가 그녀에게 티셔츠를 건넸다.


“입어보세요.”


흰색 바탕에 귀여운 강아지가 두 마리 그려져 있는 아기자기한 느낌의 티셔츠였다. 민정은 입고 있던 오래된 티셔츠를 벗어던지고 얼른 갈아입었다.


“와 이거 옷감이 너무 좋아요.”


옷을 입어 본 민정은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엄청 예뻐요. 그냥 흰 티인데 왜 이렇게 이쁘지? 정말 신기하네.”


웃음이 떠나지 않는 민정이었다. 덩달아 신난 로운이 설명을 보탰다.


“영계에서는 옷이 특별한 의미를 가져요. 그 영혼이 쌓은 선업에 따라 입을 수 있는 옷이 정해지죠. 그 입은 옷을 통해서 그 영혼의 가치나 수준이 표현되는 거예요.”


“오, 무슨 말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좋은 뜻인 거죠?”


“그럼요. 바지도 입어 볼까요? 저기 저 청바지가 민정씨한테 어울릴 것 같아요.”


로운이 홀로그램 속을 가리켰다. 루미는 손짓으로 화면을 조정해서 확대한 후 로운이 말한 바지를 손으로 가리켰다. 곧이어 바지가 튀어나왔다.


“색깔이 너무 예쁘네요.”


하늘색에 가까운 연한 청바지는 민정의 마음에 쏙 들었다.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패션 아이템이었기에 민정도 한 벌은 갖고 있는 티셔츠와 청바지였지만, 정말 딱 한 벌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바지를 못 사는 처지가 너무 서러워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그 때가 생각이 나서 살짝 울컥하는 마음마저 드는 민정은 얼른 바지를 입었다.


“진짜 너무 예쁘다.”


“완전 잘 어울려요, 딱 민정씨 옷이네요.”


민정은 벽에 있는 거울을 보면서 한참을 살폈고 옷 여기저기를 만져 보았다. 민정이 옷을 매우 마음에 들어하는 것을 눈치챈 루미는 민정에게 말했다.


“여기서 한두 벌 정도를 가져가서 여정 기간 동안 입으실 수 있어요. 여정이 끝나면 반납을 하게 될 거고요.”


“그래요? 너무 좋아요. 진짜 이 옷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민정은 장난감을 선물 받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이것저것 골라서 입어봐요.”


“네, 감사해요. 이 바지에는 이런 너무 귀여운 티셔츠 말고 저런 셔츠가 더 나을 것 같아요...”





민정이 탈의실에서 여러 가지 옷을 입어보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정찰을 하다가 사망한 나래가 부활하기까지 남은 40시간, 즉 만 하루하고도 열네 시간 동안이나 민정은 옷을 갈아입었다. 해일은 그동안 여러 영계를 계속 돌아다녔고 1만이 넘는 악령을 퇴치했다.


“세상에, 귀신에 홀렸나 봐. 어떻게 시간이 이렇게 지나갈 수가 있지...?”


민정은 40시간이나 옷 구경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충격에 빠졌다. 로운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영혼은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식이 육신과는 다르니까요. 순간이 천 년 같을 수도 있고 천 년이 순간 같을 수도 있죠. 무한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니까요.”


“하긴, 생각해 보면 진짜 옷이랑 목걸이랑 등등 해가지고 수백 벌은 입었어요. 근데 그게 지겹지가 않았어요.”


온갖 종류의 셔츠와 바지, 치마, 원피스, 블라우스, 모자, 구두, 시계, 목걸이, 반지, 귀걸이, 취미가 암벽 등반일 것 같은 스포츠의류에서부터 성공한 커리어우먼의 느낌이 나는 정장, 심지어는 축구선수가 입는 유니폼까지 입어 보았다. 물론 축구 양말과 축구화까지 신었었고.

그 중에서 민정의 마음에 든 옷은 많았지만, 결국 민정은 처음에 로운이 골라줬던 청바지를 선택했다. 티셔츠는 흰 바탕에 다소 기하학적인 무늬가 금빛으로 수놓인 세련된 것으로 바꾸었고.


그리고 방패에 십자가가 새겨진 모양의 은색 목걸이를 찼다. 수호천사를 나타내는 문양 중 하나라고 하였다. 갈아입은 옷 외에 여분으로 흰색의 트레이닝복 한 세트를 챙겼다.


"완전 잘 골랐다! 마음에 들어요?"


"네네, 완전 마음에 들어요."


"헤헤, 다른 천사님들도 완전 잘 어울린다고 하실 거예요."


로운은 민정보다 신나서 계속 반복해서 물어봤다. 조금 전에 루미가 갑자기 급한 일이 있다며 순간이동으로 사라지는 바람에 로운이 마지막으로 옷을 고르는 것을 도와 줬다.


"그럼 민정씨 빌라로 보내드릴게요. 저는 사무실로 돌아가야 해요. 조금 있다가 뵈어요."


로운은 민정을 제2본부로 보냈고 본인은 제1본부로 복귀했다. 제1본부에서는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옷이 잘 어울리네요.”


1만의 악령을 학살하고 돌아온 해일이 새 옷을 입고 제2본부로 돌아온 민정을 보고 짧게 평했다.


“로운이가 골라준 옷인가요? 로운이가 그래도 보는 눈이 있어요. 잘 고른 것 같아요.”


옆에 있던 나래는 조금 더 성의 있게 말을 했다.


"아, 그 티셔츠랑 청바지. 잘 골랐어요. 그게 제일 낫더라고요."


루미가 웃으면서 칭찬했다. 민정은 이제 그들과 함께 제2본부에서 다음 여정을 의논할 차례였다. 


“재밌는 경험이 되셨길 바랍니다. 하지만 조민정씨의 인생여정의 본질은 인생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이고, 옷 고르는 것은 본질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본질적이지 않은 것에 너무 마음을 뺴앗기면 안 됩니다.”


해일은 그 부분이 신경쓰였다. 어떻게든 민정을 육신으로 돌려보내길 원하는 해일이었으니 그는 민정이 영혼으로 누리는 것들을 최소화하고 싶어했다. 그는 민정이 그런 것 때문에 육신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을 것을 염려한 것이었다. 그는 다른 천사들에게 말하지는 못했으나 민정이 40시간 동안이나 옷을 구경하도록 내버려둔 것을 후회하는 중이었다.


“알았어요.”


민정이 웃으면서 좋게 대답하였다. 그래도 해일은 마음속의 불안함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는 이 부분을 작정하고 파고들 생각이었다. 한참 악령을 제거하면서 그는 40시간 동안 앞으로의 여정의 방향을 생각하고 구체적으로 계획을 짰다.

그리고 민정이 아직 옷을 입어보는 동안, 부활한 나래와 민정과 함께 있던 루미를 호출하여 고민한 바를 전달했다.


“지금까지는 육신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하도록 하는 여정을 주로 진행했습니다. 앞으로 당분간은 조금 방향을 바꿔서, 영계에 남는 것을 피하는 선택을 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대로는 죽음을 선택해서 영계에 남아 봤자 육신으로 돌아가는 것만 못하다는 현실을 느끼도록 해야겠습니다.”


해일은 단호한 입장이었다. 나래는 그에 우려를 표했다.


“그 부분의 중요성은 알겠는데, 그건 인생여정의 본질과는 맞지 않잖아? 인생여정은 육신의 삶에 대해서 깨닫는 과정이고, 영혼의 삶에 대한 것은 민정이가 선택을 마친 후에 해야 하잖아.”


“나래 선배님 말씀이 백번 맞지만, 지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가 안 됩니다. 이제 여정 기간도 일주일이나 지났고, 사탄들은 점점 교묘하게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민정이는 영계의 달콤함을 너무 많이 맛봤어요. 당장 여기가 너무 즐거운데 육신으로 돌아가고 싶을 리가 없죠.”


해일이 단언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사탄과의 직접적인 전투도 이겼고, 여정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진행했어요. 실패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냉정하게 말해서 오히려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전투에서는 이겨도 전쟁에서는 지는 국면으로 흘러가고 있어요. 지금 당장은 괜찮아도 나중엔 치명적일 수도 있습니다.”


군인다운 비유를 하는 해일의 말에 나래도 반박하지 못하고 신중해졌다. 루미는 의문이 들어 질문했다.


“분명 지금까지 잘 해 왔는데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요?”


“상황 자체가 불리하기 때문이죠. 이미 죽음을 선택한 사람을 돌이키게 하는 건 어려우니까요. 솔직히 사탄들 입장에선 가능한 우리들도 자기들도 민정이에게 아무런 영향을 안 주는 것이 최선입니다. 가만히 놔 두면 알아서 죽을 거니까요.”


해일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놈들이 괜히 <땅 넓히기>를 했던 게 아닙니다. 민정이가 육신으로 돌아갈지 어떻게 할지 선택을 하려는 와중에 우리 행동을 엄청나게 제약하도록 만들었어요. 지금부터 우리는 이전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여정을 하지 못합니다. 여정 초반에는 별로 위협적이지 않던 놈들이 중반에 들어서자 본격적으로 거세게 압박하는 전략입니다. 문제는 지금 그런 전략이 너무 잘 먹히는 타이밍이라는 겁니다. 이제는 민정이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너무 영계에 익숙해졌어요."


심각하게 말하는 해일에 루미와 나래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민정이는 머릿속으로는 자살이 나쁜 거라고 알고 있어요. 육신으로 돌아가는 게 맞다고 생각도 하겠죠. 지금까지 여정은 이런 부분과 관련이 있었어요.

용기를 내어 다시 돌아간다면, 즉 머릿속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답을 실천한다면 앞으로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을 가르쳤어요. 하지만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우리는 민정이가 마음으로 육신의 삶을 강력히 원하도록 만들진 못했고 오히려 영계에 남고 싶게 만들어 버렸죠. 이제는 영계에 남고 싶지 않도록 만들 겁니다.”


“후, 알겠어. 그래도 지난번에 ‘병원 탈출 미션’이 네가 하려고 하는 영계의 단점을 드러내는 활동이었지 않아? 그때 민정이가 악령한테 많이 시달렸었지. 악령을 만나게 하는 것은 이미 했는데 앞으로는 뭘 하려고?”


“현재 여정에서 ‘부지런함’과 관련해서 지상영계의 적절한 곳을 청소를 시키고, 과거와 관련해서 민정이가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영혼이 아름답지 않은 몇 명을 뽑아서 그 모습을 보여줄 겁니다.”


“그렇게 할 바에는 차라리 ‘미래’를 보여주는 게 낫지 않아? 육신으로 돌아갔을 때 앞으로 어떤 기회가 올 것인지 알려 주면 확실하게 희망이 생길 거잖아. 만약 직접적으로 알려주지 않더라도 암시를 해 줄 수도 있고.

물론 ‘미래’는 민정이가 육신으로 돌아가겠다는 선택을 한 후에 알려주는 것이 원칙이지만, 어차피 네 계획대로 진행할 '영계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는 것'도 선택을 한 후에 시키는 게 원칙이니까. 육신으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용기를 주고 사람을 붙여 준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희망을 가져야 할 것 아니야.”


나래가 제안했다. 그는 민정이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건 민정이가 감당하기 힘든 축복입니다. 이걸로 해내지 못한다면 사용할 최후의 보루로서 남겨놓고,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진행할 생각입니다.”


“사탄 놈들이 <땅 넓히기>를 통해 영계의 영향력을 넓히는 와중에 그 본진으로 달려들다니. 이건 놈들이 의도한 대로 움직이는 것 아니야?”


“반대죠. 놈들은 민정이가 지상영계를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땅 넓히기>를 했다고 봐야죠.”


이번에도 나래는 해일을 설득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과 생각이 달랐지만 해일의 생각도 틀린 부분은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일단은 보는 것부터 시작하려고요. 제가 악령들을 퇴치하면서 다녔던 병원, 학교, 집 주변의 영계를 민정이를 데리고 돌아다닐 겁니다. 악령들을 배치해서 땅 넓히기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는 사탄들의 행동을 정면돌파하는 거죠. 나래 선배님이 함께하시면서 민정이를 보호해 주시면 좋겠고요.”


“알았어.”


“그 영계들 중에 민정이 본인의 흔적이 남은 곳이 있어요. 집 주변에서는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엄마한테 화를 내고, 해야 할 일을 안 한 것들이 많죠. 이 과거들을 보여주면서 직접 쌓인 죄를 치울 겁니다. 넉넉잡고 이틀간은 이것만 해도 될 것 같아요.”


“허, 민정이가 고생깨나 하겠네. 이쯤 되면 조민정의 인생여정이 아니고 영계 견학기가 되겠어.”


“영계 견학은 그래도 꽤 많은 사람들이 하니까요. 어떻게 보면 무난한 커리큘럼이죠.

앞으로는 여정의 판도가 완전히 바뀔 겁니다. 사탄 놈들은 <땅 넓히기>를 바탕으로 점점 힘을 키워가고 있어요. 놈들은 신중하면서도 과감합니다. 지금까지는 신중함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이제부터는 과감함을 늘릴 거예요. 큰 싸움이 조만간 있을 거고, 어쩌면 제1본부가 공격당할 수도 있습니다. 루미 천사님이 지켜주신다면 걱정은 없겠지만요.”


"...난 지금까지 우리가 여정을 잘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쉽지 않네, 해일아."


"잘 해 왔어요. 사람을 살리는 일이 애초에 워낙 어려우니까 그렇죠. 무슨 짓을 해도 안 될 수도 있는데 가능성이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죠."


"맞아."


마주 보며 웃는 해일과 나래, 두 천사를 보며 루미는 생각에 잠겼다. 많은 사탄이 언제 노릴지 모르는데 민정이를 데리고 지상영계를 돌아다닌다는 것은 대단한 자신감이면서 많은 고난을 스스로 감당하겠다는 의지였다. 해일은 본인 스스로 극히 어려운 길을 가겠다고 결심했으며 같은 것을 아주 거리낌 없이 나래에게 요구한 것이다. 방금 막 죽었다가 부활한 나래에게. 

마음 같아서는 고생한 둘을 대신하여 직접 민정을 데리고 여정을 하고도 싶었지만, 루미 본인도 제1본부의 ‘보석’을 지키는 매우 중요한 역할이 있었다. 비록 제1본부 방어는 민정이를 직접 데리고 영계를 돌아다니는 것에 비해서는 위험도가 0에 가까운 일이기는 했지만, 루미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자리를 지키는 것이 맞았다.


결국 루미는 조금은 씁쓸한 마음으로 두 천사와 민정을 응원하기로 했다. 그들이 여정을 떠나면 제2본부를 정리한 후 제1본부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쓰던 일기장은 저를 주세요. 제가 잘 챙겨 놓겠습니다.”


"네, 잘 보관해 주세요."


루미는 민정에게 일기장과 펜을 받았다. 해일은 민정을 재촉했다.


“트레이닝복도 하나 챙기셨네요. 다음 여정은 많이 움직여야 해서 그걸로 갈아입으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얼른 민정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은 해일은 곧바로 다음 여정 이야기를 꺼냈다. 민정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 다음 여정을 하기 전에 지금 선택을 할까 싶은데요.”


“...네?”


“여정이 끝나고 육신으로 돌아갈지 영계에 남을지 지금 선택하겠다고요.”


“......뭐라고요?”


루미는 해일이 그렇게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물론 루미 본인도 들고 있던 민정의 펜을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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