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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틀리제 Oct 06. 2024

사연녀와 그녀의 수호천사들

16화 : 민정의 천국 여행

해일은 항상 철저한 계획을 바탕으로 임무를 수행하지만, 계획대로 다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알고 있는 천사였다. 그는 하나의 가능성만을 염두하고 계획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생각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런 노력 덕분에 대체로 모든 일은 그가 예상한 범위 안에서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부딪혔다.


“지금 선택을 하신다고요?”


“그렇다니까요.”


당황한 해일과 달리 민정의 태도는 자연스럽고 당당했다. 어느 지점에서 그녀에게 확고한 결심이 섰는지 해일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민정은 이미 확실한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이 분명했다.

해일은 입술이 바짝 말랐다. 피가 덩달아 마르는 느낌이었다. 만약 여기서 민정이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면 절대로 그 누구도 번복할 수가 없었다. 평정심을 유지할 필요조차도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조바심을 숨길 수가 없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해일이 민정에게 물었다.


“아직 많은 여정이 남아 있는데 지금 결정을 하실 겁니까?”


“네, 지금 결정할게요.”


“특별히 결정을 내릴 만큼 심경의 변화는 없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결정을 내린 이유가 있습니까?”


“심경의 변화가 많이 있었죠. 티를 안 냈을 뿐.”


“...그렇습니까? 그런 줄은 몰랐군요.”


“천사님들이 다 말하지 않으셨듯이 저도 다 말하지 않았어요.”


민정이 해일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해일도 그런 민정을 바라보았다. 최후의 순간에 그녀가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 눈치를 채 보려 함이었다.


“정말 지금 결정하시겠습니까? 결정을 내리신다고 해도 여정이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정이 끝날 때까지 결정을 바꿀 수 없습니다.”


“네, 지금 결정할게요.”


“지금의 선택이 민정씨의 운명을 영원히 좌우할 겁니다.”


“알고 있어요. 선택은 어떻게 하나요? 그냥 말로 하나요?”


해일이 양손 위에 두 개의 구슬을 소환했다. 하나는 흰색, 하나는 검은색이었다.


“육신의 삶으로 돌아가겠다면 흰색 구슬을, 육신의 삶을 끝내겠다면 검은색 구슬을 손으로 잡으시면 됩니다.”


“흰색과 검은색은 좀 너무 의도가 보이는데...”


민정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을 해일은 못 들은 척했다. 그 때 루미의 부름을 받은 로운이 현장에 도착했다.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것이라면 제1본부를 봉인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상황을 전해 들은 로운은 그녀답지 않게 말 한 마디 없이 다른 천사들과 함께 눈치만 살피며 사념을 주고받았다.


[갑자기 무슨 일로 지금 선택을 한다는 걸까요?]


[정말 모르겠어. 해일 천사님도 전혀 예상하지 못하셨는데...]


[아직까지는 민정이가 직접적으로 육신으로 돌아갈 이유를 찾지 못했을 텐데요. 검은색 구슬을 잡을 것 같은데, 억지로라도 못 하게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로운이 심각하게 물었지만 루미는 딱딱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법칙을 어기는 일이야. 그렇게 할 수는 없어...]


민정이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렸던 때를 알고 계시죠? 계속 자살을 고민했었지만 정작 마지막 순간은 충동적이었죠. 자살을 하고 싶어서 옥상에 올라갔는데, 옥상 난간이 부서져서 흔들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민정은 부서져 가는 난간에 몸을 기댔다. 과연 무너질까 안 무너질까. 자신의 목숨을 운에 맡기는 행위였다. 그리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던 난간은 의외로 굉장히 쉽게 부서졌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선택도 많은 고민을 했지만 결론은 충동적인 것 같아요. 머리로는 이렇다 저렇다고 하는데 결국엔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되네요."


"그런가요."


긴장해서 대답도 잘 못 하는 해일이었다. 민정이 말을 이었다.


"사실 삶이냐 죽음이냐 내게 선택권을 주고 인생을 알게 해 준다고는 했지만, 말이 선택권이죠. 상식적으로 누가 죽으라고 하겠어요. 애초에 내가 죽음을 선택해서 여기 왔는데 또 기회를 준다는 건 죽지 말라는 뜻이죠. 지금까지 했던 여정들도 다 마찬가지였어요."


구슬을 들고 있는 해일의 손에 땀이 맺혔다. 민정은 역시 천사들의 의도를 다 눈치채고 있었다.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살아갈 이유를 알려 주는 여정들이었어요. 이제 그만 죽어도 좋다라고 알려 주는 여정은 없었죠. 그러다보니까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의미 없는 행동은 그만 하고 이제 결정을 하려 합니다."


차마 못 보겠는 마음에 루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짧은 순간 민정이 태어나던 때, 걷고 말하고 웃고 눈물을 흘리던 때가 환상처럼 보였다. 이십여 년의 조민정의 인생이 보인 후 좌절한 채로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가는 모습까지 선명했다. 애타는 마음으로 기도하던 루미는 귀를 때리는 커다란 고함소리에 눈을 떴다.


“우와아아악!!!!”


힘껏 주먹쥔 손을 높이 치켜든 해일이 몸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온 함성을 내질렀다. 손에 든 검은 구슬을 던져 버리면서 승리의 희열을 표출하는 해일의 옆에선 로운이 흰 구슬을 들고 있는 민정을 껴안고 있었고, 나래는 그들에게서 뒤돌아서서 손으로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루미는 격한 반응을 보이는 천사들보다도 멋쩍게 웃고 있는 민정이 눈에 크게 들어왔다. 아름다운 천사들에 비하면 못생기고 위축된 작은 소녀였으나 이 순간 루미의 눈에는 민정이 천국처럼 거대하게 느껴졌다. 루미는 민정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물었다.


“혹시 영혼의 삶이 아닌 육신을 선택한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루미의 질문에 기뻐 날뛰던 천사들도 호들갑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에, 음... 양심적으로 육신으로 돌아가는 게 옳은 선택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엄마도 혼자 남기게 되고, 도망치듯 삶을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까요.

옳은 길이 무엇인지는 알아도 그동안은 망설였어요. 결단을 내릴 각오가 필요했던 거예요.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결단을 내린 결정적인 이유는...”


망설이던 민정은 수줍게 말했다.


“천사님들이 내가 육신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시는 것 같아서요. 천사님들이 원하시는 대로 하고 싶었어요.”


“하. 나도 아직 멀었구만.”


민정의 대답에 해일이 자조에 찬 헛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로운은 민정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루미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래는 아예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하더니 어디론가 가 버렸다.






조민정이 삶을 선택했다는 소식은 지옥의 사탄들에게도 재빨리 전해졌다. 해일을 방해하기 위해 지옥에서 파견된 사탄 악화는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크아악!!!"


분노한 악화의 손톱이 부하 사탄들의 살을 찢었다. 이미 많은 경험이 있는 악행은 묵묵히 그녀의 분노를 버텼고, 악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쳤으며, 그러지 못한 피보라와 피철철과 피칠갑은 연신 비명을 질렀다.


"이 쓸모 없는 버러지같은 놈들!! 그 동안 뭘 하고 있었어!!"


모두가 악화의 분노가 의미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분노를 막을 수 없었다. 아직 여정이 끝난 건 아니었지만 더이상 조민정이 죽을 일은 없었다.


피보라는 억울한 심정이었다. 그동안 조민정을 어떻게든 죽이려고 그토록 노력해온 것은 악화보다는 피보라 자신이었다. 힘이 조금 강할 뿐이지 뭘 잘 했다고 자기에게 화풀이를 한단 말인가?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크윽, 살아 돌아간다고 해도 다가 아닙니다. 그 전에 잡는다면 살아 돌아가는 의미가 없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팔다리가 잘렸다가 붙는 고통과 심적인 억울함에 못 이긴 피보라가 떠듬떠듬 항변했다.


“조민정도, 그 추하고 더러운 꼬마 영혼의 모습을, 분명 보았습니다. 그년은 그게 뭔지 모르고도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니 진실을, 알게 한다면 분명 그년의 마음이 무너질 겁니다.”


그녀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악화가 그녀의 말을 들어 주었다.


"...네놈 말이 맞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조민정을 잡아. 그러지 않으면 영원히 찢어 죽일 거다."


악화가 피보라의 머리를 두 손톱으로 들고 눈을 맞추어 말했다.


"명심해. 한 번의 기회는 무조건 온다. 잡으면 성공이고 놓치면 실패야. 놓치면 다 죽는 거다. 작전을 짜 줄 테니 실행하기 전까지 죽도록 연마하고 준비해. 그리고 실행할 때는 목숨을 걸어라."





민정이 인생여정을 시작한 후에 먹은 음식은 로운과 함께 먹은 마카롱과 차, 그리고 병원 탈출 미션을 끝내고 먹은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였다. 그 외에도 일주일 동안의 여정의 사이사이에 천사들이 여러 간식을 주었기에 챙겨 먹었으나, 식사를 한 일은 많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그 이유는 영혼은 육신과 달리 음식을 통한 에너지의 섭취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민정은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다. 천사들도 민정에게 밥을 먹일 이유가 없었고 오히려 가능한 영혼으로 누릴 것을 배제해 왔었다. 인생여정 안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오로지 맛을 누리기 위함이었고, 민정이 영계에 남지 않는 것이 결정된 현 시점에선 그 권리를 외면할 이유가 없어졌다.


“후우.”


젓가락을 내려놓은 민정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벌써 다섯 시간째 먹고 있어요. 이제 그만 먹을래요.”


웃으면서 또 준비한 음식을 차리던 나래와 로운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어찌할 줄 모르는 그들의 모습에 민정은 웃음이 날 것 같았다.


“다섯 시간이나 먹어도 새롭고 짜릿하지 않습니까? 육신과는 다르게.”


해일이 빙글거리며 대답했다. 그는 방금까지 민정이 먹던 음식을 가리키며 물었다.


“와인 숙성 삼겹살과 그냥 삼겹살 맛을 비교해보니 어떤가요? 혀가 예민하다면 그 차이를 알아차린다고 하더라고요.”


“뭔가 좀 다르긴 한데... 이게 와인 맛인가?”


“저도 잘 모릅니다. 그래도 뭔가 다른 맛이 느껴진다니, 와인에 숙성된 보람이 있는 돼지군요.”


해일이 낄낄거렸다. 민정은 미친놈 보듯 그를 바라봤다.


“정말 이미지가 많이 달라지셨어요. 손바닥 뒤집듯이. 이거 배신감까지 느껴지는데요?”


“줄곧 보여드렸던 모습이 평소 성격이고, 지금은 기분이 매우 좋아서 이렇습니다. 누구씨께서 잘해 주신 덕분이죠.”


“흠흠, 뭐 대단한 일을 했다고.”


“천사들이 일을 하면서 이 정도로 기쁠 때가 잘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결국에는 경호하는 인간이 하기에 달렸거든요. 보통은 뭐 빠지게 노력해도 허사로 돌아가는 일이 많은데 이 정도면 거저 얻은 성과나 다름없죠.”


"흠흠, 맞는 말이야. 이 정도면 뉴스에 나올 만한 일이지."


뼈 있는 해일의 말에 민정은 물론이고 천사들도 헛기침을 했다. 


“저는 다음 여정을 준비하러 가 보겠습니다. 금방 올게요.”


“네네, 빨리 오세요.”


해일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민정이 밥을 먹는 다섯 시간 동안 몇 번이나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 해일이었다. 


“이제 후식 먹고 끝내자. 아까부터 로운이랑 나래가 너 준다고 후식을 준비하느라 바쁘던데. 서로 자기들이 준비한 디저트가 더 낫다면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던 루미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녀는 민정의 요청에 따라서 말을 놓았다. 나래도 루미와 같이 민정에게 말을 놓기로 했고, 앳된 외모에 실제로 경력도 막내인 로운은 반대로 민정이 그녀에게 말을 편하게 하기로 했다. 해일과는 아직 서로 말을 높이고 있었다.


루미는 나래와 로운 사이에 끼어서 같이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다섯 시간 동안 민정의 초상화를 그려서 선물해 주는 방식으로 경의를 표현하고자 했다. 루미는 천사들 중에서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편이었다. 민정은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녀의 그림을 기대했다.


“디저트는 아이스크림이지! 이 망고 치즈 파르페가 네 입에 딱 맞을 거야!”


나래가 자신 있게 말했다. 마치 정치인이 연설하는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은 분명 탁월한 선택이죠. 하지만 파르페보다는 셔벗이 지금 상황에선 제격이라는 걸 모르시는군요.”


로운이 짐짓 날카로운 표정으로 반박했다. 나래보다 지금의 상황에 더욱 몰두한 그녀는 어디서 또 쓸데없이 안경까지 꺼내서 쓴 그녀는 변호사 콘셉트로 상황극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민정은 파르페건 셔벗이건 별로 상관이 없었다.


“둘 다 먹으면 되잖아?”


열심히 펜을 움직이던 루미가 해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로운과 나래는 시큰둥했다.


“당연히 둘 다 먹을 건데, 뭘 먼저 먹느냐가 문제입니다, 팀장님.”


“휴우. 민정아, 쟤들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루미가 한숨을 쉬더니 민정에게 충고했다. 민정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녀는 과감하게 셔벗을 들어 한 숟가락 퍼 먹었다.


“으아닛?”


“캬하하하하하!!”


나래는 경악했고 로운은 기뻐 뛰었다. 민정은 이어서 파르페를 한 입 먹었다. 그리고 말했다.


“파르페가 더 맛있네요.”


“정말? 크하하하하하!”


“샓$!@#!!”


나래는 광소했고 로운은 특이한 비명을 질렀다. 민정은 낄낄 웃었다.


“하하, 농담이에요. 둘 다 엄청 맛있어요. 우열을 가리긴 힘들 것 같아요. 그것보다 쉬는 것도 좋지만, 이제는 여정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민정이 말했다. 민정이 육신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그 이후에 더 다양하고 흥미로운 여정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노는 것이 좋아도 의미가 없는 것은 싫었다.


“조금만 기다려 줘. 해일 천사님 준비가 거의 끝나신 것 같아. 이번에 돌아오시면 바로 여정을 다시 시작할 거야.”


루미가 말했다. 그런 그녀도 그림을 거의 완성해 가고 있었다. 모델처럼 고개를 살짝 돌리고 미소를 지으면서 약간 왼쪽을 바라보는 민정의 초상화였다. 그림 속 민정은 실제 민정보다 분명히 더 아름답고 기품이 있었지만, 누가 봐도 조민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민정은 그림에 대해서 잘 몰랐지만 신비로웠다. 민망한 마음에 그림을 제대로 보지를 못했다.


저마다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농담을 즐기는 동안 민정과 달리 천사들에게는 사념을 통한 해일의 전달이 있었다.


[지금 상황은 매우 좋지만, 한 가지 맹점이 있습니다. 바로 민정이가 우리 때문에 삶을 선택했다는 점이죠. 천사로서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사실 좋은 건 아닙니다. 결국에는 자기의 삶을 긍정하고 자기를 위해 희망과 기쁨으로 돌아가야 해요.

이미 결정을 되돌릴 수는 없기 때문에,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민정이가 여정이 끝난 후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결정을 후회하면서 슬픔과 고통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일 수는 있겠죠. 그런 일만은 막아야 합니다. 사탄들도 그걸 목표로 하고 있을 거구요.]


사념을 전달받으면서 나래가 말했다.


"다음 여정을 뭘로 할지가 궁금하네. 해일이 말마따나 계획을 싹 다 갈아엎어야 하는데 어떻게 할 생각일지."


"이제는 어떤 방향으로 여정을 하게 될까요?"


민정이 물었다.


"영계에서 좀 더 재밌고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을 거야. 21일의 기간은 정해져 있지만, 이미 선택을 끝냈으니 네 인생과 관련 없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겠지."


"다양한 경험이라고 하니까 괜히 불안하네요. 저번에는 재밌는 여정을 하자고 해놓고 방망이 들고 악령들이랑 싸우게 시키셨거든요."


[어쨌든 드디어 생각보다 일찍 인생여정 제2부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민정이 텐션을 좀 올릴게요. 2부 첫 여정은 천국 여행입니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데리러 가겠습니다.]


"음.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이번에는 해일의 초이스에 기분이 흡족한 나래가 히죽거렸다.


"아마 네 마음에 쏙 들 여정을 할 것 같아."





“원래는 사람의 영혼이 천국에 가는 방법이 따로 있습니다. 정해진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하죠. 마치 사람들이 비행기나 기차를 타고 이동하듯이 말입니다.”


다음 여정이 천국 기행임을 공지받은 민정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민정이 옳은 선택을 한 것에 대한 보상의 개념도 있는 여정이었다.


"사람의 영혼이 천국에 가는 기준은 당연히 선행입니다. 육신으로 살면서 쌓은 선과 악에 따라서 그 영혼이 위치하는 영계가 달라지죠. 그런 점에서 아직 민정씨는 천국에 거주할 만큼 선업을 쌓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잠깐 견학을 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까지 가는 방법이 조금 달라질 거예요."


“어떻게요?”


해일의 설명이 귀에 잘 안 들어올 정도로 흥분한 민정에게 해일이 차분히 설명했다. 그는 제2본부인 빌라 안에 그들 옆에 갑자기 생긴 문을 가리켰다.


“저기 문을 열고 나가면 길이 있을 겁니다. 그 길을 따라 쭉 가다 보면 문이 나올 거예요. 그 문을 열고 나가면 도착할 겁니다. 우리는 따로 미리 도착해 있을 거고요.”


“그냥 걸어가기만 하면 돼요?”


"네. 그냥 길을 계속 따라가면 돼요. 바로 출발하시죠."


민정은 성큼성큼 문을 열고 나갔다. 천국이라니, 진짜로 너무 궁금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온통 흰 공간이 나왔다. 너무 흰색뿐이라 순간 방향이 헷갈렸지만, 민정은 이내 들어갈 안쪽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움직였다.

온통 흰 공간을 걷는 타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민정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움직이는 느낌, 시간이 그녀가 인지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흐르는 느낌이었다. 새삼 그녀가 이십 년 넘게 살아온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있다는 강한 실감이 났다.


그리고 금방 그녀는 막다른 길에 도착했다. 거기 있는 것은 문이 아니라 사다리였다. 그것도 하늘로 끝도 없이 올라가는 사다리였다.


“길이 있을 거라고 했지, 평범한 길이라곤 하지 않았지.”


그리고 민정은 홀린 듯이 사다리를 걸어 올라갔다. 몸이 전혀 힘들진 않았다. 더 위로, 더 위로. 끊임없는 상승 욕구에 몸을 싣고 끝까지 도달하고자 올라갔다.

얼마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게, 그녀는 출구인 것 같아 보이는 흰색 문 앞에 서 있었다.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왔다. 저 문을 열고 나가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너무도 궁금했지만 잠깐의 여운에 잠겨 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여운을 털어낸 그녀는 드디어 문을 열고 밖으로-


“우왁!”


나가지 못하고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문 밖은 낭떠러지였다. 끝도 없이 높이 떠 있는 공중에 연결된 문이었다. 밖에는 뭔가 한없이 넓은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발을 잘못 헛디뎌 떨어질 뻔 했다.


“뭐야. 뭐야?”


패닉에 빠진 민정 앞에 하늘에 떠 있는 해일이 보였다. 그는 민정에게 손을 내밀었다.


“뛰어내리시죠. 괜찮습니다.”


“아니, 잠깐만요...”


“앞을 보세요. 참 멋지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아니, 내가 죽은 게 뛰어내려서 그런 건데...”


“안 죽으셨는데 뭘요. 그리고 트라우마 극복하셔야죠.”


태연하게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해일의 말마따나 눈앞의 풍경만큼은 참 멋있었다. 엄청 높이 떠 있었는데도 커다란 건물이 아래가 아니라 앞에 있었다. 그만큼 상상할 수 없이 높은 건물이었다. 건물 높이가 최소 몇 킬로미터는 되는 것이었다.


그런 건물이 수십, 수백, 아니 수천 개가 보였다. 시야가 너무 넓었다. 참 신기하게도 눈이 독수리처럼 좋아졌는지 엄청나게 멀리까지 볼 수 있었다. 못해도 수천 킬로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살짝 후들거리는 다리와 심장을 부여잡으면서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지구에서는 이런 게 가능할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멋있죠? 천국에 있는 한 도시입니다. 천국은 수없이 많은 행성과 도시가 있습니다. 이 구역은 그중 하나로, 크기가 지구로 치면 아시아 대륙쯤 될 거예요. 건물 수는 더 많고요. 건물 용도도 엄청 다양하죠.”


해일이 자연스럽게 웃더니 민정을 독촉했다.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른 가시죠.”


“아니, 잠깐만... 악!”


해일이 민정에게 손짓하자 민정의 몸이 저절로 끌어당겨졌다. 그대로 민정은 수십 킬로미터를 자유 낙하하는 신세가 되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드넓은 낯선 도시에 민정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끝없이 존재하는 하늘 곳곳에는 뭔가 떠 있었고 무척 빠르게 다가오는 땅에는 점점 구체적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건물, 커다란 나무, 커다란 보석, 형형색색의 장식과 구조물들이 가득했다. 민정은 그 모든 것들을 구체적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강렬한 이미지만큼은 눈과 머리에 곳곳이 남았다.


그리고 저 멀리 작은 점으로 보이는, 천사들이 있었다. 나래, 로운, 루미였다. 민정은 가슴이 뛰었다.


“환-영-해-요-!!”


로운이 손을 흔들면서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아직 한참 멀리 있는 것치고는 상당히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민정도 외쳐서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술만 달싹거릴 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낯선 곳에서 로운처럼 소리 지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 감사합...”


우물거리다가 말을 삼켰다.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바닥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서로의 표정을 명확하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부터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오오...”


공중에 떠 있는 상황에 민정이 감탄했다. 그녀는 천천히 하강했고 곧 바닥에 발이 닿았다.


“하하...”


민정은 웃음이 터졌다. 세상에 다시는 하지 못할 것 같은 경험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짜릿했다.


“다시 한번 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천사들이 환하게 웃었다. 주변이 아주 화려했다. 멋진 도시의 한복판이었다. 파스텔 톤의 귀엽고 아기자기한 색감의 커다란 건물들이 만화처럼 들어서 있었고, 그 모양도 제각각으로 특이했다.

바로 옆에는 에메랄드빛 호수의 물들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물이 어떻게 저렇게 움직이고 있을까.


“엄청나네요. 아무것도 안 하고 구경만 하더라도 하루가 다 갈 것 같아요.”


“구경하는 게 일입니다. 바로 이동하시죠. 저기로 갈 겁니다. 급하지 않으니 여유롭게 걸어가죠.”


해일이 손을 들어 멀리 가리켰다. 멀리 하늘과 연결되다시피 가장 높이 솟은 탑이 있었다. 크기도 크기지만 가장 강렬한 빛을 뿜어내었기에 시선이 절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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