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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틀리제 Oct 09. 2024

사연녀와 그녀의 수호천사들

17화 : 민정의 네 번째 여정(1)

멀리 있는 건물에서 강력한 활기가 느껴졌다. 민정은 저 탑이 이 도시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도시를 이루는 모든 구조물들은 모양과 색깔이 저마다 개성이 있었지만, 이 도시는 분명히 고차원적인 하나의 질서로 설계된 하나의 몸이었다. 그리고 저 건물이 도시의 심장이었다. 


민정의 깨달음을 증명하듯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저 탑까지 길이 나 있었다. 초록색 잔디처럼 반짝이는 길이었다. 민정과 천사들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가면서 저런 것들을 보고 즐기면 됩니다.”


해일이 말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금색의 커다란 새가 웃으면서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덩치가 크니 모습이 웅장했다. 날개는 특별히 우아하게 펄럭거리고 있었다. 금색의 날개에서는 금빛 가루가 떨어졌다.


“원래 저렇게 생겼나요?”


민정이 새를 보며 질문했다. ‘저렇게’라 함은 마치 사람처럼 웃는 표정을 두고 말한 것이었다.


“아뇨. 기분이 좋으니까 웃고 있죠.”


“아, 진짜요? 저 새는 이름이 뭐죠?”


“저 새가... 봉황의 한 종류입니다. 은빛웃는봉황이라고 하네요.”


“어머.”


민정은 순간 수많은 의문이 동시다발적으로 머리를 스쳤다. 그중에서 가장 원초적으로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은빛웃는봉황이라니, 금색인데요?”


“밤이 되면 은색이 될 겁니다.”


“밤이요?”


“지구의 밤과는 다르고요. 쉽게 말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빛의 색이 달라진다고 보면 됩니다. 여기는 빛이 없는 순간이란 없거든요.”


“밤의 이곳을 볼 수 있나요?”


“이번 여정에선 힘들 것 같군요. 그 전에 지구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쉽군요.”


“가면서 충분히 즐기시길.”


민정은 천사들과 함께 산책하듯 천국의 길을 걸었다. 온갖 동물들이 가득했다. 작고 아기자기하고 귀엽고 우아한 동물들이었다. 말과 양과 개와 새, 토끼 등이 맥락 없이 조화롭게 어울려서 노는 동산 같은 도시였다. 수 킬로미터가 되는 끝없는 마천루와 아기자기한 야생동물이라니. 너무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조금 더 걷자 더 희한한 것이 있었다. 초록색 잔디 같은 길이 이어진 곳이, 바다 위였다. 바닷물은 파도치고 있었고, 그 위에도 길이 나 있었다. 수 미터의 적당한 폭의 흔들리지 않는 물의 길이 있었고 그 양 옆에서 길을 향해 잔잔하게 물결이 일고 있었다. 강렬한 햇빛이 파도를 예쁘게 장식했다.


“너무 신기하고, 너무 예쁘네요. 보는 풍경마다 그림이에요.”


민정이 감탄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공들여 만든 일러스트의 장면 속에 있는 것 같았다.


“파도가 치도록 만들어 놓았지만 사실 호수입니다.”


길 아래에는 물고기, 거북이, 불가사리 등 다양한 물 속 생물들이 있었다. 물고기 한 마리가 튀어 나왔다가 다시 물에 들어갔다. 원형의 아름다운 물결이 따라 퍼졌고, 물방울들이 막 피어나서 하늘로 솟았다.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민정은 점점 기분이 고조되었다. 힘들지 않았는데 숨이 찼다. 온갖 건물들, 새들, 노랫소리들, 천사들의 미소가 민정의 마음을 행복으로 가득 채웠다. 


엄청나게 먼 거리였는데도 이동하는 속도가 말도 안 되게 빨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끝없이 높게 세워진 탑의 입구에 도착했다. 탑의 입구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하하, 너무 멋지다.”


엘리베이터는 사방이 투명한 물로 된 공간이었다. 바깥이 투명하게 비치는 신비한 물의 벽을 바라보며 그들은 빠른 속도로 탑을 올라갔다. 거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것 같았다. 엄청나게 빨랐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올라가면서부터 민정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으로 감정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천사들은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 강렬한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 꼭대기에 이 탑의 주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를 만나려고 초대를 한 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엘리베이터는 꼭대기에서 멈췄다. 물의 벽이 사라지는 것으로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곧바로 커다란 홀이 있었다. 화사하게 꾸며진 홀 안으로 민정, 루미, 나래, 로운, 해일이 조금 걸어서 들어가자 누군가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눈부시게 빛나고 강렬하며 부드러운 느낌의 여자였다. 연한 금색의 웨이브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안녕.”


“주연 언니?”


“영혼으로 만나서 반가워.”


“안녕하세요.”


병원에 병문안을 왔던 신주연의 옆에서 보았던 영혼의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 때 신주연 영혼은 신주연 육신과 그리 모습이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천국에서 본 신주연은 너무나 아름답고 고결하며 완전한 존재였다. 심지어 루미보다도 훨씬 아름다웠다.


"멋진 천사님들께서 너를 이곳에 초대해 달라고 부탁하셨어. 여기는 내 집이야. 내 집에 온 걸 환영해."


“집 크기가 얼마나 되는데요?”


"많이 넓지? 구경은 잘 했어?”


“...너무 상상도 못할 만큼 넓어요.”


해일은 이 도시가 아시아 대륙 크기 정도 된다고 했다. 수십 킬로미터 높이의 건물이 수백 개는 되었었다. 그것만 해도 놀라웠지만, 그것이 신주연의 소유라는 건 더 놀라운 일이었다.


"한눈에 볼래?"


신주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홀의 중앙으로 민정을 데려갔다. 중앙에서 아래를 보니 투명한 유리 바닥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세계가 보였다.


"우와..."


그야말로 압도적인 스케일이었다. 땅이, 산이, 건물이, 바다와 호수가 끝이 없이 펼쳐져 있었다. 드넓은 세계 속에 어디 하나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민정은 한참 동안 신주연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드넓은 우주를 관찰하는 인간이 된 느낌이었다. 무슨 말을 할지 떠오르지가 않았고 그저 조용히, 정신 없이 눈앞에 펼쳐진 세계를 인식하고 받아들이기에 전념했다.


"저 건물을 한번 볼래?"


신주연이 멀리 한 곳을 가리켰다. 먼 거리였지만 신주연이 보라고 하니 민정의 눈에도 그 건물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지금 세워지고 있는 듯, 조금씩 점차 모습을 갖추어나가는 건물이었다. 아래는 넓고 올라올수록 위쪽이 좁아지는 곡선 모양이었다.


“저 건물이 무슨 모양인지 알겠어?”


민정은 빠르게 만들어지는 건물을 자세히 쳐다봤다. 그녀는 답을 알아차렸다.


“아... 저거, 그거네요. 언니가 나한테 사준 화장품 모양이네요.”


“맞아.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은 자기가 쌓은 의로운 삶을 통해서 받는 거야. 그럼 저건 어떻게 받은 건물일까?”


“어, 설마 제 병문안을 온 것으로 받은 건물인가요?”


“그렇지. 신기하지?”


"우와... 그 병문안을 간 것을 대가로 이렇게 큰 건물을 받는다고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그동안 내 육신이 너한테 잘해 준 것들을 포함하기도 하지.

그리고 사실은 네 병문안이 나름대로 쉽지 않은 상황에서 어렵게 간 거였거든. 갑자기 바쁜 일이 많아서 시간이 없었는데도 겨우 짬을 내서 찾아간 거였어. 그리고 요즘 돈도 별로 없어서 어디 다른 데 쓸 여유가 없는데 나름 좋은 화장품을 산 거야. 당분간 내 육신은 밥도 잘 못 먹고 다닐 거야.”


“그랬구나...”


"혹시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이 건물은 그 병문안 뿐만 아니라 평소에 그렇게 너를 챙겨 주고 했던 선행의 대가로 받는 거니까, 그런 점에서 사실은 내가 너에게 고맙지."


"히히, 말이라도 고마워요."


“정말이야. 나는 항상 너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


신주연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민정을 바라보았다. 민정에게 그 따스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있어. 네가 영혼의 세계에서 모든 여정이 끝난 후 삶으로 되돌아갈 때, 지금 여기의 이 순간만큼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거야. 이번 천국 기행 전체를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고 그런 일이 있었다는 느낌만 조금 가져갈 거야."


"이유가 뭐예요?"


민정은 울상이 되었다.


"네가 만약 지금의 기억을 갖고 육신으로 돌아간다면 어떤 삶을 살 거야?"


"내가 가진 것을 전부 다른 사람들한테 나눠 주겠죠. 뭔들 못 주겠어요. 여기에 끝내주는 세계가 있는데."


민정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 그녀가 느끼기에는 지구에서 사는 육신의 삶은 그저 거짓이며 하룻밤 꿈 같은 허황된 세계였다. 가짜가 아닌 진짜의 삶은 여기 천국에서의 것이었다.


"그런 건 선행이 아니야. 대가를 받기 위해 베푸는 것은 안 돼. 자기가 살아가는 선함이 자기에게 어떻게 돌아올지 잘 몰라야 해... 내 육신도 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몰라.”


“아... 정말 그렇네요.”


“다만 내 육신은 자기의 선행이 의미가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행한 대로 받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 이번 여정에서 너도 그 정도의 감각만 가지고 육신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선행을 베풀면 반드시 돌려받을 거라는 증명할 수 없는 믿음을."


"그렇게 될까요?"


민정은 육신으로 돌아간 자신의 삶을 상상해 보았다. 조금 더 선행을 베푸는 자신의 모습을. 신주연처럼 살 수 있을까. 순수하고 도덕적이며 가난과 돈이 문제가 아닌 삶을.


"그럼. 내가 항상 너를 응원할게."


신주연이 조민정을 축복했다.





민정이 감당하지 못할 강한 축복을 받은 천국 여행이 끝났다. 천국에 갈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탑의 입구에 열린 문으로 들어가자 내리막길이 있었다.

홀린 듯이 한참 동안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전부 내려가서 출구의 문을 열자 다시 제2본부인 민정의 빌라로 돌아왔다.

제2본부의 달력에는 숫자가 10으로 바뀌어 있었다. 천국 기행을 시작하기 전보다 3일이나 지난 상태였다. 시간이 엄청나게 빨리 흘렀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여정은 11일이 지났어요. 절반 정도가 남았습니다. 이번 여정은 어떠셨나요?"


제2본부에는 해일만이 남아 있었다. 그가 민정에게 소감을 묻자 민정은 해일에게 감사를 전하고 질문을 했다. 


"최고로 재미있는 여정이었어요. 감사해요. 그런데 다른 천사님들은 어디 계신가요?"


해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재밌으셨다니 다행이네요. 다른 천사님들은 사무실에 계십니다. 민정씨는 곧바로 다음 여정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


“아쉽네요. 바로 시작해 주세요.”


"천국 기행이 장소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엔 특정 인물에 초점을 맞춘 여정을 할 겁니다. 그것을 위해 여러 시간과 장소를 빠른 속도로 넘나들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들을 테니 정신을 집중하고 잘 보세요."


해일이 말을 하는 동안 그들 주변의 풍경이 시시각각으로 바뀌었다. 도심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다니고 있었다. 해일과 민정은 하늘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십의 인생들이 그곳에 있었다. 민정은 강한 흥미가 돋았다. 이전까지는 민정 자신의 삶에 대한 인생 여정이었다면, 이번에는 인간과 삶 자체에 대한 인생 여정인 듯했다.


"이번 여정은 제가 아는 사람들을 보나요?"


"아니요. 이번 여정의 이름은 <라멕의 세 아들> 입니다. 라멕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해일이 말했다. 그러자 풍경이 바뀌고 민정의 눈앞에 털이 덥수룩한 남자들이 보였다. 거칠고 포악하게 생긴 한 남자 앞에 그보다 젊은 남자 세 명이 있었다. 그들 모두는 즐겁다는 듯 낄낄 웃고 있었는데, 이것이 매우 불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허공에 글자들이 펼쳐져서 보였다.


<창세기 4장 19절>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라멕은 성경 속 최초의 살인자인 카인의 자손입니다. 라멕의 세 아들, 야발, 유발, 두발가인은 각각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 구리와 쇠로 기구를 만드는 자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인간이 가진 악한 속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죠.

지금부터는 이 하나하나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가축을 치는 자.”


해일이 설명했다. 민정은 낯선 이름들임에도 불구하고 흥미가 일었다.


“구약성경 창세기의 라멕의 시대를 대충 계산해 보면 기원전 한 4000년 정도입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시대죠. 그 상황에서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는 어떤 사람을 뜻하겠습니까?”


“음, 당시의 평범한 사람인가요?”


“목축업은 그 환경에서 핵심 산업이었습니다.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친다는 것은 당시 핵심 산업의 기반을 가지고 있는 사람. 오늘날로 치면, 자본가죠. 그것도 대단한 자본가, 즉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을 뜻합니다.”


“아하, 그렇군요.”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는 말은 물질중심주의 사상자들의 대표격이라는 말이죠. 이런 사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무척 많습니다. 한 사람을 예시로 들어 볼까요. 

이 사람은 국내 기업 시가총액 50위 안에 들고 계열사도 몇 개 거느린 모 대기업 회장입니다. 80대의 노인이고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죠."


화면이 바뀌었다. 매우 넓고 화려한 병실에 누워있는 한 노인이 보였다. 병실의 크기나 내부의 모습은 대형 병원의 VIP실이 분명했다. 그러나 노인은 그 넓은 곳에서 혼자였고 초점 없는 흐린 눈으로 TV를 보고 있었다.

TV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천지그룹 내부의 후계자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김봉석 회장이 건강 악화로 사실상의 은퇴를 결정한 후, 장남 김동준에 대항하는 차남 김민준의 지분 확보가 더욱 공격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원래 돈을 번다는 것은 선한 일도 악한 일도 아닙니다. 경제 활동은 사회인으로서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돈을 버는 과정이나 돈을 번 결과는 얼마나 의로우냐 혹은 죄가 끼어 있냐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돈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그 사람의 인생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죠.”


해일이 말했다. 그리고 배경이 바뀌었다. 병실에 누워 있던 노인, 김봉석 회장이 젊었을 적의 모습이었다.

무기력하게 누워 있던 노인은 지금은 품이 큰 양복을 입고 꼿꼿이 선 남자의 모습으로 사무실 같은 곳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부하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의 분노를 감당하고 있었다. 몇 명은 심지어 무릎도 꿇고 있었다. 해일이 그 장면을 설명했다.


“아랫사람을 물건 다루듯 대하며 살아왔습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사람의 역할을 정해 놓고 정확히 그대로만 움직이기를 강요했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든, 기업이든, 법과 질서와 도덕이든 뭐든 짓밟으면서요.”


고함을 지르던 김봉석은 갑자기 소리를 죽이고 조근조근 분노를 담아 말하기 시작했다. 민정에게도 그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우리 쪽 물건에 하자가 있다고 그놈만 주장하는 거잖아? 아직 다른 곳에서는 문제 삼지 않은 거지?

그래, 알겠어? 이건 기회야. 이 일을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는 기회라고. 그놈만 입을 다물게 만들면 되는 거야. 너는 이 일을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어. 그러라고 내가 너를 그 자리에 앉힌 거라고.

그러니까 처리해. 처리하고 보고해. 알았어? 그놈이 다시는 그런 얘기를 못 하게 만들어. 한 오백만원이면 가능하겠지?”


민정은 그 내용을 듣고 경악했다.


“저건 그러니까, 죽이라고 시킨 건가요?”


“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무자비하게 선을 넘었죠. 지금과는 다르게 수십 년 전의 대한민국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은 없고, 신주연씨조차도 살면서 죄를 안 짓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김봉석처럼 자기 욕심을 위해 심각하게 선을 넘는 사람은 흔하지 않죠.

그렇게 자신의 양심도, 도덕도, 영혼까지도 다 바쳐서 세운 자신의 왕국이 이제는 무너지고 있습니다. 김봉석은 늙었고, 아들놈들은 이미 후계자 자리를 굳혔습니다. 그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자기 자신에게 배운 것들을 그대로 실천하는 청년들을 당해낼 수 없었죠. 지금은 실권을 잃은 채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지입니다. 물론 먹을 것 입을 것 걱정은 없습니다. 하지만 수만 명을 부리던 그룹의 회장도 더 이상 없죠.”


다시 노인이 입원한 병실로 돌아왔다. 초점 없는 눈은 TV를 응시하고 있었다. 방금 전에 사람 하나를 죽일 듯이 쳐다보던 그 이글거리는 눈이 맞나. 민정은 사람이 시간이 지나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실감했다.


“육신은 그렇게 되었습니다. 지금 와서야 가진 것들을 아들들에게 빼앗기고 있지만, 나름 거대한 기업을 일구었고 큰 권력을 누렸으니 평가하기에 따라서는 성공한 인생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죠?

그럼 이 시점에서 저 사람의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요?”


“으음. 지옥에 있으려나요.”


심성이 착한 신주연이 천국에 있는 모습을 보았으니 반대로 악하게 살았던 저 노인은 지옥에 있을 것 같았다.


“거의 정답입니다. 지금 저 사람은 지옥의 코앞에 있어요. 이제 지옥에 들어가기 직전입니다.”


“아, 그렇구나. 잠깐, 저 사람은 이제 곧 죽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럼 저 사람이 죽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는 말인가요?”


“맞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영혼은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지상영계에 있고, 죽고 나면 그 삶에 따라서 정해진 곳으로 가게 되죠.”


“호오...”


살아서는 왕 같은 권력을 누렸지만, 죽음을 앞둔 그는 모든 것을 잃은 듯 무력해 보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지옥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민정은 인생이 참 무상한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여유로운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직접 보죠. 지옥에 떨어질 운명인 영혼은 어떤 모습인지.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배경이 바뀌었다. 그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고, 해일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실로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시커먼 동굴 같은 바닥에 말라비틀어진, 정말로 다 말라서 비틀어진 영혼이 파들거리고 있었다. 영혼의 팔다리는 휴대폰 충전기 선만큼이나 가늘었고 얼굴은 오징어처럼 얇았다. 몸통은 팔다리만큼 가늘지는 않았지만 너무 말라서 배와 등이 말 그대로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허업...!”


놀란 민정이 입을 틀어막았다. 이게 사람의 영혼이란 말인가. 물론 형상의 기괴함으로만 따지자면 예전에 병원 탈출에서 싸웠던 악령들이 더 끔찍하게 생겼었다. 그러나 눈앞에 이 끔찍한 것은 사람, 그것도 방금까지 병원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던 사람이었다. 사람이 그토록 망가진 영혼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갑자기 머리에 뿔이 달리고 커다란 가시가 달린 몽둥이나 채찍 같은 것들을 든 악령들이 나타났다. 느껴지는 큰 위화감을 보니 사탄이 분명했다.

사탄들은 민정이나 해일에게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다. 그들은 곧바로 손에 든 각종 무기들로 바싹 마른 노인의 영혼을 무자비하게 내려쳤다.


“흐읍...!”


“으아아아아악!”


가시 몽둥이가 영혼에 닿는 순간 무언가 사방으로 튀는 것들을 보며 민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눈으로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민정이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끊임없이 내려치는 소리, 노인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해일은 겁에 질려 떨고 있는 민정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조금 후에 때리는 소리가 멎었다. 민정이 살며시 눈을 뜨니 뭉개진 무언가를 커다란 사탄이 질질 끌고 걸어가고 있었다.

완전히 사탄의 수중에 들어간 김봉석의 영혼이었다.


“저대로 지옥에 끌려가는 거예요?”


민정이 안타까움을 담아서 물었다.


“아직 육신이 죽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조금 남았습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시간문제죠. 지옥에 가면 지금보다도 훨씬 고통스러운 시간을 영원히 보내게 될 겁니다.

천국이 멋진 세계였던 것 이상으로 지옥은 끔찍한 세계입니다.”


해일도 차분하게 말했지만 씁쓸함을 담고 있었다.


“지금보다도 더... 정말 끔찍하네요..”


민정은 몸서리치면서 말했다. 그녀는 깊이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천국에서 대륙 크기의 도시를 소유하고 영혼의 격이 다른 모습을 보여 준 신주연은 육신의 삶에선 피부 관리용 화장품도 신중하게 살 정도로 여유롭지는 않았다. 그런데 계열사를 거느릴 정도로 큰 기업의 제왕이었으며 기업의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다스렸던 남자는 영혼이 영원히 지옥에 빠져 고통을 받는다고 한다.


"김봉석에겐 자신의 삶을 돌이킬 수많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지옥행이 확정되기 직전까지도 그를 담당하는 수호천사들이 목숨을 걸고 그를 위해 싸웠죠. 단 한 번이라도 그가 자신의 삶을 돌이키고 선행을 베풀기를 간절히 기대하면서요. 하지만 그는 결국 마지막까지 천사들의 기대를 저버렸죠."


인생이란 무엇일까. 무엇을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는가. 부하에게 호통을 치며 누군가를 죽이라고 시키던 김봉석의 눈에는 강력한 의지와 열정이 담겨 있었다. 무엇을 위한 의지였을까. 그토록 열심히 산 결과가 지옥인 걸, 왜 그는 꿈에도 몰랐을까.


“김봉석은 자신의 행위가 이런 결과로 돌아올 거라는 걸 왜 몰랐을까요?”


어느새 제2본부로 돌아온 민정과 해일이었다. 해일이 민정의 생각을 짐작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민정이 대답하지 못하자 해일이 말했다.


“누구나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죠. 타고난 심성은 사람마다 달라도,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 알고 배우게 되니까요.

다만 김봉석은 그걸 알면서도 그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습니다. 욕심 때문이죠. 돈에 대한 욕심뿐만 아니라 권력을 손에 쥐고 다른 사람 위에 서려고 했던 욕심을 참지 않고 그대로 다 해버린 겁니다.

첫 번째로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해일이 말을 마쳤다. 그리고 풍경이 바뀌었고 다시 글자가 보였다.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다음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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