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 민정의 네 번째 여정(2)
화면에 뭔가 고풍스러운 느낌의 현악기가 등장했다. 고대 유물 같은 느낌이었다.
“이게 여기서 말하는 ‘수금과 퉁소’는 피리를 번역한 겁니다. 한 마디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장막에 거주하여 가축을 치는 자’는 거대 자본가이자 물질을 추구하는 자였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사람을 뜻할까요?”
“음악가를 뜻하는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런데 음악가뿐만 아니라 더 큰 범위로, 예술가를 말할 수 있죠. 모든 창작이나 공연을 하는 사람들 말예요. 물론 돈을 버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술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없습니다. 창조주가 사람의 마음에 예술에 대한 갈망을 넣으신 것은 축복이고, 천국에서 우리가 본 모든 것들도 예술적이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예술가들 중에서 솔직하게 마음이나 영혼이 순수하지 않은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매우 큰 침대에 여러 명의 헐벗은 젊은 남녀가 누워 있었다. 민정은 조금 당황했지만 평정심을 유지했다.
방이 아니라 넓고 화려한 최고급 별장의 야외 테라스였다. 침대 옆에는 수영장이 있었고 테이블에는 고급 술병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 공간에 여러 명의 남녀가 그런 모습으로 누워 있는 것이, 상위 0.01퍼센트 젊은 부자들의 은밀하고 지저분한 사생활의 현장을 보는 것 같았다.
와중에 화면의 초점은 한 여자에게 맞춰져 있었다. 금발의 아름다운 외모가 퀭한 눈빛과 일그러진 표정으로 훼손되어 있는 그녀가 이번 여정의 대상이었다.
“저 가수가 누구인지 민정씨도 아시죠?”
“엄청 유명한 가수잖아요? 저도 노래를 들어봤어요.”
풍경이 바뀌었다. 화려한 무대에서 열창하는 여자가 보였다. 드넓은 콘서트장에서 수만 명의 관객들이 열광하고 있었다. 이어서 여러 가지 풍경들이 겹쳤다. 시상식에서 상을 거머쥐고 기뻐하는 장면, 언론의 기사와 인터뷰, 그녀가 세운 수많은 기록들이 나왔다.
'2018년 가장 영향력 있는 연예인 3위!'
'5년 연속 청소년들이 닮고 싶은 가수 선정!‘
“굳이 이름은 언급하지 말고 A가수라고만 하죠. 간략히 설명하자면 A는 19세에 데뷔해서 그 앨범으로 빌보드 차트 1위를 달성한 천재 싱어송라이터로 알려졌죠. 한국에도 꽤 팬들이 많고요. 반짝 슈퍼스타도 아니라서 데뷔 후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음악적으로는 세계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거기에 최고의 자리에 있음에도 특별히 거만한 언행을 하지도 않고, 기부도 많이 해서 존경도 받고 있어요. 누가 봐도 인생이 완벽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죠.”
민정은 그녀의 모습을 자세히 보았다.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악령이 짓는 표정과 흡사했다. 그녀의 주변에 있는 남녀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약을 하는 중입니다. 거의 10분 동안 다른 세상에 가 있는 느낌이 들 거예요.”
다른 세상이라는 해일의 표현이 민정의 귀에 맴돌았다.
"이 사람은 왜 마약을 했나요?"
민정이 질문했다. 해일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행복하지 않아서죠.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은 빈껍데기에요. 모든 것을 다 이뤘으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마음엔 공허함뿐이에요. 텅 빈 마음을 쾌락으로 채우려고 한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약으로 마음이 채워질 리가 없죠. 오히려 나쁜 것들이 마음 속에 가득 차게 됩니다."
그녀의 영혼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육신은 외모도 아름다웠지만, 그 영혼의 모습은 육신과는 180도 달랐다.
온몸에 가시가 돋은 흉측한 괴물의 모습이었다. 팔다리는 짧았고 뭉툭한 몸통은 온몸을 덮은 가시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얼굴에 털이 잔뜩 났으며 눈빛이 흉흉했다. 못생긴 밤송이에 팔다리가 달린 느낌이었다.
"으아아아!!!"
A가수의 영혼이 분노에 가득 찬 비명을 질렀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아까 전의 김봉석의 영혼처럼 무력한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영혼에 악의가 느껴졌다.
“자기 자신과, 마약과, 자기를 이렇게 만든 세상, 한시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언론 미디어와 악성 팬덤들에 대한 분노와 서운함을 가득 품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항상 웃지만 속은 이미 분노에 잡아먹혔고요. 한 번도 그 분노를 제대로 표출한 적이 없지만 영혼에는 그대로 남게 되어 있습니다.
육신으로는 모두의 선망을 받는 최고의 연예인, 영혼으로는 흉측한 모습으로 온 동네를 싸돌아다니며 마구잡이로 남을 공격하는 한 마리의 괴물. 그게 가수 A의 본모습입니다.”
A의 영혼이 지나가던 평범한 영혼에게 이유 없이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 영혼을 경호하는 천사에게 제지당했다. 천사가 달려드는 그녀를 단호하게 방패로 쳐 내자 비틀거리던 그녀는 되돌아서 또 어디론가 달려갔다.
민정은 그 모습을 마음 아프게 바라보았다. 그녀가 불쌍했다. 육신의 모습을 생각하면 자기가 그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마음 속의 공허함을 채우지 못하는 것은 예술가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죠. 예술가들은 감성이 풍부하지만 그만큼 마음을 채우기가 어려운 면이 있어요.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만큼 영혼도 영향을 받는 겁니다."
화면이 다시 바뀌었다. 흉측한 A의 영혼이 이번에는 목놓아 울고 있었다. 세상이 떠나갈 듯 우는 소리가 민정의 귀를 때렸다.
“그래도 김봉석보다는 상황이 훨씬 좋아요. 김봉석은 지옥의 문 앞에 와 있었지만, 가수A는 아직 젊고 기회가 남아 있죠. 언제라도 선한 행위로 바뀔 수 있긴 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선과 악은 관성이 강하기 때문에, 특별히 마음을 굳세게 먹고 결단하지 않는 한 쉽지는 않을 겁니다. 마약을 끊는 것도 어렵고요.”
목놓아 우는 흉측한 영혼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풍경이 바뀌었고, 그들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라멕의 세 아들> 중 두 개의 여정이 끝난 것이다. 해일은 여정이 끝나도 민정이 잠시 여운을 느끼도록 기다렸다.
이제 남은 하나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였다.
“마지막.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 여기서 구리와 쇠가 상징하는 것은 무기입니다. 무기를 만드는 자, 라는 것은 무기 개발 기업을 운영한다는 뜻은 아니고, 폭력을 업으로 삼아 타인을 공격하고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몇 명의 남자가 총을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얼굴에 피가 튀어 있었고, 옆에는 총을 든 몇 명의 남자와 쓰러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현장에서 여러 사람이 죽은 살벌한 모습이었다.
“이건 또 뭐야...”
영혼이 아닌 육신이 보이는 무서운 모습에 민정은 몸서리쳤다.
“어느 나라의 커다란 갱단입니다. 살인, 강도, 마약 공급, 인신매매 등 온갖 범죄를 다 저지르는 범죄 카르텔이죠.”
해일이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그는 내심 총으로 악을 행하는 자를 경멸했다.
“대놓고 범죄조직이니까 뭐 영혼을 볼 것도 없습니다. 당연히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죠.
다만 몇 가지 짚을 점은 첫 번째는 그래도 처한 환경을 감안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총과 마약의 도시에서 살았으니 총을 들게 된 것도 이상하지는 않죠. 만약 대한민국에서 저렇게 사람을 많이 죽였다면 육신이 죽지 않았어도 곧바로 지옥에 떨어졌을 겁니다.
두 번째로 이들은 같은 갱단 소속이라서 영혼도 비슷한 모습으로 같은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행하는 일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죠.”
화면이 바뀌었다. 큰 구덩이에 여러 사람이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구덩이 안에서 영혼들은 서로 칼이나 몽둥이를 들고 휘두르며 공격하고 있었다. 육신과 같이 그들의 영혼도 폭력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폭력으로 고통을 받는 모습이었다.
영혼의 외형은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대충 비슷하게들 생긴 것 같았다.
과연 해일의 말대로 그들은 고통을 받고는 있었지만 김봉석의 경우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외형은 A가수보다도 나은 것 같았다.
“이들은 같은 카르텔에 소속되어 함께 범죄를 저지르는 동안은 이렇게 함께 고통을 받을 겁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저마다 각자의 길이 갈려서 가겠죠. 누군가는 지금보다 좀 더 나은 모습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또 누군가는 김봉석보다도 더 어두운 곳으로 갈 거고요. 영혼은 육신의 선과 악의 행함대로 다 받기 때문이죠.”
해일이 말을 마치자 풍경이 바뀌고 그들은 제2본부로 돌아왔다. <라멕의 세 아들> 여정이 끝난 것이다.
다른 천사들은 제1본부를 지키고 있었기에 아무도 없었다.
"어떠셨습니까? 세상에서는 빛나는 성공을 거둔 사람들, 권력과 힘을 가진 사람들이 영혼의 세계에서는 그 과정에서 쌓은 죄로 인하여 고통받는 모습이."
해일이 민정에게 소감을 물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특히 주연 언니랑 너무 비교가 되고요."
"일기장과 펜을 드릴 테니 일기를 쓰고 계세요. 저는 다음 여정을 준비하고 오겠습니다."
민정은 방금 보았던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무엇을 위한 삶인가. 돈, 명예, 꿈, 성공, 그 모든 가치관이 흔들렸다.
세상이 뒤집히고 있었다.
민정을 남기고 제1본부로 이동한 해일은 마음이 급했다. 제1본부에서는 한참 전투가 진행 중이었다. 해일이 민정을 잠깐 홀로 남겨둘 수 있는 것도 현재 모든 사탄들이 제1본부를 침공 중이기 때문이었다.
[사탄들이 거세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라멕의 세 아들>을 진행하는 와중에 루미로부터 받은 연락이었다. 해일은 마음이 급해졌고 여정을 간략하게 마무리해 버리고 얼른 제1본부로 이동했다.
쾅-
한참 사탄들이 천사들을 두들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섯 개의 아파트 동은 전부 무너졌고 가운데 성을 중심으로 천사들이 성문을 지키고 있었다.
해일이 다급하면서도 내심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제1본부는 천사들의 영역이기에 전투에 있어서 천사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제1본부에서 싸운다면 천사들은 강해지고 사탄들은 약해졌으며, 중심의 성 안에서 영력을 사용한다면 강력한 보호막과 포격 등 공격과 방어 기술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천사들은 모두 지친 듯 했으나 상처가 없었고 여섯 사탄과 많은 악령을 상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해일은 짧은 시간에 상황을 파악했고, 전투에 개입하지 않고 잠시 대기했다.
루미가 만들어낸 낮게 뜬 태양이 주변을 환하게 비추더니 붉은 노을이 되어 강한 빛을 뿜었다. 사탄들은 태양을 없애지 못하고 쏟아지는 빛들을 피하거나 막아냈다. 악화, 악의, 악행은 무리 없이 빛들을 막아냈지만 피보라, 피철철, 피칠갑은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하고 상처를 입었다.
"만물의 터전."
넓은 숲이 성 주변을 에워쌌다. 노을빛을 막아내느라 벅찬 사탄들은 숲을 건드리지 못했다. 천사들은 한숨 돌렸다.
"그래도 제1본부에 있으니까 막을 만하네."
잠깐 여유를 찾은 나래가 말했다.
"아직 그런 말을 할 때는 아니지 않을까요?"
로운이 핀잔을 주었다. 핀잔을 준다는 것 자체가 여유를 찾은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쉬익-
날카로운 악화의 손톱이 나무들을 베어냈다. 아직 노을빛이 꺼지지도 않았는데 반격을 가하는 악화였다.
"저놈도 독하긴 해."
나래가 중얼거렸다. 붉게 타오르는 노을은 마지막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하듯 폭발했다. 강력한 빛이 사탄들을 휩쓸었다. 모의 전투에서 해일을 상대로 한 것보다 훨씬 크고 강력한 폭발이었다.
사탄 악화가 두 팔과 여섯 다리를 크게 벌렸다. 여덟 손톱에서 강력한 영력이 모였다. 모인 영력이 큰 구체의 형태로 폭발하는 빛을 막아섰다.
폭발을 폭발로 막는 것이었다. 해일이 노을을 상대한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쾅-
큰 폭발이 일어났다. 천사 쪽에선 나래가 방패를 들어 폭발을 막아냈다. 사탄 쪽에선 악행이 한쪽 팔을 크게 변형해서 방패를 세웠다.
"..."
폭발이 지나간 자리에는 잠시 침묵이 돌았다. 태양이 지자 주변이 어두워졌다. 제1본부를 비추던 가로등이 전부 무너졌고 태양도 없어졌기에 중앙의 성과 천사들에게서만 미약한 빛이 나왔다.
"공격해라!"
악화가 쉰 목소리로 외쳤다. 악행의 주먹과 악의의 염력, 피보라의 핏물이 나래의 방패를 때리기 위해 움직였다. 악화의 손톱은 폭발을 일으킨 뒤 빛을 잃고 회색으로 딱딱해진 루미의 태양에게 향했다.
끼룩-
경박한 울음소리를 내는 청학이 악화의 손톱을 막아섰다. 강철처럼 단단해진 깃털과 부리를 사용하자 악화를 잠시 막아설 수 있었다. 해일의 계산으로는 잠시 막아선다면 충분했다.
잠시 후 청학이 지키던 태양이 다시 빛을 내기 시작했다.
"하루 중 가장 영적인 시간,"
다시 빛나는 구체는 이제 태양이 아니었다. 금빛이 아닌 은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조용한 새벽."
루미의 두 눈이 눈동자가 사라지고 은빛으로 변했다. 달에서 강한 영력을 담은 빛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달빛은 은은했지만 태양의 찬란한 금빛보다 훨씬 서늘하게 사탄들의 살을 베었다. 피보라 등 하위 3사탄은 달빛을 견디지 못하고 서로 뭉쳐 몸을 보호했다. 악의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그나마 버티는 것은 악화와 악행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천사들이 두고 볼 리 없었다.
"공격해!"
루미가 명령했다. 로운이 손을 뻗고 외쳤다.
"가장 강한 나무로 창을 만들어라."
로운의 나무가 사방에서 악화를 덮쳤다. 달빛에 시달리던 악화는 강하게 쇄도하는 로운의 나무를 피하지 못하고 몸이 꿰뚫렸다. 제1본부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천사 중 가장 약한 로운이 악화에게 그 정도의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
"죽어라-!"
신이 나서 힘을 내는 로운이 악화를 공격하고, 루미는 악행을 공격했다. 날카로운 바람과 푸른 학이 단단한 악행의 피부를 뚫었다. 악행의 표정이 극한의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악화 님!!"
달빛에 몸이 두 동강 난 악의가 악화를 불렀다. 피보라 등 3사탄은 이미 곤죽이 되어 죽기 일보직전의 상황이었다.
"후퇴해."
증오를 가득 담아 악화가 명령했다. 기다렸다는 듯 악의를 비롯한 사탄들이 모습을 감추었다. 루미가 최후의 공격을 가하려고 했으나 사탄들이 사라지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휴..."
루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사들이 전투 태세를 마무리하고 정리했다.
짝짝짝-
전투를 지켜보던 해일이 박수를 쳤다. 박수와 함께 그들은 제2본부인 빌라의 입구로 순간이동했다. 로운을 보호할 수 있는 범위로 이동한 것이다. 동시에 제1본부는 다시 봉인 상태로 들어갔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무리 제1본부에서 수비만 했다고 하지만 저놈들의 최전력을 이렇게 무난하게 막아낼 줄은 저도 몰랐네요."
"헤헤, 감사합니다."
해일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로운이었다. 루미와 나래도 마찬가지로 표정이 밝았다.
"<라멕의 세 아들> 여정도 계획대로 잘 진행되었습니다. 민정이는 일기를 쓰고 있고 앞으로 경호 전략에 대해서 빨리 의논한 뒤 바로 다음 여정을 하려고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지금까진 그냥 여정을 진행할 때는 제1본부를 봉인해 놓으면 그만이었지만, 이제는 민정이가 육신으로 돌아갔을 때를 위한 ‘축복’을 비축해 놓아야 하니 제1본부를 계속 봉인해 놓을 수 없죠. 이 때문에 민정이를 지키기가 이전보다 어려워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와 달리 천사들이 제1본부에서 사탄들과 싸운 이유였다.
'선택'을 끝낸 지금은 민정이 육신으로 돌아가기 전에 영혼을 성장시키는 여정을 할 차례였다. 제1본부는 민정의 영혼의 집이었고, 집을 봉인한다면 '보석'을 지키기 쉬웠지만 민정의 영혼이 성장하는 데 제약이 있었다.
"사탄 놈들의 최우선 목표는 원래 민정이가 죽음을 선택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놈들은 여정 진행을 방해하기 위해 땅을 넓히고 제 선택을 제한하는 전략을 세웠죠. 하지만 민정이의 뜻밖의 선택에 사탄 놈들도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았습니다. 놈들의 전략 자체도 완전히 바뀌었죠. 이제 놈들의 목표는 민정이를 우리에게서 빼앗아간 후 절망을 주는 것입니다. 살아 돌아가도 힘을 내지 못하고 다시 죽음을 선택하게끔 말이죠."
해일이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놈들이 민정이를 빼앗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제가 보호하고 있는 민정이의 영혼을 직접 찾아내어 납치하는 것이죠. 이를 위해 놈들은 저를 뚫어내야 합니다. 저를 이기지 못하더라도 잠깐의 틈만 내어서 납치할 수도 있죠.
두 번째는 여기 제1본부를 공격해 이 안의 '보석'을 손에 넣는 것입니다. '보석'을 사용하면 민정이를 강제로 이동시킬 수 있으니까요."
로운이 침을 삼켰다. 제1본부를 주로 보호하는 그녀의 입장에서 자칫 실수하면 민정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1본부의 방어력은 어느 정도 검증된 것 같습니다. 세 분의 천사님들이 함께 막는다면 악화를 포함한 최전력이라도 방어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물론 변수는 아직 있습니다. 놈들이 마음 먹고 '저주'를 퍼부어 공격한다면 또 모르죠. 놈들이 사용 가능하다고 본부에서 파악해서 알려준 '저주' 목록은 여기 있습니다."
해일의 눈 앞에 여러 글자들이 나열되었다. 영력 강화, 사념 방해, 순간이동 방해, 환각, 혼란, 영역 속성 조작...
"다른 건 몰라도 사념 방해, 순간이동 방해, 환각, 혼란은 치명적일 수 있죠. 이 '저주'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도록 천사님들이 신경을 써 주셔야겠습니다."
"명심할게요."
"하지만 세 분의 천사님들이 제1본부에 함께 있을 때에 사탄 놈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이죠. 반면에 저 혼자서는 여정을 진행 중일 때에는, 민정이를 절대적으로 보호할 수 있다는 자신은 없습니다."
해일의 말투가 무거워졌다.
"여섯 사탄이 모두 덤벼도 싸우면 제가 이깁니다. 하지만 민정이를 보호하면서 싸우기에는... 저로서도 백 퍼센트 장담은 못 하겠습니다. 하지만 방어의 달인이신 나래 천사님이 함께 하신다면 웬만하면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문제점이 생기네요. 나래가 제1본부에서 '보석'을 지킨다면 제1본부는 지킬 수 있지만 민정이를 지키지 못할 수 있고, 나래가 민정이와 함께 여정을 다니면서 민정이를 지킨다면 제1본부를 지킨다는 보장이 없군요."
루미가 덤덤하게 말했다.
"맞습니다. 사탄 놈들도 아마 같은 결론을 내릴 겁니다. 둘 중 하나만 뚫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이건 불리한 싸움이네요.”
로운이 불평하듯 말했다.
“사탄은 둘 중 어느 한 쪽만 뚫으면 되지만 우리는 양 쪽을 막아야 하는 입장이니, 머리가 아프네요. 어떡하면 좋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불리하지 않아요.”
해일이 딱 잘라 말했다.
“불리한 싸움은 조민정을 삶으로 돌아가게 하는 게 불리한 싸움이었죠. 우린 이미 승리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민정이를 빼앗길 위험이 커도, 괜찮습니다.”
당연한 걱정을 너무 강력하게 부정하는 해일 때문에 로운은 조금 머쓱했다. 그녀는 해일의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굳이 의문을 드러내진 않았다.
“아무튼 나래 천사님은 수시로 제1본부와 민정이를 왔다갔다 하시면서 양 쪽을 신경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사탄 놈들은 나래 천사님이 합류하지 못하도록 순간이동 방해나 환각 같은 ‘저주’를 사용할 겁니다. ‘저주’만 못 쓰게 막아도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집중해서 잘 막아 주세요. 이제 10일밖에 안 남았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로운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회의를 끝낸 후 해일은 나래와 함께 제2본부의 민정을 찾았다. 이제 달력의 숫자는 10으로 바뀌었다.
“이번 여정부터 나래 천사님이 도와주실 겁니다.”
“안녕. 여정 잘 하고 있어?”
“아, 어서 오세요.”
민정은 웃으며 나래를 반겼다.
“다른 천사님들은 안 오세요?”
“응, 내가 워낙 유능해서 여기저기에서 날 필요로 하네.”
“크크크, 그게 아니라 제일 할 일 없어서 남는 자리에 막 들어가는 거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 거였나?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였나?”
실없는 농담을 하며 마주 보고 웃는 나래와 민정이었다. 해일은 나래를 데려온 보람을 느꼈다. 해일은 유능한 수호천사였지만 그의 머릿속에도 경호 대상과 농담을 주고받는 방법이나 과정은 부재했다.
열심히 여정을 진행한 것은 해일이었지만 결국 민정의 마음을 돌이키는 주요 역할은 다른 천사들이 해낸 것이라 봐도 무방했었다. 다음엔 로운도 부를까 싶은 생각이 드는 해일이었다.
“해일 천사님, 다음 여정은 뭔지 설명해 주시죠.”
“이번 여정은 한 마디로 설명하긴 어려우니 진행하면서 설명을 드릴게요. 한 말씀만 드리자면 마음의 준비를 조금 하시는 게 좋습니다.”
“마음의 준비씩이나요?”
“민정씨에게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거든요. 하지만 이 때를 짚고 넘어갈 의미가 있습니다.”
제2본부의 풍경이 바뀌었다. 몸은 어느 정도 컸지만 지금의 민정보다 훨씬 앳된 모습의 민정이 보였다. 소녀 민정은 낯빛이 어두웠고 몹시 지쳐 보였다.
“중학교 때 체육복이네요.”
민정이 말했다. 해일의 말마따나 중학교 때는 좋지 않은 기억이 많았다. 여중생 조민정의 어떤 모습을 보게 될지 걱정이 되었다.
날씨마저 흐리고 비가 잔뜩 오고 있었다. 어린 조민정은 교실 안에서 우울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