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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틀리제 Oct 13. 2024

사연녀와 그녀의 수호천사들

19화 : 민정의 다섯 번째 여정

“야, 민정아. 이소영 선생님이 교무실로 오래.”


누군가 어린 민정을 불러 말을 전했다. 반장이었다. 전할 말을 다 한 반장은 곧바로 친구들과 놀러 어디론가 가 버렸다.

어린 민정은 터덜터덜 걸어서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카메라로 찍는 것처럼 풍경이 걸어가는 어린 민정을 따라갔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세차게 비가 내렸다. 모든 것이 현실감이 있어서 그 때로 되돌아간 느낌이 드는 듯 했다.

교무실에 들어서자 젊은 선생이 민정을 반겼다.


“아, 민정아. 저기 상담실에 손님이 와 계시네.”


“손님이요?”


어린 민정은 이소영 선생의 말을 멍청하게 되물었다. 교무실 구석에 마련된 상담실의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자 어떤 중년의 남자가 의자에 앉아서 민정을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 민정은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네가 민정이니?”


“네...”


“와서 앉으렴.”


남자의 말투와 표정은 친절했고 옷차림은 말끔했다. 어린 민정은 조용히 그 앞에 의자에 앉았다.


“아저씨는 수현이 아빠란다.”


남자가 말하자 어린 민정은 온몸이 굳었다.


“내가 왜 너를 불렀는지 알겠니?”


“...저 아니에요.”


어린 민정이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거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되었을 때 어른 민정이 중간에 개입했다.


“잠깐만요, 해일 천사님.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민정의 부탁에 해일이 시간을 멈췄다. 현장이 일시정지 되었다.


“이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도 잘 기억해요. 이 장면을 굳이 다시 보고 싶진 않아요. 필요한 부분만 보고 나머지는 넘기면 안 될까요?”


민정의 부탁에 해일은 잠시 고민하더니 과감하게 결정했다.


“흠,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면 시간을 넘길까요. 김수현이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부터...”


해일이 허공에 손가락을 움직이자 풍경이 빨리감기를 하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중년 남자는 거의 자세가 변하지 않는 반면 소녀 민정은 고개를 숙이고 들었다가 얼굴을 찡그리곤 했다.


“이쯤에서 다시 보겠습니다.”


그때 뒤에서 말 한 마디 없던 나래가 끼어들었다.


“해일아, 비상상황이야.”


“이런.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혀를 찬 해일은 총을 꺼내들었다. 나래는 어른 민정 앞에 섰다. 그는 순식간에 전투제복으로 갈아입었고, 흰 티와 청바지 차림의 민정에게도 방탄복 같은 옷이 입혀졌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민정은 긴장하여 주먹을 꽉 쥐었다.


쾅-


해일의 총이 불을 뿜었다. 약 7년 전에 존재했던 중학교 상담실에 사탄이 들이닥쳤다. 악행의 단단한 근육이 총알을 받아냈다. 악화의 손톱이 해일이 서 있던 상담실 중앙을 파헤쳤다. 옆으로 몸을 날린 해일은 염력으로 공간을 비틀어 나래와 민정을 서로 떨어뜨리려 하는 악의의 머리를 쏘았다.


순식간에 쏟아지는 공방을 민정은 열심히 쳐다보았다. 집중한 만큼 조금씩 보이기도 했다. 털투성이에 위협적인 모습을 한 악행이 눈에 들어오자 민정은 섬뜩한 공포를 느껴 마음이 철렁했다. 그런 민정을 나래가 말렸다.


“사탄에게 너무 집중하지 마. 나쁜 영향을 받을 수도 있어.”


“아, 넵.”


나래에게도 때때로 공격이 가해졌다. 피보라 이하의 3사탄은 해일의 사각에서 나래를 공략했다. 하지만 나래는 별 문제 없이 몇몇 공격을 막아냈고, 정신을 집중해 혹시 모를 틈을 내주지 않도록 했다. 방패가 공격을 튕겨낼 때마다 민정은 움찔했다.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말했듯이 네놈의 자만심이 일을 망칠 것이다.”


짧은 시간이 지나자 악화가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 사탄들은 등장했을 때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민정은 갑자기 끝난 전투에 놀랐고 살짝 어이가 없었다.


“놈들은 집에 갔나요?”


“그렇죠. 그동안은 사실 왜 안 오나 싶었습니다. 이게 보통이죠. 이런 식으로 갑자기 습격하고 또 물러나고, 우리가 방심하거나 집중력이 떨어질 때를 노리는 겁니다.”


해일이 총을 품 안에 넣고 전투제복을 경호제복으로 갈아입었다. 손짓을 하자 망가진 교무실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래도 방어 태세를 풀었다.


“차라리 잘 됐습니다. 사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거든요.”


해일은 여정을 이어나갔다. 그가 공간을 조작하며 설명했다.


“이날 있었던 사건의 핵심 인물은 두 명입니다. 김수현과 김수현의 아버지, 김호진이죠. 그리고 관련된 사람으로 심혜진 선생과 이소영 선생이 있습니다.”


어린 민정과 김호진이 마주 앉아 있는 상담실에 중학생 한 명이 추가되었다. 제법 예쁘게 꾸민 티가 나는 여학생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나쁜 년.”


어른 민정이 여학생을 보고 중얼거렸다. 해일이 쓴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


“말씀처럼 김수현은 악인입니다. 어릴 때부터 나쁜 행동을 많이 했죠. 이 사건을 일으킨 김수현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어른들과 친구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기가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거였죠.”


민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김수현이 생각하는 약자가 바로 민정이었다. 민정이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김수현은 자신의 담임인 심혜진 선생에게 자기 지갑이 도둑맞았다고 주장하고, 범인으로 같은 반의 조민정을 지목합니다. 그 근거로 체육 시간에 조민정이 가장 늦게 반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으며, 지갑을 들고 있는 것을 목격한 사람도 있다는 말을 했죠.”


상담실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이 김호진과 어린 민정에서 다른 두 사람으로 바뀌었다. 김호진의 자리에 앉아 있는 40대 선생의 표정은 지쳐 보였지만 그녀는 어린 민정의 자리에 앉은 학생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수현아, 민정이가 지갑을 들고 있는 걸 본 사람이 누구라고?”


“누가 말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반 애들이 다 알고 있어요. 조민정 집이 가난하고 돈도 없으면서 조금 있으면 자기 생일이라고 에어팟을 살 거라고 떠들고 다녔거든요. 걔가 돈이 어딨어요. 제 지갑 훔쳐서 에어팟 사려고 하는 게 분명해요.”


김수현의 태도는 당당했다. 지켜보는 민정은 열불이 나서 소리를 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전부 거짓말이에요. 저는 에어팟을 사려고 한 적이 없고 당연히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우리 반 애들이 다 알고 있다는 것도 아니에요. 애들은 아무것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어요. 애들이 아는 건 김수현이 거짓말쟁이라는 거였죠. 원래부터 허세가 심했고 말을 많이 만들어 내곤 했으니까요.”


“맞습니다. 그리고 심혜진 선생도 그런 점을 알고 있었죠.”


“증거가 없으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휴대폰은 잃어버려도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지갑은 그렇지 않아. 애초에 지갑에 현금도 없었다며.

그리고 누가 봤다더라 하는 말들은 믿지 마. 말을 만들어내는 건 쉽지만 잘못 만들어진 말을 고치는 건 힘들어. 잘못 만들어진 말이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고.”


심혜진 선생이 단호하게 말했다. 김수현의 표정이 굳었다.


“사실상 다 알고 하는 말이죠. 15년 교사 경력의 심혜진 선생은 여중생의 허술한 거짓말 정도는 그 내용을 안 들어도 말할 때 표정만 보고도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증거 없이 추궁할 수는 없으니까 돌려서 말한 거예요.”


“심혜진 쌤이 김수현한테 이렇게 말씀하셨던 건 몰랐네요.”


속이 조금은 시원한 민정이었다.


“심혜진 선생을 통한 모함이 실패한 김수현은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그게 바로 자기 아버지한테 하소연하는 거였죠. 이것은 사탄이 어둠의 지혜를 김수현의 영혼에게 속삭인 것입니다. ”


온몸이 새빨간 악령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수현의 영혼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 속삭이고 있었다. 김수현의 영혼의 모습은 거지처럼 더러웠다.


“어, 저 사탄은?”


김수현의 영혼에게 속삭이는 사탄은 민정이 본 적이 있는 자였다.


“방금 쳐들어온 그놈입니다. 피보라라는 이름이고, 오래 전부터 민정씨를 공격해 온 놈이죠. 놈은 김수현을 이용하여 민정씨에게 고통을 준 것입니다. 민정씨 주변 사람 중에 민정씨를 괴롭게 할 만한 인물인 김수현에게 접근한 거죠. 물론 그것은 김수현이 민정씨한테 해를 끼칠 생각으로 가득한 악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와, 이럴 수가...”


분노한 민정이 한숨을 내뱉었다. 풍경이 바뀌었다. 아파트 안에서 식탁에서 저녁을 먹는 가족의 모습이 보였다. 김수현은 밥을 먹다 말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부모는 당황해서 아이를 달랬다. 생각이 깊어진 듯한 표정의 김호진이 민정의 눈에 들어왔다.


“김호진은 눈물을 흘리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그간 자기가 딸에게 너무 무심했음을 깨닫고 반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직접 이 일을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죠. 학교에 가서 직접 조민정이라는 아이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몇몇의 천사들과 사탄들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그 지척에서 예의 피보라가 김호진의 영혼에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네가 믿어주지 않는다면 네 불쌍한 딸을 누가 믿어줄까?”


피보라는 김호진에게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해일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김호진은 자기 딸보다 훨씬 나은 인간이었습니다. 원래라면 이렇게 확인도 되지 않은 채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지는 않는 사람이었어요. 심지어 자기 딸이 그렇게 착하지 않으며, 때로 쉽게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서 사탄이 김호진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만든 겁니다. 바로 자기가 딸을 믿어주지 않는다면 누가 믿어주겠냐며 상처받은 딸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만든 것이죠. 상처받은 모습 자체가 거짓이고 위선이지만 김호진은 거기까지는 몰랐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와...”


“김호진은 자기 딸이 거짓말을 하기는 하지만 사소한 거짓말로 작은 이득을 가지려 할 뿐, 다른 친구한테 그런 식으로 누명을 씌울 정도로 못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김수현이 우는 모습을 보고 그게 거짓말일 거라는 생각을 애써 외면하며 민정씨를 만나러 학교로 간 것이죠.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래라면 김호진이 민정씨를 만날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지금부터 확인해 보시죠."


풍경이 바뀌었다. 교무실에서 심혜진이 피곤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들고 통화를 하고 있었다.


“네, 아버님. 아, 조민정 학생을 직접 만나시는 건 조금 어렵고요, 아무래도 증거가 없기 때문에 사실은 민정이가 범인인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네, 네, 수현이가 그렇게 말을 했지만 본인도 들은 얘기기 때문에... 네. 일단 학교에 한번 오시면은 저와 상담을 하고 수현이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수요일 1시 반까지 오실 수 있으세요?”


“심혜진 선생은 김호진이 민정씨를 만나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대신 굳이 학교에 오겠다는 김호진을 본인이 직접 만나서 김수현에 대해서 대화할 생각이었죠. 마침 자기가 수요일에 5교시가 없으니 그날 점심시간이 끝나는 1시 반에 오라고 김호진을 불렀죠. 하지만 김호진은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인 1시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마침 심혜진 선생은 점심시간에 갑자기 회의가 잡혀서 회의를 하러 갔죠.”


“안녕하십니까- 저는 김수현 학생 아버집니다.”


멀끔히 차려 입은 김호진이 교무실로 들어섰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한 이소영 선생이 김호진을 응대했다.


“아, 수현이 아버님, 네네. 아, 조민정 학생을 만나러 오셨다고요? 상담실에서 잠깐 기다리고 계시면은 제가 학생을 불러다 드리겠습니다.”


“이소영 선생은 경력 2년차의 신규 교사라서 학부모님을 잠깐 대기시키고 담임선생님을 부르는 게 최선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민정씨와 김수현 사이의 전후 상황도 몰랐죠. 깔끔히 차려입고 친절하게 질문을 하는 김호진이 문제가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심혜진이 타이밍에 맞춰서 자리를 비운 것이나 이소영이 잘못된 판단을 한 것도 모두 사탄들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도록 준비한 겁니다.”


풍경이 바뀌었다. 상담실에 앉은 김호진은 어린 민정을 쳐다보았다. 민정은 김호진을 쳐다보지 못했다. 김호진은 따뜻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민정아, 학교 생활은 재미있니?”


“...”


“나름대로 좋은 이야기를 해 주려고 저런 질문으로 시작한 겁니다. 김수현이 김호진에게 민정씨 경제적 형편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거든요. 그런 소외된 아이가 잘못을 저질렀지만 따뜻하게 대해 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해일이 김호진의 심리를 분석해 주었다.


“민정아, 세상 사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항상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친절함을 가득 담은 김호진의 말투였다. 어린 민정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어린 민정은 아버지의 부재라는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나이 많은 남자가 하는 말을 거스르기 어려운 심리적인 약점이 있었다.


“부모 마음이라는 게 그래. 공부도 중요하지만 어찌되었든 아이가 바르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 우리 수현이도 마냥 착한 애는 아니라서 나도 어디 가서 우리 애가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을까 늘 걱정한단다. 민정이 너희 부모님도 같은 마음이실 거야.”


이어진 김호진의 말에 어린 민정이 반응했다. 김호진은 알지 못했지만 민정에게는 일종의 선을 넘는 발언이었다. 고개를 들고 김호진을 똑바로 쳐다보는 눈빛에는 사뭇 독기가 서려 있었다.


“아저씨가 뭘 알아요?”


말투도 가시가 잔뜩 돋아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나 김수현 지갑 안 훔쳤어요. 증거도 없이 왜 단정지어요? 김수현이 거짓말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알아요? 김수현 싫어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민정아.”


김호진이 타이르듯 민정을 불렀다. 딸을 욕하는 민정에게 그도 화가 난 것이었다.


“누구나 잘못할 수 있어. 잘못을 하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면 돼.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은 없어. 잘못한 걸 어떻게 대하느냐가 중요한 거야.”


“나 아니라고요...”


억울한 마음에 어린 민정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어른 민정이 그 모습을 평했다.


“어려서 그런가 말도 잘 못 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네. 지금이라면 말로 개박살을 낼 텐데.”


어른 민정이 한숨을 쉬었다. 민정에게는 어린 시절에 겪었던 지나간 과거였다. 어린 민정은 계속 울면서도 자리를 뜨지 못했고 김호진은 별 영양가 없는 말들을 반복했다. 심혜진이 올 때까지 친절과 교훈의 탈을 쓴 괴롭힘이 계속되었다.


“아버님!! 세상에, 민정아 이리 와. 눈물 닦고, 울음 멈추면 교실에 가 있어.”


30분의 시간이 지나고 회의를 갔던 심혜진이 허겁지겁 복귀하고 나서야 민정은 상담실을 나갈 수 있었다. 화장실에서 울던 민정은 휴대폰으로 담임에게 조퇴를 하겠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짐을 챙겨 집으로 가 버렸다.


“민정씨는 이날 조퇴를 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 비가 쏟아지는 것을 낡은 비닐우산으로 막으면서 민정씨는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했죠.”


“그랬었나요? 아, 맞아요. 그랬어. 김수현 이 못된 년은 자기 아빠가 나서서 편을 들어 주는데 나는 없잖아요. 아빠가.”


“그 부분이 민정씨의 정신적 약점이었기 때문에 사탄이 이용했죠.”


“이날 이후 이 일은 어떻게 됐어요? 담임쌤도 더 이상 말이 없으셨는데.”


“심혜진 선생은 당일 이례적으로 김호진에게 크게 화를 냈습니다. 자기 딸이 생각만큼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오히려 김수현이 가해자로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죠. 충격을 받은 김호진은 집으로 돌아가서 김수현을 크게 혼냈으며, 전말을 전해 들은 김수현의 엄마는 부끄러움을 못 이기고 억지를 부려 김수현을 전학 보냅니다.”


풍경이 다시 김수현의 집으로 바뀌었다. 집안에서 화난 표정으로 고함을 지르는 김호진과 울면서 떼를 쓰는 김수현의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서는 똑같이 울면서 난동을 부리는 김수현의 영혼이 있었다. 검은 악령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쓸모를 다 한 김수현을 사탄들이 가차 없이 버린 겁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사탄들이 바라는 것은 이루어졌죠. 살아가면서 이런 일들은 수없이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행동은 자기가 하는 것처럼 보여도 영적 존재들에 의해 엄청난 영향을 받습니다.”


“천사님들이 내가 삶을 선택하도록 유도한 것처럼요?”


“네. 천사들은 민정씨에게 도움이 되는 선택을 하도록 하고, 사탄들은 그 반대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무리 영향을 주더라도 결국 행동은 사람이 하는 것이란 점이죠.”


해일이 족집게 강사처럼 핵심을 강조하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과거의 일을 넘어 육신과 영혼의 중요한 법칙에 대해 이야기할 발판을 마련하는 과정이었다.


“육신과 영혼은 서로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영혼은 물리적으로 육신의 세계에 영향을 거의 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육신은 자기 영혼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죠. 비록 육신이 자기 영혼을 인식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만, 육신의 마음이나 생각, 감정 등 정신적인 영역은 영혼의 영향을 강하게 받습니다.

따라서 영적 존재가 육신에게 영향을 주는 유일한 방법은 그 사람의 영혼에게 영향을 주어 그 육신의 생각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겁니다.”


이해하기 쉬운 개념은 아니었지만 해일이 자세히 설명했고 실제 사례를 방금 보았으니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김수현도, 김수현 아빠도, 저도 사탄들이 이끄는 대로 움직여 버린 거네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결국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본인의 의지에 달렸다는 점이죠. 아무리 영적 존재들이 영향을 준다고 해도 말입니다.”


해일이 말을 이었다.


“심혜진 선생이라고 사탄이 가만히 놔 두었겠습니까? 온갖 바쁜 일을 만들었으며 학부모와 마찰을 빚고 싶지 않은 마음을 주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혜진이 교사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기에 일을 예방하지는 못했어도 벌어진 일을 수습할 수는 있었죠. 만약 심혜진이 가만히 있었다면 민정씨는 더 큰 상처를 지속적으로 받았을 겁니다.

김호진도 마찬가지로 딸을 믿고 싶은 마음을 접어 두고 더 꼼꼼히 진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까지 안 한 건 김호진의 잘못인 거구요.”


난동을 부리는 김수현의 옆에는 이제 착잡한 얼굴로 딸을 바라보는 김호진이 있었다.


“천사들이 유도하는 선한 행동도 마찬가지죠. 저희는 민정씨가 육신의 삶을 선택하도록 유도하는 여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선택은 민정씨가 했죠. 천사든 사탄이든 영향을 줄 뿐이며,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은 사람의 일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해일의 말이 강한 힘을 담고 민정의 머리에 들어왔다. 약간의 텀을 두고 해일은 말을 이었다. 이번 여정에서 제2부로 새로운 주제로 설명을 시작하기 위함이었다.


"민정씨가 옥상에서 떨어지기까지의 과정도 영적 존재들의 개입이 있었습니다. 먼저 이번 사건으로 민정씨가 자살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죠.

그만큼 사탄이 민정씨의 생각에 자살이라는 씨를 뿌린 큰 일이었습니다. 6년 후에 그 열매가 열렸죠. 이 전까지는 민정씨의 삶이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살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날 이후부터는 이 때 생긴 자살이라는 생각이 민정씨 머릿속의 한 구석에 늘 놓여 있었던 것이죠.”


"과연, 사탄들이 열심히... 일할 이유가 있는 사건이었군요."


"이것이 사탄들이 민정씨를 자살로 몰고 간 1단계입니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흘렀죠. 사탄들은 인내심이 강합니다. 이 때 뿌려 둔 씨앗이 싹이 트기를 6년간 기다렸죠. 2단계는 민정씨도 아실 겁니다."


"그 사건을 말하는 거군요. 최근에 있었던, 제가 정말 자살을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만든 일요. 생각해보면 그건 1단계에 비하면 엄청 평범한 일이었는데... 사탄이 수작을 부린 것이었군요."


민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과연 민정이 자살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계기는 사소했다. 최소민이라고, 대학교에 와서 제법 친하게 사귀게 된 친구가 있었다. 민정이 아르바이트 때문에 늘 바빴고 돈은 없었기 때문에 자주 함께 놀지는 못했지만 학교에서는 그래도 친하게 지냈었고, 최소민은 민정이 식물인간이 된 후 크게 슬퍼하며 신주연보다 먼저 병문안을 왔었다.


"맞습니다. 사탄들은 친한 사람의 호의를 통해서도 수작을 부리죠."


해일이 말했다. 풍경이 바뀌었다. 반팔 셔츠를 입은 두 여자가 카페에 앉아 있었다. 최소민과 조민정이었다.

옆에는 최소민의 영혼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영혼 옆에 있는 것은 천사가 아닌 사탄이었다.


최소민의 육신이 민정에게 어렵사리 제안했다.


"민정아, 이번 여름 방학 때는 같이 여행 안 갈래? 3박 4일 정도... 바다 보러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사탄의 영향을 받고 하는 일이었지만 소민은 평소 성격 그대로 배려심이 가득했다.

민정에게 여름방학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어 두는 기간임을 알기에 제안하기도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학생 시절 여행 한 번 못 가보고 졸업하기에는 민정의 청춘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는 소민이었다. 해외여행도 아니고 국내는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민정은 곧바로 표정이 굳었다.


"아니, 나는 힘들지...알바가 있는데,"


"이틀 정도만 빼면 안 돼?"


"하나면 모르겠는데 알바를 두 개씩 하니까... 알바를 두 개를 빼기는 좀..."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직장을 다니는 것처럼 책임감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진짜 직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민정이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너무 여유가 없었다.


'내가 무슨 여행이야. 나는 남들처럼 살지는 못해. 평범하게 맛있는 것을 사먹고 주말에는 영화를 보고 방학 때는 여행을 떠나는 그런 삶은 나에겐 허락되지 않아.'


비운의 주인공 마냥 자기 한탄에 빠진 민정이었다. 사실 민정의 한탄은 어느 정도는 과장이었다. 빚이 많고 용돈은 없지만 알바를 열심히 한다면 가끔씩은 외식을 하거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평균적으로 약 1주일에 1회 정도는 마음 놓고 만 원에서 이만 원 정도의 소비를 할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을 즐긴다면 여행을 떠나는 건 불가능했다. 평소에 가끔이라도 마음 놓고 돈을 쓰려면 얼마라도 돈을 남겨 놓아야 했다. 다시 말해 민정은 방학 기간의 모든 유흥을 포기하고 여행을 선택할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 민정에게 소민은 배려심을 발휘하여 끈질기게 권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민은 진심을 담아 희망찬 미래를 약속하고자 했다. 


"그렇구나... 알겠어. 그래도 우리 우정은 계속될거니까, 언젠가는 꼭 같이 여행을 가자. 일본도 가고 유럽도 가고.

민정이 너와 함께 꼭 여행을 가고 싶어."


그것이 민정에게 번민의 줄기로써 사탄들이 이용할 줄은 소민으로선 꿈에도 모를 터였다. 옆에서 사탄이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나중에라....


민정은 미래에 소민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자기 미래를 생각한 결과였다.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도 취업을 한다는 보장이 없으며, 취업을 하더라도 이 지긋지긋한 좁은 빌라에서 빠져나가 원룸이라도 구한다면 매달 월세를 내고 학자금을 갚느라 빠듯할 터였다. 어쩌다가 해외여행을 간다고 하더라도 그 한 번 이후로는 또 다시 그런 비루한 삶을 인내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소중한 친구의 진심 어린 위로가 민정에게 오히려 독이 되었었다. 그것이 사탄이 민정을 자살로 몰고 간 2단계였다.


"이랬을줄은 정말 몰랐네요..."


그토록 친절한 소민의 배려가 민정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민정은 사탄의 치밀함과 그 뛰어난 능력에 소름이 돋았다.

해일이 분위기를 환기했다.


"마지막이 3단계입니다. 민정씨가 최후의 선택을 한 순간이 3단계죠. 그런데 사실 2단계가 지났을 때 이미 천사님들은 '인생여정'을 계획하셨습니다. 민정씨가 너무 절망에만 빠져 계셨었거든요."


"아, 아예 리셋한다는 느낌으로 가셨던 거군요."


"예, 정확하네요. 그래서 3단계는 사탄들이 결국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라 천사님들이 더 큰 계획 안에 있었던 겁니다. 저도 그 때부터 합류했고요."


"음, 근데 도대체 무슨 '의'가 있어서 이런 엄청난 일들을 겪은 거죠? 암만 봐도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요? 나에겐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난 거죠?"


민정이 갑자기 의문을 표했다. 해일은 얼른 둘러대었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하군요. 아무튼 3단계는 민정씨가 기억하시는 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어느 화창한 날, 민정은 괜스레 방학이라 수업도 없는 학교에 찾아왔다. 그리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학교 건물 옥상을 쉼터로 개조한 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쉬는 곳이었다. 민정은 옥상의 난간에 다가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떨어지면 어떨까, 생각하면서.


"그때 민정씨 눈에 구석의 난간이 들어왔죠. 그 난간이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모습이요."


위험하게도 한쪽 구석의 난간이 단단하게 고정되지 않고 삐걱거리고 있었다. 당장 보수를 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일단은 그 난간은 방치되고 있었다.

그때 민정은 생각이 들었다. 저기에 기대면 난간이 부서질까? 그러면 떨어질까?

자포자기하는 와중에 자기 운명을 두고 도박을 하고 싶은 심리였다. 만약 한번 시험 삼아 기댔는데 죽는다면 그것이 운명이지 않을까.


홀린 듯이 난간으로 향하는 민정의 육신 옆에는 사탄들이 크게 기뻐하며 속삭이고 있었다. 영혼 민정은 그 모습을 보면서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난간은 너무도 쉽게 부서졌다. 민정도 그렇게 쉽게 부서질 줄은 몰랐다. 난간이 부서지게 해 민정이 떨어지게 만든 사탄들은 민정의 몸도 난간처럼 부수려고 했다.

그러나 민정이 떨어질 때 갑자기 천사들이 나타나 민정의 옆에 있던 사탄을 공격했고 사탄은 순식간에 쫓겨났다.

천사들은 높은 건물에서 떨어진 민정이 죽지 않게 만들었다.


학교는 난리가 났고 민정은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한참 뒤, 민정의 영혼이 육신이 떨어진 곳에서 깨어났다. 그 옆에는 민정이 보이지 않는 곳에 해일이 있었다.


"그렇게 된 거였군요."


"민정씨에게 이렇게 자세히 말할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민정씨가 잘 따라와 준 덕분입니다."


해일이 말했다. 민정은 그저 웃었다. 그리고 풍경이 다시 바뀌었다. 아까 전에 보았던 김호진과 김수현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김호진이 김수현을 혼내고, 김수현은 떼를 쓰고, 그것을 사탄들이 보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을 만큼 큰 상처를 준 사람들이었으며, 김수현은 정말로 못됐었지만, 김호진은 그럴 의도는 아니었던 건 분명했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김호진과 김수현을 번갈아가면서 쳐다보던 민정은 문득 해일이 다시 이 장면을 보여 주는 것에 의문이 들었다. 해일은 말없이 민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민정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민정씨, 이들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네? 용서요?”


생각지 못한 해일의 제안에 민정은 극히 당황했다. 갑자기 어쩔 줄을 모르는 마음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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