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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틀리제 Oct 18. 2024

사연녀와 그녀의 수호천사들

21화 : 민정의 속죄

“저 못생긴 영의 정체를 네가 깨닫게 해 주마. 너, 신주연이라는 녀석을 영계에서 보았지?”


사탄은 또 갑자기 신주연을 언급했다. 그녀가 방금 전 민정의 머리를 잡았을 때 최근의 기억을 다 확인하고 알아낸 사실이었다. 악화는 민정의 눈앞에 신주연의 모습이 보이게 했다. 두 명의 신주연이 보였다.


“이건 병실에서 처음 봤을 때의 신주연이고, 이건 천국에서 다시 봤을 때의 신주연이다.”


민정은 악화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생각은 했다. 병실에서 본 신주연의 영혼은 깔끔하지만 평범하게 생겼었다. 하지만 천국에서 다시 본 신주연은 너무나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분명히 둘 다 신주연인데 왜 그렇게 달랐을까? 답을 알려주지. 그건 바로 인간의 영혼은 영과 혼으로 나뉘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은 보다 본질적으로 육신의 행위를 통해 만들어진 구체적인 존재이며, 혼은 보다 일시적으로 의지와 마음을 반영한 존재이다. 살아 있는 인간은 영과 혼이 따로 존재한다.”


“그게 무슨 소리야.”


“혼은 인간의 마음과 생각이 형상화된 것으로 육신에게 종속된 것이고, 영과 육신을 이어주는 매개다. 저 천국에서 빛나는 모습이 신주연의 영이고, 병실에서 만났던 평범한 모습이 신주연의 혼인 것이다.”


“알아들을 소리를 씨불여...”


사탄의 말이 당장 이해되지 않는 민정은 짜증을 냈다. 사탄을 노려 보며 욕을 해 주고 싶어도 시선을 못생긴 꼬마에게서 돌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놈의 설명은 해일의 것과 닮아 있었다. 처음엔 이해되지 않던 해일의 말도 설명을 듣다 보면 이해가 되었었다. 놈의 말이 민정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영은 보다 본질적으로 육신의 행위를 통해 만들어진 구체적인 존재.

혼은 보다 일시적으로 의지와 마음을 반영한 존재이며, 육신에 종속된 존재.

살아 있는 인간은 영과 혼이 따로 존재함.


나는 영혼이 아니라 육신에 종속된 존재.

영과 혼이 따로...


불쾌한 깨달음이 밀려드는 민정은 눈에 힘을 주고 볼품없는 꼬마를 노려보았다. 사탄이 입이 찢어지도록 웃으며 외쳤다.


“아하하하하!! 너는 조민정의 혼이며! 저 보잘 것 없는 약한 꼬마가 바로 네 영이다!! 너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고 임시로 존재하는 것이며!! 네 본질은 저렇게 볼품없는 쓰레기라고!!”


민정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저 사람 같지도 않은 미숙한 존재가 '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민정은 사탄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꼬마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말도 안 돼...”


“하하하하!! 너는 못해도 네 영의 모습이 중간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네 영은 당장이라도 해일 같은 천사놈들에게 퇴치당할 것처럼 악령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란다!

왜 네 영이 저 꼴인지 알고 싶나? 그건 네게 '죄'가 있기 때문이다!”


악화가 신이 나서 외쳤다. 민정은 멍하게 그녀의 말을 들었다.


“어떤 죄인지 궁금하지 않느냐?”


악화는 광기에 찬 환희의 표정을 지었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천 년을 살아온 것처럼 기쁜 모습이었다. 악화는 민정이 묻지도 않았는데 신이 나서 외쳤다.


“살인죄다!!”


풍경이 바뀌었다. 민정이 어릴 때 살았던 아파트 단지의 입구였다. 열 살의 어린 민정이 신이 나서 아파트 밖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단지 밖은 차도와 보도의 구분이 애매해서 모든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차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지점이었다.


“민정아! 뛰지 마렴!”


뒤에서 젊은 김현숙이 소리치는 데도 민정은 안중에도 없었다. 옆도 보지 않고 달려가던 민정은 그대로 차도에 뛰어들었다. 길을 쌩쌩 달리던 자동차는 민정을 피하지 못했다.


“안 돼!!”


뛰어가던 민정을 붙잡으려던 아빠, 조한석이 달려들어 민정을 밀쳤다.


“꺄악!!!!”


민정을 대신해 차에 치인 조한성이 하늘에 붕 떴다. 아빠에게 밀쳐져 넘어진 민정은 그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정신을 잃었다. 악독한 사탄은 이 순간을 느리게 재생했다. 어른 민정은 눈앞에 실현되는 광경을 믿지 못해 부들부들 떨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크하하하!! 아빠를 죽인 건 너다!! 그러면서 너는 뻔뻔하게 모든 기억을 잊어버렸지! 내가 그걸 보고 얼마나 역겨웠는지 아느냐? 네가 죽인 네 아빠는 차가운 시체가 되어 묻혔는데, 너는 하루하루를 아무것도 모르고 웃고 떠들며 살았다!”


“개소리하지마... 거짓말... 그럴 리 없다고...”


“거짓말이 아니란 건 네놈이 더 잘 알 것이다! 비겁한 천사놈들은 네 알량하고 가증스러운 위선을 지키려고 지금껏 꽁꽁 숨겼던 것이다! 네 죄도, 네 영의 모습도!!”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민정의 머릿속에 방금 전의 여정에서 했던 말들이 스쳐 지나갔다. 장례식장에서 엄마는 홀로 울고 있고 어린 민정은 누워 잠자던 모습이 떠올랐다. 자기 부모를 용서한답시고 불러 놓고선 더 이상 그들을 원망하지 않겠다고 건방을 떨어댔던 자신이 떠올랐다.


‘마음 속으로 엄마 아빠를 많이 원망했어요. 아빠는 엄마랑 나만 남겨 두고 먼저 돌아가신 거랑, 엄마는 나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한 것이요.’


‘엄마가 좋은 엄마였는지 잘 모르겠어. 확실한 건 나는 엄마한테 상처를 많이 받았었어.’


‘아빠는 나를 너무 일찍 떠나 버렸어. 왜 그렇게 빨리 가 버렸어? 너무 빨리 가 버린 아빠를 많이 원망했어.’


“그럴 리 없다고...”


“크하하하하하!!”


혼이 나가버린 민정은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절망이 깊어질수록 악화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한참 웃던 악화는 영력을 가득 담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살인자인 네게 벌을 내리마. 무저갱(無底坑)이다.”


방의 바닥이 갑자기 사라졌다. 민정은 한없이 밑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천국에서 해일의 인도를 받아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낙하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녀의 모든 것을 잡고 내려가는 악마의 손길에 끌려가는 것 같았다. 몸을 가눌 수 없고 신체 곳곳이 강력한 압력을 받는 고통이 지속되었다.


“꺄아아아악!!”


공포와 절망과 고통이 섞인 민정의 비명이었다. 몸도 마음도 끝없는 심연으로 빨려들어가는 민정은 갑자기 눈앞에 피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부모님의 얼굴이 보였다.


“너 때문에... 죽었어...”


“너 때문에... 그이를 잃었다고...”


“끼야아아악!!”


민정의 비명소리도 히스테릭해졌다. 이제는 정신적 충격이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때 민정이 그토록 바라던 목소리가 들렸다.


“민정씨! 구하러 왔습니다! 손을 잡아요!”


황금색 군복을 입은 해일의 모습이었다. 민정은 황급히 그의 손을 잡았다.

비록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당장 너무나도 큰 고통을 피할 수 있다는 안도감으로.

그런데 해일이 민정의 손을 꽉 잡았다. 큰 고통에 민정은 비명을 질렀다.


“아악!”


“뻔뻔한 것! 아버지를 죽여 놓고 혼자만 살겠다고! 너 같은 놈은 평생 지옥으로 떨어져야 해!”


민정은 그제야 해일로 변장한 사탄임을 알아차렸다. 해일의 얼굴로 키득거리며 웃던 사탄은 떨어지는 중인 민정을 위에서 밀어 버렸다.


민정의 정신은 이 시점에서 거의 무너졌지만, 그녀의 시련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사탄의 수중에 있었고, 이제 천사들은 민정의 혼을 납치한 악화와 사탄들을 추격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하하! 무슨 짓을 해도 조민정을 되찾을 수는 없을 것...!”


탕-


분노가 가득 담긴 총알이 피보라의 몸에 수많은 구멍을 뚫었다. 극적인 고통 속에서도 피보라는 민정의 행방을 말하지 않았다.

민정이 납치된 직후 해일은 곧바로 제1본부로 이동했으나 곳곳이 부서진 아파트 단지에는 무력한 로운과 쓸모를 다한 민정의 영이 버려져 있을 뿐이었다. 영과 혼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에 사탄은 민정의 영을 확보하여 영을 통해 혼을 납치했지만, 민정이 새로이 지은 ‘죄’가 없는 만큼 영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할 순 없었던 것이다.

해일은 민정의 영을 수습하여 수호천사본부로 보내 다른 천사들에게 맡겼다. 실의에 빠진 로운은 내버려두었다. 그녀가 스스로 마음을 일으켜야 했다.


상황을 급하게 대충 수습한 해일은 바쁘게 움직여 민정을 찾아다녔지만, 드넓은 지하 영계에 사탄들이 민정을 숨긴 곳을 찾을 수는 없었다. 잠시 후에 연락이 끊겼던 나래에게서 사념으로 연락이 왔다. 예상대로 그는 '순간이동 방해'와 '사념 방해'에 모두 걸려 외딴 지하영계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가 이제야 저주가 풀린 것이었다.


[해일아, 이제 연락이 되네. 어떻게 됐어?]


[선배님. 민정이를 빼앗겼습니다. 선배님은 민정이를 찾아 주세요. 저는 사탄들을 다 죽이고 가겠습니다.]


[제길, 알았어.]


악화, 악행, 악의, 피보라, 피칠갑, 피철철의 여섯 사탄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게릴라전을 벌이듯 여러 곳에서 흔적을 남기면서 장소도 계속 옮겨 혼란을 주었다. 사탄들을 잡아야 민정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해일은 역할을 분담하기로 결정했다.

나래는 민정을 찾고, 해일은 사탄들을 사냥하는 것으로.


[해일아, 지금 좌표 보내 준 지하영계에서 악화의 흔적이 남아 있어. 근데 요새가 하나 지어져 있고 크기는 대충 건물 두 개 정도이고 사탄과 악령으로 꽉 차 있는데, 악화급 사탄도 다섯 정도는 있는 것 같아. 함정 치고는 대비하는 병력이 너무 많긴 한데, 함정이긴 할 거야.]


[상관없습니다.]


나래가 발견한 요새에는 천사의 침입에 대비하여 '공격 무효', '공격 반사', '영력 약화' 등의 '기술'들, 침입자에게 반응해서 반격을 가하는 방어 장치들, 그리고 다섯 겹의 방어막이 처져 있었다.


"이놈들 정말 작정을 했네요."


나래와 만난 해일이 말했다.


"그래, 정말 남은 여정 기간이 끝날 때까지 민정이를 붙잡아둘 생각인 모양이야."


해일이 싸늘하게 코웃음쳤다.


"흥, 누구 마음대로."


해일의 총알이 불을 뿜었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커다란 폭음이 연달아 터졌다. 요새에서는 광선, 가시, 염력, 얼음 등 온갖 형태의 악한 영력이 해일에게 쏟아져나와 저항했다.

그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모든 방어막과 방어 장치들이 뚫린 요새는 10분도 안 되어 해일에 의해 가루가 됐고, 뭉쳐 있던 사탄들은 재빨리 도주했다. 나래는 사탄들이 남긴 흔적을 수집하여 정보부에 맡겼고, 해일은 결과가 나올 때까지 또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그런 과정들이 비슷하게 반복되었다. 둘이서 하루가 지나도 사탄들을 잡지 못하자 해일은 수호천사본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중대 단위 정도 되는 팀 인원이 해일의 요청에 따라 지하영계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탄들도 인원을 증원했다. 양측의 싸움이 그 규모가 점점 커졌다.


[선배님, 싸움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꽤 많이 필요할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습니다. 시간이 많이 걸려도 민정이를 다시 찾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 나는 계속 찾아볼 테니까 놈들을 박살내고 와. 너도 참, 특수 임무를 위해 파견을 와서도 원래 하던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네.]


[그러게요. 그래서 제가 이 임무를 하는 게 뜻이었나 봐요. 천군들이 다들 반갑다고 웃네요.]


“쳐라!”


해일의 지휘를 따라 대규모 전투가 일어났다. 백여 명의 천사가 비슷한 규모의 사탄 무리를 잡기 위해 진형을 갖추어 달려들었다. 사탄들도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전략적으로 대응했다. 


폭발이 일어나고 천사와 사탄들이 죽고 다쳤다. 인간 한 명을 두고 이 정도의 규모로 천사와 사탄들이 충돌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 해일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그리고 해일에게는 그가 지휘하는 천군(天軍) 중대를 이끌고 싸움에서 이기고 임무를 완수하는 것도 익숙했다. 많은 노력 끝에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는 결국 악화를 잡는 데 성공했다.


"중대장님! 다 정리했습니다. 악화 사탄만 남았습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네요... 죄송합니다."


"아냐, 수고했어. 작정하고 시간 끌면 안 되는 건 안 되지...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중요한 것들은 거의 다 했어."


"아무튼 이번 임무도 거의 성공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돌아오시면 임무 얘기 해 주십쇼."


"응. 잘 마무리하고 복귀할게."


탕-


악화의 눈 한쪽에 구멍이 났다. 그래도 아직은 멀쩡했다. 악화는 입을 놀렸다.


“흐흐... 조민정 그년은 끝났다. 성령이 와도 마음을 일으키기 힘들 걸. 4일간 내가 많은 장난을 쳐 두었거든.”


“지랄.”


“크흐흐, 애써 부정하지 마라, 해일.”


“대답할 가치도 없다.”


마지막으로 악화의 머리에 구멍을 낸 해일은 총을 집어넣고 손으로 눈가를 쓸었다.


“후우...”


도망치는 사탄을 잡는 데 4일이 걸렸다. 이는 해일의 예상보다 훨씬 오래 걸린 것이었다. 사탄들은 엄청 세밀하게 계획을 세웠고, 그 핵심은 시간을 끄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4일간 쉬지 않고 뛰고 날면서 뒤진 영계의 면적이 남한 크기 정도 되었음에도 그리 지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어떻게 할지가 중요했다. 사탄들의 방해가 모두 사라진 지금은 곧 나래가 민정을 찾아서 회수하리라.


[해일아, 민정이 찾았어. 그런데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당연히 사탄들이 모든 비밀을 다 밝혔고, 4일 동안 온갖 방법으로 괴롭혔던 것 같아.]


기다렸다는 듯 나래가 민정을 찾아냈다.


[네, 제1본부로 데리고 와 주세요.]


[음, 지금 제1본부에는 로운이가 있는데.]


[제1본부에서 쉬고 있겠죠. 로운 천사님이 있는 게 왜요? 아아, 괜찮습니다. 그 옛날에 멋모르고 선배고 후배고 임무 못 하면 대들던 제가 아니에요.]


[응, 근데 지금 민정이가 시간이 조금 필요해서... 먼저 가서 잠시만 기다려 줘.]


해일은 먼저 제1본부로 이동했다. 여기저기 무너져 폐허가 된 아파트 단지의, 성문에 크게 구멍이 뚫려버린 성 앞에서, 로운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로운 천사님.”


“...해일 천사님.”


고개를 푹 숙인 로운이 해일에게 대답했다.


“뭐 하십니까. 얼른 일어나세요. 곧 민정이가 올 겁니다. 루미 천사님도 부활하셨으니 곧 오실 거고요.”


“죄송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는 로운이었다. 루미가 죽고 민정을 빼앗길 위기에서 겁에 질려 눈을 감아버리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책감 때문에, 지금 로운은 힘을 잃은 상태였다. 루미는 죽었고 로운은 사탄과 싸우는 일을 할 멘탈이 아니었기에 둘은 민정을 찾는 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마음이 꺾인 천사는 마음이 꺾인 인간 이상으로 무력했다.


“약한 소리 하지 말고 일어나세요. 우리가 모든 싸움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그래도 그렇게 비겁하게 피하지는 말았어야 했어요... 죽더라도 끝까지 싸웠어야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게 사탄 놈들의 의도입니다. 거기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로운 천사님은 지금까지 잘 해 오셨어요. 참고로 저는 첫 임무 때 더 가관이었습니다.”


“해일 천사님이요?”


의외의 말에 로운이 해일을 쳐다봤다. 이 완벽에 가까운 천사가 과거에 모자라봤자 얼마나 모자랐겠냐마는, 그의 과거 자체에 흥미가 있기에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사탄이랑 싸우기만 하면 맨날 지고, 그런 게 답답하니까 임무 중에 수호천사 선배와 다투고 후배와도 싸웠죠. 사춘기 애새끼 같았다고 할까요.”


로운이 놀라서 반문했다.


“아니, 정말요? 거짓말 하시는 거 아니에요?”


“제가 이 이야기를 하면 다들 놀라시더라고요.”


씩 웃으며 태연하게 말하는 해일이었다. 때마침 나래가 민정을 데리고 제1본부로 돌아왔다. 루미도 타이밍 좋게 도착했다. 다들 조금씩 핼쑥하고 주눅든 모습이었다. 특히 민정은 영혼이 나간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해일은 로운에게만 들리게 작게 속삭였다.


“걱정 마세요.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건 우리가 유리한 싸움이라고요. 죽은 조민정을 살리는 게 어렵지, 살아 있는 조민정을 살리는 건 쉽습니다.”


해일은 로운을 일으켜 세워 주고는 그대로 민정에게 걸어갔다. 민정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옆에서 나래가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나래의 표정이 무척 안 좋았다. 표정 관리에 능숙한 나래가 이 정도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을 보니 좀 큰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로운에게는 큰소리친 해일이었지만, 나래의 표정을 보고는 한숨을 삼켰다.


“민정씨.”


민정은 해일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일어나보세요. 조민정씨.”


“나를 내버려 둬요. 내 인생에 상관하지 마요.”


체념한 목소리의 민정이었다. 그러나 해일은 예전부터 민정을 강하게 키우는 데에는 도가 튼 천사였다.


“이러라고 우리가 민정씨를 살리기 위해 그 고생을 한 거 아닙니다. 일어나세요.”


“...누가 나 살리래? 누가 나 살리랬냐고!”


조민정도 폭발했다.


“내가 아빠를 죽였어! 내가 아빠를 죽였다고! 그러면서 평생 엄마랑 아빠를 원망하면서 살았어! 나 같은 게 살아서 뭐 해! 뭐 하냐고!”


넓은 제1본부를 가득 채울 정도로 큰 소리로 악을 쓰는 민정이었다. 눈물이 흘렀고 온몸에 경련이 일어나며 부들부들 떨렸다. 주변에서 보면 곧 숨이 넘어가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동안 쌓인 설움이 폭발하는 광경은 자못 격정적이었다. 다른 천사들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여 민정을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그러나 해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민정씨가 아버지를 죽인 것이 아닙니다. 민정씨가 평생 부모님을 원망했다는 말도 과장이고요.”


“또 궤변이야! 이상한 소리나 해대고! 나... 너무 지쳤어. 너무 혼란스러워. 이제 끝낼래. 나 힘들게 하지 마.”


그리고 누운 채로 달싹거리며 눈물을 흘리는 민정이었다. 해일은 그녀의 앞에 다가가 쭈그려 앉아 눈을 맞췄다.

심호흡을 하고 준비한 말을 시작했다.


“아이구, 그랬쪄요? 우쭈쭈, 우리 민뎡이 고생 많이 해서 어떡해? 오구오구.”


전혀 생각지도 못한 해일의 말에 부르르 떨던 민정의 몸이 멈췄다. 그녀는 순간 머리가 정지된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 죽음의 비밀을 안 것만큼의 충격이 왔다.


“지금... 무슨...”


“애새끼마냥 징징거리시길래 맞춰서 달래드려 봤습니다. 위로가 좀 됐습니까?”


시니컬하게 조롱하는 해일의 말에 민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게 천사가 맞나? 사탄이 수작을 부리는 건가?

이어서 해일은 누워 있는 민정의 멱살을 잡았다.


“민정씨가 아버지를 죽게 만든 것은 맞습니다. 맞아, 그런데 그걸 알았으면 더 열심히 살아야지. 누가 살려준 목숨이냐. 이러라고 너희 아버지가 널 위해 희생한 거냐? 어디서 건방지게 네 감정과 의지를 앞세워? 살려준 자의 뜻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니야? 네 아버지가 네가 병신 같은 소리나 해대기를 바라셨겠어?”


해일이 큰 소리로 말을 쏟아냈다. 묵직한 말의 힘이 민정을 압도했다. 민정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해일은 그대로 민정의 멱살을 잡고 몸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누구 좋아라고 절망에 빠져 있는 거지? 일어나. 건방진 태도를 싹 뜯어고칠 교육이 필요하겠어.”


그리고 민정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로운은 충격에 휩싸여 나래와 루미를 번갈아 쳐다봤다. 정신적으로 평소같지 않았던 나래는 실소를 터뜨렸다.


“하하, 해일이다운 해결 방법이네.”


“정말 괜찮을까요?”


로운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마 괜찮을 거야. 민정이에게 필요한 건 위로보다는 속죄니까.”


루미가 대답했다. 그녀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지금부터 네가 할 일은 저 영혼들을 저 늪에서 건져 내는 거다. 전부 다.”


해일이 민정에게 명령했다. 그들이 이동한 곳은 지하영계의 어느 장소였다. 해일이 4일간 사탄과의 추격전을 벌일 때에 지나간 곳이었다.

그곳에는 넓은 늪이 있었다. 자연에 형성된 늪이라기보다 하수구 냄새가 진동하는 쓰레기장 같은 곳이었다. 그 늪 안에는 쓰레기가 아니라 영혼들이 담겨 있었다. 냄새 나는 지하영계 아니랄까봐 영혼들도 제각각 흉측하게 생긴 편이었다.

즉 민정은 저 쓰레기 냄새 가득한 늪에 들어가서 토할 것 같이 생긴 영혼들을 건져 내야 하는 것이었다.


“기간은 4일. 쉬지 않고 움직이면 할 수 있을 거다. 빨리 움직여.”


4일간 쉬지 않고 뽑아내야 할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대략 천 개는 넘어 보였다. 차라리 병원 탈출 미션을 4일간 진행하는 게 나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정은 홀린 듯이 늪으로 향했다.


가까이 가자 도저히 참기 힘든 악취가 진동했다. 민정은 늪에 발을 디뎠다. 푸욱 하고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지만 발목 이상으로 가라앉지는 않았다. 발걸음을 옮기자 철벅거리면서 힘겹게나마 움직일 수 있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처박혀 있는 영혼을 잡았다. 손에 닿는 물컹한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힘껏 당겨도 잘 빠지지 않았다. 더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기자 쑥 하고 영혼이 늪에서 빠져 나왔다.


“후욱, 후욱.”


힘들어서 심호흡을 하는 민정에게 해일이 멀리서 외쳤다.


“빨리 옮겨! 시간 없어.”


민정은 영혼을 집어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밟고 가는 늪의 무게가, 짊어진 영혼의 무게가 무거웠다. 그러나 고통을 참고 열심히 옮겨서 해일 앞에 영혼을 갖다 놓았다.


“좋아. 빨리 다음 것도 옮겨.”


다시 철벅거리며 냄새 나는 늪을 밟았다. 두 번째 영혼을 손으로 붙잡자, 가만히 있었던 첫 번째 것과 달리 두 번째 것은 눈을 뜨더니 민정을 붙잡았다.


“으윽...!”


영혼은 마치 민정을 밟고 올라 늪을 탈출하려는 것처럼, 민정을 밀어 넘어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힘이 강하진 않아서 민정이 밀려 넘어지진 않았다. 갑자기 공격해대는 영혼에 당황한 민정이었지만 이내 더 큰 힘으로 영혼을 제압한 후 힘줘서 당겨 꺼냈다. 영혼을 늪에서 꺼내자 다행히 더 버둥거리진 않았다.


“하아, 하아.”


온몸에 힘을 다 쏟은 듯한 노동에 민정이 숨을 골랐다. 해일은 그런 민정을 가만두지 않았다.


“빨리 움직여!”


민정은 얌전해진 영혼을 들고 늪을 빠져나왔다. 아까 전의 것보다 더 무거운 느낌이었다. 영혼마다 짊어져야 할 무게가 다른 모양이었다.

뒤뚱뒤뚱, 민정은 못생긴 영혼을 짊어지고 움직이는 자기 모습이 퍽 우스꽝스러울 거라고 생각했다. 해일 앞에 무거운 영혼을 내려 놓았다. 해일은 이제 꽤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빨리 움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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