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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틀리제 Oct 20. 2024

사연녀와 그녀의 수호천사들

22화 : 민정의 마지막 여정

해일이 민정에게 노동을 시키는 동안 천사들은 제1본부를 복구하기 시작했다. 나래는 조금 침울한 마음으로 그 작업을 진행했다. 천사들은 민정이 해일에게 화내는 모습만 보았지만, 사실 민정은 해일에게 화를 내기 전에 이미 나래에게 더 심하게 말했었다.

4일간 사탄들이 각종 환상을 보여 주며 민정을 괴롭혔었고, 민정의 정신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처음 민정을 발견했을 때 민정은 정신이 거의 나가 있었다. 


‘으아아아아!!’


나래를 보고도 마구 발버둥치며 괴성을 지르는 민정이었다. 사탄들이 천사들의 모습으로 변신해 구하러 온 척을 하고 더 깊은 절망을 주는 수작을 계속 부렸기 때문이었다.


‘민정아! 나야, 나래라고.’


‘으아아아악!’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는 민정이 제정신을 찾기 위해서 나래는 희생을 해야 했다. 민정이 받은 정신적 충격을 대신 받는 '축복'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버둥거리는 민정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크윽...’


꽤 큰 충격에 나래가 신음했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순간 나래의 마음을 휩쓸었다. 나래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 그에게 정신을 차린 민정은 폭언을 퍼부었고 그를 마구 때렸다.


‘나를 내버려 둬! 저리 꺼져라고! 콱 죽어버릴 거야! 이 거짓말쟁이들! 날 속였어!’


"...민정아, 미안하다..."


해일이라면 그런 민정을 기절시키고 여정을 진행했겠지만, 해일과 달리 언제나 진심으로 민정을 대했던 그는 민정의 모든 감정을 받아냈다.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면 그냥 맞아 주었다. 그러다가 민정이 천사들과 최소한의 이성적인 대화를 할 정도로 회복된 후에 제1본부로 데려왔다.


“어쨌거나 저희는 휴가를 얻은 것 같네요. 사탄들도 다 죽었고, 민정이는 4일 동안 속죄를 하고 올 테니까요.”


멘탈이 회복된 로운이 웃으면서 말했다. 루미와 로운은 나래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몰랐다. 해일만이 그의 희생을 눈치챘고, 그는 누군가의 희생을 함부로 떠벌리는 천사가 아니었다.


“응, 그러네.”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하는 나래였다.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어떤 여정을 하게 될까요?”


로운이 질문했다.


“이제 집에 갈 준비를 해야지.”


루미가 대답했다.


“지금도 하고 있는데, 다음 여정이 마지막일 것 아니에요? 마지막 여정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기대되요.”


로운은 말하면서 나래를 돌아봤다. 그녀는 나래가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러나 그 이유가 이제 민정과의 이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녀는 일부러 밝게 말하며 분위기를 띄우려고 했다.


“마지막이니까 선물이라도 준비할까요?”


로운이 제안했다.


“뭐, 뭔가를 준다고 해도 육신으로 가져갈 수는 없잖아?”


“그래도 준비할 수는 있지. 선물은 정성이니까.”


나래가 반문했지만 루미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흠, 그렇긴 하죠. 최대한 여기서 좋은 기억을 남기고 보내려면 뭐라도 준비를 해야겠네요.”


나래도 다시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바꿨다. 


“작품을 만들어서 주면 좋을 것 같은데요.”


로운이 제안했다.


“오, 작품 좋지. 그럼 루미 팀장님의 안목을 믿습니다. 지시를 내려 주세요.”


“아니 선배님, 제 안목에는 관심 없으세요?”


“그야 팀장님이 우리 둘보다 훨씬 나으니까. 작품을 만들 때는.”


“그렇긴 하네요. 팀장님,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하시죠?”


"으음. 그러면 이번엔 조각상을 하나 만들까."






“하아, 하아, 하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민정이었다. 그녀는 4일 만에 천여 개의 영혼을 늪에서 건져냈다. 육신이라면 진작에 탈진했겠지만 영혼의 몸이었기에 극한의 체력 소모가 있더라도 계속 움직일 수 있도록 어디선가 힘이 솟아났다.

너무 힘들어서 헛구역질을 몇 번이나 했고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 쓰러져서 몸을 떨곤 했다. 그럼에도 기어서라도 움직여서 영혼들을 건져냈다. 온몸에 온갖 오물을 묻힌 채로. 그녀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영혼 구출에 힘썼다.


“수고하셨습니다. 기분은 좀 어떠세요?”


해일이 민정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는 '축복'을 사용해 민정의 몸을 깨끗하게 씻어 주었다. 이제 민정의 몸도 마음도 깨끗해졌다.


“...개운하네요. 생각도 정리가 잘 되었고요.”


어느덧 눈물자국이 마른 민정이었다. 표정도 후련해졌다.


“복귀하기 전에 몇 가지만 정리하죠. 우리가 민정씨에게 두 가지를 숨겼습니다. 첫 번째는 민정씨 아버님이 돌아가신 이유였고, 두 번째는 민정씨의 영의 모습이었죠.

첫 번째인 아버님이 돌아가신 비밀을 숨긴 이유는 민정씨가 실수를 깨달아 절망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있었지만, 민정씨 아버님이 민정씨가 그걸 모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민정씨가 기억을 잃어버렸던 거예요.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것이지만, 그 배경에는 아버님의 의지에 의해 천사들이 움직인 영적인 일들이 있었던 겁니다.”


“...아빠가 그러셨군요.”


“사탄은 민정씨가 아버님을 죽였다고 말했죠. 그것은 사탄이 더러운 혀를 놀려 악의적으로 해석한 겁니다. 그때 민정씨는 어렸고, 조한석씨는 딸을 위해서 희생한 겁니다. 그걸 민정씨가 죽였다고 말하는 건 아버님에 대한 모독이죠.”


해일의 말의 뜻은 위로를 담고 있었지만 민정의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민정 때문에 아버지가 죽은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일은 곧바로 이 부분을 지적했다.


“물론 민정씨 때문에 아버님이 돌아가신 건 맞습니다. 그 일 때문에 민정씨의 영혼이 다소 볼품 없는 모습인 것도 맞아요. 그건 앞으로 민정씨가 살아가면서 선행과 의로운 삶으로 속죄해야 할 일이죠. 그러라고 아버님이 희생하신 거고요. 오히려 민정씨가 여기서 삶을 포기하셨다면 그 볼품 없는 모습으로 영혼의 세계에서 살아가셨어야 했을 겁니다.”


끔찍한 해일의 말에 민정이 몸을 흠칫 떨었다.


“속죄의 첫걸음으로 여기서 민정씨한테 여기서 노동을 시킨 겁니다. 여기는 ‘절망의 늪’입니다. 민정씨처럼 절망에 마음이 꺾인 사람들의 혼이 잠겨 있는 곳이죠.”


그들의 주변에는 천여 개의 혼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들은 모두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민정씨의 4일간의 노력으로 이들은 극도의 절망에서는 빠져 나온 상태입니다. 이들 중에는 아마 다시 늪에 빠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여기서 벗어나 더 좋은 곳으로 가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난 이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그냥 마음이 편해지려고 열심히 몸을 움직였는데.”


“육신으로 돌아가서도 그런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아, 노력해야죠. 솔직히 아까처럼은 못할 것 같긴 하지만요.”


얼추 정리는 끝났다. 해일은 차마 못 했던 속 이야기를 할 때임을 느꼈다.


"저희가 진실을 다 알려 주지 않은 것 때문에 서운했습니까?"


"...아니라고 할 수는 없죠. 저한테 선택권이 없는 느낌이기도 했고요. 그렇지만 저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천사님들은 제가 잘 되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셨던 거고... 제가 기분이 안 좋은 것은 서운한 게 아니라 내 보잘 것 없는 영혼의 모습을 받아들이기 슬픈 거겠죠.

오히려 천사님들께는 죄송하죠.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고... 특히 나래 천사님한테는 꼭 사과를 드려야 해요."


민정의 표정이 어두웠다. 해일은 반대로 표정이 밝았다. 민정은 그 밝은 표정을 보며 생각난 의문점을 질문했다.


"궁금한 게 있어요. 왜 사람의 영혼은 영과 혼이 따로 존재하는 거죠?"


"음. 원래부터 그러한 것이 왜 그러하냐고 설명하기가 쉽지 않군요. 천사들도 영으로만 존재합니다. 육신과 혼은 인간만 갖고 있는 것이죠. 혼은 인간의 영과 육을 매개합니다. 사람의 육은 혼을 통해서 영적 존재를 느낄 수 있고, 사람의 영은 육을 통해 아름다운 모습으로 천국에 갈 자격을 갖추죠. 셋이서 하나로 존재하고, 셋이 조화되면서 인간은 완성되죠."


"어렵네요. 그러면서 알 듯도 하고요."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확히 안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우주의 차원에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때까지 많이 노력하시고. 마음이 좀 정리되셨으면 이제 제1본부로 돌아가죠. 제1본부는 그동안 저희가 '사무실'이라고 불렀던 곳이며 민정씨의 영의 집입니다. 그 안에서 지금까지 민정씨의 영을 잘 보관해 놓았지요."


“흐, 제가 집이 있군요.”


농담을 던지는 민정이었다. 해일은 킥킥 웃더니 말을 바꿨다.


“사실 제1본부는 침공을 당해서 지금 다 부서져 있습니다. 지금은 제1본부로 갈 수 없을 것 같고, 제2본부로 가시죠.”


“제1본부라는 곳에 가 보고 싶은데요.”


“여정을 끝내기 전에 들를 수 있을 겁니다.”


해일이 갑자기 말을 바꾼 이유는 사념을 통한 루미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1본부는 이미 천사들이 다 복구를 마쳤지만 천사들은 제1본부에 마련한 '작품'을 나중에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제2본부로 가시죠. 천사님들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해일의 말대로 제2본부에서는 천사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천사들과 재회한 민정은 루미, 로운과는 반갑게 인사를 했지만 나래한테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힘들었지? 고생 많았어.”


“아, 네.”


4일이 지났어도 자기가 나래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분명히 기억하는 민정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래와 단둘이 있었다면 용기를 내겠는데 다른 천사들도 옆에 있었기에 그 주제로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 나중에 기회가 있겠지, 생각하면서 다음 여정에 집중하는 민정이었다.


"지금부터는 조민정씨의 ‘영’도 함께 여정을 진행할 겁니다."


그리고 못생긴 꼬마 영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멍하게 앞만 바라보는 것이 여전히 상태는 좋지 않아 보였다.

민정은 자기 영을 보며 육신으로 돌아가면 꼭 선하게 살 것을 다짐했다.


“이제 인생여정도 하루 정도 남았습니다. 26시간 남았군요.”


해일이 벽의 달력을 가리키며 말했다. 천사들과 민정의 시선도 달력을 향했다. 처음 이곳이 만들어졌을 땐 숫자가 21이었고, 민정이 처음 왔을 때는 17이었으며, 지금은 2였다. 민정은 가슴이 아릿했다.


“이제는 육신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육신으로 돌아갈 준비라는 말이 민정의 마음에 걸렸다. 이제 천사들과 헤어지고, 다시 지루하고 우울한 삶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마음먹은 일이었다. 민정은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마지막으로 진행할 여정은 <감사>입니다. 용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여정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용서와 달리 이번엔 단순하게 말로만 감사하진 않을 거에요.”


해일이 말했다. 그는 품에서 작은 구슬을 꺼냈다.


“이것은 민정씨가 지난 4일간 늪에서 영혼들을 건지시면서 쌓은 ‘의’입니다. 민정씨는 이러한 조건 여러 개를 갖고 계십니다. 이번에는 감사한 사람들에게 이 ‘의’를 나눠주면서 사례를 하면 되겠습니다. 참고로 이 ‘의’는 민정씨는 현재 수십 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원하는 만큼 나눠 주셔도 됩니다.”


“아하~ 좋아요.”


민정은 흥미가 돋았다. 마치 재화의 개념으로 ‘의’를 소비하는 것이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베푸는 입장이 된다는 게 즐거웠다.


“누구에게 감사를 할까요? 일단 장소를 좀 넓고 화창한 곳으로 바꾸겠습니다.”


풍경이 바뀌었다. 넓은 공원이 나타났다. 평지에 수많은 꽃과 나무가 심어져 있고 개울이 흐르면서 연못도 있는 곳이었다. 너무 좋은 풍경이었다.


“뭐 일단 부모님이 있네요.”


민정이 대답하자 그녀의 부모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 김현숙은 지금 나이 때의 육신의 모습이었고, 조한석은 과거의 모습이었다. 


“‘의’는 주머니 안에서 꺼내면 계속 나올 겁니다. 원하는 만큼 주면 됩니다. 두 분의 이마에 가져다 대세요.”


민정은 둘의 앞에 가서 섰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꺼내자 작은 구슬이 있었다. 민정은 그것을 김현숙의 이마에 갖다 대자 구슬이 빨려들어갔다.


“오.”


민정이 감탄했다. 그녀가 처음 인생 여정을 시작했을 때 해일이 저런 식으로 민정에게 축복을 부여했었다.

민정은 이어서 조한석에게도 똑같이 했다.


“김현숙씨는 육신의 삶에서 축복을 받을 것이고, 조한석씨는 영계에서 ‘의’의 대가를 받으실 겁니다.”


해일이 말했다. 기분이 좋은 민정은 구슬을 하나씩 더 꺼내서 김현숙과 조한석에게 주었다.


“됐어요. 다음으로 갈게요.”


“다음은 누구에게 감사를 드릴 겁니까?”


“음, 바로 생각나는 건 주연 언니네요. 화장품도 받았으니까요.”


신주연이 나타났다. 천국에서 보았던 화려한 모습은 아니었고, 병실에서 잠깐 스쳐지나가 보았던, 신주연 혼의 모습이었다.


“재벌에게 푼돈 더 주는 느낌이지만...”


민정이 자조했다. 민정보다 훨씬 ‘의’가 많은 신주연이었다. 어쨌든 구슬 하나가 신주연의 이마에 빨려들어갔다.

이상하게 구슬이 남들에게 들어갈수록 민정은 뭔가가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텅 빈 마음이 채워지고, 있어야 할 것이 맞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다음은, 중2때 담임 선생님. 심혜진 쌤. 좋은 분이셨어요. 김수현 사건 때도 잘 도와주셨지만, 나를 있는 그대로 좋게 봐 주신 분이었어요.”


이번에 나타난 심혜진 선생은 6년 전의 그 모습이 아니라 지금의 모습이었다. 그 때보다 좀 더 나이가 들었고, 여전히 피곤함에 찌든 모습이었다.


“방학이 얼마 안 남아서 많이 바쁜 모양입니다. 힘을 주시죠.”


심혜진에게 구슬이 빨려들어갔다. 그녀의 표정이 조금 좋아졌다.


“다음은 친구들?”


민정은 기억을 더듬으며 친구들을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민정에게 좋은 기억을 남긴 친구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몇 명은 지금까지도 연락을 주고받기도 하고 가끔 만나기도 했다. 민정을 진심으로 대했던 친구들 세 명에게 민정은 구슬을 차례대로 나눠 주었다.


“음... 다음은?”


민정은 고민에 빠졌다. 그녀는 생각보다 아는 사람 자체가, 또는 기억에 남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마운 사람을 생각했을 때 딱 떠오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결국 한 명 한 명 기억을 더듬었지만, 이 귀중한 조건을 선물할 만큼 고마운 마음까지는 들지 않았던 것이다.


“알바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도 골라 보시죠.”


“아, 그렇죠.”


민정이 알바를 하면서도 고마운 사람들은 있었다.


“고등학생 때 편의점 알바 했던 사장님. 주말 낮에 알바를 하면서 공부도 틈틈이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고, 시급도 잘 쳐 주셨고, 그만둘 때는 인터넷 강의까지 하나 끊어 주셨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분이 없어요. 조금 꼰대 같은 점은 있었지만...”


나이가 예순 정도 되어보이는, 멀끔하고 자기 관리를 잘 하는 듯한 남자가 나타났다. 깐깐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민정은 그를 반겼다. 그에게도 구슬 하나가 주어졌다.


“그리고 감사할 분은 박정민 팀장님.”


이번에는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나타났다.


“뷔페 알바를 하던 때에 팀장으로 매장 관리하시던 분인데 알바생들한테도 잘 해주셨고, 제가 큰 실수를 하나 했었는데 책임 지고 처리해 주셨어요.”


“그런가요? 그리고 또 어떤 점이 있었나요?”


“사실 매장 관리도 엄청 잘 하셨죠. 매장 인테리어나 메뉴 구성이라던가, 운영과 시스템적인 부분에서 원래보다 많이 발전시키고 키우셨어요.”


“그러면 그 분한테는 배울 점도 많았겠네요.”


해일이 말했다.


“뭐, 그렇죠... 어떻게 하면 더 많이 팔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하시더라고요. 일을 하거나 특히 자영업을 한다고 하면 그분처럼 하면 폐업은 안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 뷔페도 어떻게 보면 잘 키워서 재투자로 발전한 거니까.”


민정은 별 생각 없이 대답했지만, 이는 해일이 의도한 바였다. 민정으로 하여금 박정민의 특성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민정이 육신으로 돌아간 후의 미래를 대비함이었다. 민정도 박정민과 같은 재능을 갖고 있었다. 박정민의 특성을 곧바로 분석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훗날 좋은 인연을 만난다면 민정도 그와 같이 재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지는 못한 민정은 구슬 하나를 박정민에게 주었다.


“그리고 알바 할 때 많이 도와줬던 언니...”


또 몇 사람을 더 불렀고 민정은 그들에게 구슬 하나씩을 나눠 주었다. 꽤 많은 구슬을 소비했음에도 민정은 기뻤다.


“...이 정도면 다 한 것 같아요. 혹시 더 나눠줄 사람이 있을까요?”


민정이 말했다. 해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민정씨가 알아서 할 부분이죠. 다 하신 것 같으면 끝내셔도 됩니다.”


“그럼 이걸로 끝낼게요. 분명히 엄청 고생해서 번 조건인데도 나눠줄 때 하나도 아깝지가 않네요.”


“나중에 육신으로도 그런 마음을 가지신다면 참 좋을 텐데요.”


해일이 웃었다.


“어... 그건 좀 힘들지도? 애초에 남한테 줄 돈도 없는데요, 뭐.”


민정이 씁쓸하게 웃었다. 사실 이는 민정의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그녀가 다시 삶을 선택하기 싫었던 이유도 돈 때문이었다. 해일은 그런 민정에게 무심하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언젠가는 좋은 기회가 생길 겁니다.”


“오, 해일 천사님, 제 미래도 알고 계신 건가요?”


“미래는 정해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민정씨가 쌓아 둔 조건이 있고, 살면서 누구나 좋은 기회는 오게 되어 있어요. 다만 언제 올 지는 모릅니다. 기억해두신다면 좋은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을 거예요.”


“음, 실질적인 도움은 안 되지만, 그래도 고맙습니다.”


“흠, 실질적인 도움이 될 만한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뭔데요?”


“민정씨가 학교 건물에서 떨어질 때 말입니다. 그때 난간이 상당히 낡아 있었죠. 난간에 기댔을 때 부서지면서 떨어지셨고요.”


“맞아요.”


“그랬기 때문에 민정씨 추락 건은 자살이 아니고 사고로 처리되었습니다. 병원비와 보상비를 학교로부터 지급받았고요. 사람들도 다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와, 정말요?”


이는 민정에게 큰 기쁨이었다.

민정이 아무런 자살 징후를 보이지 않았고, 부서진 난간이 원래 부실했다는 수많은 제보가 있었기 때문에 경찰이 그렇게 판단한 것이었다. 민정은 마음이 굉장히 가벼워졌다. 돈도 돈이지만 사람들에게 '자살했다가 살아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불의의 사고를 겪었는 데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너무 좋아요. 진짜 다행이다...”


“아무튼 이번 여정은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남은 시간은 여기서 함께 쉬면서 마무리하시죠.”


해일이 말했다. 넓은 들판에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고 물과 꽃들이 가득한 낙원이었다. 소풍을 온 어린아이처럼 민정의 마음을 순수한 설렘으로 가득 차게 만들기 시작했다.


“다같이 기념사진이라도 찍을까요?”


민정이 제안했다.


“좋지요. 저 휴대폰 갖고 있습니다.”


해일이 동의하자 주변에 있던 천사들이 한 곳에 모였다. 각자 포즈를 잡고 셀카를 찍었다.


“하나, 둘, 셋!”


셔터를 누른 것은 나래였다. 찰칵, 하는 소리가 났다. 셀카로 찍었음에도 멀리서 찍은 것처럼 화면이 깔끔하게 구도가 잘 잡혔다. 풀과 물과 꽃이 적절히 포함되어 매우 보기 좋았다. 민정은 만족했다.


“아유, 사진도 참 깔끔하게 잘 찍으시네.”


"칭찬 고마워."


"..."


민정은 무심코 던진 칭찬에 나래가 대답하자 순간 당황했다. 아직도 나래에게 사과할 타이밍을 잡지 못하는 민정이었다. 그래서 일단 사진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20대 초반 여성은 사진을 깔끔하게만 찍지는 않기 마련이었다.


“다들 더 모여 봐요. 인생네컷 갑시다.”


이제 막 전국에 유행하기 시작한 사진 찍기 방식을 따라서 민정이 그들에게 요구했다. 천사들은 민정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


찰칵-


“좀 더 귀엽게 찍어 봐요.”


해일과 나래조차도 민정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 나래는 윙크를 했고 해일은 브이를 그려 눈 주위에 가져다 댔다. 루미는 그저 미소만 짓다가 민정의 성화에 못 이겨서 양 손바닥을 턱에다 받쳤다.


찰칵-


“흐흐흐헤헤헤헤.”


경박한 웃음을 짓는 민정이었다.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 민정과 천사들은 사진을 찍었다. 물을 배경으로, 꽃과 함께 찍고, 하늘을 날면서 동영상을 찍었다.


“아, 좋다.”


민정은 행복해했다. 그리고 그녀는 금방 아련해졌다. 이제 이 아름다운 풍경도, 선한 천사들도 못 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의 이별일 터였다. 다시 육신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선하게 살다 보면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멋진 모습으로.


"...뭐, 마지막으로 민정씨 하고 싶은 거라도 있으세요? 이제부터는 자유 시간입니다."


아련해지는 분위기를 눈치챈 해일이 제안했다.


"여기가 좋아요. 이왕이면 맛있는 거라도 먹으면서 캠핑을 했으면 좋겠네요."


민정이 문득 생각난 의견을 말했다. 캠핑이 유행하고 있었지만 민정은 당연히 가본 적이 없었다. 천사들도 덩달아 흥분했다.


"캠핑 완전 좋죠! 바베큐 파티를 할까요?"


"불도 피우고, 고기도 굽고, 밥 먹고 나면 불꽃놀이도 할까?"


로운과 나래가 의견을 보탰다. 민정은 생각만 해도 너무 행복했다. 캠핑을 즐기다가 분위기가 좀 무르익으면 타이밍을 잡아서 나래에게 사과의 말을 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여정도 만 하루가 남았으니 여기서 하룻밤 자는 것처럼 캠핑을 하시죠. 시간이 지나면 어두워지고 밤이 되게 설정을 할게요. 다른 변수만 없다면 재미있게 캠핑을 즐길 수 있겠죠."


해일이 결정했다. 그리고 그는 한 마디 덧붙였다.


"다른 변수만 없다면 말이에요. 아니면 제가 방어를-"


말을 하던 해일이 갑자기 사라졌다. 동시에 웃고 있던 천사들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쓴웃음을 짓는 천사들의 얼굴을 보며 민정은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과 함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또? 사탄들이 공격을 오는 것인가? 그 고통을 겪게 되는 건가? 사탄에게 납치당해 마음이 꺾이고 좌절하는?


"아니, 아닐 거야..."


패닉에 빠진 민정과 달리 천사들은 작금의 상황을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은 나래였다. 


“다들 마지막 인사 하세요.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지킵니다.’”


그가 편안한 표정으로 ‘기술’을 사용하자 목숨을 대가로 치러 생성하는 절대 방패가 나타났다. 마지막 여정을 하기 전, 아직 민정이 늪에서 혼을 건져내는 노동을 하고 있을 때, 천사들은 지금의 상황을 예상하고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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