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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틀리제 Oct 23. 2024

사연녀와 그녀의 수호천사들

23화 : 민정의 삶은 계속된다

“이제 인생 여정이 끝나가니까 사탄들도 마지막 승부를 걸겠지. 아마 해일이부터 다른 곳 강제로 순간이동 시킬 겁니다.”


이제 민정의 영과 혼을 분리시킬 이유가 없는 지금, 해일을 비롯한 모든 천사들이 민정 옆을 지키고 있기에 이전보다 사탄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결국 뭔가 하려면 해일을 제거해야 했다.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놈들이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하면 해일을 강제로 순간이동시키고 민정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것은 가능했다. 그 대가로 그들은 아주 오랜 세월을 지옥에서 고통받겠지만, 조민정을 나락으로 빠뜨릴 수만 있다면 기꺼운 일이었다. 이제 그들도 뒤가 없으니 모든 것을 결고 덤벼들 터였다.


"그러면 우리도 ‘의’를 사용해서 대응할까요? 지금까지 쌓은 ‘조건’을 쓴다면 ‘강제 순간이동’을 못 하도록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은 그동안 여정을 하면서 조건과 의를 아낀 편이었고, 또 민정이 4일간 뼈 빠지게 영혼들을 건져냈기에 상당한 조건을 쌓은 후였다. 사탄들보다 여유로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해일의 제안에 천사들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저는 반대에요. 그건 잘 아껴 놓았다가 민정이가 육신으로 돌아가면 써야죠."


로운이 반대했다. 루미와 나래도 마찬가지의 생각이었다.


"우리끼리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맞아요. 우리가 조금만 고생하면, 민정이가 육신으로 돌아가서 더 좋은 기회를 받을 수 있겠죠."


그것이 그들의 합의였다. 만약 해일이 강제 순간이동 저주를 당해 사라진다면, 천사들은 다들 목숨을 내놓기로. 나래가 사용하는 ‘절대 방패’ 기술에 루미와 로운이 영력을 보태어 함께한다면 해일이 돌아오기 전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여정 중에 해일이가 사라진다면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제가 방패를 만들 테니 두 분은 민정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시죠."


"나래, 괜찮겠어?"


"네, 두 분이라도 마지막 한 마디를 전하시죠."


항상 그랬듯이 나래가 먼저 희생했다.


“만약 일이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부활할 때까지 민정이를 잘 보호해 주세요.”


“...맡겨만 주세요. 천사님들이 장엄한 최후를 민정이에게 보여준다면, 민정이 기억 속에 더 강렬하게 남을 겁니다. 그것도, 괜찮은 전략이긴 하지요...”


해일은 천사들의 각오를 존중하기로 했다. 늘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존재하는 민정이었다. 


나래가 만든 방패는 민정의 영과 혼과 천사들의 주변에 푸른 방어막을 만들어냈다. 방패를 소환하는 데 모든 힘을 다 써버린 나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곧바로 악화의 손톱과 악의의 염력, 악행의 주먹이 방패를 때리기 시작했다. 여섯 사탄뿐만 아니라 족히 수천 마리는 되어 보이는 수많은 악령들이 방패와 방어막을 공격했다. 이를 정신 없는 민정이 지켜보는 가운데 로운이 민정에게 말했다.


“민정 언니. 우리 잊어버리면 안 돼요. 꼭 기억해야 돼. 여기서 겪었던 것들.”


“지금...”


대답도 듣지 못하고 로운도 나래 옆으로 뛰어가서 방패에 손을 얹었다. 로운의 모든 영력을 흡수한 방패는 악령과 사탄의 공격을 좀 더 버틸 수 있게 되었다. 로운은 나래와 마찬가지로 쓰러졌다.


“민정아.”


마지막으로 루미가 민정을 불렀다. 멀리서는 악화의 손톱이 나래의 머리를 쪼갰다. 악행이 로운의 몸을 밟아 터뜨렸다.


“안 돼!”


방패의 보호 범위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민정을 루미가 붙잡았다. 그녀는 민정을 강하게 껴안고 말했다.


“너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너의 수호천사라는 사실이 기뻐. 사랑해. 행복하게, 멋있게 살아.”


“으허엉...”


민정은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꿈을 꾸는 것인가?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민정을 놔두고 달려간 루미가 방패에 손을 얹었다가 쓰러지고 사탄들이 그 몸을 조각내는 것을 보면서 민정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천사들을 모두 도륙하고도 사탄들은 포기하지 않고 방어막을 두들겼다. 그러나 방어막은 한 순간도 흔들리지 않고 민정을 단단하게 지켰다. 울음이 멈추지 않는 민정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해일을 기다렸다.


그대로 만 하루가 지났다. 울다가 탈진해서 쓰러져 있던 민정은 갑자기 하늘 위로 높이 솟아올랐다. 깜짝 놀라 보니 해일이 돌아와 하늘에서 민정을 끌어올린 것이었다.


"흐어엉..."


해일을 발견한 민정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해일은 민정의 눈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천사들의 죽음에는 관심이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여전히 강물이 흐르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 풍경을 더럽히는 악의 무리들이 해일을 보고 올라오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해일이 총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새하얀 빛이 민정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세상이 사라졌다가 다시 태어날 것 같은 커다란 폭발이었다.


쾅-


수천 마리의 악령을 한번에 집어 삼킨 대폭발이 일어났다. 약하디약한 하급 악령에서부터 강력한 악화와 그 친위대까지, 해일의 분노에 평등하게 사라졌다.


일격에 모든 사탄을 물리친 해일은 민정을 데리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가 방패에 손을 얹자 방어막이 사라졌다.


"흐흑..."


민정은 또 눈물을 흘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번에는 민정이 천사들의 희생을 눈앞에서 지켜봤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해일은 민정의 눈물이 기꺼웠다. 그녀가 세상이 떠날 듯 울음을 쏟아내는 걸 흐뭇하게 쳐다봤다.


“해일 천사님...너무 분하고 억울해요... 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지-”


영혼의 세계에서 처음 둘이 만났을 때도 민정은 눈물을 쏟아냈었다. 그때 해일은 위로도 없이 민정을 강하게 이끌었었다.


“일어나세요. 괜찮습니다.”


“왜 또 나를 떠나버리는 거예요? 다들 말도 없이 준비도 안 되었는데 나를 떠나요...”


“천사님들이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은 없나요?”


“흐흑, 자기들 잊어버리지 마라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잘 기억해 두세요. 그러면 된 겁니다.”


“나래... 천사님한테... 사과도 못 했는데. 흐흑. 마지막에, 사과하고 떠날려고 했는데...”


“원래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죠.”


“흐흑, 제가 너무 죄송했다고 좀 전해주시겠어요?”


“먼 미래에 직접 전하시죠.”


여전히 민정이 원하는 말은 해 주지는 않는 해일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여정을 마무리하시죠. 제1본부로 갑시다.”











여정의 막바지가 다가오고 있었다. 민정의 영을 데리고 제1본부로 이동한 해일과 민정은 깔끔하게 잘 꾸며진 아파트 단지를 볼 수 있었다.

여섯 개의 동이 육각형으로 둘러싼 모양으로 중앙에 성이 있었고 가로등이 질서정연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가로등의 불은 켜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 아파트 단지에 해가 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참 노을이 지는 아름다운 풍경이기는 했지만,


“확실히 천국보다는 심심하네요.”


민정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 한눈에 들어올 정도의 규모에 특별히 눈길을 잡아 끄는 것이 없었다. 다만 성의 입구에 새로 작품이 생긴 것이 있었다.


“오, 이건 제 모습이네요.”


크리스탈처럼 반짝거리는 민정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팔을 쭉 펴고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 활력이 넘치면서도 섬세한 느낌이 나는 작품이었다. 민정은 예술품을 보는 눈은 없었지만 보통 솜씨가 아님을 알 수 있었고 너무 마음에 들어했다.


“이거 내가 천국에서 산 옷인데. 어떻게 만든 거에요?”


백화점에 가서 산 두 벌의 옷 중에 티와 청바지를 입은 민정의 모습이었다.


“천사님들이 민정씨에게 인생 여정의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로 다함께 직접 만드신 겁니다. 마지막에 보여 주려고 하셨는데 아쉽게 되었네요.”


“...”


민정이 또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시간이 조금 늦어졌다.


“이제 30분 남았습니다.”


해일이 말했다. 갑자기 제1본부의 아파트 중앙에 거대한 시계가 생겨났다. 30:00을 가리키던 시계는 29:59로 바뀌면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30분 후에 민정씨의 혼은 육신으로 돌아갑니다. 육신은 식물인간에서 깨어날 겁니다. 영은 여기서 계속 살 거고요."


"이제 정말 마지막이군요."


“저희가 할 일은 다 했습니다. 여정은 충분히 진행했으니 마무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기를 쓰시면서 정리하시죠. 맛있는 간식도 드시고요.”


해일이 순식간에 각종 쿠키 등과 음료가 담긴 테이블을 차리고 일기장을 내밀었다.


“음, 물어볼 게 있어요.”


민정은 해일이 내미는 일기장을 받았지만 다른 이야기를 했다.


“뭐든 물어보시죠.”


“결국 제가 이 인생 여정에서 배운 건 뭐였을까요?”


“그러고 보니 여정을 마무리해야 하니 정리가 필요하겠군요. 인생 여정을 통해 배운 것이라. 먼저 직접 생각해 보시죠.”


해일은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음료수를 들이키며 물었다. 민정도 따라 앉았다.


“부모님의 사랑, 착하게 살기, 그리고 포기하지 말아라. 크게 보면 이 정도인 것 같은데요. ”


“요약을 잘 하시네요. 제가 생각해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것들을 영혼과 관련하여 육신의 삶이 영혼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배웠고, 무엇보다도 그냥 말과 지식으로만 전달한 것이 아니라 행동과 겪음으로 느끼고 깨달은 시간이었죠.”


“그 모든 것들이 너무 귀하고 값진 경험이었어요. 천사님들에게 너무 고맙고, 이 이전의 저와 지금의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될 만큼, 다시 태어난 기분이에요...하지만 다시 삶으로 돌아가려 하니 역시 또 조금 막막하고 불안한 생각이 들어요.”


“왜 그렇습니까?”


“내 환경은 그대로지만 나는 변했으니 그건 괜찮아요. 하지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옳고 그른 것의 기준이 뭔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직 그건 모르겠어요. 육신으로 돌아간 나는 엄마한테 좀 더 잘 할 거고, 좀 더 남을 돕고, 좀 더 자신감 있게 살겠죠. 하지만 그게 저기 못생긴 내 영한테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어요. 신주연 언니처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나는 그렇게 순수하지 않으니까요.”


영혼의 문제에 있어서 민정의 롤모델은 신주연이었다. 천사들은 인간이 아니었고 육신도 없었기에 민정의 롤모델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민정은 자신이 신주연과는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민정이 생각하기에 신주연은 밝고 순수하며 자신의 긍정적인 에너지와 생명력을 타인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이었다. 그 순수함과 선함이야말로 신주연의 영혼이 아름다운 이유라고 민정은 생각했다.


“천사님들의 조언도 이제는 못 들을 거고, 하다가 잘 안 되면 마음이 꺾일 것 같아요. 그냥 원래와 비슷한 삶을 살지 않을까요. 그러면 제가 죽고 나서도 영혼이 저것과 비슷한 모양이지 않을까요.”


진지하게 고민을 말하는 민정을 보며 해일은 흐뭇함을 느꼈다. 처음 육신의 삶에서 절망을 느껴 인생 여정을 시작하게 된 민정이었지만, 지금 인생 여정을 마무리하는 민정은 이미 육신의 문제는 심리적으로 극복했으며. 이제 영혼의 삶을 생각하고 있었다.


해일도 신중하게 민정에게 할 말을 골랐다. 이것이 그가 민정에게 내리는 마지막 가르침이 될 터였다.


“인생 여정은 민정씨의 과거, 현재, 미래를 확인하는 여정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민정씨를 다시 삶으로 이끌기 위한 과정이었고, 그를 위해 민정씨에 대해서, 그리고 인생에 대해서 일부분만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영과 혼과 육신의 관련성에 대해 약간 가르쳐 드렸습니다. 이로써 인생을 알았다고 할 수 없고, 민정씨가 여전히 인생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민정이 원하는 속 시원한 답과는 결이 달랐지만, 해일의 답은 나름대로 민정에게 위로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선택받은 소수의 인간을 제외하면, 육신의 삶에 대해서는 육신으로 배우는 것이 원칙입니다.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를 배우고 생각하면서 삶에 대해서 깨닫고 선으로 나아가야 하죠. 그런 점에서 인생에 대해서 배우는 진정한 인생 여정이란 곧 육신의 삶을 의미합니다.”


해일은 마시던 음료수 병을 들어 민정에게 기울였다. 민정은 자신의 잔을 들어 그의 병과 부딪혔다.


“민정씨의 새로 시작할 인생 여정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를 기원합니다.”


“고마워요. 막연하지만, 부딪히면 어떻게든 되겠지요.”


“충분히 잘 해내실 겁니다...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마지막은 민정씨 혼자서 마무리하실 겁니다.”


해일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디론가 떠날 것을 암시했다. 민정은 그가 끝까지 함께 있기를 바랐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해일은 노을이 비치는 제1본부를 둘러보았다. 해일의 시선을 따라 민정도 아파트를 둘러보았다. 다시 봐도 볼품없는 영에 비하면 나쁘지 않은 영의 집이었다.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탁이요?”


해일은 태양을 등지고 섰다. 비교적 볼품없는 제1본부를 아름답게 물들이는 노을빛이 민정의 눈에 가득 찼다.


“만약 이 여정이 민정씨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우리를, 여기에서 있었던 일들을, 여기서 배운 것들을 잊지 마십시오.”


“...어떻게 잊겠어요.”


로운이 죽기 전에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아니요.”


해일이 조금 슬픈 눈빛으로 말했다. 모든 것은 민정에게 강한 인상과 여운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민정씨가 지금 육신에서의 삶을 돌아보면, 꽤 많이 감각이 멀어졌을 겁니다. 육신에서 살았던 것이 꿈처럼 느껴질 겁니다.”


“어... 그럴지도요.”


“다시 육신으로 살다 보면, 거기에 익숙해진다면, 마찬가지로 여기 영계에서의 삶은 마치 꿈을 꾼 것처럼 느껴질 겁니다. 그러다 보면, 어쩌면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죠. 나는 그저 실감 나는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닐까.”


“설마, 절대 그럴 일 없어요. 맹세할게요.”


민정이 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순간 그녀의 말은 해일에게 전하는 다짐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하는 결심이었다.


“...마음이 조금 놓이네요.”


해일이 웃으면서 말했다. 해일은 민정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다. 뼈를 깎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한 민정이 이 여정에서 배우고 느낀 그 마음과 다짐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민정의 눈빛에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기에 마음이 조금 놓인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뿌듯합니다. 앞으로가 기대가 되네요.”


“...하하.”


민정 또한 해일의 말에서 진심을 읽었다. 민정은 자신이 해일에게 인정받기를 강렬히 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일 천사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해요.”


“민정씨도 고생 많으셨어요.”


그리고 민정은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민정이 한참 집중하기 시작했을 때 해일은 슬며시 모습을 감추었다. 민정은 그동안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을 열심히 기록했다. 어느 정도 기록을 마무리했을 때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천사들, 악령과 사람들의 영혼, 신주연의 영혼의 모습을 그렸다.


어느새 해는 지고 달이 떠 있었다. 달빛에 비친 민정은 얼굴에 가득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녀는 시간을 확인했다. 1분이 남지 않았을 때 그녀는 뒤돌아섰다.

모든 것을 두고 떠날 시간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강렬한 고통이 찾아왔다.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머릿속은 깊은 잠에서 막 깬 상태처럼 생각이 잘 흘러가지 않았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고통과 혼란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주변은 매우 소란스러운 것 같았다.


새삼 육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느껴졌다. 민정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천사들을 생각했고 신주연을, 그리고 김현숙과 조한석을 생각했다. 그녀를 어떻게든 고통에 밀어넣으려고 발악하던 사탄들도 생각났다. 이제는 조민정이 스스로 이를 악물고 살아야 할 이유가 많아졌다.


“민정아!”


그리고 드디어 민정은 그녀를 부르는 김현숙의 목소리를 인지할 수 있었다. 민정은 힘겹게 눈을 떴다.


“...엄마.”


“민정아. 이 녀석아.”


김현숙은 억지로 울음을 참고 있었다.


“엄마,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나 앞으로 열심히 살 거야. 절대 자살 같은 거 안 할 거야.”


“그래, 민정아. 살자, 같이... 행복하게 살자. 미안해.”


온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간 느낌이었지만, 민정은 김현숙을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김현숙도 울음이 터졌다.





사각-


병실 침대에 누운 민정은 김현숙이 잘라 준 수박을 베어물었다. TV에서는 잘 모르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식물인간이었던 동안 약해졌던 몸은 빠르게 회복되었고 동시에 적응했다. 깨어난 후 한동안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던 민정은 이제 입 안에 도는 단맛이 익숙해졌다.

수박은 최소민이 민정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민정은 퇴원한 후 소민과 함께 부산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학교 측에서 민정에게 병원비와 보상금을 지급했기에 여유가 있었다. 여행을 다녀온 후에 알바를 다시 시작할 것이고, 개학하면 학교도 다닐 예정이었다.

알바의 최대 목적은 김현숙과 신주연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함이었다. 이미 편의점 몇 군데를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공부와 병행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편의점 알바를 계획 중이었다.


퇴원하고 나면 이렇게 여유로운 일상은 없어질 계획이었다. 몸은 침대에 편안히 누워 있었지만 생각은 끊임없이 돌아갔다. 약해졌던 근육은 매일 녹초가 될 정도의 운동으로 이미 입원하기 전보다 더 단련시켜 놓았다. 몸도 마음도 준비가 끝났다.


TV화면에는 어떤 여배우가 눈에 독기를 가득 품은 연기를 하고 있었다.


[단 한 순간도 널 용서한 적이 없어-]


[그러니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나는 멈추지 않을 거야. 이미 내 삶이 지옥이니까.]


독기를 품은 눈을 클로즈업하는 화면을 보면서 민정은 중얼거렸다.


“안 그러는 게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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