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 민정의 위기
“이 부녀가 민정씨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이고 민정씨가 피해자임은 천사로서 보증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잘못을 저질러 피해를 입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용서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입니다.”
해일이 담담하게 말했다. 민정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들을 용서하는 것은 생각도 못 했었다. 이제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엔 당연히 거부감이 들었다. 웬만하면 천사가 하자는 대로 하고 싶었지만, 지금 이 때를 다시 보니 그 때 겪었던 힘듦이 생생하게게 느껴졌던 것이다.
“사과 한 마디를 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용서를 하나요?”
“사과를 받아야만 용서를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
“민정씨의 자유 의지입니다. 여기서 이들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서 여정에 문제가 생기거나 불이익을 받지는 않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해일은 분명 방금 전에 결국 자신의 인생은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용서하는 것도 민정의 마음인 것이다.
문득 민정은 인생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 맞나 의심이 들었다. 암만 봐도 해일은 민정에게 있어서 다른 선택지가 없도록 만드는 것 같았다.
“용서한다면,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더 이상 마음으로 이들을 미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미워하지 마라고요... 후우...”
민정은 한숨을 쉬고 생각에 잠겼다. 김호진은 그렇다쳐도 김수현은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났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못됐지.
생각건대 지금 민정이 친구가 많지 않고 대인관계에 소극적인 건 김수현 때문이기도 했다. 원래 김수현은 민정의 친구였다. 2학년 초에 김수현이 민정에게 먼저 다가왔었다. 그러나 그것은 새 학년이 되어서 친구를 사귀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욕심을 채울 대상을 찾는 것이었다.
김수현을 겪은 이후로 민정은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지도 못했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쉽게 열지도 못했다. 김수현은 민정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
결국 민정이 자살하게 된 첫 번째 계기를 제공했으니 생각건대, 김수현은 민정의 죽음에 기여한 인물이라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민정은 한번 죽었으나 여기 영혼의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얻었다.
죽기 전의 삶은 지금과는 단절된 과거의 것으로 느껴졌으며, 과거에 있었던 일에 감정을 소모하는 것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요. 더 이상 김수현을 미워하지 않을게요.”
“흐흐, 나중에 마음 바뀌시면 안 됩니다. 지금은 괜찮다고 용서해도 나중에 잊어버리고 또 미워하시면 안 돼요.”
“알았어요. 뭐 노력해 볼게요.”
“좋습니다. 그러면 <김수현> 여정은 마무리하겠습니다. 많은 것을 배운 여정이었군요.”
해일이 여정 종료를 선언하자 옆에서 지금껏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서 있던 나래가 민정을 데리고 제2본부로 돌아갔다. 해일은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잠시 남았다.
배경은 여전히 김수현의 집이었다.
옆에는 난동을 부리다가 지쳐서 풀이 죽은 김수현의 영혼이 있었다. 아까 민정이 보던 모습보다 훨씬 못생기고 힘 빠진 모습이었다. 김수현의 옆에는 커다란 이빨을 가진 악령들이 낄낄거리고 있었다.
“...”
해일은 냉담한 눈으로 김수현을 바라보다가 총을 들었다. 총구는 김수현을 향했다.
탕-
총알이 발사되었고, 김수현을 보호하고 있던, 보이지 않는 방어막이 깨졌다.
그리고 악령들이 김수현을 붙잡았다.
“꺄아아악!!”
"최고의 복수는 용서라지."
김수현의 비명소리를 뒤로 하고 해일은 제2본부로 이동했다.
습격을 한번 받았던 해일-나래와 달리, 루미-로운은 아무런 공격이 없어 꽤 여유로웠다. 루미는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하여 성의 문에 가까이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로운은 좀 더 자유롭게 앞에서 ‘기술’을 연습하며 한가로운 때를 보내고 있었다.
“하압!”
로운이 기합을 넣자 사탄의 모습으로 만들어 놓은 목표물의 주변으로 반지름 3미터 정도의 나무 군집이 생겨났다. 속도도 빠르고 위치도 정확해 생각한 대로 잘 되었지만, 로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쓰읍, 이것 가지고는 안 되는데.”
“왜 그래? 잘 하고 있는데.”
그림을 그리던 루미가 반문했다.
“이것 가지고서는 사탄들한텐 큰 타격을 줄 수 없어요. 악령들 한꺼번에 정리할 때나 쓸만하지.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야 하겠지만 사탄들이랑 본격적으로 싸우려면 강력한 한 방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아요. 해일 천사님처럼 말이에요.”
“음, 저번에 보니까 ‘숲’도 꽤 강력하던데. 사탄들도 아프게 맞았고.”
“발악하다가 얻어 걸린 느낌이었어요. 언제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너무 힘들어요. 그런 우연에 가까운 기적에 기댈 수는 없죠.”
“맞는 말이야. 곧 최후의 결전이 있을 텐데 할 수 있는 게 많을수록 좋지.”
해일의 말에 따르면 조만간 사탄들의 대대적인 침략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로운은 정신을 집중했다. 반경 3미터의 나무들을 만들 영력을 한 점으로 집중한다면 사탄들에게도 그럭저럭 쓸만한 공격력이 나올 것이었다. 그를 위해서는 한 차원 높은 집중력과 영력 조절 능력이 필요한 것이었다.
“하압!”
목표물의 오른쪽, 왼쪽, 위에서 세 갈래의 나무줄기가 순서대로 목표물을 향해 파고들었다. 목표물이 회피하는 경우를 가정하여 시간차로 다각도에서 공략하는 것이었다. 공격력, 속도, 방향, 영력 조절 등 모든 면에서 집중한 보람이 있었다.
“어우, 피곤하다.”
“훨씬 좋네.”
루미가 웃으면서 칭찬했다.
“해일 천사님 스타일이네.”
“맞아요. 해일 천사님은 어떻게 하시는지 생각해 봤는데, 상대의 움직임도 다 예측하고 공격을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특별히 기술도 안 쓰시고 기본기로만 최고의 효율을 내시고요. 워낙 실력이 좋으셔서 그렇게 하시는 건데 저도 따라서 해 보려고요.”
“좋지. 나는 못 하는 부분들이니까.”
루미는 공격과 수비 및 보조 역할까지 다재다능했지만 해일처럼 송곳 같은 공격능력을 갖고 있진 않았다. 바람과 화염은 넓은 범위를 강하게 타격할 수 있었지만 그만큼 영력 소모의 효율은 떨어졌다.
로운은 루미의 영향을 받아 그녀와 비슷한 스타일로 발전해 왔는데, 해일의 영향도 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압!”
이번에는 다섯 개의 나무줄기가 뻗어나갔다.
“와, 잘 하는데? 이 정도면 나래도 칭찬하겠다.”
"확실히 임무가 빡세니까 성장이 빠른 것 같긴 해요. 아무리 제1본부에 있었다고는 해도 아까 전에 그 악화 년한테 한 방 먹이니까 좋더라고요. 손맛도 짜릿하고."
"하하, 그래? 또 쳐들어오면 이번에도 본때를 보여주렴."
"그러려구요. 흐흐흐."
김수현을 용서하자는 해일의 제안을 싫어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민정은 여정이 끝나자마자 신이 나서 천사들에게 말했다.
“용서라는 게 참 좋은 것 같아요. 내 마음이 정말 편안해져요.”
“그렇지? 최고의 복수가 용서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야. 미워하는 마음을 꺾기는 어려워도 하고 나면 마음이 굉장히 편안해지곤 해.”
나래가 맞장구를 쳤다.
“제가 또 용서하고 마음의 원망을 풀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요.”
민정이 말했다. 해일은 민정의 말에 깜짝 놀랐지만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누구인가요?”
“제 부모님이요.”
민정은 슬픔이 약간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
“마음 속으로 엄마 아빠를 많이 원망했어요. 아빠는 엄마랑 나만 남겨 두고 먼저 돌아가신 거랑, 엄마는 나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한 것이요. 물론 엄마 아빠 잘못은 아니에요. 아빠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생전에는 좋은 아빠였어요. 그리고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는 엄마도 많이 힘들었기 때문에 나를 돌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겠죠.
그래도 나는 마음 속으로 둘을 원망했어요. 어쨌든 엄마랑 아빠 때문에 내가 힘들었으니까. 이제는 둘을 용서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싶어요.”
“흐음, 알겠습니다. 여기서 준비를 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해일은 짧게 대답하고 민정에게서 돌아서서 허공에 대고 손짓들을 하기 시작했다. 뒤에 서 있던 나래는 해일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마치 사탄을 마주한 것처럼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나래도 민정의 편을 들 수가 없었다.
‘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건지... 민정이가 이번엔 교만했어.’
나래조차 그렇게 생각했지만, 해일은 일단 민정이 원하는 대로 여정을 진행할 생각인 듯했다. 나래는 기다리는 동안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와중에 제1본부 천사들로부터 호출이 왔다.
[나래 선배님 이쪽으로 와 주세요!]
“나는 제1본부로 가봐야 할 것 같아.”
“네, 다녀오세요.”
로운의 말투로 보아선 급한 일은 아닌 것 같았지만, 불편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음에 내심 기뻐하며 나래는 얼른 제1본부로 이동했다.
“김현숙씨부터 갈까요. 그 다음에 조한석씨를 보겠습니다.”
“네, 좋아요.”
풍경이 바뀌었다. 민정의 육신이 입원해 있는 병원이었다. 한낮이라 햇빛이 창문으로 들이치는데도 병원답게 고요하고 축 처진 분위기였다. 김현숙은 민정의 침대 옆에 의자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민정은 졸고 있는 김현숙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엄마.”
해일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민정은 혼자서 하고 싶은 말을 이어나갔다.
“엄마가 좋은 엄마였는지 잘 모르겠어. 확실한 건 나는 엄마한테 상처를 많이 받았었어. 하지만 엄마도 나 때문에 힘든 일이 많았겠지. 내가 짐 같았을 거고, 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도 엄마는 나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금까지 붙잡고 있어. 엄마 때문에 힘들었지만, 내가 이런 세상에나마 살았던 것은 다 엄마 덕분이야. 그런데 나는 엄마를 버리려고 했어. 미안해. 이제 더는 엄마를 원망하지 않을게. 내가 다시 살아나면 엄마가 나를 어떻게 대할지 모르겠지만, 예전과 똑같이 대한다 하더라도, 나는 예전처럼 엄마를 대하진 않겠다고 약속할게.”
민정의 진심 어린 약속을 옆에서 들으며 해일은 복잡한 감정에 한숨을 쉬었다. 민정이 교만하였고 잘못 생각했다 하더라도 나쁘지만은 않은 결심이었다. 여기서 잘못된 부분을 잘 알려 줄 수만 있다면 좋으리라.
“다음은 조한석씨입니다.”
풍경은 민정이 어릴 때 살던 아파트 단지였다. 지금의 제1본부의 모티브가 된 곳으로, <가장 행복한 순간>을 진행했던 곳이었다.
“아빠.”
직장에서 일하다가 퇴근한 듯한 옷차림의 남자가 아파트 안에서 멍하게 서 있었다. 민정은 남자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아빠. 아빠는 좋은 아빠였어. 나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아빠는 나를 너무 일찍 떠나 버렸어. 왜 그렇게 빨리 가 버렸어? 너무 빨리 가 버린 아빠를 많이 원망했어. 하지만 이제는 원망하지 않을 거야.”
말을 잇는 민정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해일은 눈가에 주름이 생길 정도로 이마를 찌푸렸다. 이걸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까,
고민하던 해일은 악령의 악한 기운이 빠르게 접근하는 것을 느꼈다. 상당히 강한 악령이었다.
나래가 방금 제1본부 천사들이 불러서 이동했건만, 아마도 그것은 나래를 유인하기 위한 전략인 듯했다. 빠르게 판단한 해일은 재빨리 나래를 다시 불렀다.
[나래 선배님!]
“민정씨!”
사념과 말을 통해 동시에 둘을 부르며 전방위적으로 날아드는 악화의 손톱을 재빨리 총으로 튕겨낸 해일이었다. 나타난 사탄은 여섯. 나래가 순간이동으로 도착해 민정을 보호하기까지 아주 짧은 순간만 잘 막아낸다면 무리 없이 사탄들을 이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래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해일만이 아닌 듯했다. 사탄들도 나래가 오면 바로 공격하려고 영력을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해일은 그 틈에서 한 차원 높은 꿍꿍이를 발견했다. 커다란 머리에 짧은 몸통을 가진 과묵한 사탄, ‘악의’는 그 개성대로 영력 조작에 탁월한 실력이 있었다. 해일은 악의가 이 싸움에서 천사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저주’인 ‘순간이동 방해’를 준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사탄들이 힘을 모으는 것은 그 목적을 가리기 위한 눈속임이었다. 만약 나래가 ‘저주’에 걸린다면 순간이동을 못 하고 제1본부에 묶이거나, 최악의 경우 이상한 곳으로 순간이동되어 어느 곳도 지키지 못할 수 있었다.
타앙-
그렇게 놔둘 리 없는 해일의 총이 불을 뿜었다. 힘을 모으던 악의는 옆으로 펄쩍 뛰어 해일의 공격을 간신히 피했다. 그 직후 나래가 방패를 든 채로 나타났다. 재빨리 주변을 보고 상황을 판단하려던 나래에게는-
“안돼!”
사탄들은 온데간데없고, 해일의 다급한 외침만이 들릴 뿐이었다. 사탄들은 나래가 순간이동하여 민정에게 도착하는 동시에 순간이동하여 어디론가 사라졌다.
“선배님! 다시 제1본부로!”
다급한 해일의 외침에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다시 순간이동하는 나래였다.
“무, 무슨 일이에요?”
겁에 질려 상황을 묻는 민정의 말에 대답도 못하고 해일은 생각했다. 사탄들은 전원 제1본부로 이동했음이 분명하고, 뒤쫓아간 나래가 악의가 ‘순간이동 방해’에 걸렸다면...
그렇다면 루미와 로운만으로 여섯 사탄을 상대해야 한다.
[나래 천사님.]
[...]
사념으로 불러도 대답 없는 나래였다. 전투가 한창이라 바쁜 것일 수도 있지만, 순간이동 방해에 이어 ‘사념 방해’까지 걸렸다면. 그렇다면 나래는 어디선가 소통도 안 되는 채로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악의의 실력이라면 그 단단한 천사에게 순간이동 방해와 사념 방해의 저주를 동시에 내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민정을 데리고 제1본부로 이동해야 하나?
고민하던 해일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사탄에게 제1본부를 뺏기든, 민정을 데리고 제1본부를 가든 결과는 비슷했다. 그러니 지금은 제1본부의 천사들을 믿고 기다릴 때였다.
“민정씨.”
“왜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러나 해일은 최악의 때에 대비해야 했다. 민정에게 마지막이 될 수 있는 당부를 하려고 했다.
“...우리 천사들을 꼭 믿어 줘.”
해일이 민정에게 마지막 당부를 하기 조금 전,
루미와 로운이 설렘과 긴장으로 대비하던 제1본부에 갑자기 악령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가 처리할게요."
"좋아, 난 나래를 부를게."
악령들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음을 느낀 로운이 악령들을 처리했고 루미는 만약에 사태에 대비하여 나래를 호출했다.
"드디어 시작인 건가... 앗."
나래는 성 문 앞에서 든든하게 방어를 시작했으나, 거의 시작하자마자 다시 해일의 호출을 받고 사라졌다. 루미와 로운에게 제대로 설명도 못 하고 허겁지겁 순간이동했다.
나래가 다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천사들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긴장했다. 그리고 그 직후, 피투성이 모습의 해일이 제1본부에 순간이동해 등장하고 쓰러졌다.
“크윽!”
“해일 천사님!!”
다급하게 해일을 부르는 로운이었다. 급박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정신이 팔린 로운이 쓰러진 해일에게 달려갔다.
“정신 차려, 로운! 위치 지켜!”
다급하게 내지르는 루미의 외침에 로운이 우뚝 섰다. 뒤를 돌아 루미를 보자 어느새 나타난 악행의 커다란 주먹이 루미에게 질러지고 있었다. 루미가 급하게 휘두른 부채에서 나온 바람이 악행의 주먹을 힘겹게 막아냈지만, 뒤이어 날아드는 악화의 손톱까지 막지는 못했다. 악화의 손톱은 바람을 뚫고, 미리 성문 근처를 둘러싸고 있던 로운의 나무 방패까지 조각낸 후, 루미의 목을 꿰뚫었다.
“끼야아아악!!”
엄청난 고통에 울부짖는 루미였다. 이어서 악행의 주먹이 루미의 머리를 강타했다. 머리가 반쯤 짓뭉개진 루미의 온몸을 피보라의 핏물이 덮었다. 그대로 루미는 죽었다.
"안 돼!!"
로운은 필사적으로 공격을 시도하면서 뛰었다. 세 개의 날카로운 나무줄기가 다양한 궤적으로 악화에게 쇄도했으나 악화는 하나의 손톱으로 나무줄기를 모두 갈라 버렸다.
“히히, 이 간지러운 나무는 면봉인가? 귀를 긁어도 되겠는데.”
악화가 로운을 조롱했다. 아까 쓰러진 해일이 일어나더니 악의의 모습으로 변했다. 강한 염력이 로운의 사지를 묶고 그들이 지키던 성벽으로 처박았다. 성벽에 강하게 부딪힌 로운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두려움에 떠는 로운에게 악화의 손톱이 쏜살같이 날아왔다. 최후를 맞이하기 직전, 로운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손톱은 로운의 눈앞에서 멈췄다. 손톱은 로운의 머리를 천천히 긁었다.
“끄윽-”
머리에서 이전보다 훨씬 많은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린 로운의 눈물도 함께 흘렀다.
"흐읍..."
“겁먹은 어린 수호천사야. 네게 경호 일은 어울리지 않는구나. 그만두어라. 너는 해일 놈처럼 될 수 없으니. 후후.”
악화는 조롱의 말을 남긴 후 로운을 풀어 주었다. 로운은 악화가 천사들이 지키던 성의 문을 뚫고 들어가는 것을 차마 지켜보지 못했다. 그녀는 자괴감에 무거운 눈물을 한참이나 흘렸다.
“민정씨.”
“왜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해일과 왔다가 바로 사라진 나래를 보며 민정은 당황했었다. 해일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는데, 민정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갑자기 낯선 곳으로 순간이동했기 때문이다.
“으악! 뭐야!”
지금까지의 순간이동과는 무언가 다른, 납치되는 느낌의 강제적 순간이동에 민정은 소리를 질렀다. 이동된 곳은 좁고 어두운 방이었다. 원룸처럼 네모난 방에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고 백열등 하나가 희미하게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안녕, 꼬마야.”
섬짓하게 차갑고 도도한 목소리의 악화가 민정에게 말을 걸었다. 원래의 칠판 긁는 듯한 소름 돋는 목소리를 바꾼 것이었고, 목소리뿐만 아니라 외형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꾸민 상태였다. 누더기를 입고 여덟 개의 팔에 하체가 없는 원래의 모습에서, 옷은 새까맣지만 깔끔하고 세련된 정장에 얼굴은 창백하지만 짙고 스모키한 화장을 한 것으로 변했다.
무엇보다 너무도 차가운 느낌일 뿐, 그 원래 형상과 다르게 대단한 미인이었다. 루미와 비견될 정도로.
“당신 누구야?”
하지만 악화는 외형만 아름답게 꾸몄고, 사탄 특유의 악한 기운까지 숨기진 않았다. 누가 봐도 사탄 같은 모습에 민정은 경계심 가득 차서 악화를 노려보았다.
“후후후. 흐하하하하하.”
악화는 대답 없이 차갑게 웃으며 민정의 머리를 잡았다. 약간의 통증에 민정이 신음을 냈다.
“으윽. 이거 놔!”
“하하하하하하!”
악화는 민정의 머리를 놓고선 큰 소리로 웃었다.
“방금 너희 부모를 용서하고 왔느냐? 해일 놈도 물러터졌구나.”
“너 누구냐고! 천사님들 어디 갔어!”
“꼬마야, 나는 악화(惡花)라고 한단다. 악한 것으로 꽃을 피우는 영혼이지. 악한 것은 생각보다 아름답거든.”
그녀는 검은색 정장의 옷 안쪽에서 검은 장미를 꺼내 민정의 귀에 올렸다. 민정은 소름끼치다는 듯 장미를 귀에서 쳐냈다.
“네가 누구고 뭐 하는 녀석인지 궁금하지 않아. 저리 꺼져.”
“네가 물어봤잖니. 아무튼,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단다. 네가 누구인지가 중요하지.”
웃음을 뚝 그친 악화가 민정에게 여유롭게 말했다. 민정으로서는 짜증 나는 여유였다.
“개소리야!”
“딱한 꼬마야, 인생여정을 하면서 좋은 경험을 하고 있니? 인생이란 그렇게 알기 쉬운 것이 아니란다.”
빙글거리는 악화의 얼굴 뒤로 풍경이 바뀌었다. 백열등 하나 켜진 감옥 같은 좁은 방이 아닌 드넓은 우주가 펼쳐졌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블랙홀이 주변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커다란 행성과 함께 거기에 빨려들어가는 것 중에는 인간의 영혼도 있었다.
“인생이란 아둔한 네 머리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어려운 것이란다. 거기다가 꼬마야, 너는 인생여정을 통해서 네 인생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천사놈들이 너에 대해서 전부 알려줬다고 생각하니? 하하하하!!”
다시금 입이 찢어지게 웃는 악화에게 민정은 순간 대답할 수 없었다. 민정도 천사들이 객관적으로 모든 진실을 알려 줬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들은 민정을 삶으로 되돌리기 위해 필요한 것들만 부분적으로 알려 주며 이끌었을 뿐이었다. 드넓은 우주가 사라지고 그들은 다시 좁은 방으로 돌아왔다.
“놈들은 우리 사탄들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려 주지 않았겠지? 왜 우리가 너희를 미워하는지, 우리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말이야. 우린 그저 너희 인간들에게 진실을 알려 주고 싶은 것뿐인걸. 너희가 어떤 자들인지, 너희의 죄가 무엇인지 말이야.”
악화는 이번에는 민정의 귓가에 속삭였다. 민정은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천사들은 자기가 저놈의 말을 듣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귀를 막을수록 놈의 목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그러니 내가 알려주도록 하마. 어리석은 꼬마야, 너는 네가 누군지 아니? 후후, 너는 네가 조민정의 영혼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악화의 말투가 조금 미묘하게 바뀌었다. 보다 조롱의 색이 짙어진 말투에, 아예 무시하려고 대답도 않던 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말려들어 화를 냈다.
“개소리하지 마.”
“이상하지 않느냐? 육신이 육계에서 태어날 때 영혼은 영계에서 태어나는데.
네가 조민정의 영혼이라면, 20년 전 조민정이 태어났을 때부터 너는 영혼으로서 영계에 존재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런데 왜 너는 마치 인생여정이 시작할 때 영계에 처음 온 것처럼 굴고 있는 거냐?”
“...”
민정은 말문이 막혔다. 사탄의 말이 틀림이 없었다. 신주연도 김수현도 모두 살아 있는 인간이면서 육신 외에 영혼이 따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네가 조민정의 영혼이 아니라 조민정의 육신에 종속된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그걸 알려주지 않았지?”
“천사님들이 나한테 모든 진실을 알려 주지 않은 건 맞아. 하지만 어떻게 모든 것을 알려주겠어. 그건 불가능해.”
민정이 항변했다. 그것이 민정이 천사들이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납득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탄에게 넘어간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는 없었다.
“히히, 천사놈들을 의심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꼴이 가상하구나. 하지만 내 말이 끝난 후에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지금부터 진짜 네가 알아야 할 너의 인생을 알려 주마.”
경박하게 웃는 악화는 창백한 손을 펼쳐 방을 향했다.
“여기가 어디인지 아느냐? 여기가 바로 네 몰래 천사들이 지키던 비밀의 장소란다. 그리고 저기에 있는 저것이 바로 네게는 전혀 알려 주지 않으면서 놈들이 그토록 열심히 지키던 것이란다.”
악화는 신이 나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녀는 천사에게만 허락되었던 조민정의 인생여정을 본인이 진행하는 상황을 매우 즐기고 있었다.
민정의 눈이 저절로 떠지며 고개가 돌아갔다. 그건 사탄의 힘에 의한 불가항력이었지만, 이제는 민정의 호기심도 크게 피어났다. 도대체 무엇일까, 앞으로 자신이 알게 될 진실이 무엇일까. 그녀가 먹게 될 금지된 사과가 무엇일까.
사탄이 가리킨 곳에는, 힘없이 앉아 있는 한 꼬마가 있었다. 머리가 몸에 비해 엄청나게 크고 피부가 흉측하며 하체는 흐릿한 꼬마였고, 이 꼬마는 민정이 본 적 있는 녀석이었다. 이제는 옛날 일처럼 느껴지는, 병원 탈출 미션에서 죽고 부활했을 때 갑자기 환상처럼 보았던 못생긴 꼬마였다.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다시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천사들이 이 꼬마를 지키고 있었다고? 왜 이런 볼품 없는 꼬마를 지키고 있는 걸까. 왜 이 꼬마를 자기에게서 꽁꽁 숨겼을까. 민정은 본능적으로 뭔가 크게 잘못됐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