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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틀리제 Sep 20. 2024

사연녀와 그녀의 수호천사들

9화 : 민정의 병원 탈출 미

민정이 전의를 불태우는 동안 천사들은 제1본부에 모여 회의를 진행했다. 의자에 앉은 그들의 옆에 홀로그램의 화면이 실시간으로 민정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열심히 하려고 하네요. 민정이도.”


고함을 지르는 민정을 보며 로운이 말했다.


“난 어쩌면 이번 여정이 엄청 중요할 수도 있다고 봐요. 이걸 끝낸 민정이는 지금까지와는 많이 다른 사람이 되겠죠.”


나래가 진지하게 말했다. 해일도 동의했다.


“사실은 그래서 고민을 좀 많이 했습니다. 이번 여정은 제가 적당히 악령들 소굴을 본따서 게임처럼 만든 공간에 민정이를 집어넣은 것이고, 민정이의 과거나 현재, 미래와는 별로 연관이 없죠.

민정이의 정신적 성숙을 이끌어낼 수 있지만 꼭 해야만 하는 여정은 아니고, 어쩌면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처음으로 민정이에게 진짜 시련을 주는 여정이 될 거예요. 앞으로 그런 여정이 더 있기야 하겠지만, 이번에 민정이가 너무 고생하면, 여기서 그동안 우리가 쌓은 신뢰를 깎을 수도 있겠죠. 그리고 민정이가 어려운 일들을 해내는 만큼 합당한 대가를 돌려줘야 하니 그것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야 하고요.”


“'대가'로는 민정이가 궁금해하는 것들을 알려줘야 할 수도 있을 거고. 그건 우리가 해결해야 할 또 다른 문제가 되겠지.”


나래가 거들었다.


“그럼에도 제가 이번 여정을 선택한 이유는 그만큼 얻을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민정이가 알아야 할 것들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면, 이번에는 의지와 신념을 다지고 행동을 변화시킬 시간입니다. 리스크를 감수하고 투자할 가치가 있는 좋은 사업이고... 민정이는 아마도 잘 해낼 거라고 예상합니다. 그쪽보다는 우리쪽이 더 위험하죠.”


해일의 마지막 말에 천사들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루미가 해일에게 말했다.


“본부에서 악화가 움직인 것 같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아마 조만간 들이닥칠 것 같아요. 저희는 대비를 해 놓았습니다.”


“악화의 성격상 이번엔 분명 쳐들어오긴 할 겁니다. 그것도 본인 직속 팀이나 피보라 팀이나 동원할 수 있는 사탄들을 다 동원해서요.

그게 아예 완전히 이기려고 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협잡질을 하는 것인지는, 확률이 대충 반반인 것 같아요. 기다려 보면 알겠죠.”


해일이 대답했다.


“이번 여정엔 민정이가 해일 천사님이 만든 공간 안에 있으니, 민정이는 지킬 필요가 없고 ‘보석’만 지키면 되잖아요? 여기서 우리가 전력 분산 없이 ‘보석’을 지키고 있는데 사탄 놈들이 무리하게 덤빌까요? 해일 천사님도 계신데.”


로운이 그들이 지키고 선 성의 문을 가리키며 질문했다. 그 대답은 나래가 대신했다.


“악화라면 그럴 수도 있어. 그놈은 옛날부터 지가 해일이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덤볐거든.”


“옛날에는 제가 많이 졌죠.”


“그랬긴 하지. 하지만 지금은?”


“지금요? 뭐, 제가 악화한테 질 일은, 저도 일개 천사에 불과하니 ‘절대’라는 건 없지만, 거의 없다고 봐야죠.”


황금색 군복을 입은 해일이 손에 든 총을 만지작거렸다. 






“...”


“네놈의 자만이 지금의 결과를 만든 것이다.”


불쾌하게 만족함 가득한 목소리가 루미의 귀에 들렸다. 악화의 손톱이 해일의 어깨를 붙잡았다. 악화의 뻥 뚫린 하체에서 나온 크고 날카로운 꼬리가 해일의 배를 찔러 꿰뚫었다.


“꺄악!”


그 광경을 본 로운이 당황하여 비명을 질렀다. 나래는 방패를 두껍게 만들었다. 루미는 이를 악물었다.









미션을 시작한 민정은 어둠 속을 조금씩 더듬었다. 강력한 의지를 불태워서 달려나갈 듯한 마음이었지만, 거의 5분 넘게 가만히 있어도 눈이 전혀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더듬거리던 그녀의 손에 뭔가 닿았다. 그녀는 그게 탁자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금방 그 위에에 놓여 있던 뭔가를 손에 넣었다. 한 손에 겨우 들어올 만한 크기의 물건이었다.


“이건 뭐지.”


약간 불안함을 가지고 이리 저리 만져보니 뭔가 기계 같았다. 딸깍 하는 소리가 나더니 환한 빛이 비쳤다.


“악, 눈부셔.”


손전등을 발견한 사실에 민정은 눈이 부셔도 기뻐했다. 그녀는 손전등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민정의 육신이 입원해 있던 병실과 똑같은 구조였는데 사람은 아무도 없이, 침대와 그들이 쓰던 테이블만 덩그러니 있었다.


“와, 이걸로 보고 다녀라는 거야? 해일 천사님 양심 잃어버리셨네.”


손전등의 빛이 약해서 어둠을 충분히 몰아내지 못했다. 손전등치고는 매우 밝은 편이었지만 아주 깜깜한 어둠을 헤치기엔 많이 모자랐다. 딱 손전등이 비추는 곳만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민정은 손전등을 여기저기 비추며 방 안을 살폈다. 병실 안의 전등의 불을 키려고 스위치를 눌렀으나 당연히 켜지지 않았다. 넓지 않은 병실을 돌아다니는 그녀의 발소리만 또렷하게 울렸고, 다른 정보를 찾기는 힘들었다.


“아이씨, 분위기 꽤 무섭다.”


민정이 혼잣말을 했다. 공포를 잊기 위한 본능적인 중얼거림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온몸의 감각이 곤두서 있었다.


“이제 나가 볼까?”


이 병실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생각한 민정은 나가서 길을 찾기로 했다.


민정은 병실 문을 열었다. 드르륵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복도는 병실과 똑같이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민정은 긴장하며 손전등을 비췄다. 깜깜한 어둠 속에 정말 한 치 앞만 비쳐졌다. 빛조차 어둠에 삼켜지는 것 같았다.


“야 이거 성능 왜 이러냐...”


민정이 아주 조용히 투덜거렸다. 복도의 길은 왼쪽도 있고 오른쪽도 있었다. 병원 밖으로 나가야 하는 미션인데 나가는 길을 알지 못했다.


“아씨, 어디로 가야 되는 거야.”


일단은 어느 쪽으로든 갈 수밖에 없었다. 민정은 왼쪽 길을 선택해서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매우 천천히, 한 걸음씩, 떨리는 발을 끌고 걸어갔다. 바로 앞에 위험한 뭔가가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어서 민정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쨌든 여기는 천사들이 만든 곳이니까 정말로 나를 위험에 빠뜨릴 리는 없겠지. 뭔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너무 어두워서 착각하는 것일 뿐이야... 그래. 설마 나를 죽이기야 하겠어?”


민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극심한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점점 평정심을 잃어갔다. 손이 아플 정도로 손전등을 꽉 움켜쥐고 계속 걸어가던 민정은 어느 병실을 발견하고는 멈춰 섰다.


“음...”


민정은 병실의 투명한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서 뭔가 빛나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빛을 쳐다봤다.


‘당신은 미션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아이템들을 획득하셔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해일이 그렇게 말했었다. 그럼 저건 아마 필요한 아이템일 것이었다. 그럼 민정은 저 안에 들어가서 저걸 가져와야 하겠지.


“설마 함정은 아니겠지?”


‘만약 미션 도중에 사망하실 경우에는 지금의 장소에서 부활하게 됩니다.’


해일은 가다가 죽으면 처음 장소에서 부활한다고 했다. 어쩌면 계속 부활하니까 계속 죽일수도...? 그런 생각이 들자 병실에 들어가기가 좀 무섭긴 했지만, 들어가지 않을 순 없었다.


일단은 저 빛나는 무언가를 확인해 보면 알 것이었다. 민정은 조심스레 병실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끼긱거리는 소리에 놀랐다. 자기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본 후,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민정은 손전등으로 병실 안을 여기저기 비춰 보았다. 미션을 시작했던 병실과 똑같았다. 간단히 병실을 둘러본 민정은 테이블 위에 빛나는 것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 비춰 보니 그것은 쪽지였다.


쪽지를 집어드니 빛이 사그라들었다. 민정은 손전등으로 쪽지를 비춰 보았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길을 찾는 것이다.-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역시 이것은 천사가 민정을 위해 마련해 놓은 힌트임이 분명했다. 민정은 쪽지의 의미를 생각했다.


“길을 찾으라는 것은 지도를 찾아라는 말 같은데. 병원의 어딘가에 지도가 있다는 말인가.”


민정은 그렇게 추측했다. 이 병실 어딘가에 지도가 있을 것 같아서 민정은 병실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조금은 적응했는지 움직이는 속도도 빨라졌다.


민정은 침대 밑과 바닥, 선반들까지 구석구석 뒤졌다. TV 밑의 서랍이나 냉장고 문을 열 때는 가슴을 졸였다. 그러나 병실 안에서 지도는 나오지 않았다.


“이 병실 말고 다른 병실에 있나...”


민정은 다른 병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작지만 성과를 얻었고 이제 구체적이고 희망적인 목표까지 생기자 두려움에 떨던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 생겼다. 그녀는 드르륵거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뭔가 모험을 하는 느낌이 들어서 약간 들뜨기 시작했다. 어둠을 헤치는 데에도 조금 익숙해졌다. 


“지도르을~ 찾아서어~”


혼잣말에도 가락이 실렸다.


“근처에 있겠지?”


민정은 천사들이 지도를 이 근처에 뒀을 거라 생각했다. 한 가지 아이템에 대한 단서를 줬으면 그 아이템을 금방 찾게 하는 것이 상식적인 순서니까.


“그럼 여기에 있을 확률이 높겠지?”


민정은 어느 병실 앞에 서서 말했다. 그녀가 처음 걸어왔던 왼쪽 복도 끝에 있는 병실이었다. 그녀는 긴장한 채로 문을 열고 바로 테이블을 주시했으나 아까 전의 병실과 달리 빛나는 무엇도 없었다.


“지도는 쪽지처럼 빛나지 않는 건가, 아니면 여기에 지도가 없는 건가?”


어느 쪽이든 간에 병실을 구석구석 찾아보고 넘어가야 했다. 민정은 아까 전보다는 조금 덜 두려운 마음으로 조금 더 능숙하게 병실을 뒤졌다. 그리고 그 결과 어느 침대의 밑에서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이거인 것 같은데?”


민정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종이에 손전등을 비춰 보니 과연 지도였다.


“엄청 구조가 간단하네.”


지도에는 병원의 전체 구조가 나와 있었다. 층이 고작 세 개밖에 없었고, 3층에는 네 개의 병실, 2층에는 세 개의 병실, 1층에는 두 개의 병실이 있었다. 병원의 출구는 당연히 1층에 있었고 복도의 오른쪽에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그리고 지도에는 민정의 현재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민정은 3층의 마지막 병실, 즉 304호에 있었다. 그럼 아까 쪽지를 주운 곳이 303호고, 미션을 시작해서 손전등을 주운 곳이 302호였을 것이다.


“좋아, 가 보자!”


민정은 드디어 나갈 곳을 확인했다는 희망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도에 따르면 일단 지금껏 왔던 반대편으로 쭉 가서 2층으로 내려가야 했다.

이미 지나왔던 길을 가니 처음 가는 것보다 훨씬 걸음이 빨랐다. 순식간에 그녀는 303호와  302호를 지나 301호 앞에 멈췄다. 301호 옆에는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민정은 301호 앞에 서서 고민했다. 여길 들어가야 할지, 지나쳐야 할지. 당장에 필요한 아이템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도 아이템은 필요할 터였다. 아마도 저 병실을 한 번 뒤져보고 가는 게 좋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러기는 귀찮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무서웠다. 가능하면 병실을 뒤적거리는 건 최소한도로 했으면 싶었다.


“일단 그냥 가 보고, 필요하다 싶으면 다시 올라오지 뭐.”


그녀는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신중하게 살폈다. 손전등으로 최대한 비춰 보며 계단으로 접근했다.


뚜벅거리는 그녀의 발소리가 거의 안 들릴 정도로 살금살금,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계단은 복도나 병실보다도 느낌이 좀 달랐다. 으스스하거나 뭔가 있을 것 같은 불안감이 더 많이 드는 곳이 계단이었다.


“아이씨...”


민정은 소리도 크게 못 내고 성질을 냈다. 점점 더 심해지는 불안감에 더 이상 내려가기가 싫을 정도로 무서워진 그녀는 반쯤 내려오다가 멈춰섰다. 몸이 잘 안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아, 왜 이래. 빨리 가야지 민정아.”


잠시 멈춰 있던 민정이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그르릉.”


앞에서 그르렁거리는 위험한 소리가 났다. 민정은 숨도 멈춘 채로 얼어붙었다.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손전등을 앞에 비췄다. 거기에는 개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을 개라고 표현한다면 세상 모든 개들에게 미안할 만큼 끔찍하게 생긴 네발짐승이었다. 기본 체형은 불도그와 비슷하게 키가 작고 다리가 짧은 편이면서 퉁퉁했다. 그러나 그 외모는 눈은 잔뜩 부어올라 크게 튀어나왔고 맹수의 송곳니같은 흉측한 이빨이 크게 나 있었다. 눈은 쫙 찢어져서 몹시 사나웠고 얼굴 곳곳에서 노란 고름이 나와서 번들거렸다. 민정은 손전등을 비춘 찰나의 순간 그것과 눈이 마주쳤고, 그것이 짖기 시작하자 깜짝 놀라서 위로 도망쳤다.


“으아아악!!”


계단을 헐레벌떡 뛰어 올라간 민정은 뒤를 돌아 손전등을 비추며 그것이 쫓아오는지 확인했다. 그것이 짖어대는 소리만 멀리서 들렸기에 그녀는 그것이 쫓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놀라서 혼이 나간 것 같았다.


“헉, 허억...”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너무 놀라서 숨을 헐떡거렸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민정은 다리에 힘이 풀려서 복도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미션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벽을 만난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네.”


단순히 어둠을 탐험하는 거라면 쉽고 위험도 없었다. 단지 조금 무서울 뿐. 그러나 저런 괴물 같은 것이 길을 막고 있다면 차원이 달라진다.

저 개 괴물은 아마 악령인 것 같았다. 처음 영혼의 세계에서 깨어났을 때 마주쳤던 그것들처럼 놈은 분명히 자기에게 달려들어 이빨을 드러낼 것이었다. 지금은 대신해 싸워줄 천사도 없다. 민정은 조금씩 차올랐던 자신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머리는 본능적으로 좌절하지 않고 해결 방법을 찾고 있었다.


계단에 있는 저것은 민정이 지나가지 못하게 길을 막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지나갈 수 있게 하는 뭔가를 얻어야 할 것이다.


그건 아까 지나쳤던 저 3층 마지막 병실에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있어야 했다.


민정은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 후 병실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병실 문을 열 때는 두려움에 또다시 망설였고, 문을 여는 데는 시간이 또 걸렸다.


민정은 병실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역시 그녀의 생각이 맞았다. 중앙의 테이블에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다. 민정은 얼른 테이블로 가서 빛나는 것을 주워들었다. 그것은 쪽지였다.


-급할 때는 임시방편으로 쓸 것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러다가 여건이 생기면 근원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단을 얻을 수 있다.


민정은 천천히 그 쪽지에 담긴 말을 이해했다. 일단 저 개를 닮은 짐승을 막을 수 있는 뭔가를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은 임시방편이라는 뜻이었다.


“그럼 여기를 찾아봐야겠군.”


민정은 다시 혼잣말이 나올 정도로 정신이 회복이 되었다. 그녀는 곧바로 병실을 뒤졌다. 그리고 TV 밑의 선반에서 뭔가를 발견하고는 할 말을 잃었다.


“...”


한 손에 착 감기는 뼈다귀였다. 장난감처럼 던지기 참 좋아 보였다. 이걸로 강아지...를 유인하라는 것 같았다. 장난을 치는 건가 싶으면서도 두려움이 꽤 사그러드는 기분이었다. 그런 점이 천사들의 배려인 것 같아서 화가 나면서도 고마웠다.


“좋아. 해 보자.”


민정은 마음을 굳게 먹고 병실을 나섰다. 계단으로 들어서자 다시금 그것의 강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 존재감이 아주 강해져서 걸음을 옮기기 두려워졌을 때, 민정은 한 걸음 더 내딛으면 또다시 그것이 달려들 것을 직감했다. 심호흡을 한 후 민정은 한 걸음 더 내딛었고, 그르렁거리는 그것의 끔찍한 눈동자가 뼈다귀를 향한 것을 확인한 후 있는 힘껏 뒤돌아서 던졌다.


그것은 뼈다귀를 쫓아 민정을 지나쳐서 왈왈거리며 달려가 버렸다. 민정은 2층으로 냅다 달렸고 계단을 다 내려와서 숨을 골랐다.


심장이 막 뛰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하나의 고비를 더 넘긴 것을 확신했다. 두려운 가운데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일단 해냈다.”


그녀는 그렇게 2층 복도에서 작은 승리를 만끽했다.





민정은 2층으로 내려온 계단에서 또 한번 고민을 했다. 여기서 1층으로 곧바로 내려갈 것인지, 아니면 2층을 둘러보고 필요한 아이템들을 얻을 것인지였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이라도 1층의 정문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지금 1층으로 내려가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당장에 그녀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 하나도 없었고, 또 아까 전 쪽지에서 문제의 근원을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의 존재를 암시했었다.


-급할 때는 임시방편으로 할 것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러다가 여건이 생기면 근원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단을 얻을 수 있다.


쪽지가 말하는 ‘근원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단’은 아마 2층에 있을 것이었다. 그걸 찾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 민정은 가장 가까운 201호에 다가섰다.

병실 안에서는 계단에서 느꼈던 ‘두려운 존재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민정은 큰 두려움 없이 병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역시 작은 빛이 나는 뭔가가 테이블에 올려져 있었다.


-세상에 내던져진 누구라도 두렵고 피하고 싶은 일들이 있다. 피할 수 없거나 피하는 게 지혜롭지 않을 때에는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고, 싸워 이길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쥐고 휘둘러야 한다.


“어... 이건... 무기라도 준다는 말인가.”


쥐고 휘두른다는 표현 때문에 칼이 연상되었고 왠지 비유가 아닌 것 같았다. 손전등을 이리 저리 비춰 보니 과연 무언가가 어느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민정은 그 물건을 집어들었다.


“엥? 이건...”


민정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나무로 된 야구 방망이었다. 옆에는 흰색 장갑 한 쌍이 있었다.


“이걸로 걔들을 때려 잡으라고?”


민정은 손전등을 잠시 내려놓고 장갑을 끼고, 두 손으로 방망이를 잡고 여기저기 살펴봤다. 휘두르기에 편한지 시험해 보고 손에 익도록 했다. 그러면서도 살짝 어이가 없었다.


“진짜 이걸로 쟤들을 때려잡으라는 거야?”


민정은 처음엔 웃기던 사실이 생각해 보니 심각해졌다. 정말로 이 방망이를 휘둘러서 뭔가를 때리고 무찔러야 한다는 말인가? 내가 야구 방망이를 잡아본 적은 있었나?

민정은 스크린야구에서 재미 삼아 타격을 해 본 적조차 없었다. 야구 방망이 자체를 어디선가 보기만 했지 실제로 쥐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하물며 정말로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누군가를 때린 기억도 없었다.


이것으로 악령을 때려잡는다는, 와 닿지 않는 가까운 미래를 상상하며 민정은 침대에 앉아서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삐용삐용삐용삐용-


경박한 사이렌 소리가 갑자기 병원을 가득 채웠다. 깜짝 놀란 민정은 황급히 방망이를 꽉 쥐고 구석으로 이동한 후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췄다. 그리고 병실 입구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사이렌 소리는 금세 멎었다. 그러나 민정은 그걸 신경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 줄기 손전등 빛이 비추는 201호 병실 입구에, 두 다리로 서 있는 끔찍한 무언가가 있었다.

민정은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다.


“흡...”


쩔그럭-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져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일반적으로는 상당히 무섭고 억압하는 느낌을 주는 소리일 것이었지만, 민정에게는 지금 저 소리가 희망이었다.


끔찍한 몰골의 악령이 쇠사슬에 휘감겨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쇠사슬이 그의 팔에 잔뜩 감겨 있었기에 악령이 움직이더라도 절그럭거리는 소리만 났다. 민정은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저 악령은 그녀를 밖으로 못 나가게 막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려면 저 악령을 때려잡아야 한다. 그녀가 맞서 싸워야 할 것이었다.

만약 악령이 묶여 있지 않았다면 두려움에 악령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녀를 그 정도의 위험에 빠뜨리지 않았고, 그녀는 침착하게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민정은 방망이를 꽉 움켜쥐고 악령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까 전의 개를 닮은 악령보다도 더 커다란 압박감이 들었다. 이가 저절로 덜덜 떨리기에 꽉 깨물었다.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선 민정은 일단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저기요.”


끼에엑-


악령은 민정의 목소리에 기괴한 울음소리로 답했다. 얼굴을 한층 더 일그러뜨리는 악령의 모습에 민정은 대화가 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민정은 왼손에는 손전등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팔을 쭉 뻗어서 거리를 가늠했다. 악령은 가까이 다가간 민정에게 격렬하게 반응했다. 기괴한 울음소리에 쇠사슬이 심하게 절그럭거려 무서웠지만, 민정은 꾹 참고 심호흡을 한 후 악령의 이마를 정확히 조준했다.

그리고 앞으로 크게 내딛으면서 체중을 실어 휘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


퍼억, 하는 묵직한 타격음이 들렸다. 민정은 극도로 날카로워진 감각으로 악령에게 집중했다. 놈은 고통에 잠겨 비틀거리고 있었다.

이어서 그 살벌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게 민정의 감각을 지배하는 것은, 방망이를 통해 손에 진하게 남은 타격감이었다. 민정은 손끝에서 올라오는 뭔가 표현하기 어려운 간지러운 쾌감에 전율했다.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짜릿한 손맛이었다.


그것을 깨닫자 그녀의 내면에서 뭔가 솟구쳐 올랐다. 그녀는 이내 무자비하게 방망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네가!! 시끄럽게!! 겁준다고!! 내가!! 겁먹을 것!! 같냐!!”


민정은 눈 감는 일 없이, 두 눈을 부릅뜨고 악령을 후려갈겼다. 퍽, 퍽, 타격음이 연속될수록 악령의 끼에엑거렸던 소리는 깨갱거리는 소리로 바뀌어 갔다. 악령은 팔을 들어 머리를 가리려고 했지만 팔이 너무 짧아 가려지지 않았다. 


“누구든!! 내 길을!! 막으면!! 이렇게!! 되버리는거야!!”


악령의 움직임도 목소리도 멎어갔다. 이내 악령은 바닥에 쓰러져서 꿈틀거렸다. 민정은 그를 때리기 위해 몸을 숙여야 했다.


“죽어!! 죽어!! 죽어!!”


민정의 악에 찬 외침대로 악령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그는 힘없이 축 늘어지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민정은 애먼 바닥을 한 번 내려친 후에야 방망이질을 멈췄다.


허억, 허억.

민정은 가쁜 숨을 내쉬다가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이야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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