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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틀리제 Sep 18. 2024

사연녀와 그녀의 수호천사들

8화 : 민정의 두 번째 여정(2)

풍경이 바뀌었는데 장소는 똑같았다. 민정은 거실에서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아, 네. 네... 어쩔 수 없죠. 아니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통화를 마친 민정은 작은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을 계속 들여다보았다.


“저건 언제 있었던 일이지? 대학생 때인 건 분명한데.”


이번엔 민정이 풍경 속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했다. 해일이 민정에게 정답을 가르쳐 줬다.


“올해 2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민정씨는 아르바이트하던 곳에서 해고됐었죠.”


“아, 그때요?”


민정은 기억을 더듬었다. 해일이 설명을 해 줘도 금방 기억나지 않아서 오래 생각해야 했다.


“이제 기억이 나네요. 제가 뷔페 알바를 하다가 짤렸죠. 그때 여기가 시급이 조금 세가지고 방학때에 바짝 좀 벌려고 했었는데. 근데 가게가 망했으니 짤렸다고 하긴 좀 애매한데.”


“그래요?”


민정이 기억해내자 해일이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때는 별로 걱정이 안 되셨나 봐요? 당장 수입이 필요한 때에 수입이 끊기게 생겼는데.”


“아, 그런가? 내가 그랬나요? 그게 별로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었는데.”


“왜요? 빨리 알바를 구하지 못하면 휴대폰이 끊기고, 점심을 못 먹고, 학교까지 걸어가야 하는데요?”


해일은 민정이 무언가를 깨닫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알바를 구하는 거는 익숙해졌으니까요. 그때도 사장님이 사업은 정리하셨지만 당장 문을 닫는 건 아니니까, 수입이 끊기기 전까지 시간이 좀 있었거든요. 그러면 충분히 다른 알바를 구할 수 있고.

또 그리고 사실 새로 알바를 구하는 건 귀찮긴 한데 어쩌면 예전보다 더 좋은 알바를 구할 수도 있거든요. 뷔페에서 일하는 건 꽤 힘들었으니까 이번엔 좀 몸이 편한 알바를 구해보자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렇군요. 하지만 이건 민정씨가 늘 걱정했던 것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지 않은가요? 또 알바라고 해도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네요. 고등학생이었을 때는 알바 구하는 요령도 없고 해본 적도 별로 없고. 고등학생이라고 잘 안 써주려고 하고. 알바가 혹시 짤리거나 너무 이직을 하고 싶게 되면 새로 구하는 것에 대한 걱정도 하고 그랬어요.

근데 막상 해 보니까 알바도 구하는 요령이 생기더라고요. 알바 면접을 보면 사장님들이 나보고 간절함이 보인다고 그러고 좋아해가지고 생각보다 쉽게 구했어요.”


“그렇군요.”


해일의 말을 끝으로 풍경이 바뀌었다. 다시 민정의 빌라인 제2본부였다.


“이렇게 걱정에 관련된 민정씨의 두 가지 과거를 봤는데요, 어떤 것 같나요? 민정씨는 걱정이 많은 것은 본성인지, 아니면 환경 때문인지, 어떻게 생각하나요?”


해일은 대화를 정리하며 민정에게 물었다.


“음...”


민정은 잠깐 생각한 후 말했다. 이번에는 고민이 길지 않았다.


“아무래도 본성이 그렇다고 보긴 힘들 것 같아요. 집에 돈이 없어서 그런게 아닌가... 그러니까 입시 때는 걱정을 많이 했지만, 알바를 구할 때는 걱정을 별로 안 한 거겠죠.”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제 생각이 맞는 것 같으세요?”


민정은 해일의 생각을 물었다.


“저는 답을 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저는 보여드릴 뿐, 느끼고 깨닫는 것은 오로지 민정씨의 몫이니까요.”


해일이 말했다. 그러나 그는 민정의 생각을 부정하지 않는 말과 온화한 분위기를 통해 그녀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느낌을 풍겼고, 민정에게 성공적으로 전해졌다. 거기에 해일은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해 보죠. 민정씨와 비슷하게 어떤 알바생의 실제 있었던 일을 가져왔습니다.”


풍경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장소로, 어떤 편의점이었다. 무슨 내용인가 하고 민정은 유심히 지켜봤다. 한가로운 상황이었는지, 손님은 아무도 없었고 알바생 혼자서 물건을 진열하고 있었다.

손님이 적을수록 알바는 편한 법이었다. 민정은 홀로 물건을 진열하는 알바생의 모습만 봐도 괜히 자기 마음까지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여유롭게 알바생을 지켜봤다. 여유는 오래 가지 않았다. 알바생은 병에 든 두유를 진열하고 있었는데, 진열하다가 실수로 병 하나를 떨어뜨렸다.

불쾌한 소리와 함께 병은 산산조각났고, 안에 있던 두유가 바닥을 온통 어질러 놓았다.


“저런, 어떡해.”


은근히 할 일이 참 많은 편의점 알바의 희망은 모든 일을 끝내고 조금이라도 더 계산대에 앉아서 자기 할 일을 하는 시간을 갖는 것인데, 저렇게 자기가 일을 만들어버리면 그 시간이 줄어든다.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진 민정은 괜스레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저러면 이제 빨리 유리 조각을 치우고 걸레로 닦아야죠.”


그러나 그 알바생은 그녀의 말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깨진 병 앞에서 손발을 떨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아니, 이 사람 왜 울어요...?”


민정은 당황해서 해일을 쳐다봤다.


“이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어서 마음을 한 번 공유해 보시겠어요?”


해일이 그녀에게 제안했다.


“그래도 되나요?”


“네.”


민정은 알바생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의 감정과 생각이 민정에게 흘러들어왔다.


“굉장한 자책감인데요.”


그의 감정을 공유한 민정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실수를 자주 했고 많이 혼나기도 했네요. 사장이 알게 되면 또 혼날 거라는 공포심에다가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 그것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하고 있어요.

근데 이거 그냥 자기가 계산하면 되는데... 사장이 CCTV를 보지 않는 한 걸릴 일은 없거든요. 걸려도 뭐 자기가 계산했으면 어떡하겠어요.”


민정이 안타까워하며 말을 이었다.


“이건 객관적으로 별일이 아닌 건데 이분은 지금 그걸 별일이 아닌 걸로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계시네요. 

하... 이분의 마음은 전달이 되는데, 이분 입장에서는 그렇게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인데요. 자기 입장에서는 어쩔 수가 없는?”


민정은 자기가 느낀 그의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안타까워요. 이 분은 행동이 굼뜨고 실수가 많아서 항상 혼나면서 살았네요. 그래서 늘 움츠러들고 작은 것에도 걱정하는 성격이 되어 버렸어요. 해일 천사님은 불필요하게 걱정이 많은 사람을 저한테 보여 주셨군요.”


“잘 보셨습니다. 그럼 반대의 경우도 한 번 보죠. 이번에는 민정씨도 잘 아는 굉장히 유명하신 분입니다.”


해일의 말에 풍경이 바뀌었다. 아까 전보다 훨씬 강렬한 풍경이었다.


시야부터 좁은 편의점과는 비교가 안 되게 넓었다. 멀리까지 보이는 드넓은 바다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한 남자가 온갖 물건들이 널브러진 해변가에서 해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바다는 고요하게 파도쳤고 남자의 눈빛에는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민정은 온통 붉은 바닷가가 풍기는 압도적인 분위기에 눌렸다

풍경이 좁은 제2본부와 달리 넓게 트였으면서 붉게 물들어 감각적이고 몽환적이면서도, 바닷가에 널브러진 온갖 물건들이나 남자의 눈빛은 지독하게도 현실적이며 감정적이었다. 한참 바라보던 민정은 남자의 옷차림과 주변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보고 남자의 정체를 유추했고, 해일에게 물었다.


“저분... 이순신 장군님 맞죠?”


사극 같은 곳에서 나오는 조선 시대 장군복 비슷한 옷에 검을 찬 모습에 주변에 널브러진 목재들은 한때 군함이었을 것 같은 점. 거기에 나라를 잃은 것 같은 무거운 눈빛. 분명히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중에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던 적이 있었다는 걸 민정은 기억했다.


“백의종군이 끝난 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복귀했을 때 고작 열두 채의 판옥선이 남은 상황입니다.”


해일의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민정은 해일이 설명을 통해 흐릿한 기억을 보충하고자 했다.


"당시 장군님 상황을 설명해 주시겠어요?"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한 이유 중에는 당시 수군을 이끌고 육군을 지원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묵살했기 때문도 있습니다. 그렇게 했던 이유는 수군 병력을 온전히 지켜 바다에서 왜군을 완전히 막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백의종군을 하고 돌아와 보니, 그렇게 충성심 높은 장군이 항명하면서까지 지켜낸 수군과 전함을 원균이 칠천량에서 전부 잃었습니다. 300척이 되었던 함대는 12척만 남았죠. 이순신 장군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말했던 선조는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냐면서 장군을 다시 전쟁터로 보냅니다. 거기에 장군의 백의종군 소식을 들은 장군의 어머니가 건강이 악화되어 돌아가시고요.”


민정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상황을 대략적으로는 알아도 구체적으로는 몰랐다. 해일의 설명을 들으니 눈앞에 노을이 가득한 바닷가가 피로 물든 것처럼 슬프게 보였다.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죠.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거나 도망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순신 장군은 결국 12척의 배로 300척이 넘는 왜군의 대함대를 명량에서 격파합니다. 역사에 남을 위대한 승리를 거두기까지의 그 과정은 피가 마르는 고통의 순간들이었을 텐데, 나라와 민족을 어깨에 짊어진 장군은 어떤 마음으로 전투를 준비하고 실행했을까요?”


답을 기다리는 물음은 아니었다. 민정으로 하여금 생각을 하고 답을 찾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 피로 물든 듯한 바다에 슬슬 어둠이 깔리고 바람이 차가워질 때까지 그가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민정은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그의 고뇌와 번민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어머니 때처럼 머리에 손을 올려서 그의 마음을 확인해야 할까.


“굳이 머리에 손을 올리지 않아도 당시 장군의 심경이 어느 정도 느껴질 겁니다.”


해일이 민정의 고민을 덜어 주었다. 보기만 해도 어두워가는 바닷가 풍경처럼 고통에 가득 찬 마음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대신 그녀는 해일에게 질문을 했다.


“이순신 장군님도 이 당시에 희망을 가지고 전쟁을 준비하셨을까요?”


“그럼요. 물론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희망찬 기쁨의 희망은 아니고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을 믿은 것이죠. 그 희박한 가능성만을 믿고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지만,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나라를 지킨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것이죠.”


해일이 대답했다. 


“이만 돌아가시죠.”


여운에 빠진 민정과 달리 여전히 담담한 어조의 해일이었다. 변함없이 선명하고 약간은 낭만적인 풍경에서 그들은 다시 제2본부로 돌아왔다.


“첫 번째 여정, 현재, ‘걱정이 많은’을 여기서 마무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해요.”


“본부에 돌아가서 잠시 쉬다가 다음 여정을 시작할게요. <현재>를 하나 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여정의 중간 결과에 대한 보고가 제1본부를 지키는 팀들에게도 전달되었다. 여정의 중간에 사탄들의 공격이 없었기 때문에 해일이 실시간으로 상황을 중계를 해 줄 수도 있었지만, 언제 사탄이 천사들 모르게 틈을 노리고 있을지 알 수 없기에 안전과 보안을 위해 천사들은 약간 초조한 마음으로 해일의 보고를 기다려야 했다.


“결론을 내리면 계획대로 진행이 되었다고 하네. 민정이는 <현재>의 많은 성격들 중에서 우리 예상 중에 하나였던 ‘걱정이 많은’을 선택했고, 우리가 준비했던 사람들 두 명을 보여 주어서 앞으로 삶에 강한 동기 부여를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고.”


루미가 보고서를 읽었다.


“진짜로 ‘걱정이 많은’을 선택한 거예요? 하하, 대단하네요, 해일 천사님은.”


“한 서른 개 정도 떠다니던 글자 중에 스무 개는 해일이 미리 준비한 거였고, 나머지 열 개는 멀리서 잘 안 보이게만 떠다녔으니까. 완전 하나님 손바닥 안이라고 해야겠네요. 민정이는.”


“후후, 그리고 첫 번째인 <과거> 때와는 달리 여정을 통해 준비한 그 삶을 보여 주기만 하고, 따로 깊은 대화로 이어가지는 않았대.”


“그래야죠. 거기서 더 대화를 한다면 우리 의도가 다 들킬 테니까요.”


“맞아. 민정이에게 육신의 삶으로 돌아가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면 민정이는 우리를 부담스러워하겠지.”


루미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다른 천사들도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애증의 존재인 어머니 김현숙에 대한 원망을 극복하고, 어려운 삶을 이겨내는 강한 정신력을 갖도록 유도하는 여정들이었다. 여정이 이쯤 진행되었다면, 이제는 민정이 그들의 의도를 눈치채는 것은 시간 문제이며, 이미 눈치챘을 가능성도 높다는 것을,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생각보다 진도가 빨라서 다행이지 뭐. 어차피 언젠가는 겪을 일이니까.”


침묵 속에 루미가 덧붙였다. 나래가 그녀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다음 여정은요? 두 번째 <현재>는?”


“곧바로 시작한다고 하시네. 이번에는 4번 계획으로 진행하신다고.”


“4번 계획이라면... 현재 좋은 진행 상황을 바탕으로, 민정이 주도적인 활동을 시키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계획이군요. 그게 해일이의 판단이란 말이죠.”


나래가 씁쓸하게 웃었다.


“악역을 맡아주는 건 고맙지만, 너무 위험한 미션이 아닌가 싶어요. 말이 주도적인 활동이지, 이거는 그냥 절벽에서 내던져 놓고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저는 솔직히 민정이가 이번 여정은 중도포기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해일 천사님이 생각하시는 바대로 민정이를 인도하기에는 최선의 과정이기도 하지. 그림을 크게 그리고 계시니까. 설령 포기를 하더라도 나름대로 얻는 것이 있을 테고 말이야.”


루미가 나래를 위로했다.


“저도 강하게 키우는 거는 좋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나는 조금 좋은 게,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민정이가 좀 느낄 수 있을 거거든요.”


로운은 또 다른 의미로 기대감을 드러냈다. 


"부디 잘 되어야 할텐데..."


나래는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천사들이 저마다 각각의 이유로 다음에 대한 기대를 품는 중에, 지옥의 어느 한 곳에서는 거기에 떨어진 영혼들의 비명소리를 배경 삼아 어두운 영들이 차갑고 섬뜩한 회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끄아아아아악!


“그래, 아직도 아가들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말이구나.”


삐걱거리는 흔들의자에 앉아서 정신없이 몸을 앞뒤로 흔드는 사탄이 말했다. 잔뜩이나 날카로운 봉두난발의 머리카락이 누더기처럼 낡은 상의 아래까지 내려오지만 정작 그 사탄은 다리가 없어서 의자에 앉아있다고 표현하기도 애매한 모습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쇠를 긁는 것 같이 소름끼쳤고 앙상하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뭔가를 후벼 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악화 님.”


잔뜩 긴장한 피보라는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잘못은 아니다. 그저 본부의 멍청이들이 무능할 뿐이다.”


무심한 듯 앞을 바라보며 악화가 대답하고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피보라는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조금 후에 악화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조금 더 지나면 너희도 내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


섬뜩한 경고를 내뱉으며 피보라를 가리키는 악화의 손은 새빨갛게 피로 물들어 있었고, 손톱에는 그녀가 가장 아끼는 부하, 악행의 살점과 머리카락이 끼어 있었다. 고통이 익숙한 악행은 비명소리도 내지 않고 인내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염력으로 인간 영혼의 팔과 다리와 머리를 터뜨리며 장난을 치는 악의로 인해 인간들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아아아아아악!!


“명심하겠습니다.”


“마음에 드는 놈들이 너무 많아. 특히 그놈... 이번에야말로 꼭 붙잡아서 이렇게 예뻐해 줄 거야.”


부하의 머리를 손톱으로 파내던 악화의 차가운 눈이 분노에 물들었다. 같은 사탄이면서도 섬뜩함을 느낀 피보라는, 곧 악화가 직접 출전해 그녀의 부하들과 함께 해일을 상대할 것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저 더러운 손톱이 누런 군복을 입고 잘난 척하는 그 얄미운 천사놈의 머리를 파내는 모습을 꼭 지켜볼 것임을 다짐했다.

그러나 피보라는 당장은 악화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눈치를 보는 상황이었다. 악화는 한참을 삐걱거리면서 몸만 앞뒤로 흔들었다.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인간들의 비명소리가 귀를 때렸다.

피보라는 피가 마르는 느낌으로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두 시간 후에는 정보가 안 온다고 해도 출발한다. 지하영계로 간다. 준비해.”


정신없이 앞뒤로 몸을 흔들면서 느릿하게 말하던 악화가 말하던 도중에 멈춰서더니 똑바로 분명하게 서늘하게 말했다. 피보라는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해일은 다시 제2본부에 민정을 앉히고 글자를 띄웠다. 그러나 미묘하게 민정의 가장 가까이에서 맴도는 글자들은 정해져 있었다.


“선택하시죠.”


민정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몇 가지 시나리오를 정해 놓고 그중에서 한 가지를 고르게 하는 작전이었다. 민정에게는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고 태연한 척을 했지만, 해일로서도 긴장을 하며 민정의 선택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긴장을 배신하듯 일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다음은 ‘예민한’으로 할게요.”


천장 구석에 처박혀서 거의 움직이지도 않던 글자가 눈에 들어온 민정이 말했다. 해일은 마음속으로 잔뜩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 침착하게 아주 약간만 눈썹을 찌푸리며 잠시 시간을 끌었다.


“음, 혹시 ‘예민한’을 선택한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하하. 음...”


민정은 살짝 웃고는 얘기를 꺼냈다.


“엄마랑 싸울 때면 엄마가 나보고 자주 그랬어요. 너는 너무 예민하다고. 여자애라서 그렇냐고.

생전에는 절대로 내가 예민한 게 아니고 엄마가 잘못한 것이고, 내가 짜증을 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걱정이 많은’을 하면서 배웠지만 난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을 걱정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나보다 힘든 상황에서도 걱정하지 않고 그랬잖아요?

그럼 알고 보면 나는 짜증을 내지 않을 수 있었는데 내가 예민해서 짜증을 낸 건 아니었을까? 

내가 예민하지 않다고 생각한 건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을까? 그걸 알고 싶어요.”


민정은 결연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결의를 꺾을 생각인 해일이 말했다.


“민정씨, 이번엔 조금은 편안하게 가도 되지 않을까요.”


그의 말에 민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무 힘든 부분들만 하려고 할 필요는 없어요. 민정씨가 편안했던 것들, 민정씨를 편안하게 해 주는 것들에 대해서도 충분히 여정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것만 중요한 여정이 아니고 편하고 재밌는 것도 중요해요. 나는 어떤 때 행복한지, 나는 무엇을 잘 하는지, 그런 것들도 알아야죠.”


민정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힘들고 어려운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내가 내 힘든 부분만 보려고 했었던 건 맞지. 하지만 내가 여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잖아.’


‘걱정이 많은’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난이라는 가장 힘든 부분을 마주해야 하는 여정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의 인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었다.

‘예민한’도 마찬가지였다. 가난만큼이나 그녀를 힘들게 했던, 엄마와 있었던 아픈 기억들이기 때문이었다. 그 기억들이 가랑비에 옷 젖듯 민정을 조금씩 벼랑으로 내몰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기억들에 맞설 수밖에 없는 거잖아. 내가 살아야 할지, 죽어야 할지 선택하려면 피할 수 없는 것들이잖아.’


해일의 말에 민정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금방 해일에게 설득되었다.


“민정씨가 여정에 대해 의욕이 있으시니까 어렵고 중요한 순간을 선택하려고 하시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소한 것들에 큰 깨달음을 얻기도 하죠. 이전까지 했던 여정들 모두 무겁고 깊이가 있었으니 이번엔 가볍고 산뜻한 여정을 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해일은 약간의 미소까지 보이면서 말을 마쳤다. 또 한번 많이 부드러워진 해일의 모습에 민정도 마음이 기울었다.


“좋아요. 그러면 다시 고를까요-”


그 순간에도 많은 글자들이 민정의 주위를 떠돌았다. 그리고 그중에서 민정의 시야에 금방 들어오면서 눈길을 끄는 한 단어가 있었다.


“겁이 많은.”


“‘겁이 많은’을 선택하신 이유는?”


“제가 공포영화를 좋아해서...재밌을 거 같아서요.”


“그러시군요. 과연 민정씨는 겁이 많으신지, 없으신지. 바로 확인해보죠.”


해일이 씩 웃었다. 걸려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지금껏 볼 수 없었던 그의 악동 같은 미소에 민정은 깜짝 놀란 것을 넘어 가슴이 철렁했다. 

민정은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다.


“어, 잠깐...”


뭐라고 말을 하려는 민정을 해일은 무시했다. 갑자기 정전이 된 것처럼 주변의 빛이 모두 사라졌다.


“꺄악! 뭐야!!”


민정은 비명을 질렀다. 완전히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빛이 전혀 없는 완벽한 어둠이었다.


“뭐에요, 뭐 하는 거에요? 지금?”


민정은 당황해서 더듬더듬 주변을 살폈다.


“어딨어요, 해일 천사님?”


그러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살짝 소름이 돋는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마치 다른 공간으로 순간이동을 한 것 같았다. 그때 해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부터 <병원 탈출 미션>을 시작하겠습니다.”


해일의 목소리는 동굴 안에 있는 것처럼 엄청나게 울려댔다. 그 목소리는 옆에서 말하는 것 같지가 않았고 다른 공간에서 스피커로 전달하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민정은 소리질렀다.


“당신은 의문의 사건으로 폐쇄된 병원으로 전이되었습니다. 당신은 지금부터 이 병원을 탈출해야 합니다. 모든 어둠과 장애물을 뚫고 병원 밖으로 나오면 저희를 만나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겁니다.”


울려대는 목소리의 해일이 건조하게 말했다. 민정은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신은 미션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아이템들을 획득하셔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미션 도중에 사망하실 경우에는 지금 계신 장소에서 부활하게 됩니다.”


“아니, 사망이라니요!”


해일은 민정의 외침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조금 후에 뵙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해일의 목소리가 끊겼다.


“아니, 정말!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냐고!”


폭발한 민정은 힘껏 고함을 질렀다. 그 후에도 계속 고래고래 악을 썼지만 해일의 대답은 없었다. 해일에게 화를 내던 민정은 힘이 빠져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이게 뭐냐고 진짜. ‘겁이 많은’을 한다고 진짜 담력 시험 같은 걸 하다니.”


그녀는 천사의 말대로 미션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깜깜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이 공간을 더듬더듬 찾아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천사들에 대한 분노와 어둠에 대한 공포, 그리고 조금의 설렘이 있었다.


“흥, 난 겁이 별로 없다고.”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해서 최대한 빨리 미션을 클리어해 천사들을 놀래켜 주리라 마음먹은 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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