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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틀리제 Sep 15. 2024

사연녀와 그녀의 수호천사들

7화 : 민정의 두 번째 여정(1)

“수고하셨습니다.”


한바탕 큰 전투를 치르고 난 후의 제2본부에 해일이 등장했다. 그는 아직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민정을 데리고 왔다. 천사들이 앉은 의자 옆에 침대 하나를 소환한 그는 그곳에 민정을 눕혔다.


“민정이 얘기부터 할까요, 아니면 방금 전의 전투 얘기부터?”


숨을 약간 헐떡거리며 루미가 말했다. 루미의 ‘기술’인 ‘선인의 하루’는 강력한 효과가 있었지만 영력의 소모가 극심했다. 그래도 전투가 끝났기 때문에 컨디션은 안정되어 갔다.

다른 천사들도 마찬가지로 평상시의 컨디션을 회복했다.


“어느 쪽이든 여유 있게 논의할 수 있지만, 일단 민정이 쪽부터 할까요. 민정이가 깨어나는 대로 첫 번째 여정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아직은 보시다시피 민정이의 인식과 감정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알 수 없고요. 그러니 그 부분은 첫 번째 여정이 끝난 후에야 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일단 우리의 예측 범위 내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해일이 진행된 상황에 대해 평가했다.


“민정이 본인은 자기가 정신력이 나약하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틀린 생각이죠. 처음에는 김현숙씨에 대해 알아보는 여정을 거부했지만 금방 설득했습니다. 민정이는 이끌어주기 편합니다.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말해도 합리적으로 받아들이고 현실을 직시하니까요.

아무튼 민정이는 김현숙씨에 대해서 ‘적절한’ 수준으로 알게 될 겁니다.”


“‘적절한’ 수준은 어떤 수준일까. 민정이는 자기가 이제 엄마에 대해서 다 알 거라고 생각하겠지.”


나래가 약간의 반론을 던졌다. 나래의 맥락을 이해한 해일이 반박했다.


“엄마가 아빠 돌아가신 후에 극도로 절망적인 가운데서도 자기를 위해 열심히 살았다는 사실을 아는 거죠. 그 정도가 적절합니다. 이미 본인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그런 자신의 짐작이 맞다는 걸 확인하게 되겠죠.”


“만약 민정이가 엄마에 대해 더 알게 된다면? 예를 들어 아빠의 죽음이 그녀에게 특별히 고통스러웠던 비밀을 알게 된다면?”


“그러면 절대 안 되죠. 하지만 민정이는 그 순간 엄마의 감정을 느낄 뿐입니다.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가 그 부분에 대해서 자기에게 숨겼다는 사실을 민정이가 알게 된다면 위험할 수도 있어. 그 부분도 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


둘 사이의 논쟁에 루미가 끼어들었다.


“제1본부의 ‘보석’을 사탄에게 빼앗기지 않는다면 그럴 일은 사실상 없지.”


“저도 최악의 경우를 늘 대비하지만, 애초에 ‘보석’을 빼앗긴다면 인생여정은 거의 실패라고 봐야 합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긴 하네요. 대비책을 세워야겠습니다.”


해일이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나래는 어느 정도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민정의 여정에 관한 결정권은 해일에게 있었지만, 세 천사들도 해일에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천사들끼리 회의를 한다면 거의 준비성이 철저한 해일이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고, 그에 대해 천사들이 의견을 보태는 형식으로만 진행되었다.

그리고 나래는 해일의 결정에 반론하는 경우가 가장 많은 천사였다. 사적으로 해일과 친해서 의견 제시에 부담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해일과 민정이 수평적 관계가 깨지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민정은 해일이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해일은 성공적으로 민정을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여정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성립하는 관계였다. 그러나 해일은 원래부터 인간의 자율성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편이었고, 나래는 해일의 실력을 알지만 그 부분에서 철학이 달랐다.

그러나 이어진 해일의 말에는 나래도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여정에서 상당한 시간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빨리 다음 여정으로 넘어갈 생각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천사님들과 소통하면서 신뢰를 쌓는 시간도 중요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첫 번째 여정이 끝난 후에는 우리 모두가 민정이랑 함께 간단한 식사를 할까 싶습니다. 민정이가 영혼으로도 누릴 것들은 누려야 하니까요.”


민정과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그녀를 오랫동안 경호해 온 천사들에게는 버킷 리스트 같은 일이었다. 나래는 기쁨에 찬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좋아. 그럼 밥을 먹으면서 첫 번째 여정 마무리를 하면 되겠네?”


“네. 제1본부를 봉인해 두면 여정을 마무리할 때 좋지 않으니 식사 장소는 제1본부로 해야 할 텐데, 다행히 일단 사탄을 물리쳤으니 제1본부를 위장해서 식당의 모습으로 바꿔도 위험하지는 않겠어요. 조금 있다가 그 처리를 부탁드릴게요.”


“물론이야. 어떤 느낌으로 꾸미려면 좋으려나? 인스타 맛집 감성으로 만들면 될까?”


“감성보다는 완전 고급 느낌으로 가면서 육계에서는 볼 수 없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살릴 수 있게 하죠. 조금 있다가 제가 팀장님이랑 같이 잘 꾸며 볼게요.”


로운 천사도 신이 나서 의견을 보탰다.


“민정이 마음에 들게 잘 꾸며 주세요. 최대한 김현숙씨에 대해서 좋은 기억으로 남기고 여정을 마무리하는 게 좋으니까, 분위기를 가장 좋게. 아름답게, 미화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럼 장소 준비는 두 분 천사님께서 해 주시고, 요리랑 서비스 준비를 나래 선배님께서 해 주시면 되겠네요.”


해일이 세 천사에게 당부했다. 천사들은 맡겨두라며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하자. 그럼 민정이 건에 대한 보고는 끝났어? 그럼 다음은 이번 전투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팀장님?”


나래가 이야기의 방향을 돌렸다.


“응, 일단 뭐, 승패를 따지자면 이겼어요. 별로 큰 의미는 없지만요.”


루미가 말했다. 그녀는 전투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적들은 피보라 휘하 2명의 사탄과 약 250명 정도 되는 중하급 악령이었어요. 피보라 팀 외에 다른 사탄이 없었던 것이 결정적이었죠. 우리는 계획대로 저는 피보라를 상대하고, 나래가 피철철과 피칠갑을 상대로 방어하며 시간을 끌었고, 로운이는 악령들을 처리한 후에 합류했어요. 그 때부터 방어하는 입장이었기에 굳이 기술을 쓰지 않아도 놈들을 이길 수 있었지만, 최대한 빨리 놈들을 쫓아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선인의 하루’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사탄들을 물리쳤어요. ‘기술’을 사용한 보람 있게, 일방적인 승리였습니다.”


“특별히 놈들이 전력을 강화하진 않았다는 말이군요. 좋습니다. 그리고 뭐 다른 특별한 일은 없었나요?”


“네, 다들 하던 대로 잘 해 줬어요. 특히 로운이의 ‘기술’도 훨씬 기술다워졌고요.”


“아직 멀었죠. 제 ‘숲’은 악령에게는 잘 통해도, 아직 사탄한테 큰 효과를 줄 만한 기술은 아니니까요.”


로운이 약간 풀이 죽어서 말했다. 해일이 그녀를 위로한 후에 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마 로운 천사님은 기술 사용 면에서는 조만간 크게 성장하실 겁니다. 아니더라도 충분히 역할을 잘 해 주고 계시고요.

음, 사실은 방금 본부에서 피보라 팀에 지원을 나온 사탄의 명단을 알려줬습니다.”


“오, 본부에서 다행히 정보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군요. 누구죠?”


“사탄 악화(惡花)가 피보라에게 합류하는 것은 확인되었답니다. 악화 아래에서 주로 활동하는 악행(惡行)과 악의(惡意)까지 합류했는지는 확인되진 않았지만, 아마 같이 움직이겠죠.

참고로 악행과 악의는 놈의 오른팔, 왼팔 같은 부하입니다. 악행은 움직임이 적당히 빠른데 힘이 강하고 몸이 단단해서 직접 부딪혀 오는 스타일이고, 악의는 대부분 원거리에서 염력(念力)을 쓰면서 싸우는데 견제와 공격, 방어, 순간이동 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편입니다. 악화는... 근거리든 원거리든 까다롭고 변화무쌍하게 공격해올 거고, 강력한 한 방을 준비해서 써먹으려고 할 겁니다.”


“그렇게 됐군요. 저희가 그들과 얼마나 싸울 수 있을까요?”


루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제1본부에서 방어전을 한다면 셋 모두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아니고 밖에서 싸우면,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세 분이서 저 셋 중 하나를 막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솔직한 해일의 평가에 루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셋 중 하나조차도 우리 셋이서 상대하기가 쉽지 않은 강한 사탄들이... 우리 팀에 해일 천사님이 지원을 왔기 때문에 저쪽에서도 매우 강한 사탄이 올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우리로서는 생각했던 최악의 상대를 만난 것 같네요. 음... 하지만 해일 천사님은 충분히 그들을 이길 수 있으시겠죠.”


어두운 얼굴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던 루미가 급히 안색을 바꾸고 태연하게 말했다. 팀장으로써 나래와 로운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해일은 그런 루미의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태연하게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했다.


“막상 싸우다 보면 그렇게 강하진 않을 겁니다. 세 분이면 충분히 상대하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그쪽은 셋이 움직이고, 저는 혼자니까. 혼자서는 불리한 점이 있죠. 우리는 민정이 본인과 제1본부의 ‘보석’을 함께 지켜야 하는 입장이니까요. 여정을 하다 보면 두 가지를 모두 지킬 수는 없을 때가 있을지도 모르죠.”


“......”


“근데 그러면 다시 찾으면 그만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맞아요.”


루미 천사가 웃었다. 나래와 로운도 그녀를 따라서 웃었다.


“정리하자면 지금 민정이의 첫 번째 여정이 일단 성공적으로 시행하고 있고, 민정이가 깨어나면 결과를 확인하게 될 것이고요.

그리고 적들에게 새로 악화가 합류했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니, 이제 그들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전략을 짜야 한다는 거겠죠.”


“좋습니다. 아직 민정이가 깨어날 때까지는 시간이 좀 있을 것 같으니, 다음 여정은 무엇으로 할지 의견을 나눠 볼까요. 그리고 민정이랑 식사는 어떻게 할지도 좀 생각하고요.”







민정은 여정 중에 기절한 지 다섯 시간 만에 깨어났다. 그녀는 깨어나자마자 거울부터 찾았다.


“어, 생각보다 멀쩡하네요. 눈곱도 안 끼었네.”


“영혼의 세계에서 여정을 하는 동안은 먹는 것, 자는 것, 씻는 것 등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만약에 씻고 싶으면 씻으실 수도 있지만요.”


“그렇군요. 근데 제가 잠을 잔 건가요?”


깨어난 민정이 질문했다.


“아닙니다. 영혼은 잠을 자지 않습니다. 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외부 자극을 받으면 의식을 잃고 수면과 비슷한 상태에 빠지게 되죠.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자연스럽게 회복된 것입니다.”


해일이 대답해 주고 이어서 덧붙였다.


“그리고 민정씨 지금껏 배가 안 고프시죠? 영혼은 식사도 굳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에너지를 얻는 목적이 아니라 맛을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 식사를 할 수 있죠.

그래서 그런데 첫 번째 여정의 마무리는 밥이나 먹으면서 하면 좋지 않을까 싶네요.”


“와, 정말요?”


“예, 민정씨도 고생하셨으니까요.”


밥을 먹는다는 말에 민정은 매우 기뻐했다. 여정을 시작한 후에 이토록 두근거리고 설레는 건 처음이었다.


“뭘 먹는데요?”


“양식입니다.”


조금은 부드럽고 평범해진 해일의 태도에 민정이 살짝 낯설어하는 걸 모르는 척하는 해일은 민정을 순간이동으로 옮겼다.

민정은 맑고 푸른 바다 위에 근사한 레스토랑 같은 건물 하나를 볼 수 있었다. 넓은 바다 너머에 수평선이 보였고 망망대해에 식당 건물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신비로웠다.


“와, 이게 뭐야. 바다 위에 식당이라니. 대박이네요.”


민정은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가시죠. 그냥 걸으면 됩니다.”


해일은 물 위에 떠 있는 식당을 보고 신기해하는 민정을 데리고 바다 위를 걸어갔다. 식당 앞에는 당연히 천사들이 모여 있었다.


“민정씨-”


천사들은 민정을 뜨겁게 반겼다. 그들은 방금 전까지 민정 옆에 있었지만, 민정은 그들을 오랜만에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천사들에 대해 호감을 가진 데다가 기분까지 좋은 민정도 천사들을 몹시 반겼다.


“다들 반가워요.”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그들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 복도를 지나고, 화려하게 꾸며진 방에 들어가서 식탁에 앉았다.


“고급 레스토랑의 룸 같네요.”


짧은 시간이나마 로운과 루미가 머리를 맞대고 꾸민 식당은 민정의 마음에 쏙 들었다. 다양한 무늬를 가진 예쁜 카페트가 깔리고 조명은 어두운 편에 샹들리에에서 낭만 있게 은은한 불빛으로 꾸몄고, 한쪽 벽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 밖에는 너무나도 예쁜 푸른 빛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서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룸 안에는 깔끔하고 고풍스러운 그림이나 장식품들로 내부 인테리어를 채웠고, 바이올린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마음에 들어요. 영화 속에 있는 것 같아요.”


선명하고 감각적인 색과 이미지의 잔치였다. 민정은 환상적으로 연출된 신비로움을 느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웨이터 제복을 갖춰 입은 나래가 음식을 서빙해 오는 것까지도 천사들은 준비했다.


“다섯 가지 해산물이 들어간 수프입니다.”


“생과일 샐러드입니다.”


“송아지 안심 스테이크입니다.”


나래는 기꺼이 순차적으로 음식을 내오는 웨이터의 역할을 수행했다. 민정은 음식 하나하나를 호들갑을 떨면서 먹었다.


“와, 너무 맛있어요.”


“진짜 최고예요. 입에서 살살 녹아요.”


민정이 이렇게 야단법석을 떤 이유는 천사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한 과한 리액션도 있었지만, 실제로 너무 맛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금 살아생전 먹어보지 못했던 극한의 미식 경험을 하고 있었다.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너무 맛있네요. 제가 살면서 비싼 음식을 먹어보진 못했지만, 이렇게 맛있진 않을 것 같아요.”


“맞습니다. 영혼은 육신보다 감각을 훨씬 깊이 느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좋은 것은 더 좋고, 나쁜 것은 더 나쁘죠.”.


“아, 로운 천사님이 말씀해 주셨었어요. 정말 신기하네요.”


민정이 크게 좋아하는 반응을 보이자 천사들도 기분이 좋아졌다.


“무알콜 와인입니다. 건배 한번 하시죠.”


나래는 제법 우아한 몸짓으로 각자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모두가 와인잔을 들었다.


짠-


“건배.”


“여정을 위하여.”


“민정이를 위하여.”


“하하, 모두를 위하여.”


저마다의 건배사를 외치면서 잔을 마셨다. 조금 씁쓸하면서 적절한 단맛이 났다. 민정은 와인을 물 마시듯 쭉 들이켰다.

와인을 마신 후에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해일이 말을 꺼냈다.


“영혼의 세계에서 본다는 것은 육신이 눈으로 세상을 시각적으로 받아들이고 뇌로 인식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영혼이 본다는 것은 외적인 피상만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자기 수준대로 통찰하는 과정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그 존재에 대해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느끼고 깨달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앞서 민정씨는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신체 접촉이 있었죠.”


“무슨 말인지 대충 알겠어요.”


“그래서, 민정씨가 본 김현숙씨는 어땠습니까?”



“음...”


민정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사실은 깨어난 후부터, 여기 레스토랑에 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와인을 마시면서도, 머릿속 한 켠에서는 계속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진짜 힘들게 살았구나 싶더라고요.”


민정이 말했다.


“딸 하나를 혼자 키우면서 갖은 고생을 다 한 건 알고 있었어요. 아빠가 돌아가신 후로도 엄마 삶을 생각해 보면 사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죠.

주부였던 엄마는 아빠가 남긴 돈으로 작은 가게를 열었는데 금방 망했죠. 그리고는 계속 남의 가게에서 일을 하고 적은 돈을 받았어요. 식당에서, 마트에서, 때로는 길거리에서. 그렇게 일하면서 나를 키웠어요. 나는 엄마가 나를 얼마나 힘들게 키웠는지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엄마가, 평범한 엄마들이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을 나한테 보여 주지 못해도, 나 나름대로는 엄마가 고생을 많이 하니까 이해한다면서, 나한테 충분한 사랑과 관심을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을 하곤 했어요.

하지만 사실은 엄마를 많이 원망했었죠.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을 사 주진 못해도, 따뜻한 말 한마디 해 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아픈 데는 없는지, 학교는 잘 다니는지, 관심을 가져줄 수 있지 않냐고. 그러면 비록 가난하더라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가족이 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경제적으로는 부족해도 정서적으로는 충분한 엄마가 되줄 수는 없었냐고.”


나래가 민정의 잔에 와인을 다시 채워 주었다. 민정은 와인으로 잠시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그러다 보니까 엄마는 나를 왜 키울까, 어떤 마음으로 키웠을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었죠. 나를 사랑하긴 했을까, 아니었다면, 나는 엄마에게 짐덩어리였을까?”


웃으며 말을 이어가는 민정의 입은 무겁게 올라가 있었다.


“우울할 때는 우울한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막 상상을 하게 돼요. 십일 년 전, 서른아홉 살이면 사실 애만 없으면 새 출발을 하기에 충분한 나인데. 만약 내가 없었다면 엄마의 삶이 지금과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까 봤잖아요. 엄마의 머리, 옷, 피부. 이제 쉰 살밖에 안 되었인데 거의 환갑이 다 된 것 같아요.

만약 엄마가 나를 억지로 키우지 않았다면...”


민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크흠, 그랬는데. 근데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의 엄마의 마음을 느꼈어요. 그때 엄마는 정말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어요.

근데 나 때문에 이겨냈더라고요. 내가 없었다면 엄마가 오히려 무너졌을 것이더라고요. 그걸 알 수 있었어요. 결국 엄마한테 나는 세상의 전부였고, 엄마는 나를 위해서 살아왔다는 것을요. 그런 사실들이 나한테는 소중한 것들이죠...”


민정이 밝게 웃었다. 천사들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고마워요. 나한테 너무 좋고 필요한 경험이었어요. 이렇게 확인해 보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거예요.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나를 키웠는지, 같은 것들은.”


민정은 감사 인사를 마지막으로 소감을 마쳤다. 천사들은 겉으로 많은 티를 내지 않았지만, 첫 번째 여정의 기획 의도가 성공한 것에 크게 기뻐했다.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할 수 있겠네요.]


[결과가 좋고 잘 쉬었으니 이어서 바로 두 번째 여정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루미가 사념으로 한 마디 평했고 해일이 대답했다. 그리고 해일은 지금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했다. 그는 민정에게 물었다.


“다행이군요. 드러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것이 사람의 마음이죠. 민정씨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제 마음이요?”


“김현숙씨에 대해서요.”


“엄마에 대해서? 어...”


“여기서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마실 때,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언젠가 이런 좋은 곳에 엄마를 데리고 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런가요?”


그리고 해일은 말없이 잔을 들었다. 다들 한번 더 건배를 했다. 첫 번째 여정이 끝났다.


"첫 번째 여정을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10분 후에 두 번째 여정을 시작하겠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해일의 제안에 따라 첫 번째 여정을 끝낸 후 이어서 두 번째 여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민정은 아쉬움 속에서 다른 천사들과 잠시 이별하고 해일을 따라 제2본부인 민정의 빌라로 돌아왔다.

벽에 걸린 달력의 숫자는 16으로 바뀌어 있었다.


“여정 5일차입니다. 지금부터 두 번째 여정을 시작하겠습니다.

두 번째 여정은 민정씨의 <현재>입니다. 민정씨의 <현재>를 알아본다는 것은 민정씨가 지금 ‘어떤 사람’인지 알아본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의자에 앉은 해일이 휴대폰을 꺼내 뭔가를 누르자 빌라의 거실 안에 둥둥 떠다니는 글자가 생겨났다. 민정은 그 내용을 읽었다.


‘수다스러운, 소심한, 걱정이 많은, 세심한...’


“성격을 나타내는 단어들이네요?”


“맞습니다.

민정씨는 이 성격들 중에서 본인이 해당하시는지, 혹은 해당하지 않는지 궁금한 것들을 선택해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아... 이게 <현재>군요. 성격 검사 같은 거네요.”


“확실히 이번 여정은 성격 검사랑 비슷한 점이 있죠. 이번에는 <과거>때처럼 구체적이고 분명한 결과를 얻기는 힘들 수도 있어요. 민정씨, MBTI가 어떻게 되죠?”


“저, ISTP였는데요. 청렴결백한 논리주의자요.”


“거기서 설명하는 내용이 전부 맞던가요? 이렇게 물어본다면 아마 그렇다고 대답하기 힘드시겠죠. 그리고 예를 들어 T와 F중에서 T에 가깝지만 F의 성향이 아예 없냐고 물어본다면, 그렇지도 않죠.”


“음, 맞아요. 저는 내향적이긴 한데 은근히 돌아다니는 것도 좋아하고, 계획적인 부분도 있지만 계획을 전혀 안 하는 부분도 있어요. MBTI도 딱히 진지하게 믿진 않구요.”


민정이 해일의 말에 동의했다.


“타고난 성향은 분명히 있지만 환경에 따라 점차 달라지기도 하고, 같은 상황이라도 그때 그때 기분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는 게 인간이죠. 여기에 있는 글자들에 가까운 성향인가 아닌가를 알 수는 있지만, 이것으로 그 사람의 행동을 전부 알거나 예측할 수는 없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좀 구체적으로 생각을 하셔야 할 겁니다. 첫 번째 여정인 <과거>에서 김현숙씨가 가장 힘들었던 시점으로 특정했던 것처럼 말이죠.”


“아, 알겠어요.”


“충분히 고민해 보시면 됩니다.”


민정은 해일이 시간을 많이 준 이유를 깨달았다. 


‘선택지가 너무 많잖아.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


글자가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었고, 구체적으로 뭘 알아야 할지 고민이었다. 좀 막연하기도 해서 민정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질문했다.


“제가 몇 개나 알아볼 수 있는 거에요?”


“두 개나 세 개 정도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으음. 알겠어요. 처음은 <걱정이 많은>으로 할게요.”


“<걱정이 많은>이요.”


“네.”


“알겠습니다.”


해일은 손바닥을 위로 폈다. 허공에 떠 있던 ‘걱정이 많은’ 글자가 해일의 손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러면서 해일은 민정에게 질문을 했다.


“혹시 그걸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음, 저는 생전에 하루가 멀다 하고 걱정들을 했거든요. 돈도 없고, 미래도 불안하니까.

그래서 궁금하더라고요. 만약 내가 돈이 좀 있었다면, 미래가 이렇게 불안하지 않았다면, 걱정을 좀 덜 하고 살았을지. 과연 걱정이 많은 것은 내 본성일까, 아니면 환경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일까.”


“그렇군요. ‘걱정이 많은’ 것은 본성일까, 아니면 환경에 의한 것일까... 충분히 구체적으로 알아볼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럼 바로 가겠습니다.”


밝은 빛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눈부신 빛이 사라지자 보이는 풍경은 여전히 제2본부, 가 아닌 제2본부의 모티브가 된 민정의 집이었다. 마치 같은 장소로 순간이동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거실에서 민정이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래된 컴퓨터에서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났다.

컴퓨터 화면을 보는 민정의 표정이 아주 심각했다. 굳은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급기야 눈가에 눈물이 맺혀서 흘러내렸다.


민정은 풍경 속의 모습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이 년 전의 일이었다. 기억날 뿐만 아니라 그때의 생각과 감정까지도 다시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 저거 그때구나. 대학교 수시 쓸 때였어요. 고3 여름방학.”


민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담임쌤이랑 수시 상담을 하기 전에 내가 갈 만한 어떤 대학 어떤 학과가 있는지를 쭉 찾아봤어요. 입학 성적이 어느 정도인지도 봤지만 등록금이 얼마인지랑 장학금을 잘 주는지. 그래서 내가 다닐 수 있을지를요.

근데 쭉 보다가 나중에 현타가 오더라고요. 내 미래가 너무 뻔하게 보여서.”


민정의 담담함 속에는 그때 느꼈던 우울과 절망이 묻어났다.


“미래가 너무 뻔히 보였다... 자세히 얘기해 보시겠어요?”


“전액 장학금을 주는 학교는 가기가 싫고, 가고 싶은 학교를 가자니 고생길이 뻔히 보이더라고요. 

장학금을 못 받으면 학자금 대출을 해야 할 거고, 그러면 다 빚이 되잖아요. 그런데도 생활비가 없으니까, 학교 왔다갔다하고 점심밥 사 먹고 휴대폰 요금 낼 돈은 있어야 하니까 알바를 해야 하잖아요.

나는 매일 알바하고 매일 공부하고, 그렇게 뼈 빠지게 살다가 졸업하면 수천만 원 빚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거라는 내 미래가 보였어요. 취업은 또 곧바로 할 수 있나요. 난 문과이고, 돈도 빽도 아무것도 없는데.”


민정의 목소리가 떨렸다.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 했지만 그때의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숨기지 못한 것이었다.


“그냥 대학에 가지 말까 고민하기도 했어요. 지금까지 수능 공부한 건 아까웠지만 그냥 이대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까 생각도 했어요.

근데 그러긴 또 싫더라고요. 내 미래가 너무 불안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내 인생이 아무 반전 없이, 아무 낭만도 아름다운 이야기도 없이, 자유롭게 놀지도 못하고 곧바로 취직해서 국가의 노예가 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저 날은 그런 고민을 했던 날이었어요.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이 매일 돈 걱정에 밤을 지새울 것 같은 내 미래에 대해서 한탄했던 날이요. 나는 평생 가난하게, 이런 좁은 곳에서 살겠지. 우리나라는 가난한 사람이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나라라면서, 사회를 탓하고 세상을 탓했어요.

정말로 하루 내내 별의 별 생각을 다 했던 날이에요. 지금도 그날이 확실히 기억에 남을 만큼.”


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말씀하셨던 대로 이날은 민정씨가 살면서 가장 민정씨의 인생을 두고 걱정을 많이 했던 날입니다. 이날 민정씨는 분명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두고 마치 평생을 짊어진 고통을 대면하듯 절망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럼 다른 날도 한 번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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