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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틀리제 Sep 13. 2024

사연녀와 그녀의 수호천사들

6화 : 민정의 첫 번째 여정(2)

민정이 어린 엄마의 머리에 손을 올리자마자-

어린 엄마, 김현숙이 당시에 하던 생각, 느끼던 감정들이 민정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자기 마음이 삽시간에 다른 사람의 것으로 덧칠해지는 신기한 경험을 끝내자 민정은 눈을 치켜떴다.     


“음...”     


그리고 자기에게 전달된 엄마의 생각과 감정을 분석하고 언어로 표현했다. 거기에 자기 의견을 덧붙였다.     


“엄마도 참... 학교에 처음 입학 하는데 이렇게 지루해할 수가 있나? 이거 진짜 신기하네요. 진짜 내가 엄마가 된 것 같아요.”     


민정이 독백을 하듯 중얼거렸다.     


“이걸 왜 하는지 알 것 같아요. 이렇게 하면 내가 엄마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데 엄청 도움이 될 것 같아. 엄마는 그러고 보니 사람이 좀 무심하고 감정이 별로 없었어요.”     


민정은 엄마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중학생 때 집에서 가까운 곳에 편의점이 생겼다. 그전까지는 편의점이나 마트가 걸어가기에는 꽤 멀었기 때문에 민정은 가까이에 편의점이 생긴 것에 매우 기뻐했다.     


“엄마, 저 앞에 편의점 봤어? 우리도 드디어 편세권이야!”     


그때 엄마의 반응이 어땠던가.     


“어, 응.”     


그냥 그렇게 말하고는 계속 보던 텔레비전만 봤었다. 민정은 함께 기뻐하지 않는 엄마에게 실망했었다. 별일 아니었지만 제법 상처가 되었고, 당시 질풍노도의 민정은 다시는 엄마한테 신나서 말을 거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다짐했었다. 그런 무심하고 감정이 변화가 없는 점은 어릴 때부터 그랬던 모양이다.     


“근데 사실은 나도 좀 그래요. 내가 좋아하는 것 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나도 우리 엄마를 보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것 외에도 관심을 가지는 척을 좀 해야 된다는 걸 배웠죠. 

그래야 다른 사람한테 맞춰줄 수 있다고. 그것도 노력을 해야 한다고.”     


민정은 계속 그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의 감정이 자기의 것이 되어 버린 여운이 크게 남았기 때문이다.     


“그럼 연습은 여기까지 할까요.”     


해일이 민정에게 권했다. 민정은 그러자고 대답했고, 곧바로 원래 있던 병실의 풍경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오... 이렇게 하는 거군요.”     


“바로 다음으로 넘어갈까요?”     


“네, 그러시죠.”     


“김현숙씨의 인생 중에서 체험할 부분은 김현숙씨가 가장 힘들었을 때입니다. 방금 했던 것처럼 그 시점으로 가서 김현숙씨의 모든 것을 체험할 겁니다.”     


“으음.”     


“준비되셨습니까?”     


해일이 눈빛에 많은 뜻을 담아 물었다. 엄마가 가장 힘들었을 때. 민정은 그 때가 언제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민정이 대충 생각해도 민정 본인보다 더 힘든 삶을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

아마 민정 본인처럼 삶을 포기하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때 민정이 어렸다. 어쩌면 민정 때문에 죽지 못하고 살았을지도 몰랐다.     


“가죠.”     


그렇기에 오히려 갑자기 기꺼이 엄마의 마음을 확인하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그것은 속죄에 대한 갈망이었다. 엄마는 민정을 버리지는 않았건만 민정은 엄마를 버렸으니까.

해일은 눈빛에 그 역경을 뚫고 속죄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느냐고 담아서 물었고, 민정은 또다시 해일에게 홀렸다.     


“재밌겠어요.”     


민정의 허세를 들은 해일은 희미하게 웃었다. 작지만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진짜 미소를 보던 민정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민정이 보고 있는 것은 장례식장이었다. 깊은 밤, 조문객들도 모두 돌아가고 한 여자가 영정사진 앞에서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흑...으흑...”     


서럽게 우는 여자의 앞에는 한 어린 소녀가 옆으로 누워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을 자고 있었다. 민정은 이 상황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자동차 사고로 죽은 아버지의 장례식.

울고 있는 여자는 엄마, 그 앞에서 자고 있는 소녀는 열 살 때의 자기 자신이었다.

십일 년 전의 일이었다.     


“역시 이 때군요. 아빠 장례식이 이랬었던가...”     


어째서인지 그녀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열 살이라면 기억하고도 남을 나이인데도.

기억에 없는 게 다행이다 생각할 정도로 쓸쓸한 장면이었다. 엄마와 자기 외엔 아무도 없고 엄마는 혼자 울고 있었다.

장례식 이후로도 둘의 삶은 그랬다. 서로의 삶이 전부인, 누구 도와주는 이 없이 둘이서 힘들게...     


“똑같이 김현숙씨의 머리에 손을 올리시면 됩니다.”     


해일이 말하자 민정은 복잡한 마음이 들기 전에 서둘러서 엄마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손이 머리에 닿자마자 그녀는 곧바로 자리에서 쓰러졌다.     

쓰러진 그녀는 저절로 몸을 웅크리고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옆에 십일 년 전의 그녀의 엄마도 울고 있었고, 그녀와 똑같은 자세를 한 십일 년 전의 그녀가 자고 있었다.     

해일은 쓰러져 우는 민정을 무심히 내려다보면서 현재까지의 진행을 보고하기 위해 제1본부의 천사들에게 사념 전달(Telepathy)로 연락하려 했다.     


“음?”     


그러나 그는 천사들이 제1본부가 아닌 제2본부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것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가능성은 한 가지였다.

사탄들이 천사들을 제1본부에서 유인하여 제2본부로 이동한 것. 거기서 사탄과 천사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중요한 건 왜 그들이 제2본부에서 싸우고 있는지가 아니었다. 지금의 싸움이 유리한지 아닌지가 중요했다. 우선 해일은 여정의 상황을 천사들에게 보고했다.     


[민정이가 김현숙씨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해일은 생각에 잠겼다. 중요한 순간에 변수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만약 천사들이 상황이 급박했다면 먼저 해일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제2본부는 공격받아도 위험하지 않은 곳이었다. 제1본부가 공격받는다면 조금 긴장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천사들이 응답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싸우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애초에 해일이 여정을 진행하는 동안 전투가 일어났을 때, 응답이 없다면 해일은 천사들을 도와주러 오지 말고 그 위치에서 그대로 민정을 보호하기로 얘기가 되어 있었다.     


“위험한 상황일 것 같지는 않으니까...”     


아마도 해일이 필요한 만큼 위험한 상황은 아니기에 굳이 연락을 하지 않은 것이리라 판단한 해일은 상황을 정리할 겸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본부와 연락을 취해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면 대충 전투가 끝날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김현숙의 아픔을 체험시키는 데에 성공함. 처음에는 그 여정을 꺼려하였으나 설득에 쉽게 성공함. 겉으로 인식하고 있는 두려움과 나약함을 이기게 할 내면의 의지가 예상보다 강력한 것으로 보임...’               





제2본부의 위치는 영혼의 세계에서도 조금은 외딴 곳에 동떨어져 있었다. 제1본부 내지는 수호천사본부의 근처에 설계할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순간이동으로 왕래할 수 있는 데다 사탄들이 위치 파악을 조금이라도 어렵게 하려면 아예 외딴 곳으로 무작위처럼 위치시키는 것이 방법이었다.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제2본부의 위치는 너무 쉽게 발각되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탄들은 제2본부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상당한 '조건'을 치르고 시간을 들였을 터였다. 그것만 해도 이득이었다.     


“생명의 나무의 뿌리는 견고하고 길게 뻗은 가지는 날카로우니라.”     


빌라의 입구 근처에 있는, 정령의 모습을 한 천사의 앞에 기다란 나뭇가지가 생겨나 멀리 있는 악령의 몸을 꿰뚫었다. 성공적으로 악령을 해치운 로운이지만 표정이 밝지 않았다. 주변에는 그녀가 처리해야 할 악령이 너무 많았다.     


“생명력 넘치는 만물의 터전을 만들리니.”     


힘겨운 목소리로 로운이 외쳤다. 전방에 지름 3미터 정도의 크기의 숲이 생겨났다. 그 안에 있던 악령들은 온몸이 나무에 꿰뚫려 처참하게 죽었다. 그럼에도 로운은 우는 소리를 냈다.     


“아, 죽겠네.”     


수십 마리의 악령과 로운 혼자 싸우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래도 로운이 상대하고 있는 것은 만만한 악령들이었고, 나래와 루미는 그보다 훨씬 강한 악령인 사탄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쨍-     

날카롭고 무거운 타격음이 로운의 귀를 계속 때렸다. 전투경찰복을 입고 방패를 든 채 버티고 서 있는 나래를 새빨간 두 마리의 사탄이 쉴 새 없이 공격하고 있었다. 뿔이 달리고 꼬리가 긴 전형적인 악마의 모습을 한 두 사탄이었지만 하나는 흐물흐물하게 생겼고 하나는 단단하게 생긴 차이가 있었다. 피철철, 피칠갑 두 사탄에게서 나온 붉은 피가 빌라의 입구를 지키고 선 나래의 방패를 완전히 덮어 버렸다. 나래는 반격하지 않고 방패를 꼭 붙잡고 두 사탄의 공격을 버티기만 했다.     


물론 루미라고 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두 천사와 달리 전투제복을 입지는 않았지만 손에 작은 부채를 들고 쉼 없이 휘두르고 있었다. 부채에서 나오는 매서운 바람은 하나의 표적을 향했다.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새빨간 피철철과 피칠갑보다 대비되어 훨씬 어두운, 자주색에 가까운 붉은 사탄이 의지를 담아 핏빛 물방울을 만들었다. 마치 총알처럼 루미에게 쏟아지는 물방울들은 휘몰아치는 바람에 날려 갔다.     


“피를 뒤집어써라!!”     


악을 쓰는 자줏빛 사탄이 붉고 끈적거리는 물줄기를 쏟아냈다. 그러면 거대한 바람이 불어 폭포 같은 물줄기를 막아섰다. 바람이 핏물을 막고 물이 바람을 막았다. 물과 바람이 부딪혀 힘을 겨루자 일종의 벽이 생겨났다.

그러자 그 벽에 또 다른 물줄기가 쇄도했다. 그 물줄기를 막는 바람줄기가 추가되었다.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며 싸우는 핏물과 바람의 비등한 줄다리기가 한동안 지속되었다.     


힘을 쓰면서 루미는 자줏빛 사탄을 노려보았다. 민정이 이 빌라에 살기 시작한 때는 물론이고, 저 멀리 가로등 불 켜진 질서정연한 아파트 단지 모습인 제1본부가 창조되던 때, 즉 민정이 세상에 태어나 울음을 울고 민정의 부모가 민정을 안아 들고 웃던 그때부터 루미는 민정의 옆에서 저 자주색 사탄을 상대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때는 제1본부가 지금 같은 모습도 아니었고, 이 빌라 따위도 알지 못했다. 이십여 년의 시간 동안 이길 때도 많았으며 질 때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루미는 머릿속으로 셈을 했다. ‘기술’을 사용해서 피보라를 격퇴해야 할까? 그게 옳은 판단인가? 아니면 제2본부를 잠깐 포기하고 제1본부로 후퇴하는 것이 맞는가?     

제2본부는 임시 거점에 불과했으니 점령당한다고 한들 큰 손해는 없었다. 사탄들이 건물을 파괴하든지 ‘저주’를 걸어 악한 기운을 묻힌다고 해도 복구하거나 정화하면 그만이었다. 민정은 해일 천사가 옆에 있으니 걱정할 일이 없었다.


반면 만에 하나 지금 루미와 나래, 로운이 사탄들에게 당한다면 제1본부가 위험했다. 물론 제1본부를 ‘봉인’해두었으니 그 안에서 보관하고 있는 ‘보석’을 빼앗길 위험은 거의 없었지만, 여기서 천사들이 전멸한다면 제1본부라는 핵심 거점이 그들이 부활할 때까지 40시간 동안 사탄들의 수중에 넘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민정의 여정을 진행하고 있는 해일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까. 해일이 오면 모든 상황이 깔끔하게 해결된다. 하지만 그는 민정을 데리고 와야 한다. 그러면 여정이 일시 중지된다.     


[민정이가 김현숙씨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마침 해일이 사념을 보냈다. 루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민정의 첫 번째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진행 중이었다. 이러면 조금이라도 빨리 제1본부로 돌아가서 제1본부의 봉인을 해제해야 했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차라리 마음이 편해진 루미는 영력을 끌어올렸다. ‘기술’은 사용하기 위해서 영력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기술’을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장 그럴 필요는 없어졌다.     


“딴딴한 나무 발사.”     


하급 악령들을 모두 물리친 로운이 루미에게 합류했다. 묘하게 단순해진 로운의 수식어에 힘입은 나무줄기가 자줏빛 사탄을 덮쳤다. 나무줄기는 맥없이 핏물에 꺾였지만 피보라는 대치 상황을 거두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래를 열심히 두들기던 피철철, 피칠갑도 멀찍이 물러나 피보라의 옆에 섰다.     


“이번엔 여기까지만 하자고. 안부 인사나 하러 왔을 뿐이거든. 파견을 나왔다는 그 못생긴 천사놈과도 직접 싸우고 싶었는데, 지금은 바쁜 모양이야. 어디 중요한 일이라도 있나 보군?”     


얇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피보라 사탄이 이기죽거렸다. 사탄도 아마 해일이 민정의 여정을 진행하고 있는 걸 알 터였다. 해일의 부재를 두고 비열하게 웃는 모습이 마치 민정에 대해 협박하는 것 같았다. 루미는 ‘혹시 다른 사탄들이 해일과 민정을 습격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서라. 너 그러다가 뼈도 안 남아.”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하는 것, 네가 가끔 하던 말이지 않니? 소문이 얼마나 부풀려졌을지 모르는데 지레 겁먹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지 않을까?”     


루미가 점잖게 경고하자 피보라가 말을 이었다. 자줏빛 사탄이 입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뛰어난 천사라 하더라도 완벽한 존재는 없는 법이잖니? 그놈의 강함이 사실인지도 의문이지만, 과연 21일 동안 실수 한 번이 없을까?

거기다가 받쳐 주는 너희들이 충분히 잘 해낼 수 있겠어? 중심이 자기 할 일을 해내더라도 주변에서 잘 못 해서 실패하는 경우는 너희가 더 잘 알...”     


강한 바람이 불어 사탄들을 덮쳤다. 말이 잘린 피보라가 뒤로 더 물러났다. 루미는 영력을 한껏 발휘하면서 천사들에게 지시했다.     


“나래, 로운. 나를 도와 줘.”     


“네, 딴딴한 나무 방패와 갑옷.”     


쾅-     

로운은 영력을 모았고 나래는 손에 든 방패를 땅에 내리쳤다. 땅에 박힌 방패에서 원형의 방어막이 생겨나 천사들을 감쌌다. 그리고 그 방어막의 겉면에 또 두터운 나무가 덧씌워졌다. 로운과 나래가 힘을 합해 만든 견고한 방어막이었다. 루미가 ‘기술’을 완성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연계였다.     


“히히히, 정곡을 찔리니 급하게 움직이는 꼬라지가 추하네. 너무 사실이라 내 입을 막지 않으면 안 되겠나 봐?”     


째지는 듯한 웃음으로 피보라가 외쳤다. 그러나 시간에 쫓기는 입장인 그녀 또한 강한 영력을 담아 민첩하게 움직여 위협적인 핏물을 쏟아냈다. 나머지 피철철과 피칠갑도 손톱과 주먹을 내세워 천사들의 방패에 달려들었다.     


괴성과 굉음이 폭발하며, 많은 영력과 그에 담긴 의지가 서로 부딪혔다. 하지만 결국에는 루미의 예상대로 나래와 로운의 방패는 루미의 준비가 끝날 때까지 무너지지 않았다. 그녀가 입고 있던 제복은 흰색 바탕의 소복 같은 옷으로 바뀌었고 눈동자도 희게 물들었다.     


“선한 사람의 하루는 악한 사람의 천 년보다 빛나리라. ‘선인(善人)의 하루’.”     


초라한 민정의 작은 빌라 앞에 루미의 태양이 떠올랐다. 로운과 나래가 만들던 나무나 방패와는 그 안에 담긴 힘의 수준이 달랐다.

태양은 어느 한 곳 빠지지 않고 구역 전체를 비추었다. 따스한 햇빛을 받은 천사들은 영력이 보충되고 영적 능력이 향상되었다. 뜨거운 햇빛을 받은 사탄들은 반대로 영력이 줄고 약해졌다.     


“‘오전’부터 시작이군요. 어떻게 합니까?”     


루미가 '기술' 구현에 성공하자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피철철이 피보라에게 물었다.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이기려고 온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천사들의 힘을 빼 놓으면 좋으니 ‘노을’만 보고 물러나자. 나래 놈이 공격해 오지 않는다면 내 계산으론 승산이 있다.”     


“예.”     


공격과 수비가 전환되었다. 천사들이 사탄들에게 달려들었다. 한층 강해진 바람과 나무가 붉은 악마들을 덮쳤다. 각자 흩어져 있던 사탄들은 한 곳에 모여 휘몰아치는 공격들을 막아내는 데에 집중했다. 피보라는 열세인 와중에도 핏물과 핏방울을 돌려 공격을 하려 했지만 루미의 바람을 넘어서지 못했다. 단 나래만큼은 공격에 가담하지 않고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하여 그 자리에 굳건히 서서 성의 입구를 지켰다.     

시간이 흐르자 루미의 태양은 점점 밝아졌고 흰색이던 빛이 조금씩 노란색으로 변했다. 천사들은 더욱 강해졌다.     


“찬란한 햇살이 비치는 숲이여.”     


로운은 아까보다 두 배는 큰 규모의 나무 군집을 만들었다.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나뭇잎과 굵직한 줄기들이 사탄들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그 단단한 나무들을 핏물과 손톱으로 제거한 사탄들에게는 난데 없이 커다란 새 한 마리의 부리가 날아들었다.     


“청학(靑鶴).”     


은은한 푸른 빛이 감도는 루미의 전투용 소환수였다. 

고고한 외모와 콘셉트와는 좀 다르게 끼룩거리며 사탄들을 마구 공격하는 다소 경박한 성격이었지만 그게 사탄들 입장에서는 매우 성가셨다. 우아한 모습과 달리 부리와 날개가 강철 같아서 찌르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여 무기가 많았다. 상처 입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아 호전적이기도 했다.     


“이 새 새끼가.”     


피철철이 흐물거리는 손톱으로 청학을 찌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나래가 여전히 참전하지 않음에도 사탄들은 점점 천사들의 공격을 막기가 버거워졌다. 피철철은 이름처럼 피투성이가 되었고 피칠갑은 두 팔이 나무에 꿰뚫려 너덜거렸다.     


“버티기 힘듭니다.”     


“어쩔 수 없군.”     


피보라가 아쉬움을 삼켰다. 선명한 노란 색이던 햇빛에 붉은색이 섞였다. 곧 ‘노을’이 소환되면 사탄들은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었다.     


“피와 죽음의 폭풍.”     


간단한 수식어와 함께 사탄들의 주변에 핏물로 이루어진 회오리가 생겨났다. 섬뜩한 모습과 다르게 회오리는 사탄들을 보호했다. 순간 루미는 회오리를 깨뜨릴 방법을 궁리했다. 이러면 ‘청학’ 대신 ‘홍학’을... 아니면 그냥 조금 빨리 ‘노을’을?     

그러나 고민하던 사이 핏물 회오리는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안의 사탄들도 온데간데없었다.     


“도망쳤네요.”     


로운이 한숨을 쉬었다.     


“그냥 가볍게 견제만 하러 왔나 보네요.”     


“그러게. 다른 사탄이 끼어들지 않아서 다행이야. 일단 정리를 하자.”     


나래와 로운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천사들이 움직이자 전투의 여파로 파손된 주변의 구조물들도 점차 원래대로 복구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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