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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틀리제 Sep 11. 2024

사연녀와 그녀의 수호천사들

5화 : 민정의 첫 번째 여정(1)

“컨디션은 괜찮으십니까?”     


로운이 순간이동으로 사라지자마자 해일이 질문했다. 물론 그의 말은 걱정해 주는 따뜻한 느낌보다는 ‘중요한 일을 진행하는 데 차질이 없겠냐’ 같은 의미로 느껴졌다.     


“잘 모르겠네요. 그냥 평범한 것 같아요.”     


민정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마 로운이 물었다면 컨디션이 좋다고 대답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첫 번째 여정 장소로 순간이동 할 겁니다. 마치 이 자리가 그대로 바뀐다는 느낌을 받을 거예요.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해일은 문제없다는 듯 말했다. 민정은 좀 긴장이 되었다. 그러나 해일의 태연하고 사무적인 모습을 보니 한편으로 마음이 안정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민정은 고개를 끄덕여 해일에게 대답했다.     


“여정 4일차, 지금부터 첫 번째 여정을 시작합니다.”     


해일이 선언했다. 그러자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병원이었다.


어느 종합병원의 입원실이었다. 좌우로 세 개씩 여섯 개의 침대가 있었고 중간에는 TV가 켜져 있었다.

형광등을 환하게 밝혀 놔도 안은 왠지 어두웠다. 창밖에는 어둠이 깔린 밤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분위기에 시간조차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른쪽 창가의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이,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창백하면서 꼼짝도 않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시체 같았다. 아까 전에 본 악령들이 생각난 민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곳은 민정씨가 입원해 있는 병원입니다. 본부로 사용하고 있는 민정씨 집은 영혼의 세계에 따로 재구성한 공간이었죠. 여긴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 민정씨의 육신이 있는 공간입니다.

물론 우리는 영혼이기 때문에 이 육신의 공간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공간과 같은 공간이지만 우리는 영혼의 세계에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공간의 다른 차원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겁니다. 

그 증거로 우리는 여기에 있는 것들에게 전혀 영향을 줄 수 없죠. ”     


해일이 민정이 누워있는 침대에 손을 뻗었지만 그대로 통과해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헷갈린다면 민정씨가 귀신이 되어서 육신을 보러 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민정에겐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 침대에 누워있는 게 민정 본인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녀는 말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삶을 포기하고 행한 선택의 결과물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민정에게 해일이 다른 이야기를 했다.     


“시작하기 전에 청소부터 할까요.”     


“청소요? 아, 네.”     


무슨 청소를 한다는 말인지 알지 못했지만 일단 민정은 동의했다. 해일은 발걸음을 가볍게 옮겨 병실의 구석 쪽으로 갔다.     


“아, 저도 도울게요. 저는 뭘 하면 되나요-”     


해일을 도와주려고 지시를 구하던 민정은 우뚝 멈추었다. 해일을 따라 병실 구석으로 향하던 그녀의 시선에, 지금껏 눈에 띄지 않았던 무언가가 보였다.     

그것은 웅크려 앉아 있는 어떤 남자였다.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이 창백했다.     


“저게 뭐야...”     


민정은 충격을 받았다. 물론 민정의 온 정신이 자기 육신과 그녀의 엄마에게 쏠려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병실을 잠깐이나마 둘러봤는데 저렇게 음침하게 앉아 있는 사람을 못 봤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그보다 훨씬 더한 충격이 그녀에게 이어졌다. 그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간 해일이 갑자기 총을 꺼내서 남자를 과감하게 쏴버렸기 때문이다.      


피융,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민정은 비명을 질렀다.     


“꺅! 무슨 짓이에요?”     


“청소하는 겁니다.”     


해일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총에 맞은 남자는 괴로워하는 표정을 짓더니 스르르 사라졌다.     


“아니, 사람을 그렇게 총으로 쏘는 게 어떻게 청소...”     


민정은 말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사람을 함부로 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그러나 이곳 영계는 육계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어쩌면 이 세계에서는 이런 게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사실 첫 만남부터 해일은 총을 사용했었다. 물론 그때 총을 맞은 것들은 저 남자처럼 멀쩡한 모습이 아니었고 괴물 같은 모습이었지만.     


“사람을 쏘는 게 어떻게 청소냐고요? 좋은 질문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왜 이렇게 했는지 설명해 드리죠.”     


해일이 말하고서 반대편 구석으로 이동했다. 그쪽에도 민정이 못 보던 사람이 하나 쪼그려 있었다. 

해일은 그를 향해 총을 쐈다. 이번에는 그를 맞히지 않고 미세한 조정으로 바로 귀 옆에 총알이 박히게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바로 옆에 총을 쐈는데도 전혀 반응이 없이 가만히 있었다.     


“보시다시피 이들은 총으로 위협을 해도 꿈쩍도 안 합니다. 그렇다고 가까이 다가가서 말을 걸려고 하면.”     


그리고 해일은 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갑자기 그 사람이 일어나서 해일에게 달려들었다.

해일은 그보다 훨씬 빠르게 그 사람의 목을 붙잡고 바닥에 찍었다.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 달려들죠.”     


그 사람이 팔을 버둥거렸다. 그러나 그 팔이 해일에게 닿지 않았다. 그의 팔이 너무 기형적으로 짧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얼굴의 코와 입이 완전히 비틀어져 있었고 눈은 시퍼렇게 희번득거리는 것이...  멀리 있을 때는 형체 자체가 흐릿해 잘 몰랐는데, 집중해서 보니 참 역겹게 생긴 사람이었다.     


“이들은 하급 악령입니다. 보시다시피 그 모습조차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죠. 민정씨가 이들의 존재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은 이들이 하급 영이기 때문입니다. 영은 급이 높을수록 존재감이 강해지거든요.

이 하급 악령들은 위협하는 모든 행동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럴 지능이 없어요. 그럼에도 공격성만 강해서 가까이 다가가면 공격하려 합니다. 결국 달리 평화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죠.

악령들은 대부분 그렇습니다. 대화로 해결이 된다면 그건 악령이 아니죠.”     


이어서 해일은 버둥대던 그 악령의 머리에 총을 갖다 대고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버둥거리던 몸을 쭉 펴더니 뻣뻣하게 굳어지다가 스르르 사라졌다.

피가 튀지도 않았고 비명이 터지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민정은 살짝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사실 꼭 이 청소를 안 해도 일을 진행할 수는 있어요. 가까이 가지만 않는다면 아무런 피해도 없고, 먼지처럼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악령을 그냥 놔두고는 우리의 일을 진행할 수는 없죠. 민정씨라면 방 안에 바퀴벌레가 있는데 다른 일을 하실 수 있겠어요?”     


기괴하다고는 하지만 인간의 형상을 한 존재를 바퀴벌레에 비유하는 해일에게서 민정은 무한한 냉기를 느꼈다. 그는 악령들에게는 터럭만큼의 호감도 없는 것이 확실했다. 설명을 마친 해일은 병실에 있던 몇 명의 하급 악령들을 마저 ‘청소’했다. 민정은 말없이 그걸 지켜봤다.     


“이제 깨끗하네요. 다음으로 넘어가면 될 것 같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진행할 여정은...”     


해일이 말하는 도중에 누군가 드르륵 소리가 나는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둘의 시선이 저절로 그 사람을 향했다. 그 사람을 본 민정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다 풀어져 가는 파마머리에 후줄근한 카라티를 입은 아줌마. 생기가 하나도 없는 표정은 굉장히 피곤에 절은 모습이었다.     


“엄마.”     


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엄마를 부르고선 당황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이 해일을 향했다. 엄마가 있다는 걸 미리 말하지 않았냐는 뜻이었다. 해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김현숙씨는 민정씨가 입원할 때부터 줄곧 옆에서 간호를 하고 있습니다.”     


“일도 안 하고요?”     


“휴직 중이죠. 민정씨의 간호가 끝나면 새로 직장을 구해야 하겠지만요.”     


“이럴 수가...”     


민정이 복잡한 눈빛으로 어머니 김현숙을 바라보았다. 여정을 진행할 때 옆에 있을 엄마의 존재만으로도 부담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런 민정에게 해일은 폭탄선언을 했다.     


“첫 번째 여정은 김현숙씨에 대해 알아보는 것입니다.”     


“뭐라고요?”     


“민정씨에게 어머니는 어떤 존재입니까?”                    






“민정이, 잘 하겠죠?”     


“그렇겠지. 실시간으로 해일이가 연락도 주니까.”     


“근데 첫 번째 여정이 너무 심리적으로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긴 해요. 아무래도 엄마랑 사이가 안 좋으니까요.”     


제1본부, ‘성’에 다시 모인 루미, 나래, 로운은 민정의 첫 번째 여정에 관련된 대화를 주고받았다. 로운은 해일을 신뢰했지만, 이번에는 해일이 진행하는 여정에 대해 자기 선배들에게 불안감을 토로했다.     


“걱정이 좀 되긴 하지. 둘이 관계가 너무 불안하니까. 그래도 이번 여정을 성공하면 제일 큰 이득을 볼 수 있어.

첫 여정을 위험 부담 없는 무난한 것으로 할까, 아니면 처음부터 과감한 승부수를 던질까, 고민하다가 결국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잖아? 민정이가 여정 전체를 더 신뢰하게 될 테니까.”     


루미가 부드럽지만 강하게 로운을 다독였다. 그래도 로운은 초조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민정과 김현숙은 모녀 사이치곤 서로에 대해 복잡하고 미묘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나도 팀장님 생각에 동의해. 해일이가 여정 전체를 무리하게 짜는 것을 반대하고 천천히 하자고 했지만, 이번에는 맞는 것 같아. 첫 번째 여정으로 민정이 엄마가 적격이야.”     


나래도 루미와 같은 생각이었다.     


“민정이 엄마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민정이는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는, 자기가 죽음을 택한 것은 엄마 때문이기도 하다는 원망 섞인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본인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나름 노력하긴 했지만 말이야. 아무튼 김현숙에 대해서 알지 않고는 민정이의 인생을 이야기할 수 없지.”                         






당신에게 어머니는 어떤 존재입니까?     

해일의 물음에 민정은 눈을 감고 십일 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잊어버리려고 노력했지만 잊히지 않던 많은 사건들이 속속들이 생각났다. 초등학교부터 졸업식에는 한 번 찾아오지도 않고, 선물은커녕 미역국이나, 심지어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도 듣지 못했던 열한 번의 생일과, 한참 진로를 고민하던 때에 대학은 무조건 전액 장학금을 주는 곳으로 가라며 소리치던 고3 여름방학.      


기억을 돌이키는 시점의 기준이 십일 년 전인 이유가 있었다. 그때 지금 김현숙에 대한 민정의 인식과 감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민정이 열 살 때 아버지가 사고로 죽었다. 그때 김현숙은 서른아홉 살이었다. 열 살 꼬마 여자애와 서른아홉의 애엄마는 서로가 세상의 전부였지만 그 세상을 살아가기가 참 불편하게 짝이 없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결론적으로 십일 년간 김현숙은 민정을 학대하지는 않았지만, 현재 사회 정서상 엄마로서 해 줘야 하는 일들을 제대로 해 주지는 못했다. 민정은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늘 빈곤했고, 경제적인 점에서는 김현숙을 원망하지 않았지만, 정서적 빈곤에 대해서는 김현숙을 원망했다.     

따뜻한 말 한 마디를 할 줄 모르고, 딸한테 관심도 없는 엄마라고. 아무리 바빠도 졸업식에 못 오냐고. 생일이 언제인지도 모르냐고. 돈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은 있지 않냐고. 서운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 엄마는 세상을 등지려 한 딸의 옆에 붙어서 지키고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천사님은 어떻게 알고 계세요?”     


민정은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했다.      


“민정씨와 어머니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전부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민정씨의 심리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죠.”     


그렇다면 속일 것도 없으리라.     


“나한테 우리 엄마는 시큼한 귤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맛있었으면 좋겠는데 맛이 없고, 혹시 시간이 지나면 맛있어지지 않을까 기대도 하지만, 시큼한 귤이 시간이 지난다고 당도가 올라가진 않죠? 그래서 별로 소중하지도 않고 있으나 마나 하는 존재였어요. 하지만...”     


민정은 자기 육신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김현숙을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내가 먹을 수 있는 과일은 엄마가 가게에서 얻어 온 시큼한 귤밖에 없었어요. 이제는 저야말로 궁금하네요. 엄마는 나한테 소중한 존재인지 아닌지.”     


“그러니 첫 번째 여정을 김현숙씨에 대한 것으로 정했습니다.”     


해일의 대답에 민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음, 엄마가 나에게 소중한지 아닌지 궁금하긴 한데. 그냥 이 부분만 천사님이 간단히 대답해 주시고 넘어가면 안 될까요?”     


민정이 살짝 애원하듯 물었다. 민정은 김현숙과 연관되는 무언가를 하기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해일은 단호하다 못해 차갑게 이야기했다.     


“아니요, 반드시 민정씨가 직접 여정을 하셔야 합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요. 때로는 사실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식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해일이 말했다.     


“인생여정은 민정씨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로는 민정씨의 <과거>를 볼 것입니다. 여기 와서 민정씨의 육신을 좀 보십시오.”     


민정은 그의 말에 따라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았고 코에는 호흡기가 달려 있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머리에 창백한 얼굴이 참 못나 보였다. 떡진 머리는 하나도 정리가 안 되어 있는데 그래도 얼굴은 말끔했다. 엄마가 최소한 얼굴만큼은 닦아 주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머리는 정리해 주지 않았을까. 거기까진 너무 귀찮았을까? 얼굴은 최소한의 돌봄을 행한 걸까?

머리를 감겨주지 않은 것에 또 다시 서운함이 드는 순간 민정은 그녀가 그럴 입장이 아니라는 걸 되새겼다.

어설프게 옥상에서 떨어졌다가 병원에 입원한 건 민정이었다. 엄마는 지금 민정 때문에 이 좁고 우울한 병실에서 가만히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세상에 혼자 남을 엄마를 버리고 도망친 나 때문에. 일도 안 하고 있다니. 밥은 먹고 다니는지, 병원비는 어떻게...     


“지금 여기 누워 있는 민정씨가 지금껏 살아온 인생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김현숙씨라는 건 동의하실 겁니다.

민정씨의 <과거>를 마주하는 것은 당연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특히 김현숙씨에 대해서는 민정씨도 생각이 깊어질 겁니다. 애증의 관계이고, 원망과 미안함을 동시에 갖고 있죠. 소중하면서도 불편합니다.

그렇다 해도 김현숙씨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김현숙씨는 민정씨의 엄마이고, 뿌리니까요.”     


“막... 쉽게 말하지 말아요.”     


민정은 해일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의 말이 모두 맞았다. 그러나 맞는 말일수록 심장을 강하게 후벼 파는 법이었다. 민정에게도 할 말이 있었다.     


“내 마음을 안다는 듯 말하지 말아요. 나는... 그렇게 쉽게 판단하는 말들을 듣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내가... 원해서 만든 관계도 아니었어. 엄마는 선택할 수 없는 거잖아요. 따뜻한 말 한 마디를 못 해주는 사람이었어요.

분명히 엄마는 내가 뛰어내린 이유 중 하나였어요. 그런데 첫 번째 여정으로 엄마에 대해서 알아보라니. 너무 나한테 가혹한 것 아닌가요?”     


매끄럽지 않은 문장이었지만 민정의 의도는 두 가지였다. 민정의 힘듦에 대해 쉽게 말하지 말 것과, 첫 번째 여정으로는 김현숙을 피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정의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해일은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짧은 시간에 최적의 판단을 내렸다.     


“민정씨의 인생을 알아보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하호호 웃으면서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너무도 직설적인 해일의 말에 민정은 반박할 수 없었다. 해일의 말이 이어졌다.     


“민정씨 스스로 포기할 정도로 많이 번민했던 인생이었습니다.

제가 민정씨한테 처음 여정을 제안했을 때, 분명히 그 때는 민정씨는 스스로의 모든 것을 마주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고작 몇 시간 만에 그런 각오를 잊어버린 겁니까? 아니면 막상 부딪히려니 두렵습니까?”     


“...”     


“진리는 대가 없이 얻을 수 없습니다. 한 걸음을 더 내딛으면 민정씨가 육신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것들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한 번 망설였을 때 영영 사라져버리는 기회도 있습니다.

약간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도...”     


“아, 알았어요. 하면 되잖아요. 할게요. 엄마 여정.”     


“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민정이 결국 항복했다. 해일의 말이 무척 직설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딱딱하고 로봇 같았던 해일이 설득이라는 무언가 인간적인 행위를 했다. 민정의 생각을 변화시키기 위해 구구절절 이야기를 했다.     


‘그래. 까짓것 열심히 하자. 죽으려고 했었는데 뭘 못 하겠어.’     


그리고 독한 마음을 먹게 되었다. 이것은 해일의 교묘한 화법에 빠진 것이었으나 그녀는 깨닫지 못했다.     


“이번 여정은 민정씨가 김현숙씨의 삶을 직접 체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겁니다.”     


그 와중에 해일은 또 놀라운 발언을 했다.     


“그건 어떻게 하는 거죠?”     


“김현숙씨가 삶의 특정한 순간에 어떤 생각을 했고 무엇을 느꼈는지 그대로를 체험하는 과정입니다.

육신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자기가 느꼈던 감정이나 머릿속 생각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하죠. 하지만 영혼의 세계에서는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말보다는 직접 해 보는 게 가장 빠르겠죠.”     


그러더니 순식간에 주변 풍경이 또 바뀌었다.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들이 운동장에 빽빽이 줄 맞춰 서 있었다. 진도가 굉장히 빠르다는 생각을 한 민정은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신을 잔뜩 부여잡았다.     


“김현숙씨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순간입니다.”     


풍경의 곳곳에서 수십 년 전이라는 단서가 보였다. 선생들의 품이 큰 양복, 80년대 스타일의 아동복, 여러 곳에 걸린 커다란 현수막과 글씨들.     

하늘이 아이들을 위해 해를 가려서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거기서 한 소녀가 단정하게 차려입고 줄 뒤쪽에서 뚱한 표정으로 앞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아이는 수백 명의 학생들 중 중에 하나였지만 지금 보는 풍경의 주인공이었다. 

풍경 속 열 살도 안 된 것 같은 소녀의 모습에서 지금의 지천명 김현숙을 연상할 수는 없었지만, 민정은 그 소녀가 자신의 엄마임을 알 수 있었다. 그냥 깨달아졌다. 그리고 그 모든 이미지들은 너무 생생했다. 혹시라도 이 화면이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염려해서 현실보다 더 현실감 있게 만든 것만 같았다.     


“와... 굉장하네요.”     


민정이 감탄했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새로운 세계였다.     


“그때 있었던 실제 장면을 그대로 가져온 겁니다. 이제 어린 김현숙씨의 머리에 손을 올리시면 이 당시 김현숙씨의 생각과 감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머리에 손을요? 알겠습니다.”     


민정은 떨림 반, 떨떠름함 반으로 어린 엄마에게 다가갔다. 다가가면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어린 엄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계속 그 얼굴을 쳐다보자니 복잡한 감정이 들 것 같아서, 그녀는 서둘러 손을 엄마의 머리 위에 올렸다.

그리고 그 즉시 민정의 머릿속에서 큰 반응이 일어났다. 민정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서 일어나는 반응에 적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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