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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틀리제 Sep 08. 2024

사연녀와 그녀의 수호천사들

4화 : 민정, 영혼의 세계를 배우다

천사들이 떠나고 난 뒤의 민정의 집, 제2본부에는 민정과 초록 머리의 천사만 남았다. 식탁에 앉아 민정을 쳐다보는 로운의 모습은 마치 제 집인 듯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빤히 민정을 바라보았다. 민정도 로운과 눈을 마주쳤다. 머리카락과 비슷한 초록색은 맑고 진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면서도 깊은 눈동자에 깃든 호기심과 호감이 감춰지지 않아서 민정은 기분이 좋아졌다. 약간 씰룩거리는 로운의 입가를 의식하자 민정은 정신적으로 무장해제되는 느낌이 들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네.”     


“좀 드세요. 먹으면서 편안하게 대화하면 좋겠어요.”     


로운이 손바닥으로 식탁을 가리키자 어느새 쟁반이 놓여 있었다. 쟁반에는 찻잔 두 개와 간식이 담긴 접시가 있었다.

마술 같은 현상에 민정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쟁반에 놓인 간식에 반응했다.     


“아, 마카롱.”     


이제는 시들해졌다지만 온 국민이 마카롱에 목맬 때가 있었다. 특히 민정 세대의 경우에 마카롱은 단순히 맛있는 간식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였고 친구들과 함께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었다.     


“살아있을 때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죽어서 먹게 될 줄은 몰랐네요.”     


민정은 돈이 없어서 마카롱을 거의 먹지 못했다. 마치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것처럼 말했지만 그렇진 않았고, 사 먹을 돈이 없으니 친구가 사 주는 것만 몇 번 먹어 봤었다.

그러나 민정이 돈 많은 친구를 사귀지는 못했고, 중고등학교 때에는 정말로 같이 마카롱 사 먹을 돈이 없어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게 한이 되어서 대학생이 되면 알바를 많이 해서 마카롱을 많이 사 먹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알바로 번 돈은 매일 식비와 교통비, 휴대폰 요금 등등 생존에 필요한 비용으로 거의 다 나갔다. 존재 자체가 돈이 드는 일이라는 걸 민정은 고등학교 때보다 대학 때 더 깊이 느끼면서 살았다.


그런 기억은 마음속에 일일이 남아 있기보다 거의 민정의 정서와 사상으로 굳어 버렸다. 마카롱이라는 과자에 민정의 인생관이 살짝 담겨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민정은 비교적 얇은 마카롱 하나를 집어 들고 응시했다. 이곳에 와서 처음 먹는 음식이었다. 따지고 보면 나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셈인데 민정은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그 이유도 궁금했지만 일단은 사소한 문제였다. 일단은 이걸 먹어보는 게 먼저였다. 사후세계에서 먹는 음식은 과연 어떤 맛일지.     


“종류별로 많으니까 맘껏 드세요. 그건 코코넛 맛이에요.”     


로운은 자부심을 가진 듯 어깨를 펴며 말했다. 민정은 마카롱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몇 번 씹던 그녀는 탄성을 질렀다.     


“우와!”     


“헤헤, 생전에 먹던 것보다 훨씬 맛있죠?”     


“네. 진짜 엄청 맛있는데요?”     


민정이 맛을 느끼기 위해 온 신경을 혀에 집중시키며 대답했다. 그리고 생전과 달리 왜 이렇게 맛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다.     


“이게 왜 더 맛있냐면 민정씨의 영혼은 육신에 비해 감각이 훨씬 더 예민하기 때문이에요. 앞으로 이 영혼의 세계에서 뭘 먹든 마찬가지일 거예요.”     


“아아, 그럼 맛없는 음식은 훨씬 맛없겠네요?”     


“그렇죠. 맛없는 것도 훨씬 심하게 느낄 테니까요.”     


“와, 신기하다.”     


민정은 마카롱의 남은 부분을 입에 털어 넣고 와작와작 씹었다.     


“차도 드셔 보세요.”     


“네.”     


민정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아주 부드럽고 깊은 맛이 났다. 마카롱과 어울리는 풍미가 있는 맛이었다. 차는 전혀 모르는 민정이 마시기에도 고급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정도였다.     


“아주 훌륭해요. 뭔가 귀족이 된 것 같아요.”     


지금 보니 찻잔도 뭔가 아주 비싸게 생겼다. 화려하거나 예쁘다기보다 비싼 다기 세트의 느낌. 여전히 하찮은 모습인 집에서 먹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순간 민정은 돈 많은 권력을 누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건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민정은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저희가 가르쳐 드릴 게 참 많아요. 민정씨가 지금 상황이 얼마나 당황스러울지 잘 알고 있어요.”     


로운이 말을 꺼냈다. 과연 그 말대로였다. 맛있는 다과로 기분은 좋아졌지만 민정은 늘 불편했다. 이곳의 법칙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이 세계, 사후세계는 생전의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천사들의 외모부터가 그랬고, 순간이동을 하는 데다가, 천사가 귀신을 총으로 쏘기도 했다. 이번에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자기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외국에만 나가서 살아도 문화가 달라서 적응하기가 그렇게 힘들다는데, 이건 외국에 나간 것이 아니라 외계에 나간 수준이었다.     


“앞으로 천천히 여러 가지를 알려드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민정씨 편이에요.”     


로운이 따뜻하게 말했다. 민정은 이때 확실히 깨달았다. 로운과 해일은 민정을 대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고.

로운은 민정에게 친절했고, 해일은 그렇지 않았다. 민정은 천사도 사람과 똑같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친절한 천사도 있고 그렇지 않은 천사도 있는 것이다.      


친절함과 친절하지 않음에 따라서 섣불리 로운은 좋은 천사고 해일은 나쁜 천사라고 단정 지을 만큼 민정은 어리진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 웬만하면 해일보다는 로운과 많은 여정을 함께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런 로운의 기대는 금방 부서졌다.     


“해일 천사님이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셨을 텐데요, 추가적으로 설명을 드리자면 앞으로 대부분의 여정은 민정씨와 해일 천사님 두 분이서 진행할 거예요.”     


“아, 그래요? 다른 천사님들은 함께 안 하시나요?”     


“네, 저희는 맡은 일이 조금 달라요. 이번 여정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분은 해일 천사님입니다.”     


민정은 아쉬운 티를 내었지만 로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로운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여정은 주로 이곳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해서 진행하는 경우가 많을 거예요. 이동하는 방식은 여기에 처음 오셨을 때처럼 주로 순간이동을 이용할 거예요. 그리고 여정이 끝나면 이곳으로 돌아와서 잠깐 정리하고 쉬면서 다음 여정을 준비할 거예요.


그리고 모든 여정이 전부 계획되어 있는 것은 아니에요. 저희가 준비한 여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에 민정씨의 의견이 반영되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서 원래의 계획을 바꾸어서 진행할 수도 있을 거예요.” 

    

“알겠어요.”     


“지금 민정씨는 인생여정이 뭔지 좀 애매하실 것 같아요. 인생에 대해서 알아본다는 게 무슨 말인가 싶으시겠죠.

인생여정은 민정씨의 삶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이에요. 민정씨 본인에 대한 일일 수도 있고,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것일 수 있고, 민정씨와 관련된 다른 사람에 대한 일일 수도 있고, 또 때로는 민정씨와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어요. 어떤 것은 박물관을 관람하듯이 하는 것도 있을 것이고, 헬스장에서 운동하듯이 하는 것도 있을 거예요. 


그러한 것들을 배우면서 여기서 21일간 존재하는 방식은 육신으로 살 때와는 좀 다를 거예요. 그리고 배움이란 쉽지 않잖아요? 어쩌면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이 닥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여정을 총괄하는 해일 천사님은 굉장히 능력이 뛰어난 분이시고, 저희도 민정씨를 도와드릴 테니 이 기간이 지금까지 민정씨의 모든 삶을 통틀어 가장 뜻깊은 시간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저희도 최선을 다할게요.”      


“네, 고마워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일단 지금 꼭 설명드려야 할 부분은 다 설명드린 것 같고, 나머지는 하면서 또 설명해 드릴게요. 이제 궁금하신 것 있으시면 물어보세요. 가능한 만큼 설명해 드릴게요.”      


민정이 질문할 차례였다. 질문할 것이 너무 많았다.     


“여쭤볼 게 있는데요.”     


“무엇인가요?”     


“지금 이곳은 저희 집인가요?”     


민정은 참 웃긴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곳은 집인 듯 집인 것 같지 않았다. 구조나 커다란 가구 같은 큰 구조물은 똑같은데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이사를 막 가려고 하는 새 집 같았다.      


“아니요. 지금 민정씨는 영혼으로 존재하고 있고, 육신은 병원의 침대에 누워 있죠. 그래서 민정씨가 존재하는 세계도 육신의 세계가 아닌 영혼의 세계입니다. 이곳이 인생여정을 진행하는 동안 민정씨가 지낼 집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말인즉 이곳은 육신의 세계가 아닌 영혼의 세계이자 민정 영혼의 집이었다. 그런데 이 집은 4층짜리 빌라였고 민정은 건물 입구로 들어왔다. 들어올 때 보기에는 4층 건물이 원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럼 다른 주민들의 영혼도 이 집에서 살고 있는 건가?     


“그럼 다른 옆집 사람들도 지금 옆집에 영혼이 살고 있는 거예요?”     


“그건 아니에요. 이 집은 민정씨의 영혼의 집이지만, 이 건물에 이 집 외에 다른 공간은 존재하지 않아요. 이 집에서 나가서도 302호 말고 다른 호에 들어가려고 해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 신기하네요.”     


“세계가 다르니까 물리적인 법칙도 달라서 먼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하기도 하고, 큰 건물을 한순간에 만들기도 하죠. 하지만 영혼의 세계라고 해서 마법처럼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이쪽 세계의 법칙에 해당하는 질서를 위반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도 생전에 비하면 훨씬 좋고 편리한 것 같은데요?”     


“그렇게 생각되시겠지만, 어떤 것들은 육신으로는 쉽게 할 수 있는 것을 영혼으로는 못 하기도 해요. 다 상대적인 거죠.”     


“감사합니다. 그럼 다른 천사님들은 지금 어디 계세요?”     


“저희가 평소에 일을 하는 사무실에 계시죠. 사무실은 수호천사본부에 있어요. 저희 수호천사들의 본진이죠.”     

지금 루미 등이 있는 제1본부 ‘성’은 수호천사본부에 있지 않기 때문에 로운은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는 않았다. 제1본부는 민정에게 철저히 비밀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천사님들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요. 사람이랑 똑같이, 아니 훨씬 예쁘고 잘 생겼는데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요.”     


“흐음, 천사들이요.”     


로운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민정의 눈에 담긴 호감 섞인 호기심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얼굴은 웃고 있어도, 인간인 민정에게 천사라는 존재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민정에게 비밀로 해야 하는 부분도 있었기에 머리는 팽팽 돌아갔다.     


“천사와 인간의 큰 차이점 중 하나는 인간은 육신과 영혼으로 존재하는 것에 비해 천사는 영혼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죠.

인간의 영혼과 천사는 서로 비슷한 존재라고 볼 수 있어요. 물론 근본적으로 천사와 인간은 아예 다르게 창조되었지만, 고등한 영적 생명체라는 점에서 유사하죠.

하지만 인간의 육신의 입장에서 영혼으로 존재하는 천사는, 음... 말하자면 임무를 받고 지구에 내려온 외계인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천사들도 저 우주 바깥에 있는 천국에서 임무를 받아 내려왔어요. 다만 우리는 지구에서도 영혼의 세계에서 존재하니까, 외계인과 귀신을 섞은 느낌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 같네요.”     


“그렇군요. 어떤 느낌인지 이해했어요.”     


민정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고 그녀가 아직 알아선 안 되는 사실이 포함되지도 않는 설명이었다. 이는 해일과 사전에 합의된 부분이었고 로운이 단독으로 판단해서 조정한 대답은 아니었다. 이어서 로운은 필요한 것들을 설명했다.     


“천사들은 저마다 맡은 역할이 있어요. 그 임무를 사명이라고 하죠. 사명의 종류는 굉장히 많은데, 그 중에서 저희 수호천사들은 인간을 경호하는 사명 하고 있어요. 인간은 누구나 천사의 경호를 받거든요. 그건 처음부터 결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한 일이에요. 우리는 수호천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고, 민정씨를 담당하는 것으로 배치를 받은 것이죠. 특히 루미 천사님 같은 경우엔 민정씨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민정씨를 경호해 왔어요.”     


“와, 정말요?”     


민정이 기쁜 듯이 반응하고는 이어서 질문했다.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저를 지키신다는 말이죠? 아까 여기에 오기 전에 엄청... 무서운 존재들을 만났어요. 해일 천사님이 구해주셨고요.”     


질문하는 민정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해일 천사가 그들을 손쉽게 퇴치해 버렸지만, 그 소름끼치는 감각만큼은 아직도 생생했다. 살아생전엔 그렇게 끔찍하고 불길한 것들을 본 적이 없었다.

로운도 심각하게 말을 이었다.     


“그것은 악령입니다. 악한 영혼이죠. 사람도 선한 사람이 있고 악한 사람이 있지만, 영혼은 육신보다도 훨씬 선과 악이 뚜렷한 존재거든요. 모든 영혼은 선한 영혼 또는 악한 영혼으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천사들이 인간을 지키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것처럼 악령들은 인간이나 다른 영혼을 해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아요.”     


로운이 목소리를 더 낮추었고 눈빛에도 매서운 투지가 깃들었다.     


“해일 천사님이 그놈들을 쉽게 처리하셨던 것처럼 보통의 악령들은 저희 천사들 선에서 손쉽게 정리가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은 놈들도 있지요. 천사와 동등한 격을 가진 악령들. 그들을 사탄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의 모든 어둠보다 더 어둡고 어떠한 악보다 더 악한 존재예요. 비열하지만 강력한 영이지요... 일단은 그 정도만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너무 낯선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정신이 없으실 테니까요.”     


“네, 고마워요.”     


“천사와 사탄은 숙적이고 서로 엄청나게 죽이지만, 사실 영혼은 죽여도 죽지 않아요. 하지만 그 영혼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손상을 입으면 일시적으로 소멸하고, 보통 40시간 후에 부활하죠. 목숨은 무한이지만 고통이 크기 때문에 천사라도 죽는 것은 두려워요.”     


“그렇구나. 신기하네요.”     


“이제 시간이 다 되어 가네요. 마지막으로 물어보실 게 있으실까요?”     


“아... 아까 보니까 해일 천사님은 처음에 저랑 만났을 때는 군복을 입고 계셨는데 여기로 돌아오니까 제복을 입고 계시더라고요. 순식간에 갈아입으시던데, 다들 옷을 그렇게 군복을 입어요?”     


별로 중요한 질문인 것 같지는 않았지만 민정은 그게 궁금했다. 민정은 소녀의 모습을 한 로운이 그런 군복을 입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해일에게는 무척 어울리는 옷이었지만 로운이나 루미, 나래는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요. 해일 천사님이 그 때 입으셨던 옷은 모든 수호천사들이 입는 게 아니에요.”     


로운이 황금색 제복인 자신의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수호제복’이고요. 모든 수호천사들이 같은 디자인의 수호제복을 입어요. 수호천사의 공통 유니폼인 거죠.

그런데 수호천사들이라고 해서 모두 이 옷만 입고 경호를 하는 게 아니에요. 수호제복 외에 ‘전투제복’이 있어요. 이 전투제복은 수호천사들이 무력을 사용해야 할 때 주로 입는 옷이에요.”     


로운은 말을 잠깐 멈추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민정도 따라서 마셨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차는 여전히 따뜻했다.     


“전투제복을 입으면 좀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어요. 전투 쪽으로 능력이 향상되는 것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이 전투제복은 천사들마다 다 달라요. 그러니까-”     


로운이 잠깐 말을 멈추고 머릿속으로 설명을 정리했다.     


“사람이 각자 개성대로 성격도 외모도 다양하듯이 천사들도 개성대로 다양하거든요. 그런 자기의 특성을 나타내는 상징들이 그 전투제복에 반영이 된, 자기만의 전투제복을 입는 거죠.

말하자면 시그니처 슈트 같은 거라고 보면 되겠어요. 아이언맨이 갑옷 같은 슈트를 입고 캡틴 아메리카가 쫄쫄이에 방패를 드는 것처럼요.”     


“우와, 신기해요.”     


민정은 천사들이 각자의 시그니처 슈트 같은 게 있다는 것과, 천사가 히어로 영화를 언급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해일 천사님은 군인 같은 성격이신 거죠. 그분의 전투제복은 특수부대를 모티프로 했다고 해요. 실제로 해일 천사님은 수호천사들 중에서도 무력이 굉장히 강하시고, 작전을 짜는 능력도 출중하시고, 충성심이 강하시고 예, 아니오가 확실한 군인 같은 성향이에요.”     


해일을 언급하는 로운에게서는 약간의 존경심이 숨길 수 없이 묻어나왔다. 민정은 그걸 느끼면서 로운의 말에 동의했다.     


“와, 진짜 그런 것 같아요.”     


민정은 군인이 어떤지 잘 몰랐지만 해일이 군인 같다고 하는 것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잘 벼려진 칼 같은 사람, 아니 천사가 해일이었다.     


“그럼 로운씨도 전투제복이 있겠네요?”     


“있죠. 보여드릴까요?”     


“정말요? 너무 보고 싶어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민정은 기대했다.     


“그럼 약간 마술하는 것처럼...”     


로운이 손가락을 딱, 튀겼다. 그러자 빌라 거실의 불이 꺼져서 어두워졌다. 그리고 1초 만에 다시 켜졌다. 물론 이미 로운은 모습을 바꾼 후였다.     


“우와-”     


민정은 감탄했다. 로운의 모습이 수호제복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단발에 가까웠던 머리카락이 거의 무릎까지 내려오면서 훨씬 풍성해지고, 색깔도 밝은 초록색에서 아주 짙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옷은 밝은 갈색 톤의 원피스에 코가 뾰족한 가죽 신발을 신고 있었고, 얼굴에는 굴곡진 어떠한 문양이 맵시 있게 그려져 있었다. 비슷한 문양이 입고 있는 원피스에도 가득했다. 원피스의 문양은 로운의 등 뒤의 허공에 뻗어나더니 양쪽으로 퍼져 형체를 이루었다. 마치 날개 같았다. 그 문양에서는 원시림의 생명력이 느껴지는 어떤 아우라가 풍겼다.     

옷만 바뀌는 게 아니라 외모 자체가 달라졌다. 거기서 민정은 로운의 외모뿐만 아니라 풍기는 느낌과 분위기마저 엄청나게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떤 느낌이에요?”     


로운이 물었다.     

초록색과 갈색, 얼굴과 옷의 문양, 뾰족한 코의 가죽 신발과 나비 같은 날개, 매력적이면서 귀여움이 남아 있는 모습에서 민정은 뭔가가 떠올랐다.


그건 해일의 군인의 모습이 현실에 있는 것과 달리, 현실에는 없는 상상 속 세계의 존재였다.     


“판타지 같은 데 나오는... 정령?”     


“맞아요. 딱 머릿속에 떠오르죠? 이렇게 딱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영혼의 세계의 특징이에요. 참고로 정령 중에서도 나무의 정령입니다.”     


“네. 진짜 신기해요.”     


“그래서 사실 이건 옷을 갈아입는다기보다 변신하는 것에 가까워요.”     


“완전 멋있어요. 대박이에요. 진짜로 히어로 영화 캐릭터 같아요.”     


민정이 아이처럼 흥분해서 말했다. 각자의 코스튬으로 변신 같은 걸 한다니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뭐, 비슷하죠. 슈퍼히어로는 지구를 구하고, 저희는 영혼을 구하는 차이 정도?”     


“그렇네요.”     


민정은 로운의 모습에 오랫동안 들떠서 옷도 머리도 만져보고 감탄하고 했다. 얼굴과 옷의 문양은 탈부착식이었고 날개도 뗄 수 있었다. 그들은 문양을 떼어내서 민정의 얼굴에도 붙이고 마주 보며 까르륵거렸다.

그리고 여정을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다.     


“시간이 다 되었네요. 이제 해일 천사님이 오셔서 첫 번째 여정을 진행하실 거예요. 저를 비롯한 다른 천사님들은 여기서 기다리실 거고요.”     


“그렇구나. 알겠어요.”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음에도 민정은 아쉽다는 듯 로운을 쳐다봤다. 그런 민정의 표정을 읽은 로운이 고민하다가 말을 보탰다.     


“해일 천사님은 좋은 분이세요. 민정씨가 드신 저 간식들, 해일 천사님이 준비하신 거예요.”     


그러면서 입을 손으로 살짝 가리고 눈을 찡긋거렸다. 해일에게는 비밀로 하자는 뜻이었다. 민정은 웃음을 터뜨렸다.     

로운의 옆에 순간이동으로 해일이 나타났다. 그를 흘끔 본 로운은 주먹을 내밀고서 불끈 쥐고 외쳤다.     


“민정씨, 파이팅!”





“야 피철철, 죽고 싶냐?”     


“쩝쩝, 피칠갑, 왔나?”     


“내가 개고생할 동안 밥이나 처먹고 있었어?”     


“그럼 뭐 손 모으고 기도라도 하고 있어야 하나?”     


“어.”     


“닥쳐, 쩝쩝.”     


“아, 정찰 결과 내용 안 들을 거야?”


“말해. 쩝쩝.”     


“무사히 도망쳤다.”     


“...?”     


“역시, 천사들 사이에서 전설을 써가는 ‘라이징 스타’ 해일 놈도 나를 잡진 못하더...크악!”     


“미친놈아, 빨리 본론이나 말해.”     


“죽고 싶냐? 끓는 물을 던지면 어떻게 해?”     


“헛소리 하지 말고 본론이나 말해.”     


“예상과 다를 게 뭐가 있겠나? 조민정 그년의 <인생여정>이 시작됐어. 당연하지만 딱 시작만 하고 바로 이동하더군. 제1본부인 ‘성’에 가진 않았을 테고 제2본부인 ‘빌라’에 갔겠지. 아무튼 제길, 나는 놈들이 어디로 이동하는지도 알아내지 못하는데. 시키니까 하는 거지만 뭐 하러 이런 쓸데없는 정찰을 하는지.”     


“그렇군. 쩝쩝.”     


“아, 그만 쳐먹어라고!”     


“지금 먹어야 제일 맛있다. 이게 얼마나 수고를 들여서 만든 건데.”     


“그럼 수고를 들이지 말든가.”     


“그러기엔 이건 너무 맛있군.”     


“넌 정말로 참사탄이다. 지옥에 떨어진 인간 뇌 수프, 그것도 자기 뇌를 자기가 직접 요리해서 갖다 바치게 하다니.”     


“뇌를 뜯어내도 몸이 움직이게 하려면 고문을 얼마나 해야 하는지 아냐? 그만큼의 정성이 들어간 요리라고.”     

“그래서 그동안 그렇게 바쁜데도 꾸역꾸역 고문해서 만든 요리라는 거군. 내가 개고생할 동안에. 나는 새로 오신 귀한 분들 수발을 들고 시키는 대로 정찰까지 다녀왔는데.”     


“내 할 일은 다 했다. 쩝쩝.”     


“그래. 너에겐 그걸 만들고 또 처먹을 권리가 있지. 그건 알겠는데. 솔직히 그게 뭐가 맛있냐? 더러운 영혼의 더러운 뇌 수프인데. 네가 참사탄이라고 해도 그렇지 인간 극한의 고통으로 만든 음식이라고 해서 그 더러운 걸 맛있다고 느끼는 건 너무 정신 승리 아니냐? 나 같으면 토 나와서 못 먹는다.”     


“피칠갑, 닥쳐라. 내 음식을 모욕하지 마라. 네놈의 사탄으로서의 소양이 부족한 것일 뿐이다.”     


“별 미친 놈 다 보겠네. 근데 흐흐, 뭐 어떡하게? 한 판 붙게? 너 나한테 이길 자신 있냐?”     


“...밥맛 떨어지는 새끼. 해일 천사놈이 네 대가리를 날려버리지 못한 게 아쉽군.”     


“좆같은 말 하지 마라. 어쨌든 나는 놈한테서 도망 정도는 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건 확인했다. 나도 뭐 도망친 게 자랑은 아니지만, 네놈은 도망이라도 칠 수 있냐?”     


“흐음, 그래? 그래서 만나본 소감은?”     


“강하긴 하다만. 소문으로 들은 것에 비해선 별 볼 일 없었다. 라이징 스타라니 백 년 만에 나오는 재능이라니 말은 많지만, 소문은 부풀려지기 마련이지. 천사놈들이 자기들 사기를 올리려고 희망적인 마스코트를 내세우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 우리가 놈을 씹어 먹으면 여러 가지로 좋겠지. 어렵게 모신 '그분'이라면 해일을 잡을 수 있을 테니.”     


“흠, 아무리 그래도 해일 그놈이 네놈을 못 잡을 정도는 아닐 텐데. 소문이 아니라 확실하게 확인된 실력으로만 봐도 그놈이 네놈을 놓치는 일은 없는데.”     


“우리 윗대가리 새끼들은 그걸 알고도 나를 정찰을 보냈단 말이지. 아무튼, 그럼 내가 도망친 게 아니라 그놈이 나를 놓아준 거란 말인가?”     


“그렇지. 놈은 자기 실력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더군. 지금 너를 잡아봤자 놈에겐 아무 이득이 없으니 숨긴 거겠지. 너를 정찰을 보낸 것이 우리가 거는 도발이었다면, 놈이 너를 놓아준 것은 도발에 대한 도발이지.”     

“망할 새끼...”     


“손바닥 위에서 잘 놀아났군. 쩝쩝.”     


“망할 새끼들!! 다 죽여버리겠어! 찢어 죽일 것이다!! 뼈를 뽑아내서 그걸로 목을 치고 뒷구멍에 꽂아서 위로 꼬치를 꿰어 버릴 것이다!!”     


“좆같은 건 윗분들이나 해일 놈이나 마찬가지군. 알면서 뭘 흥분하고 그러냐. 이길 준비나 해라, 멍청한 피칠갑.”     


“흠, 놈이 자기 힘을 얼마나 숨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리 개 같은 윗분보다 더 강할 것 같진 않던데. 비록 자기들 기싸움에 나를 보내는 좆같은 짓을 하긴 했지만, 그분은 정말 아득할 정도로 강했다. 적어도 루미, 나래, 로운 세 천사놈이 떼로 덤벼도 그분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았는데. 거기에 그분이 데리고 다니는 ‘두 사탄’들도 있으니. 거기에 놈들은 아직 그분이 합류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고.”     


“그분이 조민정의 원래 담당인 세 천사놈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건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마 해일 놈을 그분 혼자서 잡기는 힘들 것 같긴 하다. 거기에 그분은 조민정을 무너트린다는 우리 임무보다 해일 놈을 잡는 것을 우선하는 느낌도 있으니 뒤통수 맞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하지만 그분을 모시는 그 두 사탄이 있으면 아무래도 해일 놈을 잡을 수는 있을 테니까, 최소한 틈이라도 만들어 준다면 또 우리가 하면 되고.”     


“그래.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질 수가 없는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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