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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틀리제 Sep 06. 2024

사연녀와 그녀의 수호천사들

3화 : 민정, 천사들을 만나다

그리 크지 않은, 10층대의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구조는 상당히 작위적이어서 여섯 개의 동이 육각형 모양으로 각각 배치되어 있었고 중앙에는 놀이터가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뛰놀기 좋게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놀이터의 중앙에는, 아파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주변의 건물들과 비슷한 키의 성(城) 하나가 있었다.


아파트 단지 중앙의 놀이터와 그 중심의 성이었다. 흰색의 네모 반듯하고 단조로우며 오밀조밀한 아파트 건물과 달리 중심의 성은 동화 속에 나올 것처럼 동글 반짝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고, 마냥 아기자기하지만도 않게 구조적으로 완벽한 균형과 조화로 예술성을 갖추고 있었다. 

나름 봐줄 만한 모습이긴 해도 영혼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 치고는 많이 부족한 수준의 공간이었지만, 성의 입구에서 원형 테이블을 두고 의자에 앉아 있던 세 천사들은 그곳이 자기들의 집인 것처럼 익숙하게 굴었다.  

   

“해일이가 민정이를 만났답니다. 우리도 슬슬 이동해야 하겠네요.”     


빨간 머리의 남자 천사가 말했다. 그는 체격이 건장했고 목소리가 굵었다.     


“헤헤, 기대돼요.”     


초록 머리 여자가 들뜬 듯 대답했다. 남자에 비하면 키나 덩치가 많이 작고 어려 보이는 외모였다.     


“뭘, 우리가 민정이를 봐온 게 몇 년인데.”     


빨간 머리의 남자가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초록 머리 여자는 머리카락이 약간 광택을 내고 있었고 빨간 머리 남자는 조금 짙고 색이 두꺼웠다.     


“그래도 지금은 특별한 경우잖아요. 대화도 할 수 있을 거고. 세상에, 이런 날이 오다니.”     


초록 머리 여자가 반박했다.     


“그래도 본질은 똑같다고. 우리가 달리 대할 것도 없어.”     


빨간 머리가 의젓하게 말했다.     


“나래 선배님, 또 허세에요? 자기도 지금 되게 신났을 거면서.”     


“로운아, 허세라니. 당연한 거야.”     


“눼- 알겠습니다.”     


초록 머리 천사, 로운이 혀를 날름거리며 대충 대답했다.     


“나처럼 당당하면서 따뜻하게 대해 주라고. 긴장하지 말고.”     


빨간 머리, 나래가 가슴을 쫙 펴며 엄지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켰다. 엄청나게 작위적이었다.     


“손 좀 그만 떨면서 얘기해요.”     


“이건 절대로 긴장해서 그런 게 아니야.”     


로운과 나래가 대화를 주고 받는 것을 보며 흰 머리 여자는 조용히 웃고 있었다.     


“팀장님은 어때요?”     


로운이 눈을 돌려 흰 머리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의 머리카락은 아주 깨끗한 흰색이었다. 밤사이 조용히 내린 눈 같았다. 나래와 로운의 외모도 뛰어났지만 이 흰 머리의 여자는 둘을 압도하는 외모와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처음 겪는 일은 뭐든지 새롭고 설레지.”     


여자는 목소리도 미소도 나긋하고 감미로웠다. 그에 흥분한 초록 머리가 빨간 머리에게 소리쳤다.     


“봐요, 팀장님도 설렌다잖아요.”     


“내가 안 설렌다는 게 아니고, 마음속의 설렘을 누르고 의연하겠다는 말이야. 알겠니? 우리가 민정이에게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야 천사다운...”     


“선배는 전혀 어른스럽지 않은데요.”     


초록 머리가 빨간 머리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빨간 머리가 잠시 어떻게 ‘어른스럽게’ 반박할지 고민했지만, 하얀 머리의 천사가 명령을 내렸다.     


“뭐 하니, 얘들아. 어서 가야지. 로운이는 제2본부로 먼저 가고 나래는 나랑 여기 봉인하고 가자.”     


“네, 팀장님. 빨리 가야지.”   

  

초록 머리의 여자 천사가 사라졌다.     


“조민정의 육과 혼과 영의 교통을 봉인한다.”     


하얀 머리의 천사가 주문을 외우듯 말했다. 이어서 빨간 머리의 남자 천사가 허공에 손짓을 하자 그들의 머리 위에서 비추던 가로등의 불빛이 꺼졌다.     

그 가로등과 열을 맞춰 많은 가로등이 단지 전체에 있었다. 두 천사의 손짓에 따라 모든 가로등이 차례대로 꺼졌다.

그러자 아파트 단지는 회색으로 물들었다.

     

“다 했으면 가자.”     


회색으로 물든 세상의 모든 것이 멈췄다. 천사들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고 공기조차 가만히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루미 천사님.”     


“갑자기 이름을 부르니. 왜요, 나래 천사님?”     


“솔직히 긴장이 많이 되네요.”     


“왜 그래. 너도 알고 있잖아. 이번에야말로 민정이는 잘 될 거야.”     


“그럴 거라고 믿죠.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전부 이룰 순 없지 않을까 싶어서요.”     


“...로운이도 비슷하게 생각하겠지?”     


“저보다 더하면 더하지 않을까요. 성격이 밝지 생각이 없는 애는 아니니까.” 


흰 머리 천사는 고운 이마를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회색 세상 속에서도 흰색 머리는 조금도 빛바래지 않았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해야지.”     


“뭐, 그렇죠.”               





새로운 세상에서 눈을 뜬 민정의 흥미를 크게 끈 것은 처음은 해일의 존재였고, 두 번째는 인생여정이라는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첫 번째 것은 영 이상한 스타일이었고, 두 번째 것은 민정에게 친절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나 세 번째, 순간이동은 민정의 흥미를 크게 끌었을 뿐만 아니라 강한 열망과 희망을 갖게 만들었다. 세상에 이런 편리한 기능이 있다니. 이것만 보면 이쪽 세상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방금 그들은 차로 최소 30분은 걸리는 긴 거리를 한순간에 이동한 것이었다.     


“우리 집이네요.”     


“그렇습니다.”     


그들이 순간이동으로 도착한 곳은 민정의 집이었다. 경기도에서 아직 집값이 비싸지 않은 곳이었다. 집이 비싸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는 위치가 최악이고, 집이 무척 낡았기 때문이다. 지은 지 30년 가까이 된 빌라였다.

낡고 음침한 집은 그 누구도 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민정도 여기서 살기 싫었다. 그러나 지금 죽은 후에도 여기로 돌아왔다.     


“들어가죠.”     


해일이 빌라의 문을 열었다. 그들은 계단을 천천히 걸어올라 3층의 302호에 들어갔다. 좁은 방 두 개에 거실과 식탁마저 좁은 그 집이었다. 민정은 엄마랑 둘이서 살았기에 좁은 집에 살아도 좁은 것 때문에 불편한 점은 많지 않았다. 가끔 지독하게 답답해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어, 희한하네요.”     


익숙한 집에 들어선 민정은 가장 먼저 감탄 섞인 의문을 드러냈다.     


“우리 집인데 우리 집이 아니네요. 신발장이나 벽지 같은 기본 가구나 인테리어는 그대로인데 물건이 하나도 없어요. 신발장 안에 신발, 벽에 거울이랑 시계...

어떻게 된 거예요?”     


“설명은 차차 해 드리기로 하고, 우선 이 쪽으로 오시죠.”     


해일이 민정을 그녀의 집에서 안내해서 거실로 데리고 갔다. 거실의 식탁에는 낯선 세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중간에 앉은 사람이 민정에게 인사했다. 민정은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금색 제복을 입은, 흰색 머리카락을 단정히 묶었고 빛나는 까만 눈동자를 가진 여자였다. 생김새 전체가 동양적인 둥근 미를 가졌는데 코는 오똑했다. 어깨는 가녀려 보였는데 제복을 입으니 균형 잡혀 보기에 좋았다.

여성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나긋하고 감미로운데 힘이 있었고, 톤은 높지만 무거운 존재감이 있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한 마디로 하자면 걸어다니는 아름다움이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화장도 안 했는데 얼굴에서 빛이 났다. 해일 천사도 이 세상 외모가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생전 본 그 어떤 남자보다도 잘생겼었다. 그러나 이 천사와 비교하면 해일도 길가에 나뒹구는 돌멩이 같았다.     


“음. 와우, 매우 아름다우시네요. 여신 같으세요.”     


도저히 그 말을 참을 수가 없었다. 원래 민정은 다른 사람과 친해질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속마음을 잘 이야기하지 않는데, 이 천사에게는 왠지 호감이 생기고 뭔가 칭찬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정은 그것이 천사의 미모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민정의 말에 다른 천사들이 주변에서 조용히 킥킥거렸다. 흰 머리 천사는 쑥스럽다는 듯 대답했다.     


“하하, 감사합니다. 저는 루미라고 해요.”     


“네, 루미 천사님. 만나서 반가워요.”     


“두루미의 루미에요.”     


묻지도 않았는데 옆에서 빨간 머리 천사가 덧붙였다. 새하얀 두루미, 확실히 눈앞의 천사에게 너무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다음으로 빨간 머리 천사가 민정에게 물었다.     


“저는 나래라고 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아, 아뇨. 잘 모르겠어요.”     


“날개의 순우리말입니다.”     


“아, 그렇군요.”     


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상의 반응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래라는 빨간 머리의 천사도 물론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생겼지만, 루미에 비하면 큰 감흥이 없게 느껴졌다. 해일도 루미도 각자가 뚜렷하고 강렬한 느낌을 주는데 그에 비해 나래 천사는 좀 평범해 보였다.     


“좋은 이름인 것 같아요.”     


민정은 적당히 대답했다. 나래는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해일과 달리 이 천사는 성격은 무척 좋아 보였다.     


“말씀드렸듯 저는 해일(海日)이고, 바다 위에 뜬 태양이라는 뜻입니다.”     


민정은 루미의 경우와는 다르게, 해일이라는 이름이 자기가 생각한 해일의 이미지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바다에 뜬 태양이라면 퍽 감성적인데. 해일은 낭만보다는 원리원칙적인 것 같았다. 군복을 입고 있는 것도 그렇고. 어, 군복?     


“옷이 바뀌셨네요?”     


민정이 해일에게 물었다. 어느새 해일은 흰색 바탕에 황금색이 조금 섞인 제복을 입고 있었다. 다른 천사들도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이게 저희 제복입니다.”     


해일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언제 갈아입은 것인지. 더 뭔가를 물어보기도 애매해진 민정은 남은 한 천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는 새로운 이라고 해요! 로운이라고 불러 주세요.”     


마지막, 밝은 초록 머리의 여자 천사가 활기차게 말했다.     


“네, 로운 천사님.”     


민정은 그런 로운이 귀여워 보였다. 로운은 외모로 보기에 십 대 중후반, 고등학생처럼 보였다. 십 대도 십 대 나름이지만 로운은 귀엽고 활기찬 십 대의 느낌이었다. 너무 귀엽고 애정이 생기는 인상이었다.     

민정은 다른 천사들도 나이를 짐작했다. 천사들이라서 실제 나이는 모르겠지만 추측해 보자면 해일은 이십 대 후반으로 보였고, 나래는 이십 대 초반으로 보였으며, 루미는 이십 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보였다.     

소개가 끝나자 해일이 설명을 덧붙였다.     


“이상 4명이 현재 민정씨를 경호하는 수호천사 팀입니다. 팀장, 리더가 루미 천사님이고,”     


압도적인 아름다움의 소유자, 새하얀 루미 천사는 나의 수호팀장. 민정의 마음속에 경외심이 무럭무럭 자랐다.     


“민정씨에게 소개드린 순서는 경력순입니다.”     


나래가 둘째, 해일이 셋째, 로운이 막내라는 뜻이었다. 외모만으로 보면 해일이 최고 연장자인 것 같았으나 보기와는 달랐다.

해일의 소개를 받은 팀장 루미가 이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소개는 다 했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죠. 해일 천사님에게 설명을 들으셨겠지만, 민정씨는 앞으로 17일 동안 인생여정을 통해서 영혼의 세계인 영계(靈界)에서 여러 가지를 경험해 볼 겁니다. 저쪽을 보시면 남은 기간이 달력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루미 천사가 가리킨 곳에는 달력에 17이라고 크게 쓰여 있었다. 원래도 달력이 있던 자리였다.     


"그리고 육신의 세계인 육계(肉界)로 돌아가 육신으로 계속 살아갈지, 혹은 육신의 삶을 포기하고 영계에서 영혼으로 살아갈지를 선택하시게 됩니다.”     


루미 천사가 진지하게 말했다. 자못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여정은 하나씩 차근차근 진행할 것이고, 중간중간에 쉬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 대략적으로 어떤 여정을 할 것인지는 정해져 있지만, 여정의 진행 상황에 따라서 변동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일정을 진행하기 전에 저희끼리 마무리 회의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동안 민정씨가 여기 와서 궁금한 것들에 대해서 로운이가 설명해 드리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데, 어떠세요?”     


“네! 제가 설명해 드립니다~”     


초록 머리의 로운 천사 기다렸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네, 좋아요.”     


민정은 거의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녀는 루미 천사의 말이라면 뭐든 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저희는 다른 곳에서 회의를 하고 오겠습니다. 두 분은 여기서 대화를 나누세요.”     


“조금 있다가 뵐게요.”


그리고 세 천사는 순간이동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나타난 곳은 루미, 나래, 로운이 있던 아파트 단지였다. 여전히 이 세상은 잠겨서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봉인 해제.”     


루미가 선언했다. 가로등이 일제히 켜지고 공기가 흘렀다. 희미한 새 울음소리도 났다. 천사들은 성의 입구 앞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히죽거리는 나래의 말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할까요, 여신님?”     


“조용히 해.”     


루미가 나래에게 쏘아붙였다.     


“헤헤, 화 내시는 거에요? 여신 같은 루미 선배님?”     


“천사가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그건 신성모독이야.”     


“알겠어요. 안 할게요. 흐흐흐흐.”     


나래가 여전히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정말 못살아. 해일 천사님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특별임무를 받아 파견을 나왔더니 천사들 상태가 이상하다고, 무슨 사탄들이나 하는 말을 하냐고 해도 할 말이 없어.”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해일이 끼어들었다. 민정 앞에 있을 때와는 달리 해일도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민정이 반응이야 뭐, 사람이 모르면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거고. 천사가 사람한테 여신 같다는 말을 들으면 그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해일이가 그렇게 재미없는 애가 아니라니까요?”     


나래가 거들었다.     


“해일 천사님, 웃지 마세요.”     


루미는 입술을 삐죽였다.     


“예, 알겠습니다.”      


해일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루미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시작은 무난하네요. 거의 계획한 대로 되었어요. 민정이가 깨어나고, 악령을 마주치고, 해일 천사님의 보호를 받으면서 여정을 시작하는 것까지.”     


민정이 여정을 시작하는 현장에 있지 않았던 루미, 나래, 로운이었지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두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루미가 말문을 열자 해일이 대답했다.     


“변수가 적은 일이었으니까요. 순간이동 직전에 그놈이 나타난 것까지 포함해서. 그놈에게는 적당한 수준에서 정찰을 허용해 주고 쫓아만 냈습니다. 앞으로 놈들이 제 인지 범위를 실제보다 좁게 추정할 수도 있고 화력도 착각할 수 있겠죠. 물론 웬만해선 놈들도 제가 봐줬다는 걸 알아차리겠지만.”     


“‘피칠갑’ 그놈. 쯧쯧, 쫓겨난 것도 억울한데 농락만 당했네. 그래도 총알에 머리가 날아가는 것보단 낫겠죠. 팀장님, 피칠갑이 이번에 나타날지 안 나타날지 로운이랑 내기했었는데. 제가 이겼습니다. 로운이는 어차피 해일이한테 내쫓길 게 뻔한데 뭐하러 정찰하러 오냐고 그러더군요. 근데 ‘피보라’는 꼭 안 될 걸 알면서도 부하들을 굴리는 짓을 하곤 했으니, 이번에도 억지로 떠밀려서 정찰하러 왔겠죠.”     


나래가 웃었다. 그러나 이후로 이어진 말에는 근심과 불만이 담겨 있었다.     


“해일아, 그 사탄 놈을 일부러 가까이 접근을 허용했던 건 좋았어. 그렇지만 처음부터 민정이를 너무 방치한 것도 그렇고, 여정을 시작할 때 아무런 설명 없이 불친절한 것도,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나 생각해. 강하게 키우는 것도 좋지만, 앞으로 여정도 꽤 고생이 될 텐데. 처음엔 자신감과 희망을 줬어야 하지 않았을까.”     


“선배님 의견도 맞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민정이를 강하게 키우는 것뿐만 아니라 여기서는 항상 적극적으로 물어보고 또 우리를 의지하게 만들기 위한 의도가 있었죠. 그래야 민정이가 계속 질문을 하겠죠. 질문한다는 ‘조건’이 있어야 필요한 정보를 알려줄 수 있으니까요.”     


해일이 대답하자 나래가 반론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래서야 민정이가 우리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우리가 만드는 거잖아. 민정이가 우리 의도대로 질문을 잘할 거라는 보장도 없고.

해일이 네가 이 인생여정이라는 전에도 후에도 없을 중요한 사명을 받고 우리 팀에 합류했고 모든 결정권을 갖고 있는 건 알지만, 내 생각을 말하자면 솔직히 네가 생각한 방향이 맞는지 모르겠어. 민정이 입장에서는 계속 이런 식이면 짜증이 날 것 같은데. 우리가 잘 대해 주고 위로해 줘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의지할 텐데 굳이 반감을 살 수도 있는 방법을 택할 필요가 있었나 싶어. 이미 결정되고 지나간 일을 탓하는 건 아니지만.”     

“제가 판단하기엔 지금 민정이에게 필요한 건 따뜻한 위로가 아니라 강한 자극입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해서 마음이 약한 건 아니니까요.”     


해일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네 말이 맞지. 뭐든 장단점이 있으니까. 아무튼 나는 앞으로는 조금 더 민정이의 감정을 고려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하도록 하죠.”     


원하던 대답이 나오자 히죽 웃는 나래를 보며 루미는 마음 속으로 웃었다. 아까 전에 불안해하던 것과 달리 여정의 모든 결정권을 가진 뛰어난 능력자 해일에게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세우는 나래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근데 팀장님, 방금 일은 로운이한텐 비밀로 해 주십쇼. 나 주제에 해일 천사님 하시는 일에 토 달았다고 욕할 테니까요.”     


“...그래.”     


다만 로운과 더불어서 철이 좀 더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해일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지금까지는 제 생각대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특히 첫 번째 여정은 ‘피보라’ 팀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많은 변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피칠갑을 정찰씩이나 보낸 점을 생각해 보면 피보라가 초반부터 공격을 생각할 수도 있겠어요. 제가 여정을 진행하는 동안 철저한 보안과 경계를 부탁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당분간은 해일 천사님 없이도 우리가 피보라 팀에게 밀리진 않을 겁니다.”     


루미가 자신 있다는 듯 말했다. 해일보다는 나래를 안심시키기 위한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걱정은 안 합니다. 우리는 질 수가 없는 싸움을 할 겁니다.”     


웃으면서 말하는 해일의 자신감은 그 누구에게도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닌 순수한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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