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틀리제 Sep 04. 2024

사연녀와 그녀의 수호천사들

2화 : 민정, 인생여정을 시작하다

조민정, 21세, 여자, 수도권의 평범한 대학교의 경제학과 18학번, 2학년.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단둘이 어려운 형편에서 힘겹게 살아가다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인물.

그 선택의 결과로서 사후세계에서 깨어난 후, 그녀는 생전과 사후를 통틀어 느끼지 못했던 당혹감을 경험하고 있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여기는 사후세계인데 제가 살아있다니? 그게 무슨 살아 있는 시체 같은 말이에요?”     


“조민정 씨는 2019년 6월 26일에 여기 글로벌관 옥상에서 투신하셨죠.”     


천사 해일이 민정의 질문에 대답했다.     


“...네, 맞아요.”     


“그리고 즉시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지만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제가 지금 식물인간 상태라는 말인가요? 그래서 살아는 있는데 사후세계에 있는 거고요?”   

  

“그렇습니다.”     


“맙소사...”     


민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생각했을 때 이는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결과였다.

자살을 생각했던 옥상에서는 자포자기해서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었지만, 식물인간이 되는 것은 정말로 원하지 않았다. 죽지 않았으니 매일 병원비만 해도 얼마나 많이 나올 것인지.

그녀는 사후세계에 내던져져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나 하는 막막함보다 이미 일어나버린 일에 대한 절망이 앞섰다.     


“정말 되는 게 하나도 없구나.”     


민정이 자포자기하며 내뱉은 말에는 지금 민정이 느끼는 절망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런데도 그 말을 들은 해일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표정도 표정이지만 약간은 온화한 미소가 생각나는 차분한 분위기. 아무 걱정할 것이 없다는 평온함. 민정의 감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분위기를 계속 내뿜고 있었다.     

눈앞에 절망하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를 보호하는 천사라면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나. 천사들은 그런 존재들인가?


민정은 그렇게 태연한 해일에게 묻고 싶었다. 이 천사는 자기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천사님, 혹시 천사님은 내 인생을 쭉 봐 왔나요?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조민정 씨가 태어났을 때부터 쭉 봐 온 건 아니고, 이번 임무를 맡기 시작했을 때 민정씨의 인생에 관련된 데이터는 모두 숙지했습니다.”     


‘이번 임무’, ‘인생에 관련된 데이터’ 등 그녀가 놓치지 말아야 할 단어들이 있었지만, 지금 그녀는 그것들에 신경 쓰지 못했다.     


“난 어떻게 살아야 했을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지옥 같은 삶이었어요...”     


그런데도 해일 천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내가 어떻게 살았어야 그 끔찍한 삶을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그게 가능했을까요?”     


격앙되어 외치는 민정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런 삶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뛰어내렸어요... 그런데... 이게 뭐에요...”     


결국 그녀는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누군가 그 옆에서 보았다면 누구라도 가슴이 미어질 듯 서럽게.     


“식물인간이라니요... 병원비는 어떡하고...”     


그런데도 해일 천사는 ‘온화한 미소’의 느낌을 잃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민정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대로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 민정이 어느 정도 울음을 그치자 해일은 민정에게 말했다.     


“조민정 씨가 과거에 어떻게 살아야 했는지에 대해 물으셨는데, 그에 대해서는 제가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민정은 이번에는 그의 말에서 중요한 부분을 알아들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그럼 제게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는데요?”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선명했다. 그녀의 질문에 해일은 대답이 없었고 그녀가 말을 이어나갔다.     


“과거의 삶에 대해 말해줄 수 없다면...”     


민정은 자기 머리가 처음 여기서 눈을 떴을 때보다 훨씬 잘 돌아감을 알 수 있었다. 마치 뇌가 업데이트된 것 같았다.     


“지금 제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줄 수 있나요?”     


그 말이 정답이었는지, 해일이 분위기가 아주 살짝 밝아졌다. 민정은 그걸 알아차리진 못했다.     


“민정씨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들에 대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가르쳐주세요.”     


“민정씨에게는 21일의 유예 기간이 주어졌습니다.

민정씨는 21일 동안 식물인간의 상태로 있게 되며,

21일이 지나면 깨어나서 육신으로 돌아가던가,

혹은 정말로 죽고 영혼의 삶을 살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아아.”     


놀라운 일이었다. 눈을 떠서 다시 삶을 살던가, 아니면 그대로 영혼으로 살아가던가.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니.     


“그렇습니까. 또 다시... 선택을 해야 하는군요.”     


그러나 그녀는 선택은 버거운 일이라는 듯 말했다. 이미 어려운 선택을 했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심지어 그 어려운 선택으로 인해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울고 난 직후였다.     


“참고로 이곳에서 눈을 뜨기 전까지 4일이 지나서, 지금은 17일 남았습니다.”     


“그렇군요. 음, 천사님도 알다시피 난 스스로 옥상에서 뛰어내렸어요. 이미 죽음을 선택했다는 말이죠.”     


민정이 진지하게 말했다. 해일은 눈을 깜빡거리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민정은 눈앞에서 천사라는 존재가 자기 말을 듣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또 한번 기회가 있다고 하니까 망설여지네요. 음, 제 인생은 개판이었지만 여기서 산다고 해도 여기도 별로 좋은 곳은 아닌 것 같고요.”     


“지금 당장 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해일이 힌트를 줬다.     


“남은 17일 동안 생각해 보면 된다는 건가요? 그럼 만약 제가 삶으로 돌아간다고 선택한다면 그 즉시 돌아가게 되나요? 반대로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나요?”     


“아니요. 남은 기간 동안 여기서 다양한 체험을 이어서 할 겁니다. 21일이 지나면 육신의 삶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면 마찬가지로 21일이 지난 후에 죽음 이후의 삶을 사는 곳으로 가시게 될 겁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사는 곳...”     


민정이 중얼거렸다. 천국인가, 지옥인가. 사후세계는 실존하는 것이었나. 옥상에서 떨어질 때는 그런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겪고 있는 상황이니만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남은 17일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면요?”     


“민정씨의 과거, 현재, 미래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고요..."     

해일의 말은 꽤 비유적이었다. 그러나 민정은 왜인지 모르게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제 인생에 대해 보고 들을 수 있다는 말이군요.”     


“맞습니다.”     


“인생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것들이라... 좀 막연한데요.”     


아직 이쪽 세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민정은 그녀의 인생에 대해서 알게 된다는 말이 와닿지 않았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겁니다.”     


태연한 얼굴로 자신감을 내비치는 천사를 보면서 민정은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그녀는 자기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복잡하던 표정이 이내 밝아졌다.     


“제가 자살할 때 말이죠. 정말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물론 충동적으로 뛰어내린 것이긴 하지만 그 전에 몇 날 몇 일을 밤을 새우며 생각했어요. 

내가 살아야 할까, 그냥 죽는 게 나을까. 사는 게 싫은데 죽는 것도 두려우니까요. 그런데 막상 죽고 보니, 아니 아직 죽은 건 아니죠. 식물인간이니까. 아무튼 사후세계에서 영혼으로 살면서-”     


민정은 팔을 들어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처음 눈을 떴을 때와 달리 몸이 자유롭게 움직였다. 좀비 남자에게 부딪힐 때의 어깨 통증도 어느새 사라졌다.     


“내 인생에 대해서 되돌아볼 수 있다니 이건 기회겠죠. 이제 내가 살아야 할지 죽어야 할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어차피 달리 여기서 할 수 있는 일도 없을 것 같으니까...”     


민정은 한 호흡 쉬고, 정확한 자기의 뜻을 전했다.     


“그러니 천사님이 말한 대로 확인해 보겠어요. 제 과거, 현재, 미래를 보고 제가 어떻게 할지 정하겠습니다.”    

“인생이 그러하듯, 이 여정도 좋은 순간이 있는 반면 생각보다 고통스러울 때가 있고 기대했던 것과 다를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천사의 섬뜩한 경고에 민정은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분명히 대답했다.     


“휴우, 괜찮습니다. 이미 죽었는데 또 죽기야 하겠어요? 한번 가 볼게요.”     


그러자 해일이 갑자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로봇 같던 그가 갑자기 감정 변화를 보이니 민정은 살짝 놀랐다.

해일은 손을 들어 민정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손에 빛나는 작은 구슬이 들려 있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축복’을 부여합니다.”     


“네? 그게 무슨...”     


구슬이 민정의 이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민정은 어리둥절했다.      


“우와, 우와, 우와.”     


그녀는 입으로 계속 감탄사를 뱉었다. 해일은 그저 웃고 있었다. 잠시 후에 빛이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아무 변화도 없었다.     


"엥?"     


“2019년 6월 30일, 조민정씨의 ‘인생여정’이 승인되었습니다.”     


해일이 태연하게 할 말을 읊었다. 씩 웃었던 미소가 사라지고 처음부터 보았던 그 ‘온화한 무표정’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민정은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천사들은 원래 이런 걸까.     


“인생여정이요?”     


“네, 이 21일의 인생에 대한 체험을 인생여정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아. 그렇구나.”     


대답을 마친 해일은 말없이 민정을 쳐다보았다. 추가 설명을 기대한 민정은 천사가 말이 없자 조급해졌다.     


“그건 그런데 방금 그 구슬은 뭔가요?”     


해일의 태도에 살짝 어이없어진 민정이 물었다.     


“민정씨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여기 영혼의 세계에서 확실히 보고 들은 후 삶을 선택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제안한 인생 여정을 수락하신 거죠.”     


“그렇죠.”     


“그것이 ‘조건’을 충족한 것이 되어 민정씨에게 ‘축복’을 부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해일은 또 말이 없었다. 이 천사는 아까부터 왜 자꾸 설명을 안 해주고 뜸을 들이는가 싶었다.     


“조건은 뭐고 축복은 뭔데요?”     


결국 민정이 먼저 물어봤다. 해일은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조건이란 이 세계에서 뭔가를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는 행위입니다. 축복은 조건이 완성되었을 때 부여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실체적인 은사(恩賜)로, 그 형태는 다양합니다.”     

말인즉 어떤 자격을 갖추면 축복을 받는데, 그걸 민정이 방금 받았다고.     


“그러니까 제가 뭔가 받을 만한 일을 해서 축복을 받았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으음, 알겠습니다. 그럼 저한테 무슨 변화가 일어난 거죠?”     


“방금 제가 민정씨에게 전달한 축복은 당장 직접적인 효과가 있는 건 아니고, 이제 정식으로 민정씨가 영계에서 인생의 답에 대한 여정을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아...그렇군요.”     


민정은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 하지만 여전히 답답한 마음이 있었다. 이번에도 해일이 아무 설명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이제... 뭘 해야 하나요?”     


결국 답답한 민정이 먼저 물어 보았다. 기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불친절한 천사라는 존재에게 짜증이 나려는 걸 참았다.

하지만 어쩌면 사후세계는 원래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애초에 본인 선택의 결과로 낯선 세계에 떨어진 것은 민정이었다. 이곳에서 버티기 위해서는 아쉬운 쪽인 민정이 질문을 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천사의 대답은 민정의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기 충분했다.     


“일단 자리를 옮기겠습니다. 인생 여정을 시작할 장소로 가시죠.”     


“아, 네.”     


그러나 어디론가 이동한다는 말에 그녀는 순간 걱정이 들었다. 이 천사를 따라가도 되는 것이 확실한가.

민정은 이미 좀비 같은 귀신에게 쫓기는 경험도 했고, 눈앞의 천사가 구해주기는 했지만 아직 이 천사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다.     

정말 천사가 맞을까? 혹시 사람인데 거짓말하는 거 아닌가?

아니, 이런 훌륭한 외모에 아까 그 마법 같은 구슬을 사용한 걸 보면 사람은 아닌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정말 천사인가? 조금 능력이 특이한 귀신이 아닌가?

혹시 속고 있는 건 아닐까?     


“저기 근데 어디로 가나요?”     


갑자기 든 다급한 마음에 민정은 주어도 생략하고 내뱉듯 물었다.     


“저희들의 작전 본부로 갑니다. 민정씨에게도 익숙한 곳일 수 있습니다. 일단 가 보시죠.”     


“아...”     


민정에게도 익숙한 곳이라니, 이 낯선 세계에 익숙한 곳이라는 게 너무 안 어울려서 민정은 호기심이 생겼다. 마음이 급격히 기울었다.     


“거기 가면 누가 또 있는데요?”     


“저와 함께 일하는 천사들이 있지요. 모두 민정씨에 대해서 잘 아는 분들이고 좋은 분들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서 인사를 하고 또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의논하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민정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본부까지는 순간이동으로 갈 겁니다.”     


“아, 네. 순간이동이요.”     


민정은 순간이동을 한다는 것에 놀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제 손을 잡으시면-”     


해일이 민정에게 손을 내밀고 말을 하다가 멈추었다. 민정은 그의 손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얼굴처럼 손도 예쁜 편이었다. 이 신기한 존재와 신체접촉을 하면 작금의 상황에 좀 더 현실감이 생길 것도 같았다.     


“손을 잡을... 왜, 무슨 일 있어요?”     


민정의 물음에도 해일은 말없이 앞만 쳐다보았다. 민정은 그 얼굴을 제대로 보고 나서야 그가 지금 놀랍도록 싸늘하게 서 있다는 걸 알았다.

살짝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싸늘한 해일이었지만 무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녀에게 싸늘함을 풍기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일은 저 멀리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민정은 그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기다렸다. 기다림의 시간은 짧았다.     


타앙-     


갑자기, 아무 예고도 없이 커다란 총성이 울렸다. 깜짝 놀란 민정이 귀를 막고 천사를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민정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해일이 짤막하게 사과했다. 언제 꺼냈는지도 모르게 총을 손에 들고 있었다. 민정은 무슨 일인지 궁금했으나 물어볼 수가 없었다.     


“일단 이동부터 하죠.”     


해일이 다시 말하고 민정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정은 그가 내민 손을 단단히 잡았다.

저기 방금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것을 이 천사가 총으로 물리쳤다. 아까 전의 좀비 같은 자들인가. 그것들은 귀신일까.     

앞으로 하는 것이 인생여정이라고 했던가. 이걸 하고 나면 자기 인생에 대해서 알게 되겠지만, 저런 것들에 대해서도 알게 될까. 이 낯선 세상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까.

민정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이전 01화 사연녀와 그녀의 수호천사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