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는 이 씨 일가가 모여 살았다. 그냥 한동네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명절이 되어 알았다. 누구는 할아버지 큰형의 아들이고, 누구는 그 며느리고, 누구는 손자였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사돈에 팔촌이었다.
추석과 설날에는 한복을 입은 무리가 집집마다 찾아다녔다. 차례를 함께 지내기 위해서였다. 시내에 가정을 꾸린 분들까지 다 시골을 찾으니 이동 인원은 몇십 명이나 되었다.
"나도 가야 해?"
"너네들은 집에 있어. 남자들만 다니면 돼."
아빠와 작은 아빠가 집을 나서며 말했다. 우리 세 자매는 한복을 차려입고 집에서 어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엄마, 저기 걸어오는 거 보여."
창 밖을 내다보던 우리가 소리치면 엄마가 마당에 올려둔 국을 덥혔다.
차례는 돌아가신(혹은 살아계신) 어른의 항렬이 높은 집부터 시작했다. 우리 집도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와 돌아가시고 난 뒤의 제사 순서가 바뀌었다.
"이제 떡국을 좀 더 끓여야겠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첫 명절이 왔을 때 엄마가 한 말이다.
"왜?"
그 전에는 시간이 애매했는데, 순서가 바뀌면서 딱 식사시간에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단다. 이제 끼니가 될 만큼 드실 거라고 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이 집 떡국이 맛있어."
떡국 한 솥이 금방 동이 났다.
"자, 다음 집에 가야 하니 빨리 일어나세."
누군가 말하면 다 같이 숟가락을 놓고 일어났다. 우리 집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간 어른들은 밀물처럼 다음 집으로 몰려들어 갔다.
일 년에 두 번, 명절이면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다는) 자연현상처럼 밀려오는 광경이었다. 지금은 이런 조석 현상은 끊어진 지 오래다. 마을 길을 걷는 어른들 무리도 볼 수 없다. 이제 명절이면 마을에 드문드문 남은 집에 각자의 직계가족이 차를 끌고 와서 각자의 집 안에만 머물다 떠난다. 나도 마찬가지고. 비록 거리는 한산해졌지만 모두의 집 안에서는 명절의 정이 풍요롭게 오가기를 기대해 본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