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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소요 Feb 05. 2023

인간의 제로는 뼈

발제문






  

1) 지금껏 지극히 무난하고 안전한 독서만 해 왔다. 제도권 내의 순문학. 서정적이고 정돈된 문체로 메시지와 정서를 나에게 직접 전달해 주는 친절한 문학들을 주로 읽어온 내게 컬트 작가의 글은 매우 신선했다. 그 신선함이 피부에 닿는 순간 육성으로 “이게 뭐야?”라고 말했을 정도로. 하지만 앞서 읽은 독자들의 열광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끝까지 읽었다. 카오리가가 대체 어디를 향해 가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생각해보니 어디를 향해 가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이야기는 카오리의 생 그 자체인데, 생이란 애초에 특정한 방향이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저 이리저리 사방팔방 흘러 갈 뿐.) 

컬트 작가 혹은 컬트 소설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거니와 이런 식으로 시종 ‘흥, 후왓, 퐁퐁, 쿠궁’ 같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소설은 처음이라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한꺼풀 넘어서고 보니 이 글은 내던져지다시피한 소녀의 성장기였다. 소녀의 마음 속이라 생각하면 후왓도 퐁퐁도 다 납득이 된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수없이 많은 상처와 혼란과 불안과 음울을 이해하게 된다. 컬트는 수단일 뿐 그곳에 담긴 메시지는 결국 인간과 삶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게 되니 더 이상 글을 읽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처음 오타로의 글이 생경하게 느껴졌던 것은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한 형태의 감정을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다소 제멋대로 늘어놓는 방식의 새로움 탓이었으리라. 이제 조금은 그의 글을 알 것도 같다.

     

2) 끝없이 이어지는 폭력적인 상황에서 주인공 카오리는 다소 담담하고 시니컬하게 대응하고 있다. 학대에 가까운 나날도 푸슝 핏 파앗하고 넘겨버린다. 이는 카오리가 믿을 수 없을 만큼 긍정적인 소녀라서 모든 것을 씩씩하게 이겨내기 때문이 아니다. 카오리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외도로 인해 붕괴된 가정에서 방치된 채 자라난 아이다. 아이에게 가정은 세계 그 자체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서지고 무너지는 세계를 보며 그가 가장 먼저 학습한 것은 무기력일 것이다. 날아드는 폭력 앞에서 나는 맞서 싸울 수도, 물꼬의 방향을 틀 수도 없을 것이라는 침잠. 그 속에서 카오리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택한 것이 예의 그 무덤덤함, 웃음으로 눈물을 닦는 해학적 태도이다. 카오리 본인만의 힘으로 아버지의 외도를 없던 일이 되게 할 수도, 아버지를 집으로 돌아오게 할 수도, 방안으로 숨어든 어머니의 활기를 되찾아 줄 수도 없다. 이에 카오리가 택한 방도는 ‘어쩔 수 없는 인간들이랍니다. 나도 그렇지만.’하고 우습게 서술하고 넘어가버리는 것이다. 별일이 아니라는 듯한 태도로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내며 매 코너를 돌아서 나아가는 카오리를 보며 나는 점점 더 마음 속이 차게 식었다. 그를 향한 안쓰러움과 어른들에 대한 분노(정확히는 카오리의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그러니까 카오리는 타고나길 여유롭다거나 유머러스한 것이 아닌, 불가피하게 도피적으로 해학적인 삶의 태도를 택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는 이불보다 더 단단하고 포근한 집이 있어야 했다. 하나씨보다 먼저 그녀의 이야기를 이끌어내줄 존재가 있어야 했다.

실은 직업적인 이유로 이 글을 소설 그대로 읽기 어려웠다. 쓸데없이 이입하게 되고 남매의 앞날을 걱정하게 되고 그들의 학교 생활을 상상하게 되고. 소설 속에도 나와 같은 어른이 있어야 했다. 무엇보다 남매가 잘 자라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겨줄 어른이 있어야 했다. 카오리가 좀 더 어리광을 부리고 투덜대고 우는 소리를 할 줄 아는 아이가 될 수 있도록 그를 달래주고 다독여줄 사람이 있어야 했다. 

    

3) 카오리가 학창 시절 만화를 그리려 할 때는 자신 안에 이야기를 찾아내지 못 했다. 그러나 후에 자라서 소설을 쓰려 했을 때 그는 드디어 이야기를 발견한다. 이 차이에 대해 두 가지의 포인트로 가정해 볼 수 있다. 

첫째, 카오리는 소설에 등장한 (혹은 미처 다 담지 못했을)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고 난 후에야 ‘이야기’라 부를 만한 무언가를 지니게 되었다. 만화를 그리려 할 때의 카오리는 너무나도 미숙했고 지닌 경험이 한정적이었다. 그 탓에 이야기를 만들어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에 서툴렀을 것이다. 반면 학창 시절을 모두 보내고 대학에 진학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그 생애 주기에 적합한 사회적 작용을 거치고 난 뒤 그제서야 이야기라 부를 만한 것을 지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지닌 것을 언어화·문자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둘째, 카오리는 이야기를 이미지화 할 수 없지만 텍스트화 할 수 있다. (이 관점은 다소 억지스럽다.) 카오리는 자신 안에 지닌 것을 그려낼 수 없는 인간인 것이다. 그는 상상력이 뛰어난 편이다. (밤의 철길을 걷는 장면에서 나는 그가 N일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 상상력을 이미지로 표현해내지는 못 한다. 그것은 아마도 카오리가 그림, 즉 현상의 재현 또는 재해석에 관심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지화 및 그림을 그리는 행위의 본질을 여기에 한정하여 논의하도록 한다.)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현상을 언어로 인지한다. 자신이 사용하고 아는 언어에 한하여 세상을 인식한다. 그리고 그것을 한 번 더 가공하여 표현해내는 것이 그림이라고 할 때, 카오리는 이 지점에서 한계에 부딪치는 것이다. 언어-이미지로의 가공 단계 자체에 관심이 없거나 역량이 부족할 것이라는 가정을 내려 볼 수 있다. (사실 한계에 부딪친 것은 지금 해설문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이다. 좀 더 명징한 해설이 있을 것 같은데 가닿을 듯 말 듯하다.) 이에 반해 카오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텍스트로 표현해낼 수 있다. 그는 예민하고 날카로운 면이 있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자는 그렇지 않은 자보다 더 많은 감정의 촉수를 지니고 있다. 즉 더 많은 감정을 포착해낼 수 있다는 뜻이다. 포착한 것은 곧 언어로 이어지고, 카오리는 이것을 써내려 갈 수 있게 된다.

      

4) 대화체는 인물과 사건을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한다. 인물의 내면에 있는 심리, 정서는 물론이고 인물의 정체성과 인간성을 드러내게 한다. 즉 작가가 좀 더 교묘하고 은근하게 인물과 사건을 설정할 필요 없이 소설 속에 존재하는 당사자인 인물 본인이 나서서 자기 입으로 술술 설명하게끔 하는 것이다. 마치 바쁜 아침 시간에 방영되는 아침 드라마 속 대사들이 설명투, 만연체인 것처럼. 암시와 상징과 추론의 영역이 줄어들고 보여주기의 영역을 늘리는 것이다. 이는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경제적으로 효율적이고 편리하다. 다만 작가의 역량과 독자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한계가 있다.

     

5) 낯설게 하기는 이 소설을 더욱 컬트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장치로서 작용했다. 그리고 오히려 불안정한 카오리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장치로 활약했다. 감정이 쉴새없이 요동치고 생각이 과장되게 확대되었다가 축소되었다가 하는 상태를 여실히 드러냈달까. 소설의 전통적 형식이 아닌 것을 소설 속에 대입했을 때의 어색함이 작가가 의도한 바가 아닐까. 뒤샹의 ‘샘’이나 황지우의 ‘한국 생명 보험 회사 송일환 씨의 어느 날’처럼 전형성을 탈피한 예술이 지니는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6) 생애 주기별 특정 시기에 따로 방점을 찍지 않고 물 흐르듯 이어지는 서술 전략은 말 그대로 인간의 생이 별다른 마침표나 쉼표 없이 연결되어 전개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7) 실은 이 소설이 해피엔딩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아무 것도 근원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마침내 이혼을 하고 어머니가 새 가정을 꾸리게 되는 것은 화해가 아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외도와 방임을 사과하지 않았고 어머니와 남매가 이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저 덮어놓고 네,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었지만 이제 다 지나가고 우리는 새로운 시간을 앞두었네요. 하고 쓸쓸히 웃으며 나아갈 뿐. 

카오리가 이야기를 찾지 못 하다가 하나 씨와의 만남 이후 마침내 이야기를 찾게 되는 장면에서도 기이함을 느꼈다. 가정을 파멸에 이르게 한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지지하는 애인, 그 애인과 연락하고 만나는 카오리. 마치 잘 통하는 친구인 양 말하고 행동하는 하나 씨와 카오리. 하나 씨와의 시간 이후 숙원사업이었던 소설 쓰기에 성공하는 주인공. 기이하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아닌 ‘그저 인생의 상처와 고난은 뿌리 뽑히지 않고 그대로 존재한 채 시간은 흘러간다’ 정도의 달관적 마무리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마이조 오타로의 해피니스 관념은 무엇일까? 이 부분은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나는 이 책에서 해피니스를 느끼지 못 했다. 네 가족이 웃으며 건배를 나누는 장면에서조차 안심되지 않았다. 그것은 진짜 화해가 아니었으므로. 오타로의 해피니스는 도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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