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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Mar 02. 2024

다독은 글쓰기에 도움이 안 된다?

014.

그러므로 다독은 인간의 정신에서 탄력을 빼앗는 일종의 자해다. 압력이 너무 놓아도 용수철은 탄력을 잃는다. 자신만의 고유한 사상을 가장 안전하고 확실하게 손에 넣는 방법은 독서다. 천성이 게으르고 어리석은 일반인이라도 꾸준한 독서를 통해 일정한 학문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렇게 얻어진 길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독서는 어디까지나 타인이 행한 사색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 본 책, 14쪽

다만 독서는 사색의 대용품으로 정신에 재료를 공급할 수는 있어도 우리를 대신해서 저자가 사색해 줄 수는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다독을 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대용품, 즉 독서가 실제적인 사색을 방해할 수도 있다. ☞ 본 책, 26쪽

우리에게는 염세주의 철학자라고 잘 알려진 쇼펜하우어는 일반적인 상심의 통념을 뒤집는 말을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다독, 즉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인간의 정신에서 탄력을 빼앗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냥 빼앗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가 그러듯 다독에 집착하는 것은 결국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자해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적어도 이건 우리가 전통적으로 믿어 오고 있는 삼다설과는 정면으로 대치하는 생각입니다. 잘 알다시피 무려 1000여 년 전의 중국 북송의 문장가였던 구양수가 글을 쓰는 비결로 삼다(三多)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삼다, 다독, 다작, 그리고 다상량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현대인들에게 조금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여지는 진리 중의 진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글쓰기 위해서는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글을 써야 하며,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고 하니, 감히 누가 의심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글을 잘 쓰고 싶어 하는 이들이라면 그 어느 누구라도 다독, 다작, 다상량의 중요성에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생활 속에서도 꾸준히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그 생각이 철저히 잘못된 생각이라고 단언합니다.


자신만의 고유한 사상을 가장 안전하고 확실하게 손에 넣기 위해, 일반인이지만 일정한 학문적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독서라는 것에는 공감하고 있지만, 이것만 고집하면 결국엔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디까지나 독서는 사색을 위한 재료로 쓰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말 그대로 독서는 사색의 대용품이기 때문에 실제적인 사색을 방해할 수 있는 독서, 더 나아가 다독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말하고 있습니다. 독서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이 행한 사색의 결과이지, 우리 스스로가 뭔가를 주도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오히려 다독이 아닌 적당한 양의 독서를 추천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도 맹점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적당하다'는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하게 가리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양수의 생각과 쇼펜하우어의 생각 중 누구의 생각이 더 옳은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 역시 어쩌면 개인차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고, 글쓰기와 관련한 개인의 경험에 따라서도 충분히 다를 수 있기 때문이겠습니다. 다만 저 역시 아무래도 구양수보다는 쇼펜하우어의 생각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이 비유가 논리적으로 성립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많이 읽어서 글을 잘 쓸 수 있다면, 수많은 그림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다는 것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겠습니다. 물론 쇼펜하우어의 생각이 다독은커녕 가장 기본적인 독서량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면죄부가 되면 되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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