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를 잘하는 사람에게 우린,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노래를 잘할 수 있느냐고 묻곤 합니다. 또 춤을 잘 추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잘하는 사람에게 그 방법을 묻는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입니다. 그러면 글을 잘 쓰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그건 당연히 작가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 주변 사람들은 저에게,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번짓수가 잘못된 것 같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제 주변에 글을 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땅히 물어볼 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 뜻입니다.
현실이 그렇다고는 해도 아무리 봐도 그들이 잘못 질문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저 같은 일반인에게 묻는다면,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냐고 물을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글을 쓸 수 있느냐고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그건 아마도 글이라는 건 잘 써야 비로소 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으니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을 쓰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글 쓰는 사람을 찾아보기 쉽지 않은 게 사실이라면 글을 잘 쓰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 격이기 때문입니다.
『앵무새 죽이기』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의 여류소설가 하퍼 리는 작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글쓰기의 재능을 갈고 닦기 전에 먼저 뻔뻔함을 키우라는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뻔뻔함이라는 것은, 글을 잘 쓰지도 못하면서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글을 잘 쓰는 사람인 양 행세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것은 글을 잘 쓸 수 있어야 비로소 글을 쓸 자격을 갖는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글을 잘 쓰는 실력을 가진 사람만이 글을 쓸 수 있거나 써야 한다면, 세상의 그 어떤 가수 지망생이나 무명가수들은 그 어떤 무대에서도 노래를 하면 안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논리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글을 잘 쓰는 사람이 글을 쓰게 되면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어떤 일이든 그 일을 잘 하는 사람만 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일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어떤 일에서든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고, 심지어는 잘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좋아하는 소설가나 시인이나 수필가가 따로 있습니다. 이미 고인이 된 분들을 예로 들자면, 누군가는 고 박경리 선생을 좋아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고 박완서 선생을 좋아합니다. 물론 이 두 분 모두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좋아한다'는 뜻은 어쩌면 '자신이 좋아하는 그 작가(소설가, 시인, 수필가 등)가 세상에서 가장 글을 잘 쓰는 사람으로 믿고 있다'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문학 작품을 읽는 독자가 1만 명이라면 이론상,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을 써내는 사람이 1만 명이 될지도 모른다고 가정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 이야기가 여기까지 진행이 된다면 글을 잘 써야 하는 사람이 비로소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되어도 한창 잘못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글을 잘 썼다는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정말 잘 쓴 글이라고 누군가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절대적인 객관성을 얻기도 힘든 것이 글입니다. 글은 누구나가 쓸 수 있습니다. 특히 못 쓰는 사람도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것이 바로 글입니다. 약간의 뻔뻔함만 갖춘다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