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글: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할 때
얼마 전, 직장 동료 중 한 사람이 내게 찾아와 물었다. 평소에도 이런저런 대화를 종종 나누곤 하던 분인데, 그녀 역시 글을 너무 쓰고 싶다고 했다. 자기 주변에도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 대부분은 아무리 쓰고 싶어도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는 말을 한다고 했다. 정작 그들과는 달리 그녀는 글을 쓸 시간은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는데, 기껏 시간을 내어 노트북 앞에 앉으면 도무지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글을 쓰고 싶어 노트북을 열었다가도 막상 빈 화면에 깜빡거리는 커서만 쳐다보다 다시 닫은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또 누군가가 종이에 친필로 써야 제대로 된 글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사백자 원고지까지 사놓았지만, 그 많은 칸이 주는 위압감만 느끼다 포기한 게 태반이라고 말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글을 쓸 수 있을까요? 전 잘 쓰는 건 원하지도 않아요. 그냥 제가 쓰고 싶은 내용을 쓰고 싶을 뿐이거든요."
사실상 자신이 원하는 것을 쓰고 싶다는 것, 그게 바로 글을 잘 쓴다는 증거나 다름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있는 그대로를 얘기하면 찾아온 수고에 대해 민망함으로 되돌려주는 것밖에 되진 않을 터였다.
"저도 뭐 솔직히 제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건 아니에요, 선생님. 전 그저 시간이 났을 때 어떤 식으로든 한 편의 글을 만들어 내는 데에 의미를 두고 있거든요."
"전 그게 어려워요. 아무리 시간이 많아도 그 문제는 여전히 해결이 안 되고요. A4 용지 한 장 정도는 써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긴 했지만, 한 장은커녕 열 줄도, 심지어 단 한 줄도 못 쓸 때가 더 많거든요."
내가 뭐 글쓰기와 관련해 어떤 타이틀이라도 있다거나 남을 가르칠 만한 자격증을 보유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저기에 글을 올리고 있는 걸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얼마나 답답했으면 내게 와서 물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막상 찾아온 자리에선 그다지 도움이 되질 못했다. 어떤 가르침이나 어떤 비법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정작 당사자가 단 한 줄도 쓰지 못한다면 아무리 훌륭한 글쓰기 강사가 있든, 아무리 좋은 비법이 있든 무용지물이 아니겠는가? 글이란 그런 것일 따름이다.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고 싶어 난 그녀에게 글쓰기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타이핑해 보냈다.
바람직하지 않은 정신 자세로 글쓰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글쓰기를 배운답시고 쓸데없이 대가들과 문학 강의를 좇아 철새처럼 옮겨 다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진실은 아주 간단하다. 글쓰기는 글쓰기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바깥에서는 어떤 배움의 길도 없다. 당신이 훌륭한 대가를 열 사람이나 만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글쓰기를 배우지 못한다.
여기 비슷한 예가 있다. 비만으로 고민하던 내 남자 친구 중 하나가 드디어 운동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필요한 정보를 충족시킬 책을 구하러 서점을 찾았다. 하지만 운동법이 적힌 책을 읽는 것 가지고는 절대 살을 뺄 수 없는 법이다. 체중을 줄이기 위해서는 실제로 운동을 해야 한다.
그동안 200여 권 이상 읽었던 국내외 저자의 글쓰기 관련 책 중에서 가장 깊이 영향을 받았던 나탈리 골드버그의 책,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녀의 책은 내게 글쓰기의 정체기가 올 때마다 곱씹어 읽어보곤 하는 책이다.
보내놓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짤막한 멘트와 함께 내친김에 아예 한 편의 글을 써서 보냈다.
"선생님! 정말 글이 써지지 않으면 이렇게 한 번 해보세요. 저도 자주 쓰는 방법인데, 글이 잘 써지지 않는 그 상황에 대해서 한 번 써 보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글이 너무 쓰고 싶은데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에서 출발하는 것이지요."
모처럼 시간이 났다. 기쁜 마음으로 커피 한 잔을 내려 노트북 앞에 앉았다. 이번에는, 적어도 오늘만큼은 꼭 뭐라도 쓸 수 있겠지 하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또 애꿎은 커서만 바라보다 노트북을 덮고 말았다. 글을 쓴다면 명색이 A4 1장은 써야지, 하는 말도 들었지만, 1장은커녕 열 줄도, 아니 한 줄도 못 쓸 것 같다.
점점 조바심이 나는가 싶더니 금세 뭔가가 떠올랐다. 잊어버리기 전에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손을 마주 비비고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머금은 사이에 또 잊어버렸다. 생각이 바로 떠올랐을 때 메모부터 해야 한다는 말이 떠올라 기껏 메모지도 옆에 갖다 놨지만, 연필을 쥐는 순간부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글쓰기 책에서 강조한 그 짧은 메모도 안 되는 걸 보니, 난 정말 글쓰기에 소질이 없는 모양이다. 설령 내가 글쓰기에 소질이 없다고 하더라도 글이 너무너무 쓰고 싶다.
안 그래도 글의 소재가 떠오르지 않아 미칠 지경인데, 한참 전부터 책상 위를 굴러다니는 먼지 뭉치가 눈에 거슬렸다. 제대로 청소를 한 게 언제였나, 하고 생각해 보니 며칠은 된 것 같았다. 일단 책상 정리라도 하면 상쾌한 마음에 글이 잘 써질까 싶어 내친김에 청소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막상 책상 위를 치우고 나니 이번엔 내가 앉아 있는 방도 마음에 안 들었다. 몇 분 후 어느새 난 진공청소기로 거실까지 밀고 있었다. 이어 화장실 청소를 끝낸 뒤 종량제 봉투에 쓰레기를 묶었다. 어떤 이유로든 쓰레기는 집에 있으면 안 된다. 냄새도 냄새지만 조금만 지체하면 금세 벌레가 꼬이고 만다. 분리수거 팩을 들고 아파트 앞마당으로 내려가 쓰레기를 처리하고 들어왔다.
두어 시간 공을 들여 청소를 하고 나니 온몸이 노곤해졌다. 우선은 좀 씻어야 할 것 같았다. 개운하게 씻고 나서 얼음을 다섯 개 정도 넣은 아메리카노를 또 한 잔 마시고 싶다. 그러고 나면 다시 노트북을 열고 글을 쓰면 될 테다.
샤워를 끝내고 아메리카노까지 준비해 당당하게 노트북 앞에 앉았다. 이런 게 무념무상의 경지인가? 문득 글을 쓸 마음이 싹 달아나 버렸다.
오늘 글쓰기는 글러 먹었다. 아쉽지만 내일 다시 도전해야 할 것 같다.
정작 그녀가 내가 써서 보낸 글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나는 강조하고 싶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그냥 이렇게 쓰면 된다고 말이다.
처음부터 거창하게 시작하려다 보면 정작 아무것도 쓸 수 없는 경우가 많아진다. 그래서 뭘 써야 할지 막막할 때는 바로 그 상황에 대해서 쓰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녀에게 건넨 말임과 동시에 나 스스로에게도 늘 다짐을 두곤 하는 말이다. 그냥 앉은 그 자리에서 바로 시작하면 된다. 이때는 글의 완성도나 작품성을 논할 이유도,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일단 닥치고 쓰고 보자. 쓰다 보면 문장이 하나하나 꼬리를 이어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잘하려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욕심이 앞서면 모든 일을 그르치기 마련하다. 소재는 어떤 것이고 주제는 무엇인지 따질 필요도 없고, 글의 형식이 어떠니 저떠니를 헤아릴 이유도 없다.
시작도 하기 전에 너무 많은 것을 구비하려고 애쓰다 보면 그 애쓴 것에 대해 반드시 번아웃이 온다. 일단 닥치고 써 보자. 쓰다 보면 꽤 많은 것들이 반드시 해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