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숲오 eSOOPo Jul 09. 2023

여백의 역할

0392

시낭송협회 회장이 찾아왔다.

한때 짧지 않은 기간 시낭송을 내게서 배웠다.

나를 '숨겨둔 싸부'라고 자랑하고 다닌다 한다.

나는 시낭송가도 아니고 시인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여느 시낭송지도자들과 차원이 다른 탁월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고 나를 치켜세운다.

그 또한 내게서 받은 것들을 가지고 현장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의 강의 에피소드를 들었다.

낭송의 여백을 언급했다.

이는 보이는 기교의 감정보다 보이지 않는 나만의 감성을 중시한 내 시낭송 철학을 인용한 것이다.

모두가 요령으로 가고 있을 때 나는 그것이 아니라고 외롭게 반발했고 그것을 수용했던 그다.

나의 강의에는 은유와 비유가 상당 부분 차지한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낭송이 예술에 가닿을 방도를 제시방법이 없다.

특히 말할 때보다 말하지 않는 순간을 더 잘 다뤄야 한다는 나의 지론은 여타 낭송지도자들과 결정적으로 결을 달리하는 지점이다.

 자주 말하는 여백도 그러하다.

대부분 사이 은 퍼즈라고 부르는 그곳을 이른다.

거기에서 대부분 호흡만을 고민하는데 이는 절반의 챙김에 그친다.

한국화에서 여백의 미가 소극적 표현이 아니듯 낭송에서도 여백의 순간을 적극적 자기표현의 기회로 다뤄야 한다.

이는 마치 여행을 목적지에서만 즐기는 것과 같다.

떠나기 전의 설렘과 가는 동안의 우연적 사건을 여행에서 삭제하고 배제한다면 여행의 절반은 놓친 셈이다.

이 중요한 절반을 간과한 낭송이 부지기수다.

여기에서 낭송의 수준이 판가름 난다.

많은 낭송가들이 이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내 것을 밀쳐두고 타인의 것을 무작정 흉내 낸다.

거기서부터 불가피한 기술의 낭송이 시작된다.

이는 감동과 공감을 저버리겠다는 선언이다.

경쟁의 도구나 쉽게 경지에 오르려는 욕심이 과정을 삼켜버리고 천편일률로 치닫는 우를 범하게 부추긴다.


글쓰기로 가져와도 이물감이 들지 않는다.

글에서의 여백은 여지다.

생각할 여지,

상상할 여지.

모두 독자의 몫이지만 글을 쓸 때 반영되어 있어야 가능하다.

충분한 고민의 흔적은 행간에서 살아있는 여백으로 태어난다.

글쓰기의 가치를 이 부분에 둔다면 지나칠까.

글의 내용만큼이나 중요하다.

독자는 글자 자체의 논리와 표현에서보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글을 읽는 이유와 흥미를 찾기 때문이다.

마치 카니자의 삼각형처럼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민은 그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