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닥치고써 Mar 27. 2024

쭉 뻗은 골목

이백 아흔아홉 번째 글: 그동안 잘 살아왔을까요?

오늘은 역에서 내리자마자 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모르는 길은 아닙니다만, 2년 넘게 다니던 길과는 정반대 방향에 있는 길입니다. 안 가던 길로 갑자기 방향을 튼 것은 시간이 애매하게 남기 때문이기도 하고, 늘 가던 터미널에 고등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담배를 피우는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특히 요즘과 같은 때면 아무리 경우가 아니라고 해도 괜한 시비에 말려 좋을 건 하나도 없으니까요. 


눈앞에 펼쳐진 길게 쭉 뻗은 골목길이 나타납니다. 순간 당황했습니다. 대략 150미터쯤 될까요? 드문드문 걸어가는 몇몇 사람들이 보입니다. 활기에 차 있는 사람도 있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가는 이도 있습니다. 길의 형태로 보면 소방도로인 셈인데, 지나가는 차는 보이지 않습니다. 걸으면서 생각하기 딱 좋은 타이밍과 장소입니다. 시쳇말로 어쩌면 앞으로 제게 하나의 핫플레이스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이 길이 마음에 들기 시작합니다. 툭하면 그런 표현을 쓰곤 합니다. 뭐, 핫플레이스라는 게 처음부터 따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닐 겁니다.


문득 그동안 저는 잘 살아왔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길게 뻗은 골목길이 제가 살아온 인생길 같이 보였기 때문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사람의 인생이라는 게 어찌 직선길만 있겠습니까? 다만 1/3쯤 걷다 뒤돌아 보니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앞으로 더 걸어가야 할 길이 보였습니다. 걸어온 발길을 더듬어 보며 더 나아가야 할 길을 헤아려 봅니다. 지금 이대로라면 남은 2/3도 별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살다 보면 모든 순간에 배움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도보로 터미널까지 이동할 때는 가는 그 자체에만 급급했었는데, 골목길을 마주 한 이 아침에 뜻밖에도 제 자신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어찌하다 보니 저의 출근길은 사색하는 공간이, 또 시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골목 끝까지 걸어가 비로소 뒤를 돌아봅니다. 벌써 이만큼 왔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새로 만나게 될 대로변으로 한 걸음을 내딛으려 합니다. 이제 사색은 불가능합니다. 연신 내달리는 자동차들을 뒤로하며 걸어야 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말입니다.

 

사진 출처: https://pixabay.com

매거진의 이전글 나이 든 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