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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치고써 Jul 11. 2023

언어는 얼굴

네 번째 글: 합법적인 관음증에 놀아나는 건 싫다.

나는 애써 TV를 챙겨보거나 하진 않는다. 뭐, 그렇다고 해서 내가 누구보다도 고상하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또, 요즘 TV 프로그램들 자체가 죄다 식상하거나 혹은 시시하기 때문에 볼 게 없다는 식의 그런 거드름을 피우기 위한 포석도 아니다. 명백히 그런 오만방자한 생각을 가진 게 아닌 건 분명하지만, 사실 종종 리모컨을 들고 채널 여기저기를 돌려봐도 딱히 볼 만한 프로그램이 없는 건 사실이다.

아주 어렸을 때였던 걸로 기억이 난다. 그때는 MBC, KBS, EBS, AFKN만 송출이 되었다. 게다가 오후 방송은 17시 정도가 되어야 나왔고, 자정이 조금 넘으면 애국가와 함께 방송은 종료되던 시기였다. 고작 서너 개 채널밖에 송출이 되지 않았던 시기였고, 그중 하나는 아예 있으나마나 한 채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채널이 거의 백여 개를 넘을 정도로 많은 요즘이 더 볼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거의 24시간 가까이 방송이 송출되는 시대인데 말이다.


사실상 TV는, 사람들에게 많은 정보를 주는 가장 좋은 통로로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직접적인 경험이 힘든 사람들에게 간접적인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통로이기도 하고,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매체로서 꽤 유용하다. 그런데 요즘은 어쩐지 TV가 사람들을 점점 바보로 만들어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 보면 바보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늘도 열심히 땀 흘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은 그렇게 살아가지 말라고, 그렇게 묵묵하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미덕은 아니라고 유혹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뿐만 아니라, TV에서는 이제 그다지 새롭고 신선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나마 제공하는 정보도 너무 편향적이라 어떤 이들에게는 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언제 틀든 어디로 채널을 돌리든 관음증적인 은밀한 욕구를 채워주는 프로그램들이 난무한다. 최소한 네다섯 명 이상의 패널들이 혹은 열 명 내외의 패널들이 나와 특정한 한 사람의 사생활을 찍은 영상을 들여다보고 모니터링한다. 모니터링한 내용이 대화의 주요 소재가 되고, 패널들이 시시각각으로 던지는 멘트들이 마치 매우 중요한 정보처럼 다루어진다. 아무리 예능 프로그램의 재미라는 측면에서 간과할 수 없다지만, 버젓이 한글의 맞춤법을 파괴하는 자막은 또 어떤가? 시청하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큰 의미는 없다고 해도, 한창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애청하는 프로그램들이 이런 류의 프로그램이란 걸 감안한다면, 방송 시청으로 인한 그 폐해는 가히 작다고 할 수 없으리라.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누군가의 삶을 몰래 들여다본다는 건 범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방송으로 송출되는 경우엔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합법화된 관음증적 행위가 되고 만다. 최소한 자신의 생활이 촬영되는 그 누군가는 그 촬영에 동의했고 또 그 대가로 돈을 받았으며, 패널들은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그들의 사생활을 제단한다. 그렇게 제단하는 내용들이 시청자들에게 모종의 쾌감이나 행복감을 주는 구조로 시청률은 올라간다. 출연자들이 동의했고 함께 참여한 사람들이 웃고 즐기고 떠들 수 있으며, 또 이를 지켜보고 있는 시청자들이 즐거움을 느꼈다면 나로서도 별로 할 말은 없다.

다만 알게 모르게 이런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우리들 역시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의 이 한심한(?) 행위 속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물론 사생활을 노출하는 사람의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사람일수록 우리들의 호기심은 더 크게 자극이 되고, 어쩌면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본다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쾌감을 느끼게 된다.


적어도 지금 이 시대의 TV 프로그램의 생명은 윤리 혹은 도덕성도 아니고, 교육성도 아니다. 당연히 그것들은 시청률에 좌지우지된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기획한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몇 회를 넘기지 못한 채 그 프로그램은 조기 종영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프로그램이라고 판단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본다면 그 프로그램을 폐지할 명분은 사라지게 된다는 뜻이다.

가끔 TV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출연자들이 너무 생각 없이 말하고 상대방을 아무렇지도 않게 깎아내리는 모습을 보곤 한다. 물론 지금까지 말하고 있는 관음증적인 프로그램들과 흔히 말하는 예능 프로그램들이 이에 해당된다. 가족들은 그런 게 다 프로그램의 설정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지 실제로 출연자들 사이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준다고 쳐도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보거나 듣고 있노라면, 그들의 의식 수준이나 그들의 상식을 의심하게 될 때가 많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어딘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고, 자신이 무지하다는 티를 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 당당해 마지않는 태도 또한 보기는 좋지 않다. 실제로 그들의 의식 수준이 형편없거나 상식이 전혀 없는 사람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더 높은 시청률 때문에 그러는 것일 수도 있을 테다.


언어는 그 사람의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같은 시간대에 적게는 수십만에서 많게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시청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으면 좋겠다. 정상적으로 땀 흘리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는 사람, 개성 없이 남들이 하라는 대로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인 것처럼 매도해선 안 된다.

누군가가 내게 그런 말을 했다. 예능은 예능으로 봐야지, 예능을 다큐처럼 보려고 하면 안 된다고 말이다.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삶 역시 예능이 아니다. 삶은 엄연한 다큐인 것이다. 다큐의 일상 속에 찌든 사람들에게,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능이라는 잠깐의 진통제를 처방한다는 것은, 삶을 기만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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